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소설_겨울]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함께 읽기

D-29
솔직히 닐에게 크게 공감하지는 못했지만, 3부가 끝날 때 저에게도 개운함(?)이 전해져서 덮을 때 편안했습니다. 상대의 모든 것을 다 알아내고 내 방식대로 정의하는 것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과는 상관 없다는 게...경우는 좀 다르지만, 저도 상대를 알아야 이해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한 적이 있었거든요. 나름의 이유는 있었지만, EF라는 인물을 따라가다보니 보지 못한 길에 전구가 하나씩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모임서 좋은 말씀들 보면서 다시 보니 생각해볼 것들도 정말 많았구요. 저는 처음 읽은 반스님 책이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여서, 잔잔하게 나가다가 독자를 바닥에 메다꽂는 무서운 작가라는 편견(?)을 좀 오래 갖고 있었네요.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다가 아니라 다방면으로 매력 뿜뿜이라는 걸 알았는데, 그 중 저의 1순위는 용감한 친구들입니다. 인기투표는 아니지만 다른 분들은 뭘 좋아하시는지 굉장히 궁금하네요~
닐에게 공감을 하든 하지 않든 어떤 방식으로든 납득하며 책장을 덮게 되는 것이 반스가 가진 힘인 것 같아요. "EF라는 인물을 따라가다보니 보지 못한 길에 전구가 하나씩 들어오는 느낌"이라는 말씀이 참 멋져요. 꼭 EF라는 인물이 아니더라도, 소설이라는 형식이 아니더라도, 주변의 누군가나 어떤 분야를 따라가다 보면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어서 공감이 되었습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와 비교하면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는 조금 슴슴한 편이죠. 열린책들에서 나온 초창기 책들도 한 번 읽어보시면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용감한 친구들>을 아직 안 읽었는데, 조만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 언급하긴 했지만 저는 이전에 읽어본 줄리언 반스의 작품이 <플로베르의 앵무새>뿐이었고 그것도 꽤 오래전이라서 기억이 가물가물했거든요. 그때 남아 있던 인상은 아주 대중적인 작법은 아니라는 것이었는데, 이번 소설을 읽으면서는 말씀해주신 것처럼 꽤나 잘 읽히면서 동시에 형식적인 기교도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닐이 율리아누스에 대한 에세이를 쓰게 되기까지의 빌드업(?)에 이어서, 2부를 그 에세이 자체로 채우는 것을 보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논문에 가까운 에세이를 소설 속에 녹여낼 수 있다는 점에 감탄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3부에서는 이를 총 정리하며 어떤 정서적인 울림까지 가져가는 것이... 이런 게 거장의 보법이구나, 뭐 이런 생각도 들었고요....ㅎㅎ
초창기에는 확실히 마니악한 작품들을 썼죠. 그러다 2010년대 들어와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는데요, 저는 초기 작품들을 더 좋아하지만 확실히 거장은 거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와 <이따위 레시피라니> 라는 두권의 책을 기존에 읽었었고, 둘다 정말 좋아하는 책이에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와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를 비교해보자면 아쉽지만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가 훨씬 좋았습니다. 그 책은 마지막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고 제목도 정말 찰떡같다고 생각했어요.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는 기존 반스 작들의 제목과 연관되게 지으려고 한건지 비슷한 느낌으로 번역 제목을 뽑은거 같은데 저는 엄청 잘 어울린다고 느껴지진 않았어요. 닐은 EF와 율리아누스를 탐구하며 인생이 서사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 하나의 사건/인물도 수용 및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배우게 되네요. 쓰다보니 결국 닐의 성장 소설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제가 백인남성의 성장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지 (ex 데미안) 아쉬움이 남네요....
저도 딱히 장르를 생각해보진 않았는데 닐의 성장소설이라고 하는 게 가장 어울릴 것 같아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가 2010년대 이후 반스를 대표하는 작품이니만큼 아무래도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가 미치지 못한다고 느끼는 독자분들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별개로, 'the sense of an ending'(결말에 대한 예감 정도 될까요?)라는 원제를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바꿔서 출판했던 출판사에서 이어지는 작품들의 제목도 비슷한 느낌으로 바꾸며 후기 반스의 소설들에 어떤 일관성을 부여하려는 시도가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는 반스 소설이 처음이었는데요. 확실히 일반적인 소설과는 달라서 처음엔 소설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저는 스토리를 따라가는 소설들을 주로 읽었던터라 그런 점에서 새로웠고, 특히 1부는 제가 마치 그녀의 강의를 듣는 것 같았어요. 이런 수업을 대학 다닐 때 들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도 해본거 같아요.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며 뜬금없이 플래너리 오코너의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는 단편 제목이 떠올랐었는데요, '진정한 스승은 찾기 힘들다'라는 생각 때문인 것 같아요. 그러게요, 저도 그런 수업을 들었다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어쩌면 저와 같이 수업을 들은 누군가는 그런 수업을 들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형식을 따지면 보통 소설과는 달라서 신선했습니다.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도 에세이 비슷하다는 평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작가가 에세이 작법을 소설에 도입하는데 관심이 있는 것 같네요. 유일하게 읽었던 작가의 전작이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인데 아쉽게도 내용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두 작품을 비교는 하지 못하겠습니다. 재미를 따지면 빠른 시간에 읽은 것으로 보아 지루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만 딱히 재밌었던 포인트도 없습니다. 그래서 작가가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에세이 부분에서 많이 이야기되었고 EF가 수업에서 강의했던 부분과 행동으로 보여 준 것들이 있겠죠. 그리고 중요한 문제인 사랑하면 이해할 수 있는가? 사랑하면 행복한가? 하는 질문은 닐이 겪은 바로는 아닌 것 같네요. 시종일관 밥값을 냄으로써 넘어오지 말라는 선을 그은 EF에 대한 닐의 짝사랑이어서 그랬을까요. 짝사랑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면 이해하고 행복해지는 것이 필연일까요. 한글 번역판 제목에 대해서는 저도 별로 공감이 가지 않았습니다. 소설에서도 딱히 필연과 대비되는 우연 요소가 제 눈에는 별로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자료를 넘겼더니 닐이 그것을 가지고 에세이를 쓸지 안쓸지를 우연으로 보는 것은 좀 부자연스러워보입니다. 그렇다고 저보고 제목 지으라고 하면 더 잘 지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동시대의 뛰어난 영국 작가이자 반스의 친구인 이언 매큐언과 비교해도 반스는 형식에 대한 고민이 큰 작가인 것 같아요. 말씀하신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도 청원과 변론으로 이루어진 재판문 형식이나 편지, 에세이 등이 다양하게 혼재 되어 있고 다른 소설들도 그렇고요. 그래서 상대적으로 분명한 기승전결 구조가 있는 매큐언의 소설과 비교해서 극적인 재미는 떨어지는 편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런 점을 좋아하는 독자들도 있지만요. 닐의 사랑을 단순한 짝사랑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복잡한 것 같아요. 존경과 동경과 기타 등등이 뒤섞여 있으니까요. 물론 '단순한 사랑' 같은 건 세상에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전 이 소설을 읽기 전에 반스의 소설을 몇 작품 읽었는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시대의 소음>입니다. 두 작품의 결이 좀 달라서 비교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것 같지만, 뭐랄까... <시대의 소음>은 한 예술가의 고뇌와 비장함이 크게 와닿았다면, 이번 작품은 좀더 독자에게 보편적인(그러나 실천하기 쉽지 않은) 주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전달하는 방식이 만만치 않았지만요.
<시대의 소음>을 읽은 지 벌써 8년 가까이 지나서 내용이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마지막에 만족의 한숨 비슷한 것을 내쉬며 책장을 덮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번 기회에 줄리언 반스 작품을 역주행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렇게 반스의 작품들을 차례대로 읽고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를 다시 읽으면 또 다른 감상이 들 것 같다는 예감이...
시대의 소음 - 개정증보판2011년 맨부커상 수상작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꾸준히 줄리언 반스의 작품을 소개해 온 다산책방에서 줄리언 반스의 명작 다섯 권을 선별해 개정증보 특별판으로 재구성했다.
이 소설은 마지막까지 읽어야 이해하기에 더 쉬운, 묘한 작품입니다. ㅎㅎ 저는 1부와 2부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3부에서 납득이 되더라고요.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좀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약간 탕후루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해요. 소설이라는 꼬챙이에 1부, 2부, 3부가 꽂혀 있는 거죠. 처음 먹고 두 번째를 먹으면 맛이 너무 달라서 이게 뭐지? 싶지만 세 번째 것까지 먹으면 앞서 먹었던 것들이 조화가 되면서 아 이런 거구나... 하는. 실제 탕후르는 그렇지 않지만요 ㅎㅎ
아이고고, 그저께가 되어서야 겨우 진도를 따라잡고 끝부분 작가님들 추천사까지 잘 읽고 마무리했습니다. 책을 다시 훑으면서 머릿 속을 정리하는 일이 남았지만... 이것저것 개인 일들이 생겨서 미루다가 이제야 들어와보니 이 많고 많은 이야기들을 제때 못본 게 너무 아깝고 어디부터 어떻게 읽고 나눠야할지... 그래도 즐거운 고민입니다. 얼마 남지 않았지만 다시 열심히 따라가 보렵니닷!! ㅎ
연말연시에 이런저런 일들이 워낙 많아서 집중해서 책을 읽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 방의 대화들도 천천히 읽어보시고 감상 올려주세요!
메마른 닐의 일상에 어떤 번뜩이는 통찰들을 주는 멘토같은 존재를 만나 그녀를 존경하고 그리워하며 그 뒤를 따라가는 모습을 보며 나에게도 저런 기회가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신입사원이던 시절 한 부장님이 나이가 들수록 공대생에게도 인문학이 중요해라고 했을때.. 이것은 무슨 고리타분한 소리인가 했었는데 요즘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저도 모르게 인문학 책을 찾아보고 있거든요. 2부 율리아누스 이야기가 공대생에게 조금 고비이긴 했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곱씩고 여기서 나누며 위기를 넘겼습니다. 오늘은 닐이 말한 "엘리자베스 핀치는 인간적 관심사의 정상적 대역폭과는 거리를 둔다"는 표현을 혼자 꼽씹어 보았어요. 분명 번역한 표현인데 "인간적 관심사의 정상적 대역폭"과 거리를 둔다는 표현이 참 절묘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 멘토를 만나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 같아요. 멘토뿐만 아니라, 한 사람에게 그만큼의 영향을 미치는 사람--친구든 연인이든--을 만난다는 게. 그런 의미에서 닐은 행운아였던 것 같네요. "엘리자베스 핀치는 인간적 관심사의 정상적 대역폭과는 거리를 둔다"는 표현을 읽으며 무심히 넘겼는데, 말씀해주신 것을 보고 생각하니 과연 절묘하네요. 다른 이야기지만, 공대생에게도 인문학이 중요한 것처럼 인문대생에게도 과학과 공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앗...!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그러니까 '한 사람에 대한 완벽한 서사(이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알고 난 이후에도 그것을 바랄 수밖에 없는 취약한 존재라는 것이 어떤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아요. 사실 EF 역시 율리아누스를 'J'라고 쓰면서 그에 대한 어떤 동일시, 그리고 어떤 이해를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잖아요. 금정연 작가님이 위에서 인용해주신 이언 해킹의 "무언가를 두문자로 지칭하는 것만큼 그 대상을 영구히,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게 없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에 비추어봤을 때, 닐이 EF를 EF로 쓰는 것처럼... EF 또한 율리아누스를 J로 표기하며 그를 자신에게 의문의 여지가 없는 무엇으로 만드려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완벽하고 철두철미해보이는 EF 역시 그런 취약함을 우리 모두와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EF를 더 생생한 인물로 만들어주면서 어떤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는 지점인 것 같아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저도 @밥심 님처럼 줄리언 반스 책은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가 유일했고 무려 2018년도에 읽은 터라 역시나 기억도 가물합니다. 그래도 책장에 꽂혀 있어서 꺼내 보니 이리저리 밑줄 친 부분들 중 눈에 띄는 것이 있어요. "역사는 일어난 일이 아니다. 역사는 역사가가 우리에게 전하는 것일 뿐이다. <...> 몇 가지 진짜 사실을 남겨 놓고 그 주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우리의 공포와 우리의 고통은 마음을 달래 주는 우화화에 의해서만 덜어진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한다."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 332-33pg) 그 책 전반적으로 아이러니, 풍자, 유머가 많았던 게 기억나는데, 이 대목에서 역사에 대한 작가의 기본적인 사고가 잘 드러나지 않나 싶고... 그런 성찰이 1989년 작품에서 2022년 작품작품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진다고 봅니다. 다른 분들도 꼽아주셨던데, 제가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실타래로 보는 아래 부분. "인생은, 우리가 아무리 그렇게 되기를 바라더라도, 서사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느낌 - 또는 우리가 이해하고 기대하는 서사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느낌."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 268-69pg) 인생도, 삶도 그러한데, 더군다나 이 세계와 역사라면.. 흠... 굳이 두 책을 비교한다면 제 생각에는 이번 소설이 훨씬 매끈하고 세련스럽다는 느낌이고, 흡인력도 상당한 거 같습니다. 삶에 대한 속 깊은 통찰도 정말 돋보이고요. 특히 앞의 저 대목에서 계속 생각이 많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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