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인터뷰를 언급해주신 분들이 계셔서 반스의 인터뷰 중에서 함께 읽으면 좋을 법한 부분들을 찾아봤습니다. 번역기로 번역해서 어색한 부분이 있지만 적당히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전문이 궁금하신 분은 각 인터뷰 하단에 있는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Q: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꽤 대담한 생각이 있는데, 바로 문명이 아주 오래전에 심각한 잘못된 방향으로 갔다는 제안입니다. 그 장면을 설명해주시겠습니까?
A: 그 장면은 363년 페르시아 사막에서 시작됩니다. 제 이름과 같은 율리아누스, 후에 '배교자 율리아누스'로 알려진 로마의 마지막 이교도 황제가 살해됐을 때입니다. 페르시아 창에 가슴을 맞고 죽어가면서, (물론 영어로 한 말은 아니지만) "창백한 갈릴레아인이여, 그대가 이겼도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창백한 갈릴레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는 군사적, 신학적 패배를 모두 의미하는 것이었죠. 물론 이 말은 실제로 하지 않았을 겁니다. 50-100년 후에 기독교 작가가 쓴 것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때가 이교도가 최종적으로 패배한 순간입니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 특히 일신교가 매우 위험하고 대개는 극도로 억압적이며 큰 부패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나쁜 일이었다고 봅니다.
Q: 소설의 중심인물인 엘리자베스 핀치 교수는 학생들에게 'mono'로 시작하는 단어들을 생각해보라고 합니다: monotony(단조로움), monogamy(일부일처제), monotheism(일신교). 그리고 그녀는 'mono'로 시작하는 것들 중 좋은 것은 없다고 선언합니다. 엘리자베스 핀치가 보는 일신교의 문제점은 무엇인가요?
A: 그녀는 일신교가 불관용과 박해로 이어진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이 살았던 다신교는 훨씬 더 관대하고 관용적인 종교였습니다. 로마인들이 골을 정복하고 독일로 진출했을 때, 그들은 모든 정복자들이 그렇듯 자신들의 군사적, 정치적 체제를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종교는 달랐죠. 그들은 절대로 자신들의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종교가 있고, 우리는 우리의 종교가 있다. 우리는 우리 신들이 더 낫다고 생각하니, 원한다면 우리 신들을 숭배해봐도 좋다. 하지만 원한다면 당신들의 신들을 그대로 믿어도 된다"고 했죠. 하지만 일신교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Q: 이렇게 대화를 계속하면서 우리가 고대 이교도들을 너무 호의적으로만 봐온 것 같아서 제가 끼어들어보겠습니다. 계몽된 율리아누스와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을 낭만적으로만 보기 쉽죠. 하지만 소설에서도 지적했듯이, 그 율리아누스도 자신의 군사 원정이 어떻게 될지 점을 치기 위해 도살된 동물의 내장을 뒤적이고 다녔잖아요. 항상 건전하지만은 않았다는 거죠.
A: 그 당시에는 그게 표준이었죠... 그가 데이비드 애텐버러는 아니었으니까요... [웃음] 동물을 해부하는 것이 별로 성공적이거나 효과적이지 않다고 결론 내린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하지만 그는 위대한 학자이자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성공을 매우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그리스와 로마라는 모델을 보면, 건축에서 군사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업적을 이룬 문명이 있었고, 거기에 종교가 붙어있었거든요.
하지만 기독교도들은 그가 보기에 갑자기 나타났고 진정한 문명도 없었습니다. 종교만 있었죠. 마치 "우린 종교가 있으니, 기독교 문명을 세우는 건 나중 일이야. 그건 나중에 걱정하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이것이 기독교의 엄청난 약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종교적이지 않은 어떤 업적도 없다는 것이요. 하지만 물론 이것이 그들의 큰 강점이었죠. 종교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까요... 처음이자 마지막이자 유일한 것, 그게 바로 문제죠. 처음이자 마지막이자 유일한 것.
https://www.cbc.ca/radio/tapestry/writer-julian-barnes-asks-what-the-world-would-look-like-if-paganism-had-won-1.6593650
[이 계절의 소설_겨울]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함께 읽기
D-29
화제로 지정된 대화

금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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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연
Q: 당신의 책 'Elizabeth Finch'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A: 이 책은 3분의 2는 소설이고 3분의 1은 논픽션입니다. 소설 부분은 성인 학생들을 가르치는 현명하고 똑똑한 여교수인 주인공과, 그녀가 남자 화자의 삶과 사고방식에 미친 영감적인 영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중간의 논픽션 부분은 엘리자베스 핀치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흥미로운 역사적 인물에 대해 다룹니다: 로마의 마지막 이교도 황제인 배교자 율리아누스입니다. 그가 363년 페르시아 사막에서 사망한 후, 기독교는 이후 약 15세기 동안 거의 도전받지 않고 승리를 구가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좋지 않은 결과였다고 결론지을 수도 있습니다.
Q: 이 소설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왔나요? 왜 이 책을 쓰는 것이 중요했나요?
A: 두 부분은 따로 시작되어 천천히 하나로 합쳐졌습니다. 저는 약 15년 전에 시인 스윈번의 유명한 구절을 처음 들었습니다: '창백한 갈릴레아인이여, 그대가 이겼도다' - 여기서 갈릴레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며, 이 말은 율리아누스가 임종 시에 기독교의 승리를 인정하며 했다고 전해지는 말입니다. (스윈번의 관점에서 이것은 유럽 역사가 크게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간 시점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핀치라는 인물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속하지 않은 - 어떤 면에서는 시간을 초월한 - 여성으로, 그녀가 가르치는 사람들보다 더 멀리 보고 사물을 더 명확하게 바라보는 인물입니다.
https://www.waterstones.com/blog/a-uk-exclusive-qanda-with-julian-barnes-on-elizabeth-finch
화제로 지정된 대화

금정연
Q: 네, 맞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배교자 율리아누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엘리자베스가 왜 율리아누스와 이런 연관성을 갖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책을 몇 번 읽어서 이해는 하고 있지만, 당신이 설명하는 것을 듣고 싶습니다.
A: 그 연관성은 자신의 시대에 대한 반항 정신이라고 봅니다. 닐이 엘리자베스 핀치에 대해 말하길, 그녀는 현재를 살아가는 평범한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구시대적이지도 않았죠. 마치 고대의 여신처럼 시간을 초월한 존재 같았다고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물론 과장된 표현이고, 그녀는 매우 인간적인 사람이지만요.
그녀는 시대에 속하지 않았고, 장기적인 관점을 가졌습니다. TV 시리즈나 스포츠 같은 우리가 흥미를 느끼는 사소한 것들에는 관심이 없었죠. 로마의 마지막 이교도 황제였던 배교자 율리아누스도 더 극단적인 방식으로 시대에 저항했던 사람입니다.
책에서 그녀가 언론의 공개적 질책을 받는 것처럼, 율리아누스도 사후 1300년 동안 기독교회에 의해 악마화되었습니다. 당시 '배교자'는 종교를 바꾼 사람이 아니라 악마를 의미했습니다. 기독교 교황과 제국에게 그는 최악의 악과 이교도의 상징이었죠.
그는 363년 페르시아 사막에서 18개월간의 짧은 재위 후 사망했습니다. 마지막 말로 전해지는 "창백한 갈릴레아인(예수)이여, 그대가 이겼도다"는 군사적, 신학적 패배의 인정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구절은 사후 수십 년 뒤에 만들어졌지만, 제가 10-15년 전 스윈번의 시에서 처음 접했을 때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16세기 이후의 스윈번을 비롯한 많은 작가들은 율리아누스를 잃어버린 지도자, 위대한 영웅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기독교에 강하게 반대했지만 박해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독교도들은 순교자가 되기를 원했기에 더 강한 박해를 바랐다고 합니다.
Q: 역사와 우리가 그것을 보는 방식, 그리고 역사가 우리를 형성하는 방식에 대한 많은 대화가 있습니다. 역사는 단순히 우리를 따라다니는 건조한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일어나는 것이라는 사실이 닐에게는 계시와 같았습니다. 그는 그저 배운 대로만 생각했었거든요.
A: 네, 맞습니다. 역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단순히 자국의 역사만 배우면 그렇게 됩니다. 닐은 엘리자베스 핀치가 수업에서 인용한 말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19세기 프랑스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르낭의 말인데요, "역사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 국가가 되는 일부"라는 심오한 말입니다.
국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라고 한 점이 중요합니다. 국가로 계속 존재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계속 잘못 이해해야 한다는 거죠. 영국의 식민지 역사와 노예무역 관련 역사가 수백 년간 미화되어 왔듯이요. 독일처럼 과거를 진지하게 재검토하는 나라도 있지만, 영국의 보수파들은 노예무역상이었던 사람의 진실을 밝히는 것조차 역사 파괴로 여깁니다.
엘리자베스 핀치는 닐에게 다른 역사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만약 율리아누스가 18개월만에 죽지 않고 로마제국을 기독교에서 이교도로 되돌렸다면 어땠을까요? 초기 기독교도들의 폭력과 파괴를 피할 수 있었을까요? 기독교도들은 로마인들보다 300배나 많은 동료 기독교도를 죽였고, 그리스 로마의 문화유산 98%를 파괴했습니다. 그들은 헬레니즘 문명을 완전히 지우려 했던 것입니다.
Q: '엘리자베스 핀치'를 읽으면서 역사가 물밑에 흐르는 것 같았어요. 사람들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또 만들어가고 있는 역사를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죠. 엘리자베스가 죽은 후 닐에게 문서와 도서관을 남긴 것도 의미심장했습니다.
A: 그녀의 노트 5-6권이 사라졌는데, 아마도 율리아누스에 대한 글이었을 거예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역사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 국가가 되는 일부"라는 말은 종교나 가족, 개인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자신이 믿을 만한 화자라고 확신하면서도 자신의 신화를 만들어가죠.
https://www.barnesandnoble.com/blog/poured-over-julian-barnes-on-elizabeth-finch/
꼬모
사람들이 각자 자신들의 관점으로 신화 를 쓴다는 말이 다 읽고난 뒤에 정말 와닿는 것 같습니다. EF와 닐은 신화 쓰기를 그만 두었지만 질문하기나 대상에 대한 애정을 멈추지 않았는데, 이게 머리로는 알아도 실제로 마음 속에서 실천하기 정말 어려운 일 같아요. 그래도 독자들이 생각해보길 바라니 작가분이 공을 던지신 거겠지만...많은 자료들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금정연
콕 짚어 인용하기 애매한 구성이라서 여기에 소개하진 않았는데, 가디언과의 인터뷰도 재밌으니 나중에 한 번 읽어보세요!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23/sep/16/julian-barnes-life-in-writing-loss-martin-amis

흰벽
와! 인터뷰 너무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보니 지금까지 여기서 오간 여러 대화들과 연관성이 느껴지네요- EF와 율리아누스의 관련성 등 여기 계신 분들이 짚어주신 내용을 작가의 말을 통해 들으니 뭔가 제대로 읽고 있는 것 같고 그렇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자 유일한 것, 그게 바로 문제죠. 처음이자 마지막이자 유일한 것.” 이 문장이 특히 울림이 있네요, 저에겐.
가디언 인터뷰도 읽어볼게요. 감사합니다!!
밥심
인터뷰까지 링크해주시고.. 고맙게 읽겠습니다.

욘욘
우와 인터뷰 기사까지 공유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당 🙂
poiein
감사합니다. 소설을 읽는 데 참고가 되었습니다. '다른 것에 대한 가능성'은 그 자체로 애잔하다 싶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금정연
저는 사실 ‘여담’을 아주 많이 좋아하는 독자이자 작가인데요, 2부는 여러 여담들이 많아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중에서 새뮤얼 존슨(우리가 아는 ‘박사’ 새뮤얼 존슨이 아니라고 친절하게 말해주는)의 일화가 기억에 남는데요.
“존슨은 이 소책자 때문에 ‘율리아누스 존슨’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이 책에 자극받아 다른 사람들도 ‘요비아누스’나 ‘배교자 콘스탄티우스’ 같은 소책자를 썼다. 또 존슨은 이 소책자 때문에 곤경에 처하게 되었는데, 그의 후원자인 로드 러셀이 처형당하면서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로드 러셀은 1683년 링컨스 인 필즈에서 잭 케치의 손에 참수당했는데 목이 쉽게 잘리지 않아 곤욕을 치렀다. 존슨 자신은 두 번 재판을 받았다. 첫 번째는 1683년 선동적 중상 혐의였는데, 이때는 교수형 집행인이 그의 책을 불태웠다. 두 번째는 1685년으로,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심각한 비행” 혐의였다. 이때는 칼을 쓰고 대중 앞에 네 번 서고, 벌금 200마르크를 내고, “뉴게이트에서 타이번까지” 채찍을 맞으며 가라는 선고를 받았다. 이제 왕위에 오른 제임스 2세는 선처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대답했다. “미스터 존슨은 순교의 정신을 지녔으므로 고난을 겪는 것이 어울린다.” 존슨은 “매듭을 지은 줄 아홉 개로 만든 채찍으로” 317번 맞았다. 그래도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의사의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교황교와 이교의 비교>를 3천 부 다시 찍었고 재판받은 이야기를 책으로 출간했다.”
p.178-179
그 시절에 가톨릭을 비판하면서도 죽지 않았다는 게 일단 신기하고, 죽지는 않았지만 책이 불태워지고 채찍을 맞는 수난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꺾지 않고 3천 부를 중쇄하고 재판받은 이야기를 책으로 출간했다는 게... 심지가 아주 약하고 게으른 작가로서 반성하게 되는 부분이었네요. 특히 3천 부를 중쇄했다는 부분에서는 존경심마저...
선처해 달라는 요청에 대한 제임스 2세의 대답도 걸작인데요. “미스터 존슨은 순교의 정신을 지녔으므로 고난을 겪는 것이 어울린다”니, 영국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영국 사람들이었네요...
밥심
저도 이 대목 읽으면서 대단한 양반일세 했더랍니다. 무지막지한 채찍으로 300번 이상 맞으면 그냥 죽을수밖에 없을 것 같은 데..
화제로 지정된 대화

금정연
드디어 함께 읽기 마지막 3주차가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흥미로워 했고 또 길을 잃기도 했던 율리아누스의 2부를 지나 다시금 닐의 시점으로 돌아왔는데요. 우리가 알지 못했던 EF의 개인사가 조금씩 드러나고, 그와 별개로 닐은 핀치에 대한 자신의 관점이 유일한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혼란스러워하며 받아들입니다. 물론 그것이 제가 요약하는 것만큼 매끄럽게 일어나는 일은 아닌 것 같지만요. 날이 추운데 다들 감기 조심하시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감상과 질문과 밑줄 기타 등등 마음껏 올려주세요!

호디에
제가 느낀 바는 아는 것과 대상을 이해하는 것은 별개라는 것이었습니다. 3부에서 닐은 EF와 친구들에 대해 에상치 못했던 모습들을 다른 사람들의 말을 통해 알게 되잖아요. 유대인 얘기도 그렇고, EF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던 린다의 상담이나 EF가 수영을 즐겼다는 부분도 그렇고요. 저는 2장의 율리아누스에 대한 탐구도 비슷한 맥락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여지는 것들을 통해 아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염두해 둔, 이해를 동반한 앎은 다르고, 그래서 이해가 참 여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강보원님이 쓰신 '슬픔'이 뭔지도 알 것 같고요.

금정연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슬픔은 어쩌면 그 낙차에서 생기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씀이 와닿네요. 약간 결은 다르지만 요즘 뉴스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도, 나는 세상을 조금은 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무력감인 것 같아요. 앎과 이해 사이의 격차에서는 슬픔 말고도 또 다른 감정들이 생겨나는 모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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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보원
저한테 3부가 인상깊었던 이유는 어떤 슬픔이 느껴져서였던 것 같아요. 닐은 EF의 삶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과정에서 닐이 점점 알게 되는 건 삶의 불가능성인 것 같기도 해요.
"EF가 연필로 두 줄을 그어놓은 그의 주장은 삶에 대한 비난과 죽음에 대한 긍정이다.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삶은 그것을 믿는 사람을 속였고, 그것을 구하는 사람을 바보로 만들었으며, 그것을 신뢰하는 사람을 조롱했다. 삶은 아무에게도 확신을 주지 못하고, 모두에게 거짓으로 드러난다.' 최선의 대응은 가능한 한 빨리 거기에서 빠져나가는 것이다. 두 형제는 자신들의 신앙을 더 강하게 내세워 말뚝에 묶인 채 창에 꿰뚫린다." (244)
"인생은, 우리가 아무리 그렇게 되기를 바라더라도, 서사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느낌 - 또는 우리가 이해하고 기대하는 서사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느낌." (269)
그리고 EF는 안나와 이야기를 나누다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나는 인생에서 이를 수 없는 것이나 바랄 수 없는 것 전문이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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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보원
이 슬픔의 출처가 굉장히 미묘한데, 왜냐하면 단순히 '나는 EF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그건 실패했어'라는 데에서 오는 것 같지만은 않거든요(물론 그런 이유도 크긴 하겠지만). 그러면 이 슬픔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EF의 삶이 불완전하고 슬픈 것인지, 아니면 율리아누스나 EF 같은 인물들이 비극(율리아누스는 죽고, EF는 여론 재판 같은 걸 당하고요)을 겪을 수밖에 없는 세상 때문인지, 아니면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랄까, 그런 것이 기독교로 대변되는 일신교에 의해 패배했기 때문인지... 이것들이 다 조금씩 섞여 있을까요? 아무튼 '일관된 서사를 만드는 것의 불가능성'은 단순히 서사가 현실의 복잡성을 쫓아갈 수 없다는 것, 그것을 온전히 재현할 능력이 없다는 것과 같은 층위에만 한정되는 것 같지는 않아요. 뭔가 더 정서적인(?) 측면을 건 드리는 것 같은데 그것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이에 대해 함께 이야기나누며 힌트를 찾을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고요...ㅎㅎ

금정연
우리가 아무리 누군가의 삶을 이해하려 해도, 심지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는 깨달음은... 그 자체로 조금 쓸쓸한 것 아닐까요. 더욱이 그것이 자신의 삶이라면 마음은 더욱 복잡하죠. 동시에 그런 현실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큰 목소리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며 망신주며 가뜩이나 희미한 삶을 더욱 흐려놓으며 의기양양하게 살아가고 있다면... 근데 자신은 거기에 대해 별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다만 ‘지진아’로서 아주 천 천히 그녀의, 세상의, 스스로의 삶의 뒤를 한 발 늦게 따라가고 있다면............
꼬모
말씀 굉장히 인상깊게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다른 관점에서 다시 읽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그 슬픔에 대해서 좀 더 단순히 생각했었거든요. EF가 노트를 물려줄 정도로 닐을 가깝게 여겼다는 것에 닐은 어느 정도 자부심 - 나는 EF를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다 - 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장에서는 자신이 하려던 것이 EF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는 걸 알고 또 받아들여야 하니 그 모든 과정이 충격이지 않았을까 싶어서...짧은 견해지만 남겨봅니다. 멋진 의견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미주
와 이러한 미묘한 슬픔을 짚어주시다니. 좋은 생각거리가 돼요. 저는 EF를 고정하려는 닐의 노력이 정신적 의지처를 필요로 하는 인간의 근본적 불완전함에서 나온다고 봐요.
이제는 사라진 EF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고 구축하고자 율리아누스 에세이를 쓴 닐의 방식은 정제되어 있고 성숙해요. 그러나 그 속 자신을 깨쳐주고 기댈 기반이 되어줄 사람, 사상에 대한 갈망이 언뜻 비춰보여 슬프게 느껴지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금정연
EF가 과거 강의에서 히틀러의 책을 참고도서로 삼은 것이 대해 항의 받자 자신이 유대인이고 나치에게 많은 가족들을 잃은듯한 암시를 했던 것이 실은 의도적인 거짓말이었음이 밝혀지는데요. 그 사실을 알게 된 닐은 고민하죠. 왜 거짓말을? 학생의 코를 좀 눌러놓고 싶어서? 아니면 모종의 이유로 유대인인 척을 하고 있어서? 좀처럼 만족할 만한 대답을 찾지 못한 닐은 이 문제를 보류해 놓기로 합니다. 그리고 소설에서 이 문제는 더는 언급되지 않아요. 대체 핀치는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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