[이 계절의 소설_겨울]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함께 읽기

D-29
이 문장도 참 좋았던 것 같아요. 저도 고대식으로 살고 싶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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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해킹의 <영혼 다시 쓰기>라는 책을 읽다가, <엘리자베스 핀치>와 연관된 구절을 발견했어요. 이런 부분인데요. "이름은 생각을 구조화한다. 1980~1994년 사이에 공식 진단명은 '다중인격장애Multiple Personality Disorder'였다. 이 분야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간단하게 'MPD'라고 칭했다. 나는 인용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칭하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를 두문자로 지칭하는 것만큼 그 대상을 영구히,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게 없기 때문이다." (p.41) 소설 내내 닐이 엘리자베스 핀치를 EF라는 두문자로 지칭하는 건, 어쩌면 이미 처음부터 닐이 핀치를 '영구히,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심지어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영혼 다시 쓰기 - 다중인격과 기억의 과학들1995년에 발표한 이 책 《영혼 다시 쓰기》는 고리 효과에 의한 ‘인간 만들기(making up people)’의 연속선상에서, 19세기 말 등장한 새로운 ‘기억의 과학들’이 영혼을 기억으로 대체해간 과정을 다중인격이라는 특수 사례를 통해 살펴본다.
좋은 도서 소개 감사합니다~ 이 문장과 연관지으니, 닐이 EF에게 가졌던 애정이 정말 크게 느껴지네요. 그냥 읽었을 때도 이미 차고 넘칠 만큼의 애정입니다만...두문자만으로 관계가 이렇게 개인적이 될 수 있구나 놀랍고, 책도 꼭 읽어봐야겠네요.
닐만의 특별한 호칭이 EF라고 읽었고, 때때로 ET(외계인과 지구 소년의 우정을 담은 영화)를 떠올리면서 리즈도 아니고 미스 핀치도 아니고 EF라니, 만년필 펜촉을 또 떠올렸었죠. 헌데 인용해 주신 문장 중 '두문자로 지칭하는' 행위가 담긴 의미가 정말 각별하게 다가섭니다.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리자베스 핀치를 리즈라고 부르는 건 어쩐지 상상이 안 되긴 하네요... 미스 핀치도 어쩐지 안 어울리고. extra terrestrial이라는 평범한 말을 E.T. 라는 두문자로 지칭함으로써 유일무이한 E.T.가 된 것처럼 엘리자베스 핀치를 EF라고 지칭함으로써 유일무이한 닐의 EF가 된 것 같아요.
출근길 버스 안, 지하철 안에서 틈틈이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주인공 시점에서 보는 EF에 대한 성격묘사와 둘의 관계 진전이 흥미롭습니다. EF가 수업중 하는 발언들과 주인공과 나누는 대화들이 결국 줄리언 반스가 해보고 싶었던 발언이나 메시지는 아니었을지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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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F와 유대인 이야기는 이런저런 생각이 들게 하는 것 같아요. 음... 저도 EF가 '가족'의 의미를 보다 넓게 잡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EF는 자신이 그렇게 말했을 때 제프를 비롯한 학생들이 그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잘 알고 있었을 것 같고, 이를 의도적으로 명백히 밝히지 않은 것도 거짓말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생각해요. 다만... 거짓말이 나쁜 것일까...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그러니까 만약 이를 거짓말이라고 한다면 EF가 했던 것은 교육적 상황에서 교육적 효과를 위한 거짓말인 건데요... 사실 제프와 같은 반응을 하는 사람에게 'EF가 유대인이었다니!'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그로부터 그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면 저는 그게 나쁜 일로 보이지는 않아요. 문제는 '닐'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EF가 남긴 노트)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웠다면 제프는 그 기회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겠죠. 교육자는 배움의 문턱까지 학생을 이끌 수는 있지만 그 배움을 선택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학생에게 오롯이 달려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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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2부를 읽으며 혼란스러웠는데 3부까지 읽고나니 주제가 선명해졌어요. 닐이 율리아누스라는 역사적 인물과 그의 업적에 대해 파고들수록 다양한 서술과 인과를 발견하며 선형적인 요약이 힘들어졌듯이 엘리자베스 핀치라는 인물 역시 학생들의 기억 속에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죠. 모든 상황 같을 때 우리는 낙오자,피해자,패배자,말살된 자의 편에 서야 한다고 말했던 강의처럼 EF는 독특한 시각으로 역사를 평가했고 비난에 시달리며 본인이 그런 위치에 처했어요. 율리아누스가 단명하지 않고 초기 교회가 일신교를 고집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영국은 조금 더 선량한 개방성을 가지고 있을까? 문명은 진보하는가? 라는 고민이 과거와 현재에서 이어지며 더 현실적인 질문이 되는 것 같고요. 한 사람의 인생을, 개인이 시대와 만났던 사건과 역사를 이해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그 안에서 발견하는 크고 작은 의외성이 얼마나 즐거운 기억인지 느끼게 됩니다. 인생이 서사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핀치와 EF의 관계처럼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 있고 누군가에게 특별한 의미로 남을 수 있다면 충분히 의미 있을 것 같고요. 핀치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났고 이야기 구성도 재미있고 생각해 볼만한 문장도 많아 즐거운 책이었습니다. 언젠가 천천히 다시 읽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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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3주 간의 함께 읽기가 끝나고 마지막 '토론하기' 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책을 읽으며 느끼셨던 감상들 의문점들 좋았던 점들과 아쉬웠던 점들을 자유롭게 나눠보아요!
이 책을 읽고나서 오래 전 혼자 생각이 다시 떠올랐네요.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어느 날엔가 막상 기억을 되살려보니 그 분들의 삶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별로 없었더라고요. 자책 했습니다. 왜 여쭈지 않았을까, 또 그분들은 당신들의 삶에 대해서 뭔가 말씀을 남기시지도 기록을 남기시지도 않았을까. 사진도 거의 없는 할아버지의 일제시대 어린 시절과 청년시절은 완전한 암흑으로 사라졌고, 남은 것이라곤 연세가 드신 후 제가 직접 접했던 기억의 파편들과 부모님 세대가 간간히 되풀이하시는 짤막한 에피소드들뿐이었던 거죠. 그런데 요즘 저도 이렇게 나이가 들고 보니 이해가 됩니다. 누군가 만약 지난 삶에 대해 묻는다면 과연 흔쾌히 정리해서 답할 수 있을까. 소설의 1부와 3부처럼 둘이서 대화를 나눈다면? 얼마 되지 않는 성공과 자랑으로 지난 세월을 설명할 낯짝은 안 되고, 어떤 건 부끄러워서 말할 수 없고 다른 건 거짓으로 덮을까 두렵고, 보다 근본적으로 기억은 이미 많이 흐릿하고... 더군다나 스스로 나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아 그건 정말 극도로 끔찍한 일이 될 것만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드네요. ㅠ.ㅠ
저도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을 자세히 여쭙지 못한 게 아쉬울 때가 많았어요. 제가 청소년기를 보낸 90년대와 지금만 해도 세상이 엄청나게 달라졌는데, 그때는 과연 어땠을지 모든 게 변해버린 세상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지금도 너무 궁금합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정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매일매일의 일기를 쓰는 것을 추천합니다. 짧은 기록이라도 그것이 모이면 무시 못할 이야기가 되더라고요.
소중한 조언 고맙습니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책 읽고 부담 없이 그믐에 글을 남기듯, 어디에라도 짤막히 기록을 남겨보는 노력부터 해봐야겠어요. 혹시나 그러다 어쩌다 EF처럼 다이너마이트 같은 문장을 남길 수도..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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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저는 이 소설이 어떠셨는지 궁금해요. 줄리언 반스는 많은 작품이 번역된 작가이고 그만큼 팬도 많죠. 특히 현역 작가분들이 많이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한 것 같아요.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플로베르의 앵무새>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 <내 말 좀 들어봐> 같은 초기 작품들이 (국내에서는) 조금 마니악한 지지를 받았다면, 2010년대 들어서 발표하고 번역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시대의 소음> 등을 통해 더 많은 독자분들의 사랑을 받는 작가가 되었는데요. -반스의 독자시라면 어떤 작품을 가장 좋아하시나요? 반스의 이전 작품과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를 비교한다면? -반스를 처음 읽으셨다면, 어떠셨나요? 아무래도 일반적인 소설의 구성과 다르다 보니 어떻게 느끼셨을지 더 궁금해요. -앞선 질문에 이어보자면, 1부-2부-3부로 나뉘어진 작품의 구성이 단순히 스토리를 따라가는 독서와는 다른, 조금 독특한 독서 경험을 주는 것 같아요. 소설의 초반부를 읽으며 느꼈던 감상과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의 감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궁금합니다.
솔직히 닐에게 크게 공감하지는 못했지만, 3부가 끝날 때 저에게도 개운함(?)이 전해져서 덮을 때 편안했습니다. 상대의 모든 것을 다 알아내고 내 방식대로 정의하는 것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과는 상관 없다는 게...경우는 좀 다르지만, 저도 상대를 알아야 이해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한 적이 있었거든요. 나름의 이유는 있었지만, EF라는 인물을 따라가다보니 보지 못한 길에 전구가 하나씩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모임서 좋은 말씀들 보면서 다시 보니 생각해볼 것들도 정말 많았구요. 저는 처음 읽은 반스님 책이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여서, 잔잔하게 나가다가 독자를 바닥에 메다꽂는 무서운 작가라는 편견(?)을 좀 오래 갖고 있었네요.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다가 아니라 다방면으로 매력 뿜뿜이라는 걸 알았는데, 그 중 저의 1순위는 용감한 친구들입니다. 인기투표는 아니지만 다른 분들은 뭘 좋아하시는지 굉장히 궁금하네요~
닐에게 공감을 하든 하지 않든 어떤 방식으로든 납득하며 책장을 덮게 되는 것이 반스가 가진 힘인 것 같아요. "EF라는 인물을 따라가다보니 보지 못한 길에 전구가 하나씩 들어오는 느낌"이라는 말씀이 참 멋져요. 꼭 EF라는 인물이 아니더라도, 소설이라는 형식이 아니더라도, 주변의 누군가나 어떤 분야를 따라가다 보면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어서 공감이 되었습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와 비교하면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는 조금 슴슴한 편이죠. 열린책들에서 나온 초창기 책들도 한 번 읽어보시면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용감한 친구들>을 아직 안 읽었는데, 조만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 언급하긴 했지만 저는 이전에 읽어본 줄리언 반스의 작품이 <플로베르의 앵무새>뿐이었고 그것도 꽤 오래전이라서 기억이 가물가물했거든요. 그때 남아 있던 인상은 아주 대중적인 작법은 아니라는 것이었는데, 이번 소설을 읽으면서는 말씀해주신 것처럼 꽤나 잘 읽히면서 동시에 형식적인 기교도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닐이 율리아누스에 대한 에세이를 쓰게 되기까지의 빌드업(?)에 이어서, 2부를 그 에세이 자체로 채우는 것을 보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논문에 가까운 에세이를 소설 속에 녹여낼 수 있다는 점에 감탄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3부에서는 이를 총 정리하며 어떤 정서적인 울림까지 가져가는 것이... 이런 게 거장의 보법이구나, 뭐 이런 생각도 들었고요....ㅎㅎ
초창기에는 확실히 마니악한 작품들을 썼죠. 그러다 2010년대 들어와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는데요, 저는 초기 작품들을 더 좋아하지만 확실히 거장은 거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와 <이따위 레시피라니> 라는 두권의 책을 기존에 읽었었고, 둘다 정말 좋아하는 책이에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와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를 비교해보자면 아쉽지만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가 훨씬 좋았습니다. 그 책은 마지막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고 제목도 정말 찰떡같다고 생각했어요.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는 기존 반스 작들의 제목과 연관되게 지으려고 한건지 비슷한 느낌으로 번역 제목을 뽑은거 같은데 저는 엄청 잘 어울린다고 느껴지진 않았어요. 닐은 EF와 율리아누스를 탐구하며 인생이 서사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 하나의 사건/인물도 수용 및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배우게 되네요. 쓰다보니 결국 닐의 성장 소설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제가 백인남성의 성장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지 (ex 데미안) 아쉬움이 남네요....
저도 딱히 장르를 생각해보진 않았는데 닐의 성장소설이라고 하는 게 가장 어울릴 것 같아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가 2010년대 이후 반스를 대표하는 작품이니만큼 아무래도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가 미치지 못한다고 느끼는 독자분들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별개로, 'the sense of an ending'(결말에 대한 예감 정도 될까요?)라는 원제를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바꿔서 출판했던 출판사에서 이어지는 작품들의 제목도 비슷한 느낌으로 바꾸며 후기 반스의 소설들에 어떤 일관성을 부여하려는 시도가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는 반스 소설이 처음이었는데요. 확실히 일반적인 소설과는 달라서 처음엔 소설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저는 스토리를 따라가는 소설들을 주로 읽었던터라 그런 점에서 새로웠고, 특히 1부는 제가 마치 그녀의 강의를 듣는 것 같았어요. 이런 수업을 대학 다닐 때 들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도 해본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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