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보르헤스 읽기]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3부 같이 읽어요

D-29
"그리고 (살짝 비꼬는 실망감을 가지고) 언어의 가장 쉬운 분류법이 문장을 능동태, 수동태, 현재 분사, 비인칭 등으로 나누는 기술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알마푸에르테의 위치] 저도 처음에 알마푸에르테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당황했습니다. 아마 각주로 설명해줬다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다른 인명은 각주가 있는데, 정작 중요한 인물에 대한 각주가 없는 것은 편집상 아쉬운 점입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알마푸에르테는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라플라타 지역에서 활동한 시인입니다. 본문에도 나오듯 본명은 페드로 보니파시오 팔라시오스(Pedro Bonifacio Palacios)입니다. 청년기에는 화가로 활동했지만, 여러 이유로 유럽행이 좌절되자 진로를 바꿔 글쓰기와 교육에 전념했다고 알려집니다. 시인이자 교사였고, 기자로 활동한 적도 있습니다. 보르헤스처럼 사서와 번역을 겸한 적도 있고요. 이른 시기부터 시를 썼던 것으로 보이나, 책들이 주로 출간된 시기는 20세기 초입니다. 그는 무수한 필명을 갖고 있었는데요, '알마푸에르테'는 그중 가장 유명한 이름입니다. ⟨나아가라!(¡Piú avanti!)⟩라는 시를 보면 대충 어떤 시를 쓰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Claude로 번역을 맡겨봤습니다. 포기하지 마라, 패배했더라도, 노예처럼 느끼지 마라, 노예일지라도; 네 자신을 용맹하다고 생각하라, 공포로 떨면서도, 맹렬히 돌진하라, 이미 깊이 다쳤어도. 지녀라, 녹슨 못의 그 끈기를 낡고 보잘것없어도, 다시금 못으로 되돌아가는; 안 된다, 공작새의 비겁한 대담함처럼 작은 소리에도 깃털이 움츠러들어서는. 나아가라, 신처럼 결코 울지 않는; 혹은 결코 기도하지 않는 루시퍼처럼; 혹은 위대함을 지닌 참나무 숲처럼 필요로 하나 구걸하지 않는 물을······ 하여, 물어뜯고 외치게 하라, 복수하듯이, 먼지 속을 구르는, 너의 머리를!
알마푸에르테를 검색하니 알마 푸에르테라는 담배가 나오고 아래 내려가니 아르헨티나의 도시 이름이 나옵니다. 아무래도 사람 이름 같은데 가상의 인물인지, 실제 인물인지 모르겠네요 알마푸에르테보다 분량이 훨씬 짧지만 그래도 읽기가 쉽지는 않네요.
계속 얘기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보르헤스는 알마푸에르테가 당시 청년들에게 버림받고 있는 현실을 먼저 지적하면서, 그를 두고서 "다정한 관계는 어렵겠지만 존중은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글을 엽니다. 동시에 그가 그만의 목소리를 가지고 시를 썼음을 말합니다. 하지만 읽어보셔서 알겠지만 이 글 전체가 알마푸에르테를 단순히 칭송하는 게 아니라 묘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당대의 청년들처럼 증오하는 식으로 단순 비판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존중하면서 비판하고 있다는 차이점은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이 과학적인 근거를 추적해서 이성적으로 논변한 것들을 우리 선조들은 몸소 겪어서 그 용무용을 따졌습니다. 약초의 효능이 그러하고, 쑥뜸과 침의 효능이 그러합니다. 개중에는 거짓으로 밝혀지거나 근거가 없다거나 위약 효과로 밝혀진 것도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 무용함이 밝혀졌다고 해서 당대에도 그것이 무용했다고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신념이 사실과 관계없이 그 나름의 효용이 있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당시 알마푸에르테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단순히 니체의 모조품이라고 폄훼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아르헨티나의 상황에서 그만의 목소리를 구축했다는 점을 먼저 인정하고 난 뒤에, 그 한계를 나란히 펼쳐놓고 살피는 것입니다. 한편, 보르헤스가 알마푸에르테에게서 니체를 찾아내는 장면은 꽤 의미심장합니다. 보르헤스는 알마푸에르테가 니체의 모조품에 불과하다는 사람들의 비판을 수용하고, 자신도 한때 그런 비판에 동조했다고 말하면서도, "지금은 괜찮아 보인다"고, 또 한 번 틀고 있습니다. 표절과 아류 시비를 우회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 돌파하는 식으로 알마푸에르테의 방식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고 저에겐 읽힙니다. 이 책이 출간된 시기로 미루어볼 때, 이 저변에 흐르는 사고방식은 보르헤스가 훗날 쓰게 될 ⟨돈키호테의 저자, 삐에르 메나르⟩를 예비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무엇 때문에 그리스어나 독일어 선생이 이미 생각한 것을 어떤 크로오요가 생각하면 안 된다 말인가? 왜 재규어가 호랑이의 모조품이며, 약초는 차의, 초원은 황무지의, 알마푸에르테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의 복사판이라고 추정하는가? 그러나 여기 그런 변론을 무력화할 수 있는 주장이 있다. 알마푸에르테가 그 독일인과 같은 순서로 시작해서 기독교적 도덕성의 소멸과 초인의 위기에 대한 동일한 결론에 다다랐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허용되지만 용어나 상징성까지 같은 것은 허용할 수 없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194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나는 언젠가 모두의 가슴에 스멀거리는 탐정 본능으로 인해 ⟪선교사⟫를 구성하는 일곱 개의 장제목 가운데 차라투스트라가 없다는 사실에 분개한 적이 있다. 지금은 괜찮아 보인다. 왜 그런 인간이 인간에게 주는 최후의 조언을 미지의 고상한 책에서 찾으려 하는가? 석양과 절망, 도주와 신에 대해 우리가 언급하거나 하지 않는 것을 왜 도서관을 통해 추인받아야 하나?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195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감사합니다. 내용 이해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글로 쓴 행복] 말 그대로, 보르헤스가 생각하는 "글로 쓴 행복"에 부합하는 조건이 무엇인지를 '문학'과 '행복'과 '종교'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풀어내고 있습니다. 먼저 보르헤스는 글로써 행복을 묘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얘기를 꺼냅니다. 생각보다 현실에서 행복을 잘 묘사한 글은 보기 드뭅니다. 역사 속에서 많은 작가가 행복을 대변하는 천국이나 유토피아를 묘사하려고 했습니다만, 결과적으로든 다들 실패했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만 봐도 그러합니다. 도서관에서도 단테의 신곡 중 ⟪천국편⟫이 비교적 덜 대출된다고 하죠. 하지만 그럼에도 보르헤스는 "행운이나 행복한 운명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데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는 천국이나 유토피아로 치닫지 않는 한에서의 행복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프라이 루이스를 논하면서 보르헤스는 그가 행복한 상태를 묘사하려고 했지만 왜 실패했는지를 짚습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생각하는 "글로 쓴 행복"에 부합하는 사례를 찾아내는데요, 바로 아르날도스 백작의 로망세입니다. 보르헤스는 시의 유쾌함을 두고 이렇게 씁니다. “(추측컨대) 그 유쾌함은 시 초반부의 행복한 장면과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는 행복이 사랑이나 보물을 찾는 모험에 있지 않고 작은 배에서 일어나는 것에 불과하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는 데 있다. 인간이 어느 아침 노래하는 뱃사람과 돛대에 내려앉은 새를 보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끼던 시대와 시간들은 축복받은 것이다.” 글을 읽고 있으면, 지향하는 바나 풀어내는 과정은 좀 다르지만 조지 오웰이 떠오릅니다. 그는 ⟨사회주의자는 행복할 수 있는가?⟩에서 비슷하게 주장한 바 있습니다.
책 대 담배일용할 양식이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죽는다. '마음의 양식'도 마찬가지일까, 아니면 독서란 기호에 불과할까, 기호라면 얼마나 값비싼 기호일 것인가? 조지 오웰은 이 같은 호기심을 지극히 형이하학적으로 해결했다.
신학자들의 책에는 천국에 대한 묘사가 넘쳐 난다. 그들의 메마르고 추상적인 관념을 살아 있는 표현으로 만들기란 어려운 일이다. 로테는 행복은 의인의 사후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상태로,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보고 모든 괴로움에서 멀어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원한 기쁨과 영광, 행복 안에서 살며 다스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라고 용감하게 말하고 '모든 괴로움에서 멀어져'라고 소극적으로 말한 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 따위로 마치는 이런 정의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져야 할까?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06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무엇인가와 대비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을 묘사하거나 떠올리지 못하는 것 같다. 천국이나 유토피아의 개념이 시대마다 다른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산업화 이전 사회에서 천국은 끝없는 안식의 장소로, 그리고 금으로 덮인 곳으로 그려졌다. 당시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경험은 과로와 빈곤뿐이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 낙원의 미녀들 대부분은 부자들의 하렘으로 사라져 버리는 일부다처제 사회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행복을 이런 식으로 묘사하는 시도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행복이 영원해지자마자 대비는 작동을 멈추기 때문이다.
책 대 담배 72쪽, 조지 오웰 지음, 강문순 옮김
책 대 담배일용할 양식이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죽는다. '마음의 양식'도 마찬가지일까, 아니면 독서란 기호에 불과할까, 기호라면 얼마나 값비싼 기호일 것인가? 조지 오웰은 이 같은 호기심을 지극히 형이하학적으로 해결했다.
나는 ⟪트리뷴⟫의 편집자들이 내 주장을 인정하지 않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사회주의의 진짜 목표는 행복이 아니라고 말하고자 한다. 이제껏 행복은 부산물이었고 우리가 아는 한 늘 그럴지도 모른다. 사회주의의 진짜 목표는 인류애다. (···) 유토피아를 창조한 사람들 거의 모두는 행복을 그저 치통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치통 환자와 유사하다. 그들은 일시적이기 때문에 소중했던 뭔가를 영속화해서 완벽한 사회를 만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것은 틀렸다. 인류에게는 추구해야 할 노선이 있고, 거대한 전략은 이미 나와 있지만 전략의 세세한 사항을 예언하는 것은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완벽한 상태를 상상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의 내면이 텅 비어 있음을 드러낼 뿐이다.
책 대 담배 74-75쪽, 조지 오웰 지음, 강문순 옮김
저는 제목을 보고 엉뚱하게 체스터튼이 바로 생각났는데, 보르헤스가 '그는 행복을 선택했다. 적어도 그런 척했다'고 평했던게 늘 인상적이었거든요. 두 사람 모두 세상을 하나의 이야기처럼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긍정하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체스터튼은 정작 읽어보면 오늘날은 물론이고 당대에도 꽤나 반시대적이고 호전적으로 느껴졌을 글들을 썼더라구요. 인용해주신 조지 오웰의 글까지 읽으니 여러 생각이 드네요. 여하간, 정작 체스터튼을 읽고 나니, 실은 보르헤스 쪽이 더 행복했던거 아닌가? 체스터튼(이나 조지 오웰)이 세상에 '문학'을 실현시키기 위해 분투했다면 보르헤스는 도서관에 앉아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선과 악을, 세상 자체를 문학으로 만들고 있는거 아닌가? 같은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시대와 환경을 고려하면 '수행적일 수 없었던 보르헤스가 불행했다'고 생각하는게 맞을거고, '보르헤스 작품에 사실 더 무시무시한 뭔가가 있다'는 생각도 맞을 것 같구요. 이 글에서 보르헤스는 '근대적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행복한 시대가 있었고, 문학으로 표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을 낸다면, 체스터튼은 '그게 행복의 조건이라면 당연히 세상에서 시간을 없애야 한다!'같은 순진한 소리를 부끄러움없이 할 것 같고, 조지 오웰은 오늘날 타락하게 된 단어(행복) 대신 새로이 찾은 단어(인류애)를 소개하는데, 사실 이건 다른 두 사람이 말하는 행복과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는 데 저도 동의합니다. 결국 흔히들 말하고 소망하는 것과 달리, 행복이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죠. 저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납니다.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고, 다만 인생을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기에 부차적으로 중요할 뿐이라고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또다시 은유] '은유'에 대해서 달리 분석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그러고 싶지는 않습니다. 뭣보다, 시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라고 봅니다. 그리고 다르게 생각하려고 하다 보면 다르게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하고, 그러다 보면 결과적으로 은유를 데려오게 된다고 봅니다. 은유는 새로운 사고방식의 결과물임과 동시에 새롭게 사고하는 수단인 것입니다. 하지만 시 자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며, 때때로 그 위험성도 있습니다. (잠시 샛길로 새면, 한 시대를 풍미한 은유에는 그 시대의 한계가 녹아 있기도 합니다. "국가 수뇌부"라는 표현이 군주를 중심으로 신체라는 국가를 일사분란하게 조종하는 이미지를 은연중에 그려내고, "사회의 암덩어리" 같은 은유에 암환자를 향한 은근한 멸시와 그 방종한 생활을 비난하는 함의가 담겨있는 것을 보면 그러합니다.) 반복하지만 은유는 달리 생각하기입니다. 따라서 은유로써 달리 생각하지 못하고, 기지를 기계적으로 재생산할 뿐이라면, 그 은유는 (혹은 그 은유에 대한 생각은) 쇄신되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보르헤스가 211쪽 괄호 속에 겸손하게 숨겨놓은 문장은 빛납니다. "나는 진심으로 은유는 시를 지을 때보다 오히려 시를 지은 후에, 문학적이고 이미 잘 꾸려진 시를 원할 때 필요하다고 본다. 은유로 인해 뒤섞인 어휘로 구성된 시는 제약을 가하고,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실패하게 만들기도 한다." 은유를 모르고서 시를 읽을 수는 없지만, 시의 모든 것을 은유로 보면 우리는 시를 즐기지 못합니다. 시는 수수께끼가 아니고 은유는 수수께끼의 힌트 따위가 아닙니다. 시를 수수께끼로, 은유를 수수께끼의 힌트로 좁게 보기 시작하면, 시는 낱말 맞추기처럼 시시하고 피곤한 것이 되며, 시인은 살인 현장을 밀실로 만들려는 범죄 추리극의 시시한 범인이 되고 맙니다. "동굴(grata)에서 파생되었다는 이유로 ‘그로테스크’라는 단어가 은유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10이라는 숫자에 있는 0이라는 상징으로 인해 ‘절대 무(無)’의 개념이 개입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212쪽. 글의 말미에서, 보르헤스는 은유가 장식이자 호화로움이라고 말합니다. '장식'과 '호화로움'이라는 단어가 오해될 뉘앙스를 갖고 있음에도 보르헤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결국 장식도 '다르게 보이기(말하기)' 위함이니까요. 이때 '장식'이란, 내면이 텅 비어 있음을 가리는 겉치레를 넘어서는 개념입니다. 때로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줄 뿐 아니라, 중한 것과 중하지 않은 것 사이를 일순 반전시킬 힘을 지닙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저는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가는 피처럼 붉은 체리 한 알을 생각했습니다. 그 체리 한 알은 케이크 시트와 그 위에 덧발릴 생크림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장식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생크림케이크의 맛과도 무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없으면 생크림케이크는 이미지적으로 너무 둔탁하거나 옹졸해 보일 것 같습니다. 그 점에서 새하얀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가는 붉은 체리는 사소하지만 중한 것입니다. 물리적으로는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가지만, 이미지적으로는 생크림케이크가 작은 체리 한 알 위에 올라타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보르헤스가 쓴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은 너무 멋집니다. 저에게는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가는 핏빛 체리를 연상케 합니다.
"일반적으로 은유의 발견은 감탄스럽다. 그러나 그 발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담화 속에 은유를 어디에 둘지 자리를 찾는 것과, 은유를 정의하기 위해 선택하는 단어들이다."
삶이 우리에게 부당한 고통을 주거나 걸맞지 않은 행운을 가져다주면 우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은유법을 사용한다. 우리는 세상보다 잘지 않기를 바라고, 세상만큼 커지기를 원한다. 215쪽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나는 전차를 타고 다니는, 그저 우수에 젖은 남자이며, 산책을 하려고 황폐한 거리를 선택하지만 마차와 자동차가 다니고 유리창이 빛나는 플로리다 거리도 좋고 마찬가지로 은유가 있어 어떤 강렬한 정열의 순간을 축하하는 것도 좋다. 삶이 우리에게 부당한 고통을 주거나 걸맞지 않은 행운을 가져다주면 우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은유법을 사용한다. 우리는 세상보다 작지 않기를 바라고, 세상만큼 커지기를 원한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15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내 생각에)사물은 본질적으로 시적이지 않다. 이를 시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과 사물을 연관시키고 혼신을 다해 이를 궁리하는 데 길들 필요가 있다. 별들은 시적이다. 수 세기 동안 인간의 눈이 이를 보아 왔고 그 영원성에 시간을, 그 가변성에 불변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10p,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과식주의] 여기서 과식주의(culteranismo)로 번역된 단어는 흔히 공고라주의(Gongorismo)라고 해서, 16세기 시인 루이스 공고라에서부터 시작된 스페인의 문체 운동을 일컫습니다. 화려하고 과장된('過飾') 어휘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보르헤스도 설명하듯, 과식주의는 "은유법의 남용, 라틴어 어투, 즉 고어체의 사용 그리고 그리스 신화의 남용"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보르헤스는 이 글에서 과식주의를 비판합니다. 제가 제대로 읽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글은 공고라 자체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에서 파생한 문체에 대한 비판인 것 같습니다. 마치 성서의 말씀은 언제나 있으되, 그것을 왜곡하는 사람도 항상 있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성서의 진의를 어쩐 일인지 자신만은 알아버렸다고 주장하면서 구세주를 자처하고 내용을 왜곡해서 설파하는 사이비들처럼요. 보르헤스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와 그 용례의 관계를 들어서 이러한 논의를 엽니다(216쪽). 즉 문법이란 그것에 고착되거나 귀속되기 위한 정답지가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더 넓은 땅을 여행하기 위한 토대라는 겁니다. 생각해보면, 문법에 과도하게 신경쓰다보면 우리는 언어적 입스(yips) 상태에 빠집니다. 하지만 능숙한 운동 선수가 그렇듯이, 경이로운 플레이는 논리가 아니라 숙달된 감각, 찰나의 직관으로만 가능합니다. 모듈화된 룰이 중요한 것은 그것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고 그 모듈화된 경직성으로부터 제대로 알고 벗어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이러한 맥락에서, 보르헤스는 공고라가 아닌 과식주의의 세 가지 오류를 다시금 살핍니다. 먼저, 은유가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은유가 오래된 생각을 쇄신하는 수단이 되기에 실패한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은유는 은유라서 시적인 것이 아니라 그가 성취한 표현에 의해 시적이다"라는 내용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과식주의에서 은유는 상상하는 수단이 아니라 "상상하거나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수단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 다음으로, 공고라가 즐겨썼던 라틴어식 표현을 짚어봅니다. 보르헤스는 라틴어식 표현을 두고, 자신이 “오늘날 스페인어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정통주의자들의 어리석음과 비사교성보다는 라틴어 혼용주의자의 너그러운 자세를 선호한다”고 말합니다. 젠체하며 학식을 뽐내는 수단이 아니라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식주의자들이 보여주는 일종의 '믿음 없는 믿음'을 지적합니다. 이는 무신론자들의 주기도문과 같습니다. 이때 과식주의자들의 그리스 신화는 공통된 이야기에 접촉하려는 열망이 아니라 "아부하거나 타지의 풍경을 이용하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 점에서 과식주의는 공고라의 장치를 치장으로 오해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이것들을 공부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이것들은 언어의 발명가나 창조자가 아니라 나중에 만들어진 분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단어가 사전적 의미만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문법의 구조와 논리적 사고와 이해의 과정 사이에 확실한 연관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16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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