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그라운드》 혼자 읽기

D-29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이 병원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밥을 먹지 못할 때는 아내에게 비닐봉지에 넣어서 버리라고 했습니다. 회복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지요. 그렇게 해서 억지로 열하루째에 퇴원을 했습니다. 적어도 보름은 입원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무시하고 말이죠.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그러나 집에 돌아와도 결국 마찬가지였습니다. 발이 이불 밖으로 비어져나와 차가운 물건에 닿으면 똑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공포가 되살아나는 겁니다. 혼자서 욕실에 들어갈 때도 그렇습니다. 나 혼자 남는 것이 너무 두려웠습니다. 밤늦게 거실에 있다가 제각기 자기 방으로 들어가고 나면 정말 두렵습니다. 목욕탕에도 혼자 있는 게 두려워서 아내를 불러 등을 밀게 합니다. 아내는 간단히 등만 밀고는 나가버립니다. 그래서 절대로 내가 나가기 전에 욕실을 나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내가 나가기 전에 욕실을 나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내가 먼저 나가겠다고 말이죠(웃음).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유럽에서는 테러가 일상적인 일처럼 자주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일본에서는 이제까지 그런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에 살면서 역시 일본이 안전하고 좋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그곳 사람들에게서도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일을 당했습니다. 무차별 테러에 화학병기인 사린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는 의문이 듭니다. 이를테면 IRA 같은 경우는, 그들이 어떤 수단을 쓰느냐는 제쳐두고라도 그들이 지향하는 목적은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사린사건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저는 다행히 후유증도 없이 회복되었지만, 생명을 잃은 사람이나 심한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도저히 그 울분을 풀 데가 없을 것입니다. 죽으면 다 똑같다고 하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죽음이 있고 의미 없는 죽음이 있지 않습니까.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이번 사건은 여러 각도에서 철저히 규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법치국가이므로 이번 기회에 납득할 수 있는 논의를 거쳐 이 사건의 책임 소재를 명시하고 하나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범한 죄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 그 처벌 기준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를 신중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세뇌에 의한 범죄의 전례가 없으므로 거기에 관한 명확한 기준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판례로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처참한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국가의 위기관리에 관한 논의를 정책적으로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우리 앞 세대가 힘들게 노력해서 이 나라를 풍족하고 평화로운 나라로 만들었으니 우리는 그것을 보전하고 발전시켜 다음 세대로 물려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 그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지금 일본에 절실한 것은 마음의 풍요를 추구하는 일입니다. 지금처럼 물질만 추구한다면 일본의 미래는 없을 겁니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어쨌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인간은 반드시 한 번은 죽어요. 죽으면 모든 게 끝이지요. 죽어버리면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자신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옴진리교 사람들은 과연 책임이란 것을 생각이나 하고 있을까요? 그들이 과연 피해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조금이라도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을 깨닫기 바랍니다. 정말로 간절히 바랍니다. 그들에게 사회적인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합니다. 그런 후 갱생의 길을 걷게 하든지 해야 합니다. 결코 죽어버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은 스스로 바로 세워야 합니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실행범 하야시 야스오는 아직 체포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하철 사린 피해자 모임에 참석하고 있는데, 목숨을 잃은 분의 유족들이나 아직 의식불명인 아들을 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무차별 살인을 계획한 그들에게 극형을 내려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사하라나 실행범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 대한 증오심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평생 그들을 잊지 못할 겁니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저는 벌써 정년에 가깝기 때문에 회사에서도 관대하게 봐주는 편입니다. 좀 게으름을 피워도 대충 넘어갑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 또는 중증 환자는 정말 큰일입니다. 그런 사람에 대해 정부가 무슨 배려를 해줘야 할 것입니다. 에이즈도 중요한 사안이지만 마찬가지 차원에서 사린 피해자를 봐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다 쳐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꼭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른쪽 눈의 시력은 원래 시력에 비해 반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0.8이었던 것이 지금은 0.4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사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싫습니다. 그렇게 인정하고 싶지 않아요. 인정하는 순간 그놈들에게 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그런 생각을 안 하려고 노력합니다. 기본적으로는 나이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그렇지만 덕분에 한국어 실력은 많이 늘었습니다. 눈이야 아프지만 머리는 괜찮으니까 테이프를 들으면서 공부를 한 겁니다. 그나마 이것이 이번 사건에서 얻은 거라면 얻은 거죠. 그때 배운 한국말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맞은 놈은 발을 뻗고 자지만 때린 놈은 몸을 움츠리고 잔다.” 즉 맞은 사람은 몸이 아프지만 정말로 마음이 아픈 사람은 때린 쪽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고생하는 분들께 이런 말을 하면 화를 내겠지요. 각자 입장도 사고방식도 다르니까요. 그러나 오해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한국의 그 속담이 현재의 제 심정입니다. 한동안은 죽일 놈들이라고 욕을 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결국 이틀 입원했습니다. 제가 느끼는 신체적 감각으로는 그렇게 심하지 않은 것 같았는데, 혈액의 무슨 수치하고 시야협착 때문에 집에 가서는 안 된다고 하더군요. 마침 집사람이 임신중이라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지만 입원하게 되었으니 알리지 않을 수도 없었어요. 저녁때 중환자실에서 나와 일반병실로 옮겼을 때에는 집사람과 부모님, 장인, 장모님까지 모두 병원에 와 있었어요. 그날 밤에는 도저히 잘 수가 없었습니다. 태어나서 입원 같은 것은 해본 적도 없는데다 온갖 것들이 마음에 걸려서 말입니다. 코에는 산소 튜브가 꽂혀 있어서 도저히 편히 잘 수 없었어요.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그후 별다른 후유증은 없습니다. 하지만 전차에 타는 것이 두려워서 얼마 동안은 시간대를 바꾸거나 차량을 바꾸거나 했죠. 똑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런 공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사라졌지만 지금도 환승 계단은 다른 곳을 이용합니다. 일상생활에는 아무 지장이 없기 때문에 증오심 같은 것은 거의 없습니다. 분노도, 사건을 겪었다는 현실감 같은 것도 없습니다. 종교에는 아무 관심이 없으니까 그들이 한 짓을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니까 증오심도 일지 않는 모양입니다. 만약 또다시 제 몸에 뭔가 문제가 생기면 그때는 심한 분노를 느끼겠지만 지금은…… 그 사건과 관련해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둘째 아이입니다. 그 사건을 당한 후 둘째, 셋째 아이를 낳아도 과연 괜찮을까, 몸에 뭔가 이상이라도 생기는 건 아닐까 싶어서 말이죠.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월요일에는 회사 일이 끝나면 병원에 들러볼 생각이었습니다. 전해줄 물건도 있고 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에 휘말려버렸습니다. 아내는 무척 화가 났다고 합니다. 분명히 어디서 술을 마시고 있을 거라며 말이죠(웃음). 병실에 텔레비전이 없었기 때문에 사건에 관한 소식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날 하루 종일 제게서 아무 연락도 없었으니까요.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아사하라는 극형에 처해야죠. 도대체 무슨 생각인 겁니까. 용서할 수 없습니다. 재판 따위는 볼 마음도 나지 않아요. 보면 울화통이 터집니다. 파괴활동방지법 적용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자기가 직접 피해자가 되어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죽은 사람들과 그 유족들의 심정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놈들에게 동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당치도 않습니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형님에게는 아이가 둘 있어서(저와 같은 시기에 마침 셋째를 출산하였습니다), 제가 훌쩍훌쩍 울고 있으면 그 아이들이 와서 “작은엄마 괜찮아?”라고 말하는 겁니다. “에이지 삼촌, 죽었지”라고요. 아이들이 있으니까 그렇게까지 울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요코하마에 돌아온 것은 그해 9월이었습니다. 반년 정도 남편의 집에 있었습니다. 내 집 같은 기분이었습니다(웃음). 지금도 자주 가지만 갈 때마다 즐거워요. 모두 따뜻하게 맞아주고, 남편의 묘도 그곳에 있으니까요.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사건 후 일 년이 지나 조금 마음의 정리가 된 듯한 기분입니다. 이젠 남편이 없다는 사실을 점점 뚜렷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아직도 뭔가…… 남편은 미국에 출장을 자주 갔기 때문에 이삼 개월 집을 비운 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없어도 당연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죽은 뒤에도 ‘아, 출장 갔지’라고 생각한 적도 많았습니다. 일 년 정도 계속 그랬습니다. 나는 출산 때문에 고향에 와 있는 거라고 생각하거나 갑자기 “다녀왔어” 하면서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합니다. 때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 그이는 출장 갔지’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한참 생각하다가 위패를 보고는 ‘아, 그렇지. 그이는 죽었어’라고 퍼뜩 정신을 차립니다. 알면서도 아직도 왠지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현실과 공상이 뒤섞여 있는 듯한 기분입니다. 그이가 돌아올 거라는 생각을 하며 성묘를 하는 그런 모순된 느낌입니다. 그러나 일 년이 지나 그가 죽고 없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그건 정말 괴로웠습니다. 밖에 나갔다가 아버지가 아이를 목말 태우는 것을 보거나 하면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정말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젊은 부부의 대화를 듣거나 하면 고개를 돌리고 싶어집니다.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은 심정이에요. 그러나 다른 사람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고 끊임없이 스스로 타일렀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태연해졌습니다. 다른 아버지가 아이를 달래는 것을 봐도 마음이 쓰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우에다로 관을 옮길 때도 텔레비전 방송국 사람과 카메라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사정은 조금도 생각해주지 않았어요. 정말 제멋대로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만 내버려두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혼모쿠로 돌아오자 사람들이 모두 저를 알아보고 길을 걸어가면 뒤에서 수군대며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저기 저 사람, 그 사린사건으로 남편을 잃었어’라고요. 그것이 마음을 아프게 찔렀습니다. 등으로 그런 느낌이 전해져오는 겁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이사했습니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제가 처음으로 검찰청에 사건에 관한 개요를 들으러 갔을 때, 남편을 도와준 사람과 데리고 온 사람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지하철 직원도 증언했습니다. “남편이 죽을 때의 상태를 알고 싶습니까?”라고 검사가 묻기에 “물론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아니…… 그이가 그렇게 괴로워하며 죽었단 말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상대에게도 똑같은 고통을 주고 싶었습니다. ‘왜 이렇게 질질 끌며 죽이지 않는지’, 늘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극형에 처하길 바랍니다. 재판을 보면 정말 화가 치밉니다. 남편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살해되었을까요. 남편과 저와 아이의 미래를 망친 이 억울함을 어디에다 하소연하면 좋을지……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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