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19. <호라이즌>

D-29
내가 멈춰 선 앞에는 흰색 브래지어가 있었다. 이런 곳에서 보게 될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물건이었다. 누군가 나무 그루터기의 넓은 면을 감싸는 식으로 브래지어 끈을 당긴 다음 압정으로 고정해놓았다. 양쪽 컵에는 오렌지색 동심원이 그려져 있고 각각 대여섯 발의 총알구멍이 나 있었다. 나는 브래지어를 풀어내 잡초가 무성한 덤불 속 깊이 밀어 넣고는 다시 트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지. 나는 돌아와 다시 브래지어를 집어들고 운전석 아래에 밀어 넣었다. 뉴포트에 가면 쓰레기통에 넣을 생각이었다. 궁금했다. 그런 물건에, 인간 정신의 악의적 성향을 보여주는 소리 없는 증거에 신경이 쏠리는 것은 좋은 일인가? 그 증거를 감추는 건 소용없는 일, 어쩌면 혹시 심지어 잘못된 일일까? 여성 혐오에도 그냥 있을 자리를 허용해주어야 하는 것인가?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을 보지 못하게 막으면 모방자가 더 줄어들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구제불능일 정도로 순진한 생각일까? 나는 칼리만탄이나 사라왁✻의 시골 벌목지에서도 이런 퇴보의 신호를 볼 수 있을지도 궁금했다.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호라이즌 배리 로페즈 지음, 정지인 옮김
작가의 이런 생각에 지지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네요. 악의 평범성의 반대로 선의 평범성의 느낌이랄까요.
오늘날 군사 용어로 쓰이는 부수적 피해라는 말은 의도치 않게 죄 없는 사람들에게 가해진 해를 가리킬 때 흔히 사용된다. 16, 17, 18세기의 ‘탐험’과 그 후 이어진 공격적인 경제적 착취, 이후 유럽의 식민지들에서 정치적 영향력과 통제를 두고 벌어진 세계적인 다툼의 결과로도 죄 없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오늘날 권력을 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런 피해들을 다시 살펴보고 싶어하지 않으며, 평범한 사람들 역시 대체로 독재국가와 경찰국가뿐 아니라 유사 민주국가에서도 여전히 그러한 책략을 옹호하는 현대의 폭군들에 맞설 용기가 없다.
호라이즌 배리 로페즈 지음, 정지인 옮김
이 작가의 문장들이 길긴한데 그래서 더 여려번 천천히 읽게되고 그러면서 문장의 아름다움과 그 내용에 들어있는 깊은 염려와 sorrow와 분노를 체험하는 장점이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식으로 여행을 한다는 게 무척 어려운 일인 것도 같아요. 눈 크게 뜨고 보는 역사와 자연 속의 폭력과 괴로움과 미래의 암담함 그리고 그 와중에도 붙잡아야하는 책임감과 행동의 중요성을 잘 전달하는 책이네요. 그래서 읽으면서 마음이 점점 무거워집니다
폭풍은 모든 생명에 무관심하지만 그래도 폭풍의 본성은 강렬함이기 때문이다. 폭풍의 힘은 어떤 기계로도 제어할 수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폭풍의 변화는 나침반 방위에 맞춰 등압선으로 표시할 수 있지만, 가장 정확한 숫자들로도 폭풍을 붙잡아두거나 속박할 수는 없다. 폭풍은 완전히 자유롭다. 오직 자기 생각만 따르는 자유로움.
호라이즌 파울웨더곶, 배리 로페즈 지음, 정지인 옮김
내 경험상 이렇게 해변에 있을 때든 바다 한가운데 있을 때든, 바닷물을 꼼꼼히 살펴 보는-이따금 보이는 새나 수면 위로 올라오는 고래를 관찰하고, 수면에서 노니는 빛의 움직임을 바라보는-시간은 다른 어디서도 쉽게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종류의 시간, 광활하고 균질적인 공간의 부피를 가득 채우는 시간을 인식하게 한다. 그런 날에는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이런 집중적 관찰이 오히려 일상적 경험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호라이즌 파울웨더곶, 배리 로페즈 지음, 정지인 옮김
저도 이 문장이 좋았어요
저도 하이라이트한 문장이에요.
나는 서구 예술의 역사를 공간의 양감과 시간의 연장, 빛과 소리의 진동을 이용해 행한 다양한 실험의 역사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의 근본적 강점은 예술이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의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술은 은유를 제시할 뿐 해석은 보는 이나 듣는 이의 몫으로 남겨둔다. 관람객이나 청자에게 가장 깊은 만족감을 주는 일은 예술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 그 의미를 캐내려 시도하지 않는 것이다.
호라이즌 파울웨더곶, 배리 로페즈 지음, 정지인 옮김
우리를 가로막는 것은 단지 상상력의 실패일 뿐이라고.
호라이즌 파울웨더곶, 배리 로페즈 지음, 정지인 옮김
어떤 언어들은 매우 장소 특정적이어서 그 언어들이 생겨난 풍경과 떼어놓으면 의미가 통하도록 말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해리슨은 언어란 단순히 단어와 문법만이 아니라, 다른 언어에서는 인식되지 않은 생태 환경과 잠재력을 드러내는 것임을 강조한다.
호라이즌 256/1680, 배리 로페즈 지음, 정지인 옮김
요컨대 한 문화의 영적, 물리적, 심리적 안녕에 가해지는 위협의 심각성을 평가하는 방식이 사회마다 서로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무엇이 되었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써서, 한 종족을 마비시키는 절망감이 엄습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일이다.
호라이즌 257/1680, 배리 로페즈 지음, 정지인 옮김
목재업계는 나무를 모조리 베어낸 땅은 자신들이 다 복원한다고, 즉 새로 나무를 심는다고 곧잘 말한다. 하지만 복원은 적합한 단어가 아니다. 대개의 경우 빈 땅에 새로 심는 나무는 오직 미송 한 종뿐이므로 그 땅은 이제 경작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호라이즌 261/1680, 배리 로페즈 지음, 정지인 옮김
그렇군요. 몰랐습니다. 아, 정말 어렵네요.
@Nana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책이 제가 <책걸상>에서 소개했던 차태서 선생님 책입니다!
30년의 위기 - 탈단극 시대 미국과 세계질서국제정치학의 고전이 된 『20년의 위기』를 준거로, 양차 대전 사이 20년과 구냉전과 신냉전 사이 30년을 비교ㆍ분석하면서 우리 시대의 고유한 국제정치적ㆍ역사적 국면 변화에 집중한 책이다.
흐흐흐 안 읽고 넘어간 책인데 어찌 아시고 추천을 딱! 하십니까…
위에 줄줄이 <불안의 서>와 <월든>이 등장하네요. <불안의 서>는 시도하지도 않았고, <월든> 은 유명세에 솔깃해져서 읽다가 하차한 1인 입니다. 소로우 씨 미안합니다, 저는 도시를 사랑합니다. <월든>을 찬미하는 사람들은 도시 버리고 메사추세츠 월든 호수에 짱박혀 살 자신 있단 말인가, 하며 앞 부분 조금 읽다가 포기했습니다. <호라이즌>은 <월든>하고 다른다고 주장하고 싶네요 ㅎㅎ 결정적인 차이는, 한 곳에서 붙박이로 지내냐 아니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냐가 아닐까요?
소로우는 남의 사유지에서 지속가능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리 오래 살지 않고 <월든>을 썼는데, 저는 <호라이즌>을 읽으면서도 해외여행 잘 안 하고 장거리 비행은 몇 번 해본 적 없는, 자동차는 아예 사 본 적도 없는 제 삶이 배리 로페즈의 그것보다 더 환경친화적인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네요.
전 '월든'은 완독했지만, 작가님 생각에 동의하지 못했고 온전히 숲에서만 살았던 게 아니라는 뒷이야기 듣고 분개했어요. 저도 @소피아 님처럼 도시찬미자입니다. 자연경관은 사흘까지가 한계예요. 그 이상 자연과 계속 함께 하면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높은 건물들과 정비 잘 된 도로, 맛있는 것 파는 식당가와 마트가 그리워져요. 그래서 귀촌에 대한 동경은 있지만, 자연은 냄새만 생각해도 가고 싶지 않아요.(제가 어렸을 때 방학때마다 몇 년간 삼촌이 사시는 시골에 맡겨진 적이 있어서 그 흙냄새로 시골을 기억하고 있는데 제 취향이.....)
소피아님 글 가만히 읽다가 진성으로 웃음 터졌네요. "소로우 씨 미안합니다" 이 대목에서요. 저도 도시에서만 살아봐서 산 속(시골? 자연? 등등)에 사는 것에 대한 일종의 낭만이 있었는데요. 몇 년 전에 템플스테이 한 번 다녀왔다가 기겁했어요. 공기도 좋고, 자연도 좋은데, 벌레가 사방에... 자고 일어나면 제 주변으로 벌레들 사체가 한가득. 그걸 쓰레받기로 쓸어 담으면서 '이게 자연이군' 싶었답니다. 거기다 새벽에는 동물들인지 기괴하게 우는 소리에 악몽을 꿨더랬죠. 스님과의 차담시간까지가 딱 행복했어요. 아 배차간격도 있군요. 강화도에 놀러 갔다가 막차시간 보고 기겁했던 기억도 나고. 저벅저벅 시골길을 걸어가면서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더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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