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책 챌린지] 2. 재난, 그 이후

D-29
592~603쪽, 정의가 실현된 것일까요? 포 박사와 틸 박사를 심정적으로 지지하기는 했지만, 몹시 찜찜합니다. 앞부분에서는 제가 포나 틸 박사의 처지라면 어땠을까를 물으며 읽었지만 뒤로 갈수록 제가 법의학자나 배심원이었다면 어땠을까를 묻게 됩니다.
603~604쪽, [왜 우리는 삶의 모든 이정표를 축하하면서도, 유독 이것 하나만큼은 제외하는 걸까? 그린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삶의 시작을 보기 위해서는 모두가 참석하고 싶어 하지만, 출생과 사망의 비율은 정확히 1대 1이었다. 우리 모두는 작별을 고하는 법을 배워야만 하고, 사랑하는 가족이 떠나가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그들에게 존엄을 부여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그녀는 이렇게 물어볼 것이었다. “만약 당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먼 여행을 떠나는 배에 몸을 싣는다면, 당신은 선착장에 나가서 작별 인사를 하지 않을 겁니까?”]
평소 같으면 저 문장들에 고개를 끄덕였을 텐데, 캐시 그린이라는 인물에 대한 묘사와 그의 주장을 읽고 나서 저 대목을 마주치니 몹시 섬뜩한 기분이 듭니다. 그런 배치 역시 노련한 솜씨일 듯합니다.
259쪽, [2층 로비의 냄새는 수전 멀더릭이 수요일에 이 지역을 지나다녔을 때보다 더 지독했다. 창문을 깼는데도 불구하고, 화장실 근처의 공기는 여전히 그 자리에 딱 고정되어 있었다. 오물 냄새가 진동했다.] 읽는 내내 얼마나 고역스러운 냄새가 병원을 휘감고 있을지 상상하게 되네요. 작가도 이 냄새에 대한 내용을 1부에서 지속적으로 언급(인터뷰이에게 들은 내용들을 포함해서)하는 것을 보면 병원에 있던 사람들은 참기 힘든 냄새로 정말 괴로웠을 것 같습니다.
260쪽, [멀더릭은 상대방을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도대체 어떻게 의사라는 사람이 자기 주위에 널려 있는 환자들보다 고양이 한 마리를 더 걱정할 수 있단 말인가? (...) 심지어 가장 상태가 위중한 환자가 누운 곳에서 모퉁이 하나 돌아선 곳에서 직원들이 자기네 애완동물을 애지중지 돌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멀더릭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멀더릭 마음이 제 마음과 같습니다.
제 마음도 찌찌뽕입니다.
355쪽, [응급실 경사로에 있다가, 병원으로 찾아온 사람들이 퇴짜를 맞는 모습을 목격하고, 결국 그 일로 인해 CEO와 말다툼까지 벌이고 나자,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이런, 젠장, 이놈들은 모두 총을 갖고 있잖아. 이놈들은 나를 이 물속에 던져 넣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어. "자네는 더 이상 이 안에 들어올 수 없어." (...) 분명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를 쏘지는 않겠지만, 그들이 자기를 제거할 수도 있다고 킹은 확신했다.] 사고 방식이 충격적이네요. 총기소지가 자유로운 미국에서 자라온 사람의(그것도 엘리트라고 볼 수 있는 의사) 생각이 이렇구나 하는 대목입니다. 물론 킹이 자라온 환경과 초유의 재난의 영향이 있겠지만서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요. 생각해보니 할리우드의 많은 재난영화들을 보면, 주인공의 세계와 일상을 망가뜨리는 이벤트가 벌어진 이후에 주인공은 자신의 가족 이외 타인을 모두 적으로 돌려 놓더라고요. 환한 인사를 건네던 이웃을 여차하면 나에게 총부리를 들이밀 수 있는 적으로 간주하죠. 신기합니다.
604~605쪽, [미냐드가 생각하기에, 대배심의 결정은 포티 주 검찰총장이 그 여자들을 다룬 방식이 가혹했기 때문에, 그리고 언론의 설득하는 위력 때문에 나온 것에 불과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면 검찰총장의 조급함이 정의의 실현을 방해한 셈입니다. 포 박사 등이 여론전을 벌인 것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자신들 입장에서는 생존의 문제이고, 병원 밖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그들의 책임은 아니니까. 포티 검찰총장을 두 번 죽이는 말이겠군요.
이쯤에서 한국 검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네요. 한국 검찰도 조급함에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조직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거대한 사정 정국이 오는 것 같지요.
606쪽, [보통 수줍어하는 성격은 아닌 생명윤리학자들조차, 이 사건에 관해서만큼은 각자의 견해를 드러내기를 꺼렸다. 이미 미국에서는 조력 자살과 안락사의 관습이 암암리에 존재하는 듯했기 때문에, 굳이 이제 와서 어느 누구도 그 사건을 정면으로 부각시키고 싶어 하지 않은 듯했다. 또 상당수의 윤리학자들은 메모리얼의 상황이 워낙 끔찍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일어난 일에 관해서는 도덕적 판단이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캐플런은 전혀 다르게 느꼈다. “왜 거기서는 안 된단 말인가?” 그는 이렇게 묻곤 했다. 하지만 본인도 이 질문에 대해서는 결코 만족스러운 답변을 얻지 못했다.]
왜 생명윤리학자들이 메모리얼 병원의 상황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렸느냐. 사고실험과 실제 상황의 무게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윤리학자들은 첨예한 윤리적 쟁점을 다루는 것이 어렵다고 여기지만, 정말 무거운 것은 윤리가 아니라 현실입니다.
《어 퓨 굿 맨》에서 잭 니콜슨의 대사를 좀 뒤틀어 말하자면, 윤리학자들이여, You can’t handle the reality.
현실에는 어떤 식으로 논의를 펼쳐도 깊이 상처 받을 수밖에 없는 살아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복잡한 사정이 있습니다. 그 고통과 사연에 대해 논리는 별 답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공동체를 이끄는 자리에는 연륜이 꼭 필요하다고 여겨요.
다른 이야긴데요 《어 퓨 굿 맨》 정말 재밌게 봤었습니다. 작가가 참 시나리오를 잘 썼다고 해야하나요. 배우들이 말하는 대사 하나하나 집중하면서 재판과정을 지켜봤네요. (작중 이름은 다 까먹었습니다만) 특히 톰 크루즈가 잭 니콜슨을 감정적으로 자극시켜서 코드 레드를 명령했다고 대답을 이끌어내는 씬은 참 인상적이었어요. 말씀하신 잭의 명대사도 기가막히쥬. You can't handle the truth! 괜히 아는 영화 나와서 떠들어 봤습니다.
《어 퓨 굿 맨》 재미있었지요. 이게 애런 소킨 각본이지요? 《소셜 네트워크》와 《머니볼》도 좋아합니다. 《스티브 잡스》도 재미있게 봤고... 저는 《머니볼》에서 빌리 빈이 보스턴 레드삭스 단장직 제안 거절하는 장면을 유튜브에서 종종 찾아봐요. 이 장면이 무척 감동적인데 왜 감동적인지 잘 설명을 못하겠어요.
이 영화가 언급되는 순간 절묘하게 유튜브 알고리즘이 "어 퓨 굿 맨"을 추천해주네요. 우연이겠지만 살짝 무섭습니다.
아내가 바이어 접대하느라 자기 휴대폰으로 열심히 중국 영화를 검색한 다음날 제 유튜브 피드에 난데없이 중국 영화 추천이 뜨더라고요. 우연일까요, 저희가 수다 많이 떠는 부부인 걸 구글이 아는 걸까요. 무서웠습니다.
왜 거기서는 안된다는 건지에 덧붙여 왜 포만 그런 판단을 한 건지도 궁금하네요. 2부 읽으면서 혼란스럽고 당황스럽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정말 무거운 것은 윤리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점 정말 동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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