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그라운드》 혼자 읽기

D-29
우리는 기꺼이 인터뷰에 응해준 분들에게 곤란을 끼치고 싶지 않았기에, 언짢은 생각이 들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배려를 하고 싶었다. 매스컴에 대한 일반적인 불신감을 불식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말이 아니었는데’라거나 ‘믿고 협력해주었더니 배신당했다’ 하는 기분을 갖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때문에 증언자에 의한 정정과 삭제 작업은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면밀하게 행해졌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다시 말해 이 책에 수록된 사람들의 증언은 완전히 자발적이며 적극적인 것이다. 문장 표현상의 기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유도도 없고 도발도 없다. 나의 문장력은(만일 그런 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말이지만) ‘증언자들의 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그와 동시에 얼마나 읽기 쉽게 쓰는가’라는 단 한 가지에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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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증언자의 개인적인 배경 취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은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명확히 부각시키고 싶어서였다. 거기에 존재하는 한 인간을 ‘얼굴 없는 많은 피해자 중의 한 사람’에 그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업적인 작가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종합적이고 개념적인’ 정보에 대해서는 딱히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체적인─교환 불가능한─존재양태에 대해서만 흥미를 느낀다. 그 때문에 나는 증언자를 앞에 두고 한정된 두 시간 동안 집중하여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깊고 구체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했고, 그것을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문장을 만들려고 했다. 증언자의 사정으로 활자화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긴 했지만.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그런 자세로 취재에 임한 이유는, ‘가해자=옴 관계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프로필이 매스컴에 의해 세부까지 밝혀져 사생활 폭로에 가까운 정보나 가십으로 세간에 전파되고 있는 데 반해, 다른 한쪽의 ‘피해자=일반시민’의 프로필은 억지로 만들어낸 듯이 너무도 어색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단지 주어진 역할(통행인 A)이 등장할 뿐, 귀를 솔깃하게 하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제공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몇 안 되는 그런 이야기도 패턴화된 문맥으로 표현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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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것은 일반 매스컴의 문맥이 피해자들을 ‘상처받은 순진한 일반시민’이라는 이미지로 고정시켜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실적인 표정이 없는 피해자가 문맥의 전개상 편하기 때문이다. ‘(얼굴 없는) 건전한 시민’ 대 ‘얼굴 있는 악당들’이라는 고전적인 대비를 활용하면 그림을 그리기 쉬워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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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에 의한 피해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실제적인 피해는 거의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불행히도 목숨을 빼앗긴 사람도 있으며, 아직도 재활을 위해 요양중인 중증 환자도 있다. 그때는 별 대수롭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증상으로 고생했다는 (아직도 고생하는) 사람도 많았다. 일반적인 보도의 관점에서 보면 중증 환자의 기사를 많이 늘어놓는 것이 사회적인 가치가 크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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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당신은 여느 때처럼 아침에 눈을 뜨고 세수를 한 다음, 아침을 먹고 옷을 입고 역으로 간다. 그리고 늘 그렇듯 붐비는 전차를 타고 회사로 향한다. 여느 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딱히 다른 날과 구분할 필요도 없는 당신의 인생 속 하루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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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말해서 사린을 뿌린 사람에 대해 별다른 감정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건과 연관시키기 어렵다고 할까요, 어쨌든 느낌이 없어요. 그보다는 세상을 떠난 분들이나 그 짐을 떠맡은 가족들의 모습을 보는 고통이 범인에 대한 분노와 미움보다 더 크기 때문이지요. 옴진리교의 누가 사린을 가지고 전차를 탔는가. 그런 것은 제게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 옴에 의해 사린사건이 일어났다는 인과관계가 제 머릿속에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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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는 닷새 동안 있었습니다. 빨리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콜린에스테라아제 수치가 정상으로 회복되지 않아서 퇴원할 수 없었습니다. 의사는 마음을 느긋하게 먹으라고 하더군요. 그래도 빨리 나오고 말았습니다. 토요일에 결혼식이 있어서 참석해야 한다고 억지를 부렸지요. 시야에서 어둠이 걷히는 데 이 주일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시력은 여전히 떨어진 상태입니다. 밤에 운전을 하면 신호 표시가 흐릿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안경을 다시 맞췄습니다. 도수를 높였어요. 얼마 전에 피해자의 모임에 참가했더니 변호사가 시력이 나빠진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더군요. 상당수가 손을 듭디다. 이것 역시 사린 때문인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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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개개인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정이 없습니다. 그 사람들도 조직 속에서 꼭두각시 노릇을 한 것뿐이니까요. 텔레비전에서 아사하라를 보아도 밉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중증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이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저 같은 경상자는 괜찮지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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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 여동생이 그 사건으로 쓰러진 다음 연로한 부모님을 대신해 하루걸러 병원으로 가서 시즈코 씨의 간병을 하고 있다. 실제로 병원에 가서 간병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에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환자의 주변 정리를 해주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여동생을 사회에 복귀시켜야 한다. 절대로 이대로 내버려둘 순 없다’는 오빠의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그것은 깊은 애정이자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며, 어처구니없는 폭력과 범죄에 대한 말없는 항변이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의 분노가 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평온하고 온순한 얼굴에다 상냥한 미소를 띠고 말투도 부드럽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강한 결의가 불타오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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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자신이 배운 봉제 일을 계속하고 싶어했지만 일자리가 없어 이번에는 슈퍼마켓에 취직했습니다. 동생은 좀 맥이 빠진 모습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부모님 곁을 떠나면서까지 일자리를 찾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집 근처에서 직장을 찾았죠. 십 년이 넘게 거기서 일을 했습니다. 시즈코는 버스로 통근했습니다. 십 년이나 계산대를 맡았으니 베테랑이라 할 수 있죠. 사건 이후 이 년이나 입원하고 있지만 아직도 그 회사에 적을 두고 있습니다. 사건 후에 그 슈퍼마켓으로부터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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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그렇게 굳이 역까지 바래다주지 않아도 ○○선을 타고 사이쿄 선으로 갈아탄 다음에 이케부쿠로에서 마루노우치 선을 타면 된다면서 사양했지만, 저는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가스미가세키까지 가서 마루노우치 선으로 갈아타는 게 좋다고 권했습니다. 그때 제가 그렇게 권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이 사건에 휘말려들지 않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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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생이 전차를 탄 시각이 7시 20분이라 치고, 가스미가세키에서 내린 게 8시 조금 전, 마루노우치 선을 타려고 환승하기 위해 걷는 시간을 고려하면 사린이 살포된 전차와 딱 마주치게 됩니다. 한 해에 한 번밖에 없는 강습회에 가려고 탔던 전차인데, 공교롭게도 동생이 탄 차량에 사린 봉지가 놓여 있었던 겁니다. 정말 운이 나빴어요. 그러나 운이 나빴다는 걸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동생은 나카노사카우에 역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소방대원이 살려내려고 노력했지만 그 사람도 사린가스를 마셔서 결국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아니요, 그분은 만난 적이 없습니다. 이름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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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는 동생과는 연락이 안 되는 상태에서 왠지 몹시 예감이 좋지 않았습니다. 시간상으로 문제의 그 열차와 맞닥뜨릴 가능성이 컸기 때문입니다.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정말 괜찮을까’ 하고 걱정했습니다. 그런 걱정을 하면서도 저는 외부로 돌아다녀야 하는 영업사원이라 전차를 타고 고객을 만나러 갔습니다. 도중에 회사에서 전화가 왔는데 급히 어머니께 연락을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가 10시 반에서 11시 정도였습니다. 전화를 했더니 방금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는데 시즈코가 지하철에서 독가스에 당한 모양이니 빨리 병원으로 가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은 니시신주쿠의 ○○병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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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히 회사로 돌아와 전차를 타고 신주쿠까지 가서 병원에 도착한 게 12시였습니다. 그전에 전화로 어떤 상태냐고 물었더니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습니다. 가족이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는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지요?” 하고 물었더니 “아무튼 지금은 중독상태예요”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중독이란 바로 생명이 위험하다는 말이었지요. 불안한 마음에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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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도착해보니 피해자들로 가득 찼더군요. 넓은 병원 로비가 환자들로 가득했습니다. 모두들 링거주사를 맞고 안과와 내과의 검진을 받고 있었습니다. 정말 큰일이 벌어졌구나 생각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독가스로 추정된다는 텔레비전 보도가 있긴 했지만 그 이상 자세한 정보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의사도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더군요. 결국 그날 제가 들은 이야기는 농약으로 보이는 극약을 마셨다는 간단한 설명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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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보니 마치 죽은 사람 같았습니다. 입에 산소마스크가 씌워져 있고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습니다. 고통스럽다든지 답답하다든지 하는 그런 표정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니터에 나타나는 심장박동도 아주 약했습니다. 띄엄띄엄 약하게 뛰는 상태를 보일 뿐이었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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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20일) 저녁에는 부모님과 아내와 아이들이 병원으로 왔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기 때문에 아이들까지 다 부른 것입니다. 저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시즈코가 큰일을 당했어” 하고…… 아이들도 그런 제 모습을 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울지 않는 줄 알고 있으니까요. 두 아이는 “아빠, 울지 마” 하고 같이 엉엉 울면서 저를 위로해주었습니다. 부모님은 고난의 세월을 견뎌오신 분들답게 묵묵히 참아내시더군요. 그렇지만 집으로 돌아온 다음에 밤새 우셨다고 합니다. 병원에 있는 동안은 담담해 보이셨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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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코가 신주쿠의 병원에 있는 동안 매일 그곳에 갔습니다. 가끔 몸이 좋지 않을 때만 제외하고 일이 끝난 후에는 반드시 7시부터 시작되는 면회 시간에 맞춰 병원으로 갔습니다. 우리 회사의 소장이 차로 바래다줄 때도 있었습니다. 저도 그동안 체중이 많이 빠져서 여위었습니다. 그런 생활이 병원을 옮긴 8월 23일까지 약 다섯 달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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