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그라운드》 혼자 읽기

D-29
이러한 원고작업은 인터뷰 당시의 개인적인 ‘인상’이나 ‘기억’이 크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이야기를 세세하게 녹음한다 해도, 또는 몇 번이나 테이프를 반복해서 듣는다 해도 현장 분위기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면 대화의 핵심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그러면 증언 자체의 힘이 사라져버린다. 그 때문에 듣는 동안은 되도록이면 상대방에게 의식을 집중하며 이야기 하나하나를 그대로 흡수하려는 자세를 견지하려고 노력했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딱 한 번 녹음을 거절당한 경우가 있다. 사전에 전화로 ‘녹음하겠습니다’라고 먼저 양해를 구해두었으나 막상 녹음을 하려 하자 상대는 ‘아니, 그런 말은 한 적 없어요’ 하고 거절했다. 어쩔 수 없이 숫자나 지명 등을 메모하면서 두 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들은 다음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책상에 앉아 원고를 작성했다. 간단한 메모와 기억만으로 그때의 대화를 재현한 셈인데, ‘사람의 기억이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 순간이었다. 물론 매일 취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사로운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애써 그렇게 작성한 원고도 당사자가 게재를 거부하는 바람에, 결국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사건 발생 후 시간이 경과하면서 거의 대부분의 주요 멤버들이 체포되자 옴진리교에 대한 공포심도 많이 희석되기는 했지만, ‘나는 남에게 이야기할 정도로 증상이 심하지 않다’라는 이유로 거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취재를 거부하기 위한 하나의 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인할 길이 없다.) 또는 당사자는 자진해서 말을 하려 했지만, 가족들이 ‘더는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고 제지하는 바람에 인터뷰를 하지 못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 직업별로 보면, 공무원이나 금융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증언은 거의 들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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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생각해보니 ‘증언자 일반 공모’를 피한 것은 또다른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비교적 간단한 수단을 배제함으로써 필자와 조사원과 편집자의 결속이 강해졌고 어떤 성취감을 맛볼 수 있었다. ‘우리의 힘으로 해냈다’라는 뿌듯한 감동이 있었다. 긴밀한 팀워크가 이 책을 구성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덧붙여 한 사람 한 사람의 증언자를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도 한층 강해졌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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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한 내용이 원고로 정리되면 증언자에게 보내 일일이 체크했다. 원고를 보낼 때 “우리의 입장은 되도록이면 실명으로 발표하는 것입니다. 만일 실명이 싫으시다면 가명을 사용하겠습니다. 어느 쪽이든 선택해주십시오”라는 편지를 동봉했다. 그 결과 약 40퍼센트 정도의 증언자가 가명을 희망했다. 본문에서는 쓸데없는 억측을 피하기 위해 어느 것이 가명이고 어느 것이 실명인지 일일이 밝히지 않았다. ‘가명’이라는 말이 불필요한 호기심을 자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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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원고화된 인터뷰를 체크할 때 ‘활자화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변경하거나 삭제하면 좋을지 구체적으로 알려달라는 내용도 덧붙였다. 대부분의 증언자가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변경 또는 삭제를 희망했다. 필자는 증언자의 지시대로 지정된 부분을 변경하거나 삭제했다. 수정한 부분에는 증언자의 인격이나 생활상이 리얼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아서 필자의 입장에서는 무척 아쉬웠지만 이야기의 흐름이 달라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지시대로 따랐다.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경우에는 이쪽에서 대안을 제시하여 허락을 받았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우리는 기꺼이 인터뷰에 응해준 분들에게 곤란을 끼치고 싶지 않았기에, 언짢은 생각이 들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배려를 하고 싶었다. 매스컴에 대한 일반적인 불신감을 불식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말이 아니었는데’라거나 ‘믿고 협력해주었더니 배신당했다’ 하는 기분을 갖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때문에 증언자에 의한 정정과 삭제 작업은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면밀하게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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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이 책에 수록된 사람들의 증언은 완전히 자발적이며 적극적인 것이다. 문장 표현상의 기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유도도 없고 도발도 없다. 나의 문장력은(만일 그런 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말이지만) ‘증언자들의 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그와 동시에 얼마나 읽기 쉽게 쓰는가’라는 단 한 가지에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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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증언자의 개인적인 배경 취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은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명확히 부각시키고 싶어서였다. 거기에 존재하는 한 인간을 ‘얼굴 없는 많은 피해자 중의 한 사람’에 그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업적인 작가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종합적이고 개념적인’ 정보에 대해서는 딱히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체적인─교환 불가능한─존재양태에 대해서만 흥미를 느낀다. 그 때문에 나는 증언자를 앞에 두고 한정된 두 시간 동안 집중하여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깊고 구체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했고, 그것을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문장을 만들려고 했다. 증언자의 사정으로 활자화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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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자세로 취재에 임한 이유는, ‘가해자=옴 관계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프로필이 매스컴에 의해 세부까지 밝혀져 사생활 폭로에 가까운 정보나 가십으로 세간에 전파되고 있는 데 반해, 다른 한쪽의 ‘피해자=일반시민’의 프로필은 억지로 만들어낸 듯이 너무도 어색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단지 주어진 역할(통행인 A)이 등장할 뿐, 귀를 솔깃하게 하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제공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몇 안 되는 그런 이야기도 패턴화된 문맥으로 표현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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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것은 일반 매스컴의 문맥이 피해자들을 ‘상처받은 순진한 일반시민’이라는 이미지로 고정시켜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실적인 표정이 없는 피해자가 문맥의 전개상 편하기 때문이다. ‘(얼굴 없는) 건전한 시민’ 대 ‘얼굴 있는 악당들’이라는 고전적인 대비를 활용하면 그림을 그리기 쉬워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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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에 의한 피해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실제적인 피해는 거의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불행히도 목숨을 빼앗긴 사람도 있으며, 아직도 재활을 위해 요양중인 중증 환자도 있다. 그때는 별 대수롭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증상으로 고생했다는 (아직도 고생하는) 사람도 많았다. 일반적인 보도의 관점에서 보면 중증 환자의 기사를 많이 늘어놓는 것이 사회적인 가치가 크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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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당신은 여느 때처럼 아침에 눈을 뜨고 세수를 한 다음, 아침을 먹고 옷을 입고 역으로 간다. 그리고 늘 그렇듯 붐비는 전차를 타고 회사로 향한다. 여느 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딱히 다른 날과 구분할 필요도 없는 당신의 인생 속 하루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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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말해서 사린을 뿌린 사람에 대해 별다른 감정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건과 연관시키기 어렵다고 할까요, 어쨌든 느낌이 없어요. 그보다는 세상을 떠난 분들이나 그 짐을 떠맡은 가족들의 모습을 보는 고통이 범인에 대한 분노와 미움보다 더 크기 때문이지요. 옴진리교의 누가 사린을 가지고 전차를 탔는가. 그런 것은 제게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 옴에 의해 사린사건이 일어났다는 인과관계가 제 머릿속에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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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는 닷새 동안 있었습니다. 빨리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콜린에스테라아제 수치가 정상으로 회복되지 않아서 퇴원할 수 없었습니다. 의사는 마음을 느긋하게 먹으라고 하더군요. 그래도 빨리 나오고 말았습니다. 토요일에 결혼식이 있어서 참석해야 한다고 억지를 부렸지요. 시야에서 어둠이 걷히는 데 이 주일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시력은 여전히 떨어진 상태입니다. 밤에 운전을 하면 신호 표시가 흐릿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안경을 다시 맞췄습니다. 도수를 높였어요. 얼마 전에 피해자의 모임에 참가했더니 변호사가 시력이 나빠진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더군요. 상당수가 손을 듭디다. 이것 역시 사린 때문인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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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개개인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정이 없습니다. 그 사람들도 조직 속에서 꼭두각시 노릇을 한 것뿐이니까요. 텔레비전에서 아사하라를 보아도 밉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중증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이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저 같은 경상자는 괜찮지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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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 여동생이 그 사건으로 쓰러진 다음 연로한 부모님을 대신해 하루걸러 병원으로 가서 시즈코 씨의 간병을 하고 있다. 실제로 병원에 가서 간병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에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환자의 주변 정리를 해주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여동생을 사회에 복귀시켜야 한다. 절대로 이대로 내버려둘 순 없다’는 오빠의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그것은 깊은 애정이자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며, 어처구니없는 폭력과 범죄에 대한 말없는 항변이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의 분노가 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평온하고 온순한 얼굴에다 상냥한 미소를 띠고 말투도 부드럽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강한 결의가 불타오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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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자신이 배운 봉제 일을 계속하고 싶어했지만 일자리가 없어 이번에는 슈퍼마켓에 취직했습니다. 동생은 좀 맥이 빠진 모습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부모님 곁을 떠나면서까지 일자리를 찾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집 근처에서 직장을 찾았죠. 십 년이 넘게 거기서 일을 했습니다. 시즈코는 버스로 통근했습니다. 십 년이나 계산대를 맡았으니 베테랑이라 할 수 있죠. 사건 이후 이 년이나 입원하고 있지만 아직도 그 회사에 적을 두고 있습니다. 사건 후에 그 슈퍼마켓으로부터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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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그렇게 굳이 역까지 바래다주지 않아도 ○○선을 타고 사이쿄 선으로 갈아탄 다음에 이케부쿠로에서 마루노우치 선을 타면 된다면서 사양했지만, 저는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가스미가세키까지 가서 마루노우치 선으로 갈아타는 게 좋다고 권했습니다. 그때 제가 그렇게 권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이 사건에 휘말려들지 않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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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생이 전차를 탄 시각이 7시 20분이라 치고, 가스미가세키에서 내린 게 8시 조금 전, 마루노우치 선을 타려고 환승하기 위해 걷는 시간을 고려하면 사린이 살포된 전차와 딱 마주치게 됩니다. 한 해에 한 번밖에 없는 강습회에 가려고 탔던 전차인데, 공교롭게도 동생이 탄 차량에 사린 봉지가 놓여 있었던 겁니다. 정말 운이 나빴어요. 그러나 운이 나빴다는 걸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동생은 나카노사카우에 역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소방대원이 살려내려고 노력했지만 그 사람도 사린가스를 마셔서 결국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아니요, 그분은 만난 적이 없습니다. 이름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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