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문고 서점친구들] 문학 독서모임 <작은 땅의 야수들> 함께 읽기

D-29
정호가 옥희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건 바로 그런 모습 때문이었는데, 그가 평생 벌 수 있을 만한 것보다 더 값진 것을 주겠다고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는 그 당당한 자신감이 옥희의 눈에 들었던 것이다. 옥희에 비하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정호는 절대로 비굴해 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결코 자신의 상황을 탓하거나 과거를 후회하지 않았다. 마치 텅 빈 그릇 같았으나,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다. 정호가 가진 지식이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그의 정신은 어떤 방향으로든 자유롭게 흘렀으며 제 스스로 고통을 키워내는 법이 없었다. 그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든, 옥희는 그가 장독 같은 마음 안에 깊이 묻어둔 것을 꿋꿋이 지켜내리라 확신했다.
작은 땅의 야수들 - 2024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 p.162,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그가 단이에게 그처럼 매력을 느끼고 이끌렸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주변의 다른 모든 이들과 달리, 단이는 대의에 대한 예리한 인식과 진심에서 우러나온 공감을 명명백백하게 보여주었다. 손에 든 모자를 저도 모르게 빙글빙글 돌리면서, 명보는 단이의 총명한 눈빛과 유려하면서도 표현력이 풍부한 입술을 떠올리고 있었다. 단이의 매력적인 얼굴에서 사람들이 찾아내는 장점이 오직 관능뿐이라면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명보가 바라보던 단이의 얼굴은 깊은 지성과 순수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더하여 단이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며 감동을 주는 무언가가 있었는데, 그건 강하고 높은 자긍심이 포함된, 동시에 매우 부드러우면서도 개방적인 활력이었다.
작은 땅의 야수들 - 2024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 p.186,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공산주의, 러시아, 일본 혹은 한국, 정호 자신과는 무관한 관념이나 세계지도가 아니라. 진정한 행복을 찾는 방법에 대해 한 이야기 말이다. 그저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소박한 삶을 나누고 싶다는 바람, 바로 그것이 그가 아무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하는 마음속 소망이었다. 자신이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명보라면 이러한 소망을 인정하고, 그에 더해 존중해 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누구에게도 이처럼 이해받은 적이 없었는데, 방금 만난 이 낯선 사람에게서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게 그로서는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명보만큼 진실하고 똑똑하고 힘을 가진 사람마저 정호가 자신의 작은 소망을 이룰 수 있게끔 이끌어주지 못한다면, 아마 이 세상 그 누구도 할 수 없을 터였다.
작은 땅의 야수들 - 2024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 p.291,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처음 은실의 집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그가 상 상할 수 있었던 미래라고는 고작 하인이 되는 것뿐이었다. 그런 다음엔, 오직 혐오감 외에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남자들과 잠자리를 하다가 더 젊은 여자들과 새로운 오락거리에 밀려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 아닌가 생각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어떤 기적이 일어난 것인지, 이제 옥희의 현실은 그가 꿈꿨던 모든 것을 능가했다.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그것은 옥희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꿔놓았다. 변화의 대부분은 내부에서 일어났지만, 종종 지진이 일 어나면 지층의 안과 밖이 모두 뒤집히듯이 옥희의 겉모습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는 거울 앞에 앉아 고작 반년 전과 비교해 자신의 눈이나 코의 형태가 희한하게 달라져 있음을 확인하며 깜짝 놀라곤 했다. 이제 옥희는 너무나 깊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꼈기에 그의 영혼 자체가 변화했고, 그의 이목구비 또한 그 변화를 반영하여 새롭게 모양을 잡아가는 것 같았다.
작은 땅의 야수들 - 2024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 p.351,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모두가 꿈을 꾸지만, 그중 몽상가는 일부에 불과하다. 몽상가가 아닌 다수의 사람들은 그냥 보이는 대로 세상을 본다. 소수의 몽상가들은 그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달, 강, 기차역, 빗소리, 따스한 죽 한 그릇처럼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도, 몽상가들은 여러 겹의 의미를 지닌 신비로운 무엇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세상은 사진이라기보단 유화여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바깥쪽에 있는 색깔만을 바라볼 때 이들은 영원히 그 아래 감춰진 색깔을 바라본다. 몽상가가 아닌 사람이 유리를 통해 보는 풍경을, 몽상가들은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는 셈이다
작은 땅의 야수들 - 2024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 p.415,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만일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저 우정의 가장 짙은 색채일 뿐이요, 너무 짙은 나머지 다른 빛깔로 보일 정도지만 사실은 충실함이라는 감정과도 같은 색상표 안에 있는 것이라면, 그러면 옥희도 정호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 터였다. 정말 깊이, 진심으로. 하지만 결국 그런 감정들이 아예 처음부터 완전히 다른 거라면, 그는 정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작은 땅의 야수들 - 2024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 p.431,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만약 이 순간 옥희의 모습을 묘사해야 한다면 한철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마치 어머니가 불러주곤 하던 정답고 그리운 옛 노래 같다고. 혹은 서랍 뒤쪽에서 아직 뜯지 않은 채로 발견된, 오래전에 사랑했던 사람이 보내준 편지 같다고. 아니면 어느 봄날 갑자기 되살아난 고목-검게 죽어 있던 가지들이 만개한 꽃들로 가득해져, 꽃잎 한 장마다 전부 나, 나, 나라고 외치며 타오르는 한 그루 나무 같다고. 하지만 그의 마음을 움직인 건 그저 지나간 시절과 추억의 잔해만이 아니었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것, 전에는 보지 못했던 그것은 대체 무얼까? 그것은 뭔가 신비롭고, 옥희의 진정한 모습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그는 옥희가 여전히 아름다우며, 심지어 자신의 정신을 흘려 빠져들게 할 만큼 매혹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작은 땅의 야수들 - 2024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 p.474,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태연자약한 풍경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은 것은 엄청난 사건, 그러니까 단 하나의 폭탄으로 한 도시 전체가 순식간에 죽은 일이 었다. 오후가 되어서야 히로시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무전으로 메시지를 받았으나, 야마다는 여전히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이 연보랏빛 꽃 들, 호수에서 나른하게 헤엄치는 거북이들, 상쾌한 이 여름 사이에최대한 많이 자라기 위해 힘을 쏟아 가지를 뻗는 나무들이 있는 세상에서•••••• 동시에 눈을 멀게 하는 무시무시한 백색광선, 검게 그을려 녹아내리는 살, 얼굴 전체가 날아간 사람들이 남은 잿더미 도시가 있을 수 있는가? 이들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단 말인가? 세상은 이제 완전히 무의미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고 마치 그게 말이 되는 것처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가장 큰 중죄였다.
작은 땅의 야수들 - 2024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 p.518,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당시의 야마다는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이 바뀌리라는 걸 짐작조차 못했지만, 그 이후 일어났던 모든 일을 조화롭게 맞물리게 하는 어떤 절대적인 필연성이 수정처럼 또렷한 의식의 물결 속에 서 그를 압도했다. 논리적으로든 비논리적으로든 발생했던 불가역적인 사건들, 그 모든 일이 그를 정확한 최종 목적지인 이곳에 안착 시켜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가장 어려웠던 '왜'라는 물음조차, 이제 새하얀 저 하늘에서 깨끗하게 녹아 사라지는 듯했다. "이제 알겠군." 그는 중얼거렸다.
작은 땅의 야수들 - 2024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 p.547,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그리고 옥희는 그가 단이를 애도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을 슬퍼하기 위해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연화는 거침없이, 결의에 차서 울었다. 다시 만들어지기 전에 먼 저 흔적도 없이 녹아버려야 하는 사람처럼 울었다.
작은 땅의 야수들 - 2024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 p.536,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내가 아직도 아주 선명하게 꺼내볼 수 있는 기억은 오직 아름다운 부분들뿐이다. 단이 이모와 월향 언니와 연화와 함께 비 오는 날 거실에서 왈츠를 추었던 일. 처음으로 조선 극장 무대에 섰던 때. 쏟아지는 달빛 아래 한철과 키스했던 순간. 그가 나를 바라보던 눈빛. 그의 손길.
작은 땅의 야수들 - 2024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 p.595,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한참이나 그걸 바라보던 나는, 정호가 아직도 나를 돌봐주고 있다 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저세상에 가서도 말이다. 그리고 나도 똑같은 방식으로 있을 거라는 것도. 삶을 계속 놓아주고 또 붙잡고 버티면서, 오직 바다에서 온 나의 일부만이 남을 때까지. 삶은 견딜 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에.
작은 땅의 야수들 - 2024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 p.603,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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