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소설] 2월 『폴란드인』 함께 읽어요

D-29
사실, 처음 읽을 때, 2장까지만 해도 좀 뭐랄까, 왜 이렇게 껄떡대지…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요, 머뭇거리고 엇나가는 생각들, 그보다 더 닿지 않는 의미들을 곱씹다보니 정말 희미한 선율이 저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알듯말듯한 멜로디들.
책 자체가 연극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이 문장 쫌 맘에 들었습니다.
그녀는 그가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예기치 않게 깊은 목소리다. 검은 흐름, 액체 같은.
폴란드인 53,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그러나 그는 질투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는 즐거워한다. 다른 남자가 오직 그에게만 속한 것. 그가 너무 쉽게 소유하는 것을 원하니 즐거운 거다.
폴란드인 6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비톨트는 몇 차례에 걸쳐 베아트리스에게 고백을 하고 여행을 제안합니다. 저는 베아트리스가 비톨트의 고백과 제안을 거부하는 이유가 조금(?) 흥미롭웠습니다. 남편에 대한 사랑이나 도덕적 측면이 아니라 자신에게는 외도를 할 만큼 열정이 없다는 그녀의 말이 눈에 들어오는데요, 그녀는 남편의 외도에도 별 감흥이 없습니다. 그저 남편의 애인들과 엮이지 않도록 조심할 뿐이죠.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올 갱년기, 더는 어려워질 임신 등 육체적인 측면에서의 여성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는 세상만사가 따분하고 한편으로는 회의적인 감정으로 대하는 듯 느껴집니다. 재미있는 점은 베아트리스는 비톨트를 따라 브라질에 갈 생각이 전혀 없으면서도(심지어 혐오감을 느끼면서) 그와 함께 브라질에 가면 일주일 동안 무엇을 하며 지내게 될지 상상합니다. 그리고 도대체 무슨 의도로 비톨트가 자신에게 얼토당토 않은 고백을 한 건지 계속 궁금해 하는데요, 이 부분에서 생각이 상당히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폴란드인과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니라고, 단지 그를 안쓰럽게 여길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인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예측하지 못했던 '비톨트'라는 사건이 어떤 관점에서든 그녀에게 자극이 된 건 분명해 보입니다.
"다시 만날 거야?" 그녀의 남편이 말한다. "아니." 그녀가 말한다. 그리고는 덧붙인다. "이건 섹스의 문제가 아니야." "당연히 섹스의 문제지. 그렇지 않다면 그가 당신을 브라질에 초대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옆에 피아노 악보를 넘기라고?"
폴란드인 p6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섹스에 대한 남녀의 차이를 볼 수도 있지만 정말 오래된 부부 사이의 대화란 생각도 드네요. 어찌보면 남 얘기하듯 하기도 하고. 아님 남사친 여사친이 오랜만에 만나 최근 알게된 이성에 대해 상담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의 우상인 쇼팽은 자신을 돌보는 여자에게 의존했던 병약한 남자였다. 어쩌면 바로 그것이 폴란드인이 진짜로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쇠잔해가는 말년에 그를 돌봐줄 간호사 말이다.
폴란드인 76,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갑자기 쇼팽 평전을 읽고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보면 사람이 이성을 보는 시각이 변화해 가고 있다는 게 느껴지기도 하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자신이 힘이 있다고 생각하면 지켜주고 싶은 사람을 찾겠지만 자신이 힘이 없다고 생각하면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건 인지상정 같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시작은 비톨트가 다짜고짜로 베아트리스를 사랑한다고 하는 건데 이런 경험 있지 않나요? 전 갓 스무살 때 길가다 어떤 사람한테 붙들려서 차까지 얻어 마시고 헤어졌는데 그땐 서로를 잘 모르는데 어떻게 사귀나 싶어 막 화를 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걸 꼭 나쁘게 생각할 건 아닌데 너무 심했나? 뭐 그런 생각도 하게 되더라구요. 근데 그때는 정말 무서웠습니다. 😢
그녀는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호기심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가 틀렸다. 그녀는 호기심이 많다. 아주 많다. 그러나 더 넓은 세계에 대해서도 아니고, 섹스에 대해서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떤 것에 호기심이 많을까? 자신에 관해서다.
폴란드인 51쪽,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만약 그녀가 반응을 보이면, 그것이 그녀에 대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더 중요하게는, 그녀가 반응을 보이기를 남자가 기대한다는 것이 그녀에 관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녀는 그에게 평화를 준다. 그녀는 그에게 기쁨을 준다. 아리아치고는 별로다. 또한 운명이 그에게 드러났는데, 알고 보니 그녀가 그 운명이란다. 하지만 그녀는 어떠한가? 그녀에게도 운명이 있지 않을까? 그 운명은 어떤 것일까? 언제 그것이 드러날까? 나는 당신의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답이 아니에요. 당신의 수수께끼도 다른 사람의 수수께끼도 아니라고요! ... 나는 그냥 나예요! 나는 당신을 위한 운명이 아니예요. 다른 누구를 위한 '운명'도 아니고요. 그 말이 무슨 의미든, 우리 중 누구도 어떤 '운명'이 아니예요.
폴란드인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베아트리스가 비톨트를 처음에 별로라고 생각하다가 스며드는 모습이 전형적이면서도... “스파크”로 비유되는 성적 텐션이 없는 것 같아서 새롭기도 하네요.
그녀 때문에 헤로나에 클래스를 연 남자. "두 폴란드인, 즉 오래전에 젊어서 죽은 폴라드인과 아직 살아 있는 늙은 폴라드인" 때문에 혼란스러운 여자. "폴란드인이 말한다. 당신은 내게 평화를 줘요. 당신은 내게 평화의 상징이에요." p57
화제로 지정된 대화
3장 (83~139쪽)
시간이 뭔가요?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에게는 기억이 있어요. 기억에는 시간이 없어요. 나는 당신을 기억 속에 넣어둘 거에요. 그리고 당신도, 어쩌면 당신도 나를 기억할지 모르죠
폴란드인 p.102,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오! 밑줄 그은 문장이 저랑 똑같아요.
기억에 시간이 없다는 말 좋아요
나는 액체예요. 당신이 나를 잡으려고 하면, 나는 당신 손에서 물처럼 빠져나갈 거예요.
폴란드인 112,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112페이지에서 고체(solid), 기체(공기), 액체로 각자의 성향과 음악을 비유해 대화하는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1부에서 비톨트의 쇼팽 연주가 무거워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베아트리스는 생각했는데 오히려 비톨트는 베아트리스를 심오한 질문을 하는 사람으로 여겨 진중함(시어리어스)에 반하게 된다는 모순이 인생사 같네요. 스스로를 액체로 여기는 베아트리스는 어떤 종류의 액체일까 연상해 보았는데 그녀는 빛나는, 액체 중 비중이 큰 ’수은‘이 아닐까 싶어요. 그에 비해 비톨트의 음색을 묘사할 때 검은 액체 같다 하여 ’석유‘를 떠올렸는데요, 그 둘이 섞이면 어찌되려나 상상해 보았습니다. 섞이지 않을거 같지만 확실하진 않아요. 쇼팽과 드뷔시의 액체 음악도 듣고 싶어졌고요, 책 사이 등장하는 음악 연주를 찾아 듣는 즐거움도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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