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소설_겨울]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함께 읽기

D-29
우리는 모든 것은 아니더라도 많은 것을 예측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편견 혹은 자만이 어떻게 사회와 삶을 망가뜨리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인용을 사랑하는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이 부분을 읽으며 정말 많은 공감을 했습니다. 인용의 좋은 예라고 할까요? 사람들은 흔히 인용을 배척하는 경향이 있지요. '네 언어로 써라' 혹은 '권위에 의존하지 마라' 하는 식으로요. 많은 글쓰기 책들이 이런 말을 하고, 많은 평자들이 이런 기준으로 어떤 글을 판단하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게 굉장히 비효율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요. 마치 '나는 나만의 집을 지을 거야'라고 하면서 벽돌 한 장 한 장을 굽고, 나무를 길러서 직접 기둥을 만드는 식으로요. 하지만 나만의 집은 그렇게 해야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죠. 집을 짓는다는 건 기성 벽돌과 기성 기둥과 기타 등등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건축 자재들을 가지고 그것을 설계에 따라 적절히 배치하는 일이잖아요. 글을 쓰는 것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이미 훌륭한 좋은 글들이 많이 있고 사유가 많이 있는데, 그것들을 당연히 가져다 써야 하지 않을까요? 다만 그것이 어떤 포인트 악세서리처럼 자신의 글을 치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그쳐도 되지만), 전체적인 글 속에서 기능을 하도록 하느냐가 중요한 것 아닐까요? 그것이 인류의 지적 재산을 풍요롭게 향유하며 뒤에 태어난 사람들로서 우리가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핀치의 수업 방식이 개인적으로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인용이 영리한 선택의 문제나 심지어 선호의 대상이라 생각해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재능의 영역으로 보였어요. 절묘한 인용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재주꾼이다 싶더라구요. 인용을 하면 말에 공공성을 더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자기 생각에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고 확장성이 있는데 대화의 내밀함을 즐기는 사람들에겐 방해물처럼 느껴질 것 같기도 해요.
아무래도 사적인 대화에서의 인용은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그러나 EF는 스스로의 생각에는 엄격하면서도 우리 생각이나 제안은 하찮거나 감상적이거나 대책 없을 만큼 자전적이라는 이유로 물리친 적이 없었다. 대신 우리의 시시껄렁한 작은 생각을 훨씬 흥미로운 것으로 바꾸어주곤 했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32쪽,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올려주신 부분 못지 않게 이 부분도 흥미로웠습니다. 좋은 선생은 학생들이 자유롭게 말하고, 그 의견에 의미를 덧붙여주는 역할을 가진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역시나 대학 시절의 은사님들이 떠올라서 옛 강의실로 되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자유롭게 말하고 그 의견에 의미를 덧붙여주는 선생님. 정말 좋은 선생님이네요. 그런 선생님은 우리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필요한 것 같아요. 만나긴 힘들지만... 아무래도 이제는 그런 선생님을 만나길 기다리기보다는 제가 직접 (물론 선생님은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그런 역할을 부분적이나마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나이가 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우리의 유전적 유산이 우리 오금줄을 쥐고 놓아주지 않을 수도 있어요.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33p,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하는 이 한 문장이 제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우리의 유전적 유산이 우리 오금줄을'에서 ㅇㅇㅇㅇㅇ으로 이어지는 게 인상적이네요.
그리스와 로마의 옛 신들은 빛과 기쁨의 신들이었죠. 사람들은 다른 삶은 없다고 알았고, 따라서 이곳에서, 무가 우리를 가두기 전에 빛과 기쁨을 발견해야 했습니다. 반면 새로운 기독교인은 어둠, 또 고통과 예속을 좋아하는 하느님에게 순종했어요. 이 하느님은 빛과 기쁨이 오직 사후에 자신의 사탕 과자 같은 천국에만 존재하며, 거기에 이르는 길은 슬픔, 죄책감, 공포로 가득하다고 선포했죠. ‘우리는 죽음을 배불리 먹었다' 바로 그겁니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60쪽,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우리 대부분은 우리의 감정 생활에 끈질기게 매달려 좋든 나쁘든, 영광이든 모욕이든 낱낱이 탐닉할 것이다. EF는 이런 삶에도 잡동사니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을 지워야만 다시 더 분명하게 보고, 또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107쪽,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내가 외로운 여자라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다. 나는 혼자이고, 그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혼자인 것은 강점이고 외로운 것은 약점이다. 그리고 외로움에 대한 치료책은 혼자가 되는 것이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119쪽,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그러나 유럽 전역에 철로가 깔렸습니다. 그 주된 기능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건, 러스킨과 플로베르 둘 다 지적하듯이, 사람들이 A에서 B로 가는 걸 허락하여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똑같이 멍청해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이 한 말을 내 식으로 바꿔서 표현한 겁니다. 흔히 테크놀로지의 진보가 도덕적 혜택을 가져올 거라고 가정합니다만 철로는 아무런 혜택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인터넷도 그러겠죠. 도덕적 혜택은 전혀 없어요. 그렇다고 비도덕이 늘어난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경이로운 테크놀로지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이에요.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pp.50-51,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플로베르 전기의 한 대목이 생각났었어요. 사실 좀 많이 과격한 발언이기는 한데요... "그는 ‘그러나 대중이 아무리 무능력해도 존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대중에게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풍요의 씨앗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대중에게는 권력이 아니라, 자유를 주십시오.’라고 밝혔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꿈꾸는 것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를 부르주아의 어리석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라는 주옥 같은 말을 덧붙였다." 아마 EF라면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생각에서도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고 말할 것 같은데, 딱 그런 식의 태도가 필요해보이는 생각이기도 하네요...
자꾸 잊게 되는 지점이에요. 테크놀로지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일 뿐, 그걸 사용하는 인간을 들여다 봐야 한다는 점.
저는 해당 부분을 읽으면서 갸웃하게 되더라고요. 정말 그런가? 교통의 발달로 바이러스들이 전세계로 퍼질 수 있는 것처럼, 인터넷의 발달로 어떤 악덕들은 더 잘 퍼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개인적으로 좀 지친 탓이겠지만요.
닐의 시점에서 쓰여진 글을 읽다보니 엘리자베스 핀치에게 반하게 됐어요! 외모와 행동, 강의 장면을 활용해 EF 대해 다채롭게 묘사하면서 매력적인 캐릭터를 완성합니다. 시대의 유행이나 양극단의 가치에 휘둘리지 않고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태도나 자신의 취향이나 지식에 대한 과시 없이 새로운 관점을 던지며 강의하는 장면을 읽으면서 너무 빠져들게 되더라고요. 올해 만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예요. 강의 내용에 고전이나 인문학 작품이나 사상이 다양하게 언급돼 흥미롭게 집중할 수 있었고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마침 휴일이니 빨리 읽어 보겠습니다!
매력적인 캐릭터이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찾기 힘들어지는 캐릭터인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매력적인 것도 같고요!
율리아누스에 대해 뒤져보면서 EF를 다시 바라보니 또 다른 맛이 있네요. 적들이 욕하는 것만큼 나쁘지도, 추종자들이 찬양하는 만큼 이상적인 사람도 아니었다는 언급을 보니, 어떻게 이런 인물을 딱 고르고, EF같은 인물을 만들었을까 생각이 절로 듭니다. '역사적 자기 연민도 개인적 자기 연민과 마찬가지로 매력이 없다'는 말도 다시 보니 결말의 씨앗이 이미 여기 있었구나 싶고, 이 꿋꿋함에 실제 모델이 있다는 게 새삼 놀랍습니다. 실존인물이 아닐지언정, 살아서 욕 먹은 기간이 얼마 안 되었던 율리아누스보다 EF가 더 굳건할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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