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그라운드》 혼자 읽기

D-29
오빠가 천천히 휠체어를 밀어 시즈코 씨를 병실에서 라운지까지 데리고 나왔다. 몸집이 작은 여성이었다. 머리는 짧게 깎았다. 오빠를 많이 닮았다. 표정에서 감정은 읽어낼 수 없었지만 볼은 약간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혈색은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이다. 눈 주위가 방금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보이지만 겉으로는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 같다. 만일 코에 꽂힌 한 개의 플라스틱 튜브만 아니라면 아무도 그녀를 신체에 이상이 있는 사람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양쪽 눈꺼풀은 활짝 열려 있지 않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빛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미약하지만 강렬한 빛을 발하는 눈동자다. 처음으로 내가 느낀 것은 그 빛이었다. 처참한 상황에 처한 그녀가 거의 정상적인 사람으로 내 눈에 비친 것도 바로 그 눈빛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그 발음을 정확하게 표기하면 “안오아”이다. 그러나 전후 맥락을 통해서 금방 그것이 간호사를 가리키는 말임을 유추해낼 수 있다. 대답도 빠르다. 주저하지도 않는다. 뇌 속의 논리회로가 신속하고 순조롭게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혀와 턱의 움직임이 두뇌회로를 따라가지 못할 뿐이다. 처음 얼마간 시즈코 씨는 내 앞에서 긴장하고 부끄러움을 타는 것 같았다. 나는 느끼지 못했지만, 오빠인 다쓰오 씨가 시즈코의 태도가 평소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해서 알 수 있었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낀 점은 예스와 노를 결정하는 것이 무척 빠르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결코 초등학생이 할 수 없는 일이다. 많은 일들에 대해 그녀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대답을 망설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역시 부끄러워하는 구석은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시즈코 씨는 파자마 위에 목까지 단추를 단 핑크색 면가운을 입고 있었다. 무릎 위에는 얇은 모포가 놓여 있고 어깨에도 숄이 걸쳐져 있다. 그 아래로 뻣뻣한 오른손이 비죽 나와 있다. 다쓰오 씨는 곁에서 때로 그 손을 잡기도 하고 쓰다듬기도 한다. 그 손을 통해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시즈코 씨도 웃는다. 그녀는 정말 활짝 웃는다. 이렇게 활짝 웃는 사람은 또 없겠다 싶게 활짝 웃는다. 물론 얼굴의 근육이 그렇게밖에 움직여주지 않기 때문에 활짝 웃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즈코 씨는 원래 그렇게 웃는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상상해본다. 왜냐하면 그 웃음이 그녀의 얼굴과 너무도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오빠가 그런 식으로 동생을 놀리면 동생은 그렇게 웃어 보였을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그러나 다쓰오 씨에게는 하루걸러 병원에 들르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는 차로 회사와 병원을 오간다. 편도 약 오십 분. 이 차는 회사의 호의 덕에 퇴근 후에도 다쓰오 씨가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 그가 입원한 동생을 위해 병원을 오간다는 사실을 알고 회사 측에서 배려해준 것이다. 그 배려에 대해 다쓰오 씨는 깊이 감사하고 있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저녁에 회사 일을 마치면 다쓰오 씨는 그 차로 병원으로 가서 한 시간 정도 동생 곁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다. 손을 잡기도 하고 딸기 요구르트를 먹여주기도 한다. 말하기 연습도 한다. 그리고 동생의 뇌에서 사라져버린 과거의 기억을 조금씩 되살리는 작업을 한다. 가족과 함께 갔던 곳, 함께 했던 일에 관한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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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면회 시간은 밤 8시 반까지지만 다쓰오 씨의 경우는 병원에서 특별히 배려를 해준다. 면회가 끝나면 세탁물을 들고 다시 차를 타고 회사로 돌아간다. 그리고 지하철역까지 오 분 정도 걷고, 거기서 전차를 세 번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역에서 집까지는 한 시간 남짓 걸린다. 집에 도착하면 아이들은 이미 잠들어 있다.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다쓰오 씨에게는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런 험난한 생활이 벌써 일 년하고도 팔 개월이나 계속되고 있다. 피로하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나 오래 이런 생활이 계속될지 아무도 모른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이게 교통사고 때문이라면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어떤 원인이 있고 어떤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아무런 의미도 없는 터무니없는 범죄 행위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면 정말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잠시 입을 다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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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매일 곁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회복 속도가 너무 느려서 변화를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긴 안목으로 보면 시즈코는 확실히 회복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진전이 보이지 않았더라면 이런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참 잘 견뎌냈다는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리고 시즈코의 내면에는 ‘좋아지고 싶다, 빨리 낫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알 수 있고, 시즈코의 그런 의지가 저를 떠받쳐주었습니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시즈코는 괴롭다, 피곤하다는 말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이 병원에 와 있는 일 년 삼 개월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재활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훈련, 언어 훈련, 그것 말고도 전문의가 붙어서 각종 기능 회복을 위한 훈련을 합니다. 이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막대한 노력과 인내를 요하는 일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울 겁니다. 그렇지만 피곤하냐고 묻는 의사와 간호사의 말에 그렇다고 대답한 적은 세 번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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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자들은 하나같이 그런 본인의 노력 때문에 이 정도의 회복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인공호흡기를 부착하고 의식조차 없었던 최초의 몇 개월 동안 입 밖에는 내지 않았지만 의료 관계자 대부분은 그녀의 회복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말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꿈과도 같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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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실적인 것이든 가상적인 것이든 그녀의 의식 속에는 ‘디즈니랜드’의 풍경이 있다. 나는 그 존재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풍경인지는 모른다. 나는 가능하다면 그것을 그녀의 눈을 통해 보고 싶다. 물론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시즈코 씨 자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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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 곁에 서서 손을 내밀자 그녀는 아까보다 더 세게 내 손을 잡아주었다. 아까보다 더 강한 의지로 뭔가를 전하려는 듯 내 손을 오래오래 잡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렇게 세게 내 손을 잡아준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그날 저녁 병원을 방문했을 때 나는 그녀에게 용기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용기를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도무지 불필요한 것이었고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 되었다. 오히려 내가 그녀에게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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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원고를 쓰면서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 오랜만에 그런 ‘근원적인 명제’에 직면했다. 만일 내가 시즈코 씨의 입장이었다면 과연 그녀만큼 ‘살려는’ 의지를 가질 수 있을까? 나에게 그 정도의 용기가 있을까? 그 정도의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을까? 그렇게 세게 다른 사람의 손을 따스하게 잡아줄 수 있을까? 사람들의 사랑이 나를 도와줄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솔직히 말해 정말 자신이 없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종교에서 구원을 찾는다. 그러나 만일 종교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힌다면 그들은 도대체 어디서 구원을 찾아야 할까? 시즈코 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몇 번이나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사람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을까. 그 빛은 무엇을 비추고 있을까. 언젠가 그녀가 건강을 되찾아 자유롭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면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그때 무엇을 보고 있었나요?”라고.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그러나 결코 그것만은 아닙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어떤 회한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만큼 정확하고 방대한 정보를 포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엄청난 사건을 미리 막을 수 없었다는 회한입니다. 사회를 향하여 좀더 큰 목소리로 호소했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모두 겁을 먹고 뒤로 빠져버린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두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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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지만, 간호사가 모두 굉장한 미인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 간호사는 참 미인이야. 미인은 성격이 차갑다고 하던데 그 사람은 정말 친절해” 하고 말했지요. 얼마 후 의식이 돌아온 다음에 보니…… 아마 그때는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였던 모양입니다(웃음).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그러나 밤에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병원 침대 가장자리에 파이프가 있지 않습니까. 그 파이프를 만지면 어둠 저편에서 젖은 손이 불쑥 튀어나와 저를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낮에는 환하고 주위에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기분이 안 들지만, 밤에는 자려다가도 파이프에 손이 닿으면 젖은 손이 뻗어나와 저를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습니다. 의식이 명료해지고 기억들이 매끄럽게 연결되면 될수록 그 공포는 점점 더 커져갔습니다. 저는 그게 환각증상인지도 모르고, 이 병실에서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나를 불러들이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두려웠습니다. 그렇지만 창피해서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평소에 저는 집에서 절대적인 남편이며 가장이라서 ‘무섭다’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거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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