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자서전이나 여행기의 체계를 기대하면서 책을 펼친다면 앞의 몇 쪽을 읽고 나서 낭패감에 빠질 거예요. 우선 이 책의 서술은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습니다. 저자가 슬쩍 귀띔했듯이 저자의 40대, 50대 즉 198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20년간 했던 여행이 중심이긴 하지만 20대, 30대의 이야기도 나오고 2010년대 이후 즉 60대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저자는 굳이 책 속에서 구체적인 일시를 밝히지도 않습니다. 그냥 저자가 담담하게 털어놓은 경험을 들으면서 ‘아, 40대 때구나’ ‘아, 1980년대 후반이구나’ ‘아, 1990년대 중반이구나’ 하고서 유추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자 아니라고 할까 봐서, 일시에 예민한 저로서는 이런 걸 찾는 재미(?)도 쏠쏠했답니다.)
대신 이 책의 주인공은 장소입니다. 저자는 자기 여행의 출발점을 미국 오리건주의 서쪽 끝에 있는 북태평양과 맞닿은 해안의 파울웨더 곶에서 시작합니다. 캐나다의 동북쪽 끝에 있는 그린란드를 마주하는 북극권 또 정반대로 적도 인근 남태평양의 유명한 갈라파고스 제도 여행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다음에는 호모 사피엔스 이전 인류 조상의 흔적을 발굴하는 동아프리카 케냐의 투르카나 호수 인근의 발굴 장소로 갔다가 오스트레일리아로 갑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유명한 여행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철광석을 전 세계로 수출하는 마치 『반지의 제왕』의 ‘모르도르’ 같은 포트헤들랜드 항구로 독자를 안내합니다. 마지막 여행 장소는 남극이고요.
저자는 이 여섯 장소와 얽힌 자기의 여행 경험을 담담하게 들려주면서, 평생 여행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체득한 자연과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공유합니다. 나아가 이제 생의 마지막을 앞둔 노년이 된 자기도 해결하지 못한 세상을 둘러싼 온갖 문제의 해법을 고민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쿳시, 프루 등과 나눈 대화의 주제는 ‘공동체의 복원’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본문만 870쪽이나 되는 벽돌 책이지만 한번 펼쳐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요?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이 책에서 저자가 계속해서 반복하는 키워드는 ‘어른’이었답니다. 저자는 어른과 그런 어른이 마땅히 갖춰야 할 지혜의 부재야말로 인류가 안고 있는 온갖 문제의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저자의 고민을 읽으면서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0. <3월 1일의 밤>
D-29

YG

YG
2020년에 저자가 세상을 뜨고 나서 그가 마지막으로 추려 모은 스물여섯 편의 에세이를 묶은 책이 2022년에 나왔습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자연 작가”의 마지막 책이라서 화제도 모았죠. <뉴욕타임스>가 2022년 최고의 책 가운데 하나로 선정했고, 책이 나오자마자 온라인 서점 ‘아마존’에서 판매 순위 1위에 오르기도 했으니까요.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북하우스).
저는 국내에서도 팬이 많은 작가 리베카 솔닛이 이 책의 서문을 쓴 사실에도 주목하고 싶습니다. 솔닛은 로페즈의 글과 책을 놓고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래전 나에게 무엇을 목표로 글을 쓸 수 있을지 일러준 것은 바로 배리 로페즈의 글이었다. 그의 글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주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 한, 그리고 구원의 힘에 대한 더 넓은 인식을 직조해 낸다.”
『호라이즌』뿐만 아니라 『북극을 꿈꾸다』,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가 모두 한국어판으로 나와 있습니다. 굳이 순서를 권하자면,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호라이즌』-『북극을 꿈꾸다』 순을 권하고 싶습니다. 뒤늦게 이 작가를 만난, 정작 여행을 싫어하는 한 독자가 보내는 뒤늦은 찬사로 감상을 마무리합니다.
“어른을 찾아서 떠난 여행을 통해 당신이 어른이 되었네요.”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 숲과 평원과 사막을 걸으며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의 여정『북극을 꿈꾸다』로 미국도서상을 수상한 작가이자 작가로 활동한 생애 내내 여러 세대의 작가들과 환경 운동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던, 우리 시대 최고의 자연 작가 배리 로페즈가 남긴 마지막 에세이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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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umis
그의 글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주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그리고 구원의 힘에 대한 더 넓은 인식을 직조해 낸다.
그렇네요. 제가 별로 여행 다큐나 예능을 안 좋아하면서도 이 책은 재미있게 읽었던 것은 어쩌면 그런 타인의 고통에 대한 그의 예민한 감수성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그나저나 저 순서에서 이미 벗어나긴 했지만 다음에는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를 읽어봐야겠습니다.

연해
마지막 문장 정말 감동적이네요.
"어른을 찾아서 떠난 여행을 통해 당신이 어른이 되었네요."
『호라이즌』을 읽기 전에 이 감상글을 먼저 읽었다면, 그 책이 조금이나마 수월(?)하게 읽히지 않았을까 하는 나름의 투정 아닌 투정을... (하하).
"본문만 870쪽이나 되는 벽돌 책이지만 한번 펼쳐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요?"라는 질문에는 저야말로 "네"라고 답하고 싶어지네요. 이 방에서 다시 『호라이즌』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 반갑기도 하고, YG님도 이 책을 읽고, 여행에 대한 생각이 바뀌셨다는 말씀에 괜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낯선 장소 낯선 타자와의 마주침이 없었더라면 자연과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저자의 독특한 방식이 만들어질 수 없었을 테니까요."라는 이 문장이 특히 좋았어요.
aida
공유해주어서 감사해요. 잊혀져 가는 2월의 감상을 다시 한번 되새겼습니다~
앞으로도 호라이즌, 베리 로페즈, 어른, 남극, 호주, 갈라파고스 등등 이런 단어를 마주할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이 달라질것 같습니다.

borumis
https://www.koreatimes.co.kr/www/opinion/2025/03/137_270064.html
파리를 떠나기 전 김씨는 연설을 했다. 어디서 연설했고 누구에게 연설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그는 자신이 받은 미온적인 환대에 실망했다고 말했다. 그는 우드로 윌슨이 자기 결정에 대해 말한 것이 진심이었는지 물었고, 정의를 사랑하는 척하지만 일본의 식민지 억압으로 고통받는 2천만 명의 한국인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프랑스를 비판했다.
Before leaving Paris, Kim gave a speech. Where he spoke and to whom is uncertain, but he stated his disappointment with the lukewarm reception he had gotten. He asked whether Woodrow Wilson meant what he said about self-determination and criticized the French who pretended to love justice but cared little about 20 million Koreans suffering under Japanese colonial oppression.
김씨는 일본이 체포하여 서대문형무소에 가두고 고문한 사람들 중 일부가 윌슨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한국 독립을 위해 싸웠다고 말했다는 것을 언급했을 수도 있습니다.
Kim may have mentioned that some of the people the Japanese had arrested, thrown into Seodaemun Prison and tortured said they had stood up for Korean independence because they took Wilson at his word.
김씨는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회 극동 노동자 대회에 참여한 52명의 한국인 중 한 명이었습니다. 블라디미르 레닌이 주최한 이 대회는 공산주의 스타일의 혁명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파리에서 본 것에 좌절하고 분노한 김씨는 위선적인 미국, 프랑스, 영국을 비난하는 기사를 썼고, 그들을 "흡혈귀" 국가라고 불렀습니다.
Kim was among 52 Koreans who, in 1922, participated in the First Congress of Toilers of the Far East in Moscow. Hosted by Vladimir Lenin, it was all about revolution, Communist-style. Frustrated and resentful over what he had seen in Paris, Kim wrote an article blasting the hypocritical Americans, French and British, calling them "bloodsucker" nations.

오구오구
어머나, 너무 좋은자료에요. 흡혈귀 국가.... 한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흡혈귀들이 판치고 있습니다. ㅠ
aida
우드로 윌슨의 자결의 대상이 아닌 민족임을 확인했을때.. 희망이 처박혔을 꺼 같네요. 열강의 위선을 보았겠지요.. __ 갑자기 울분이 (어떻게 이런걸 찾으셨어요, 자료 감사합니다.)

borumis
그런 '자유'를 사랑하고 혁명을 외치던 프랑스에서 위선과 무관심을 직접 목격하고, 그리고 윌슨의 이상주의에 이끌려 희생된 고국의 독립운동가들을 생각하며 김규식이 독립운동에 뛰어들며 '자결'을 향한 의지를 굳힌 것 같아요. 이 책에서도 나왔지만 레닌의 극동 노동자 대회에서도 영향을 받았을 것 같네요.

YG
이 책을 읽다 보면,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 같은 분들입니다. 이들을 좌도 우도 아닌 중간파로 묶어서 정리한 책이 한 권 있긴 해요. 분쟁 전문 기자로 유명하셨던 김재명 선생님께서 2000년대 초에 쓰신 책입니다. 김 선생님은 해방 후에 이들이 권력을 잡았더라면 한반도 정세가 훨씬 달라졌을 거라고 보셨죠.

한국현대사의 비극 - 중간파의 이상과 좌절이 책은 분단시대의 서막인 해방정국(1945~1948) 하에 오로지 국권회복을 통한 민족 자존, 그리고 좌우 갈등의 벽을 허물고 민족통일을 이루려 치열하게 투쟁했던 인물들에 관한 기록이다. 극좌와 극우 모두가 이들을 비판하는 속에서도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통한 민족통일에 온 힘을 기울이는 과정을 치열하게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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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구오구
이런 귀한 책도 있군요.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저도 만약을 자꾸 생각하게 되네요

stella15
중간파가 있긴 있었군요. 정말 그랬을 것 같습니다.

소피아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까지는 나라 운명도 세계 정세도 혼돈의 도가니여서 그렇겠지만, 엄청나게 굴곡진 삶을 살았던 인물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김규식이라는 인물에 관심이 생기더라구요. 저는 이제껏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만 대표로 파견될 줄 알았습니다. 조소앙도 중간파에 속하는군요...

YG
@소피아 아, 이참에 정말 소개하고 싶은 책이 하나 있습니다. 역사학자 임경석 선생님의 책 세 권입니다.
첫 번째 책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은 원래 <역사비평>에 연재가 되었던 글을 묶은 것인데, 너무 재미가 있어서 제가 PDF 파일을 다 구해서 제본해서 볼 정도였어요. 그런데 이렇게 책으로 묶여서 나왔고요.
훨씬 품을 넓혀서 정리한 게 『독립운동 열전』 두 권입니다. 그간 공식 독립운동사에서 제대로 다루지 않았거나, 미화되었거나, 감췄었던 내용이 들어 있어서 너무 흥미진진했던 책이었어요. 소피아 님 취향 저격할 책들이어서 강력 추천합니다. (흠, 이 정도로 벽돌 책 함께 읽고 수다 떨었으면 취향 정도는 거칠게 파악하고 있다고 해도 실례 아니겠죠?)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남과 북으로 분단된 후, 반공이데올로기에 휘둘려 우리 현대사에서 은폐되고 왜곡된 사회주의운동사를 복원하는 데 전력하는 역사학자 임경석이 혁명가들의 초상을 그린다. 일제하 조선노동당을 주축으로 민족해방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한 윤자영(1장),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2장), 강달영(3장) 등이 그들이다.

독립운동 열전 1 - 잊힌 사건을 찾아서독립과 해방을 위해 온힘을 기울인 인물들, 개인의 일신을 위해 그들을 배신했던 이름들, 이들을 둘러싸고 벌어진 갖가지 사건들을 찾아 떠난다. 저자 임경석 교수는 일본제국주의에 국권을 빼앗긴 시대에 살았던 한국 사람들이 해방을 위해 투쟁한 이야기 중 기억되어야 함에도 잊힌 사건들을 34꼭지에 담아 펼쳐 보인다.

독립운동 열전 2 - 잊힌 인물을 찾아서독립과 해방을 위해 온힘을 기울인 인물들, 개인의 일신을 위해 그들을 배신했던 이름들, 이들을 둘러싸고 벌어진 갖가지 사건들을 찾아 떠난 책이다. 일본제국주의에 국권을 빼앗긴 시대에 살았던 한국 사람들이 해방을 위해 투쟁한 이야기 중 기억되어야 함에도 잊힌 인물들을 38꼭지에 담아 펼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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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umis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은 POD (print on demand)인가봐요.
알라딘 서점에선 붉은 색으로 [단한권]이라고 나와 있길래 깜짝 놀랐어요..^^;;

장맥주
“ 따지고 보면 3·1 운동 전후 '대표'임을 주장한 인물이나 단체 중 '민족대표 33인'처럼 임의성이 두드러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33인 중 적잖은 수가 후일 소극적으로 혹은 적극적으로 일본에 협력했다는 사실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 다른 사례와 비교해도 '대표'의 비포괄성이 눈에 띈다는 뜻이다. ”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권보드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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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맥주
“ 최린은 "천도교와 예수교의 사람들이 30명쯤 모여 보니 이들로 조선민족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었고, 그래서 매우 충분하다고 생각"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민족대표 33인'이라는 자칭(自稱)이 드높은 자발성의 결과인 동시 안이한 정치 의식의 발로였을 가능성을 보여주 는 진술이라 하겠다. ”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권보드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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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umis
“ 3월 1일 서울 하늘에 태극기는 휘날리지 않았다. 어떤 깃발도 날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당대 문자나 시각자료에서, 즉 신문조서나 사진 등에서 이 날짜에는 태극기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88쪽, 권보드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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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umis
“ 서울에서 벌어진 며칠 후의 대규모 시위, 즉 학생들이 주도한 3월5일 남대문역 앞 시위에서는 여러 종류의 깃발이 동원됐다. 이날 시위는 3.1 운동을 지속화, 장기화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89쪽, 권보드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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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umis
“ 왕과 왕실에 대한 묵은 기억이 어떻든지 간에 3.1 운동 직전 왕에 대한 태도는 거의 만장일치의 추모와 공분이었다. 냉담한 축이 없지 않았으나 절대다수가 왕의 죽음을 애통해 하고 그 상실에 민족의 비극적 처지를 겹쳐 보는 시각을 택했다. (...)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상실을 전제한 위에서의 애도, 더 이상 공화의 경쟁자이거나 억압자일 수 없게 된 왕을 민족 자체와 동일시하면서 형성된 추모의 의식이었다. ”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99쪽, 권보드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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