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소설_겨울]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함께 읽기

D-29
벌써 다 읽으셨군요! 무작정 보내는 찬사와 뒷담화가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결국 상대에 대한 이해보다는 자기 내면의 투사,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에 더 가까울 테니까요. 개인적으로는 뒷부분으로 갈수록 더 재밌었던 소설이었어요. 말씀해주신 닐의 말도 그렇지만, 소설이란 결국 인물에 대한 탐구라면 그것은 어디까지 갈 수 있고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지에 대한 반스의 고민이 묻어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에 속지 말고 역사 ㅡ특히 지성사ㅡ가 선형적이라고 상상하지 마세요.(...) 그리고 잊지 마세요. 전기나 역사책은 말할 것도 없고 소설에서도 어떤 인물이 형용사 세 개로 줄어들어 깔끔하게 정리되는 게 보이면 그런 묘사는 늘 불신하세요.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p23,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그래, 그녀는 인위(人爲, artifice)를 신봉했으니까, 우리한테 여러 번 말했듯이.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p.14,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이 책 제목의 "우연"만큼이나 '인위(artifice)'라는 단어도 눈에 띕니다. 닐이 핀치에게 '배우'였다고 하자, 핀치는 감탄하면서 "진정성을 생산하는 인위성(artificiality)의 완벽한 예"(p.30)라고 합니다. 사전을 뒤져보니 'artifice'는 '책략, 계략, 농간, 솜씨좋음, 기만' 등의 뜻이라 살짝 부정적 뉘앙스던데.. 흠.. 뒤에서 등장한 명사 '인위성'은 또 다른 의미인 것도 같고.. 이것도 주목해서 차분히 읽어갑니다.
지적해주신 인위와 우연의 관계가 흥미롭네요. 다른 이야기지만, 소설 또한 진정성을 생산하는 인위성의 완벽한 예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반스의 이 소설이 일정 부분 그것에 대한 탐구 혹은 고찰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EF는, 이제 우리는 사적으로 그녀를 그렇게 불렀는데, 평소처럼 핸드백을 교탁에 올려놓은 채 우리 앞에 서서 말했다. “적당한 행복에 적당히 만족하라. 인생에서 유일하게 분명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건 불행이다.” 그러고 나서 기다렸다. 우리는 알아서 해야 했다. 누가 감히 먼저 말을 할까? 그런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EF가 밝히지 않았다는 데 눈길이 갈 것이다. 그것은 의도적인 것으로, 우리 스스로 생각하는 걸 돕는 데 유용한 기교였다. 출처를 밝히면 우리는 먼저 그런 말을 한 사람의 삶과 작업에 관해 우리가 아는 것, 또 일반적인 통념에서부터 생각을 시작하기 마련이다. 그에 따라 경의를 표하며 고개를 숙이기도 하고 맞서기도 할 것이다.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활발하게 토론했고, 이 성숙한 회의주의--어쨌든 우리는 그렇게 보았다--에 아직 젊은 희망으로 맞섰고 마침내 그녀는 출처를 밝혔다. “괴테. 우리 가운데 그보다 더 충분하고 더 흥미로운 삶을 살 사람은 거의 없겠죠. 그런데 그는 임종 때--당시 여든둘이었는데--평생 겨우 15분만 행복을 느껴보았다고 말했어요.”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p.30-31,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최근에 영국 정치학자 브라이언 클라스의 <어떤 일은 그냥 벌어진다>라는 책을 읽었는데요. '우연의 필연성'에 대한 고찰이라고 할까요. "우리는 아무것도 통제하지 못하지만,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라는 문장이 이 책을 가장 잘 요약해주는 것 같아요. 굉장히 인상적으로 읽은 책인데,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와 함께 읽으면 더욱 좋습니다. 추천!
어떤 일은 그냥 벌어진다 - 이 세계를 움직이는 힘UCL 국제정치학과 교수이자 주목받는 사회과학자인 브라이언 클라스는 오늘날 우리를 지배하는 근본적인 가정에 도전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전혀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이 책은 역사와 현실 세계를 종횡하며 무작위적 우연 현상과 그것이 가져오는 거대한 변화에 대해 깊이 파고든다.
@금정연 잘 지내시죠? 강양구입니다! 저도 『어떤 일은 그냥 벌어진다』 재미있게 읽고서 기회 닿을 때마다 추천하고 있는데, 정연 씨가 언급하시길래 반가운 마음에 오랜만에 안부 인사 드려요. 본 지 한~참 되었지만, 늘 글도 책도 읽고, 응원하고 있습니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는 책만 꽂아두고 아직 못 읽었는데 나중에 읽으면서 여기 대화도 살펴볼게요. 새해에는 기회 만들어서 한 번 봐요. 그럼, 연말 평온하게 보내세요!
앗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잘 지내시죠?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뵙게 되니 더욱 반갑네요. 이제 2024년도 몇 시간 남지 않았네요. 마무리 잘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추천 감사합니다. 뜬금없지만, 2024년에 금정연님의 나쁜책 추천 덕분에 독서 생활이 더더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읽으면서 '와 정말 재밌다!' 감탄한 책이었어요!
이 책은 제목자체로 강렬하네요. 호기심을 자극해서 같이 읽어봐야겠어요. 추천 감사합니다.
손으로 필사해주신 구절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냥 읽어도 좋은 책들이지만, 두 권을 함께 읽으면 더 큰 시너지가 만들어진다고 장담합니다!
추천하신 책을 알라딘에서 찾아보니, 역시나 사둬야 하며 읽어야 하는 책이네요. 작금의 어지러운 시기라면 더욱!!! 바로 장바구니에 쟁였고요, 우리가 읽은 소설과도 맥락이 잘 이어질 거 같네요. "확실성의 추구라는 ‘안락한 거짓말’에 갇힌 우리의 매트릭스를 깨부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지와 삶을 더 가치 있게 누리는 방법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던진다." [알라딘 책소개]
우리는 모든 것은 아니더라도 많은 것을 예측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편견 혹은 자만이 어떻게 사회와 삶을 망가뜨리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인용을 사랑하는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이 부분을 읽으며 정말 많은 공감을 했습니다. 인용의 좋은 예라고 할까요? 사람들은 흔히 인용을 배척하는 경향이 있지요. '네 언어로 써라' 혹은 '권위에 의존하지 마라' 하는 식으로요. 많은 글쓰기 책들이 이런 말을 하고, 많은 평자들이 이런 기준으로 어떤 글을 판단하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게 굉장히 비효율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요. 마치 '나는 나만의 집을 지을 거야'라고 하면서 벽돌 한 장 한 장을 굽고, 나무를 길러서 직접 기둥을 만드는 식으로요. 하지만 나만의 집은 그렇게 해야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죠. 집을 짓는다는 건 기성 벽돌과 기성 기둥과 기타 등등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건축 자재들을 가지고 그것을 설계에 따라 적절히 배치하는 일이잖아요. 글을 쓰는 것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이미 훌륭한 좋은 글들이 많이 있고 사유가 많이 있는데, 그것들을 당연히 가져다 써야 하지 않을까요? 다만 그것이 어떤 포인트 악세서리처럼 자신의 글을 치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그쳐도 되지만), 전체적인 글 속에서 기능을 하도록 하느냐가 중요한 것 아닐까요? 그것이 인류의 지적 재산을 풍요롭게 향유하며 뒤에 태어난 사람들로서 우리가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핀치의 수업 방식이 개인적으로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인용이 영리한 선택의 문제나 심지어 선호의 대상이라 생각해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재능의 영역으로 보였어요. 절묘한 인용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재주꾼이다 싶더라구요. 인용을 하면 말에 공공성을 더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자기 생각에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고 확장성이 있는데 대화의 내밀함을 즐기는 사람들에겐 방해물처럼 느껴질 것 같기도 해요.
아무래도 사적인 대화에서의 인용은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그러나 EF는 스스로의 생각에는 엄격하면서도 우리 생각이나 제안은 하찮거나 감상적이거나 대책 없을 만큼 자전적이라는 이유로 물리친 적이 없었다. 대신 우리의 시시껄렁한 작은 생각을 훨씬 흥미로운 것으로 바꾸어주곤 했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32쪽,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올려주신 부분 못지 않게 이 부분도 흥미로웠습니다. 좋은 선생은 학생들이 자유롭게 말하고, 그 의견에 의미를 덧붙여주는 역할을 가진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역시나 대학 시절의 은사님들이 떠올라서 옛 강의실로 되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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