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그라운드》 혼자 읽기

D-29
하야시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많은 일을 생각하게 했다. 그동안 하야시 야스오가 우산 끝으로 찔러 터뜨린 사린 봉지 때문에 피해를 입고 인생이 바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경험을 극명하게 들어왔기 때문이다. 자료를 몇 번이나 면밀히 검토하면서 사건 당일 하야시 야스오가 취했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의 사실로서 머릿속에 선명하게 재현해보았다. 그러면서 그의 행동과 사린 봉지와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머릿속에 하나하나 연결해왔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물론 하야시 야스오가 체포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인생이 원래대로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1995년 3월 20일에 그 사건 현장에서 훼손되고 상실된 것들 대부분은 아마도 회복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사건은 정리되어야 한다. 그의 체포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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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최후의 한 사람이 잡혀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마땅한데도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몸에서 힘이 쪽 빠져버리는 듯한 허무감이 들 뿐이었다. 오히려 ‘지금부터 새로운 싸움이 시작될 것’이라는 절절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아마도 오랜 취재 생활 속에서 피해자들의 시점으로 사물을 바라보려는 ‘시도’가 습관화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기쁨 같은 감정은 전혀 일지 않았다.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허무감과 아릿한 통증이 위벽을 긁는 산처럼 은밀히 솟구쳐오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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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코 씨는 대부분의 기억을 잃은 상태다. 애석하게도 사건 이전의 기억을 거의 떠올릴 수 없다. 담당의사는 초등학생 수준의 지능이라고 한다. 그러나 ‘초등학생 수준’이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인지 다쓰오 씨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사실 나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사고의 전체적인 수준의 문제인지, 사고회로를 말하는 것인지, 또는 잃어버린 지식과 상식의 문제인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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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호흡기에 의존할 때 목을 절개한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 구멍은 지금도 직경 일 센티미터 정도의 둥근 금속으로 막혀 있다. 그것은 그녀가 넘을 뻔했던 죽음의 문턱을 보여주는 표정 없는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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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천천히 휠체어를 밀어 시즈코 씨를 병실에서 라운지까지 데리고 나왔다. 몸집이 작은 여성이었다. 머리는 짧게 깎았다. 오빠를 많이 닮았다. 표정에서 감정은 읽어낼 수 없었지만 볼은 약간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혈색은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이다. 눈 주위가 방금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보이지만 겉으로는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 같다. 만일 코에 꽂힌 한 개의 플라스틱 튜브만 아니라면 아무도 그녀를 신체에 이상이 있는 사람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양쪽 눈꺼풀은 활짝 열려 있지 않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빛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미약하지만 강렬한 빛을 발하는 눈동자다. 처음으로 내가 느낀 것은 그 빛이었다. 처참한 상황에 처한 그녀가 거의 정상적인 사람으로 내 눈에 비친 것도 바로 그 눈빛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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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발음을 정확하게 표기하면 “안오아”이다. 그러나 전후 맥락을 통해서 금방 그것이 간호사를 가리키는 말임을 유추해낼 수 있다. 대답도 빠르다. 주저하지도 않는다. 뇌 속의 논리회로가 신속하고 순조롭게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혀와 턱의 움직임이 두뇌회로를 따라가지 못할 뿐이다. 처음 얼마간 시즈코 씨는 내 앞에서 긴장하고 부끄러움을 타는 것 같았다. 나는 느끼지 못했지만, 오빠인 다쓰오 씨가 시즈코의 태도가 평소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해서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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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낀 점은 예스와 노를 결정하는 것이 무척 빠르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결코 초등학생이 할 수 없는 일이다. 많은 일들에 대해 그녀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대답을 망설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역시 부끄러워하는 구석은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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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코 씨는 파자마 위에 목까지 단추를 단 핑크색 면가운을 입고 있었다. 무릎 위에는 얇은 모포가 놓여 있고 어깨에도 숄이 걸쳐져 있다. 그 아래로 뻣뻣한 오른손이 비죽 나와 있다. 다쓰오 씨는 곁에서 때로 그 손을 잡기도 하고 쓰다듬기도 한다. 그 손을 통해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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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코 씨도 웃는다. 그녀는 정말 활짝 웃는다. 이렇게 활짝 웃는 사람은 또 없겠다 싶게 활짝 웃는다. 물론 얼굴의 근육이 그렇게밖에 움직여주지 않기 때문에 활짝 웃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즈코 씨는 원래 그렇게 웃는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상상해본다. 왜냐하면 그 웃음이 그녀의 얼굴과 너무도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오빠가 그런 식으로 동생을 놀리면 동생은 그렇게 웃어 보였을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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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쓰오 씨에게는 하루걸러 병원에 들르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는 차로 회사와 병원을 오간다. 편도 약 오십 분. 이 차는 회사의 호의 덕에 퇴근 후에도 다쓰오 씨가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 그가 입원한 동생을 위해 병원을 오간다는 사실을 알고 회사 측에서 배려해준 것이다. 그 배려에 대해 다쓰오 씨는 깊이 감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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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회사 일을 마치면 다쓰오 씨는 그 차로 병원으로 가서 한 시간 정도 동생 곁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다. 손을 잡기도 하고 딸기 요구르트를 먹여주기도 한다. 말하기 연습도 한다. 그리고 동생의 뇌에서 사라져버린 과거의 기억을 조금씩 되살리는 작업을 한다. 가족과 함께 갔던 곳, 함께 했던 일에 관한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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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면회 시간은 밤 8시 반까지지만 다쓰오 씨의 경우는 병원에서 특별히 배려를 해준다. 면회가 끝나면 세탁물을 들고 다시 차를 타고 회사로 돌아간다. 그리고 지하철역까지 오 분 정도 걷고, 거기서 전차를 세 번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역에서 집까지는 한 시간 남짓 걸린다. 집에 도착하면 아이들은 이미 잠들어 있다.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다쓰오 씨에게는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런 험난한 생활이 벌써 일 년하고도 팔 개월이나 계속되고 있다. 피로하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나 오래 이런 생활이 계속될지 아무도 모른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이게 교통사고 때문이라면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어떤 원인이 있고 어떤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아무런 의미도 없는 터무니없는 범죄 행위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면 정말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잠시 입을 다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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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매일 곁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회복 속도가 너무 느려서 변화를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긴 안목으로 보면 시즈코는 확실히 회복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진전이 보이지 않았더라면 이런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참 잘 견뎌냈다는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리고 시즈코의 내면에는 ‘좋아지고 싶다, 빨리 낫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알 수 있고, 시즈코의 그런 의지가 저를 떠받쳐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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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코는 괴롭다, 피곤하다는 말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이 병원에 와 있는 일 년 삼 개월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재활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훈련, 언어 훈련, 그것 말고도 전문의가 붙어서 각종 기능 회복을 위한 훈련을 합니다. 이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막대한 노력과 인내를 요하는 일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울 겁니다. 그렇지만 피곤하냐고 묻는 의사와 간호사의 말에 그렇다고 대답한 적은 세 번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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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자들은 하나같이 그런 본인의 노력 때문에 이 정도의 회복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인공호흡기를 부착하고 의식조차 없었던 최초의 몇 개월 동안 입 밖에는 내지 않았지만 의료 관계자 대부분은 그녀의 회복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말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꿈과도 같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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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실적인 것이든 가상적인 것이든 그녀의 의식 속에는 ‘디즈니랜드’의 풍경이 있다. 나는 그 존재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풍경인지는 모른다. 나는 가능하다면 그것을 그녀의 눈을 통해 보고 싶다. 물론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시즈코 씨 자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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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 곁에 서서 손을 내밀자 그녀는 아까보다 더 세게 내 손을 잡아주었다. 아까보다 더 강한 의지로 뭔가를 전하려는 듯 내 손을 오래오래 잡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렇게 세게 내 손을 잡아준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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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병원을 방문했을 때 나는 그녀에게 용기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용기를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도무지 불필요한 것이었고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 되었다. 오히려 내가 그녀에게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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