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소설_겨울]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함께 읽기

D-29
몇 개의 인상적인 부분을 꼽아보면, 먼저 단종 재배(단일 작물 재배)를 단일 문화와 유럽의 제국주의까지 확장하는 부분(p51~ )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 대목은 뒤에 이어지는 게오르기우스나 율리아누스의 이야기, 그리고 과거사에 대한 후대의 책임 논쟁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또 엘리자베스 핀치의 자기 연민에 대한 혐오인데요, 그녀가 역사적이든 개인적이든 자기 연민을 질색하는 이유가 궁금해지더라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엘리자베스 핀치와 닐의 대화였습니다. 닐은 핀치를 이념이나 사상과 관련해 정의하려고 들어요. 냉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에피쿠로스파, 페미니스트까지. 그러자 핀치는 닐이 자신에게 '딱지'를 붙이려고 한다면서 그 부분에 대해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닐은 결국 그녀를 '로맨틱한 스토아철학자'라고 나름대로 규정을 짓습니다. 이러한 점들이 우리 사회가 무의식적으로 갖는 단일성, 집단성과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종 재배와 단일 문화, 유럽의 제국주의, 일신교 등등이 말씀하신 단일성, 집단성, 획일적인 문화 등등과 이어져 있는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이 말씀하셨지만 자기 연민에 대한 혐오는 결국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여야 하고 그것은 삶이다' 같은 핀치의 인생관에서 나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살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딱지'를 붙일 수밖에 없고, 소설이 인물을 다루는 이상 그 자체로 다면적이고 풍요로운 인물을 어느 정도 축소할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한 작가의 문제의식이 EF를 바라보는 닐의 시선을 통해 그려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EF 가 모노라는 말로 시작해서 좋은게 없다고 하죠 여기서 이분법적이거나 배타적인 문화에 대한 그녀의 날선 시선이 보였어요 부드럽게 말하는 것 같지만 그런 날카로운 일침들이 시원하다고 해야 할까요 뭔가 통쾌한 면이 있네요 이런 인문학 강의를 대학 때 못들어본게 아쉽네요
저도 EF가 말하는 방식이 정말 부드러운데도 언제나 핵심을 피하거나 비껴가지 않는 방법이라 좋았어요
대학이 아니더라도 여러 통로로 이런 강의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시간도 여유도 없긴 하지만요...
나는 우리와 반대되는 사람이나 우리가 반대하는 사람과 익숙해지자고 제안하고 있어요. 살아 있는 인물이든 죽은 인물이든, 종교적 반대든 정치적 반대든, 심지어 일간신문이든 주간 잡지든. 네 적을 알아라—단순하고 설득력 있는 규칙이죠—심지어 죽은 적이라 해도, 그 적이 쉽게 부활할 수도 있으니까. 또 어떤 위대한 작가의 표현대로, ‘이 괴물들이 우리에게 역사를 설명해 준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53쪽,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실패가 성공보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고, 깨끗한 패배자보다 지고 나서 뒤끝이 있는 사람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주장하고 싶네요. 나아가서 배교자가 늘 진실한 신자보다, 거룩한 순교자보다 흥미롭습니다. 배교자는 의심의 대변자이고, 의심은—생생한 의심은—활동적인 지성의 표시죠.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58쪽,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저는 좀 늦게 책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ㅎㅎ (남은 진도는 부지런히 따라갈게요) 주인공이 서른쯤 이 강의를 수강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자꾸 제 대학시절 강의가 생각나더라고요. 이런 강의를 들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어떤 생각을 하는 학생이었을까 하고요. EF가 가져오는 주제들과 풀어내는 방식을 보며 어떤 것들은 저만의 생각이 생기기도 하고 또 어떤 것들은 '음 어쩌라고..?' 라는 하는 생각도 들어서요. 줄리언 반스의 소설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문장 하나 하나를 곱씹으며 읽게 되는 작가인거 같아요. 위에 정연님이 낙차에 대해 얘기해주셨는데, 줄리언 반스는 인물의 성격 자체에서 오는 낙차는 작은데 영향이 큰 낙차를 만드는 작가인거 같아요. 약간 작은 돌맹이를 던졌는데 받는 사람은 엄청나게 흔들려버리는 그런...?
이런 강의를 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저도 들었어요. 그런데 역시 지금 들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EF가 말한 것처럼, 대학시절에는 그냥 들어야 되니까 듣는 마음으로 강의실에 갔다면 지금은 막연하지만 무언가 인생에 결핍을 느끼고 스스로 찾아갔다는 의미일 테니까요. '낙차는 작은데 영향이 큰 낙차를 만드는 작가'라는 표현이 딱 맞는 것 같아요!
'둘'을 처음 읽을 때는 율리아누스와 EF의 연결에 집중했었는데, 결말 뒤에 보니 닐의 시선에 더 눈길이 갑니다. '오만한 태도' '자기 정당화' 같은 말이나 사디스트에 대한 농담 등, 애정을 가졌던 EF에 대한 평가에 비하면 가차없는 모습에 좀 웃음도 나고...자신 안의 EF를 되살리려 글을 썼지만, 그녀가 바랐을 만한 일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모습도 무게가 더 느껴지네요.
처음에 닐은 EF를 이상화하고, EF가 죽은 후 유산을 물려 받아 율리아누스에 대한 EF의 작업을 이어가는데요, 그 과정을 통해 EF에 대한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EF와 세상과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을 얻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게 닐의 성장이겠죠.
화제로 지정된 대화
EF의 이야기가 중심이었던 1부와 달리 2부에서는 EF의 문서를 물려 받은 닐이 쓴 '배교자' 율리아누스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역사적 전기와 지식, 그리고 여러 작가들의 말들을 활용해 이야기를 엮어가는 반스의 특기가 유감없이 펼쳐지는 장인데요, 현대 문명에 대한 은은한 비판과 율리아누스의 삶을 통해 그와 EF의 접점을 찾고자 하는 닐의 노력이 눈에 띕니다. 어떻게 보면 조금은 파격적인 구성인데요, 그럼에도 읽는 재미를 준다는 게 반스의 저력이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네요!
접점에 대해 말씀하시니 엘리자베스 핀치와 율리아누스 두 사람의 외형을 묘사한 부분(각각 P13, P143)이 눈에 띕니다(지금 143쪽을 읽는 중이었거든요). 빈티지를 연상케 하는 EF와 의도적으로 허영심을 없앤 율리아누스. 어쩐지 묘하게 비슷한 분위기입니다.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이나 두 사람의 접점을 언급한 글을 읽고나니 눈에 들어오는 문장들이 많아지네요.
오, 이렇게 생각해보진 못했는데 흥미롭네요! 저도 재독 시에는 둘의 접점을 찾으며 읽어봐야겠어요.
두 번째 읽는 중인데요, 저도 그냥 무심코 지나치며 읽었다가 다시 읽으니 눈에 들어온 부분이었습니다. :)
율리아누스의 외형 묘사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넘어갔는데, 초반 EF 외모 묘사와 겹쳐볼 수도 있겠네요!
'둘'까지 읽었습니다. 율리아누스의 행적을 여러 철학자 작가들의 기록을 통해 따라가는 걸 읽다 보니 '플로베르의 앵무새'가 생각나네요. EF는 왜 율리아누스에게 꽂혔을까를 고민하며 '하나'로 다시 돌아가서 율리아누스가 언급된 부분을 읽어봤어요. 스윈번이 율리아누스의 패배를 '유럽사와 문명이 잘못된 길로 들어선 매우 불행한 순간'으로 파악한 점과 '나라가 존재하려면 자기 역사를 잘못 알아야 한다'는 르낭의 말, 'mono'로 시작해서 좋은 말이 없다는 EF의 의견, 영국의 노예 소유와 민족적 위선을 꼬집는 것, '우리는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난 일과 마찬가지로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실패가 성공보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준다' 이런 말들을 곱씹다 보니, 역사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역사는 우연의 연속으로 볼 수 있지만, 때로 그 우연은 '주사위에 납이 박힌 것'이기도 하고, 역사에 대한 해석은 승자의 입장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생각. 율리아누스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고, 게오르기우스의 용을 야생의 어떤 극단적인 예로 바라볼 수 있는 것처럼, 어떤 관점으로 볼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고 이미 '정설'로 굳어진 관점에만 안주하는 것은 어쩌면 비도덕적인 태도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어난 일만큼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그 이면에 있다는 것을 항상 인식해야 한다는 EF의 지적이 매우 묵직하게 와닿습니다. 여담이지만, 저는 율리아누스의 영어식 표기가 'Julian'인 게 너무너무 신경 쓰이네요. 줄리언 반스는 이름에 꽂혀서 율리아누스를 파기 시작했나? 이런 망상이 막 들고 말이죠... 저만 그런가요? ㅎㅎㅎ
멋진 감상 감사합니다! 읽으며 우리가 속해 있는 세계와 우리가 딛고 있는 시간과 우리가 살고 있는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인 것 같아요. 율리아누스의 영어 표기가 Julian이라서 줄리언 반스가 꽂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못했는데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2부를 읽으면서 소설가는 세상 제일 가는 수집가!라며 감탄했어요. 율리아누스의 일생을 다른 목소리의 성우들에게 듣는데, 이질적이긴 커녕 "그래서, 그다음엔"하면서 성우를 향해 무릎을 닿으며 다음 이야기를 조르는 그런 감정이 일어나서 즐겁게 읽었습니다. EF는 억압적인 유대-기독교(p.138)에 유감을 내비치는 인물로서 율리아누스를 등판시켜 EF와 율리아누스라는 두 인물의 관계성을 생각해 보도록 하는, 반스의 솜씨가 좋았습니다.
소설가는 세상 제일 가는 수집가들이고, 그중에서도 줄리언 반스는 최고의 수집가들 중 한 사람이라고 덧붙이고 싶네요. 소설에 대한 호불호는 당연히 갈릴 수 있지만 반스의 솜씨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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