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세 최남선 이야기를 하시니까,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습니다. 제가 애국심 투철한 사람도 완전 아니고, 태극기보면 울컥하고 뭐 이런 일도 절대 없고.. 아무튼 그런데요, 상하이 임시정부청사나 헤이그 이준열사 기념관같은 그런 독립운동과 관련있는 이러저러한 장소를 들른 적이 있습니다 (자체적으로 다크 역사 투어같은 거 종종 했습니다 ㅎㅎ). 그럴때마다 해당 장소에 있는 자료나 사진들을 유심히 보곤 했는데요, 빛바랜 액자 사진 속에 담겨 있는 너무 앳되고 마알간 얼굴에 흠칫 놀랄 때가 몇 번 있었습니다. 맙소사! 이 얼굴이 그 일을 했다고? 이 청춘을 대체 어쩐단 말이냐? 뭐 이렇게 장탄식 하기도 했구요.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0. <3월 1일의 밤>
D-29

소피아

borumis
자체적 다크 역사 투어..ㅎㅎㅎㅎ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stella15
그렇죠. 유관순 열사가 만세운동에 참여한 때가 20세가 채 되지 않았던 때였으니. 그러고 보면 참 조숙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시대가 그렇지 않나 생각합니다. 유진봉인가? 38세에 며느리를 봤다지 않습니까? 14,5만되어도 혼담이 오고간 때니. 지금 갓 스물은 정말 꽃봉오리들이죠. 근데 80년 대 2, 30대들은 굉장히 성숙했던 것 같아요. 그들도 그 어려운 시대를 격지 않았다면 편하게 아니 좀 다른 방식으로 보냈겠죠. 시대가 사람을 만든다는 건 맞는 말 같습니 다. 이준 열사도 독립이 아니었으면 다른 일을 했겠죠.

장맥주
약간 뜬금없는 연결이라고 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최근 10년 사이에 20대 청년이 한국 사회 전체를 향해 메시지를 내서 반향을 일으킨 사례가 누가 있었나 생각해보니 류호정 전 의원이랑 박지현 전 민주당 비대위원장이 생각납니다. 그 두 사람의 역량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요. 류 전 의원은 이제 30대가 되었군요.

오구오구
아..... 그 메시지...

소피아
"최근 10년 사이에 20대 청년이 한국 사회 전체를 향해 메시지를 내 서 반향을 일으킨 사례" --> 왜 저는 BTS의 UN 연설 "Love Yourself" 와 장원영의 원영적 사고 '럭키비키'가 떠오르는 걸까요? (장원영 추천템이라는 '초역 부처의 말'도 읽고 싶어지더라고요 >.<;)

장맥주
어... 음... 저는 두 경우 다 그 안에 별 메시지는 없었다고 생각해요. ㅎㅎㅎ

오구오구
유신시대, 또 이후 군사정권에도 이름없는 어린 학생들의 목소리에 빚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보니 31운동만 그랬던 것은 아니군요.

borumis
저도 안그래도 그런 움직임이 즉각적이고 강 력한 힘을 가질 수 있지만 한편 정확한 정보나 중추가 없이 안 좋은 방향으로 큰 여파를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일단 뒤엎은 다음에 어떻게 나아갈지에 대한 대책이 없이 더 큰 혼란이 뒤따를 수 있다는 점도 있구요. ('구체적인 개혁 방향에 대해 함구'한 것도 어찌 보면 그런 점을 보여주는 걸지도요)
밥심
“ <3장 깃발: 군왕과 민족과 대중>
89쪽
3월 1일 시위가 20만이 넘는 국장 상경객을 통해 전국 방방곡곡에 전해진 데 이어, 3월 5일 시위는 독립선언이 일회적 사건으로 끝날 수 없다는 의지를 명확하게 천명했다.
97쪽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왕에 대한 애도를 고양시킨 것은 분명하다.
98쪽
믿지 말아야 할 까닭이 없었으므로 민심은 쉽게 독살설을 받아들였다.
99쪽
왕과 왕실에 대한 묵은 기억이 어떻든지 간에 삼일운동 직전 왕에 대한 태도는 거의 만장일치의 추모와 공분이었다. 냉담한 축이 없지 않았으나 절대다수가 왕의 죽음을 애통해하고 그 상실에 민족의 비극적 처지를 겹쳐보는 시각을 택했다.
100쪽
대한제국기의 깃발을 꺼내 들더라도 그것이 옛 군주에 대한 충성으로 오인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삼일운동기 고종에 대한 추모 열기는 이렇듯 왕조의 종말을 확인한 안도감에 의해 고양됐던 듯 싶다. ”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권보드래 지음
문장모음 보기
밥심
얼마 전 읽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 서울편 1>이 창경궁과 창덕궁을 주로 다루는데 거기에 마지막 왕손들이 창덕궁 낙선재에서 쓸쓸하게 살다 간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글을 읽고 얼마 안 되어 이 파트를 읽으니 자꾸 위에 수집한 글들에 눈길이 갔습니다.
삼일운동 주최 측은 고종 장례식에 모여들 사람들이 고향으로 내려가 운동을 더 전파시켜주기까지 기대하고 장례식 이틀 전에 운동을 한 걸까, 아니면 단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기회를 노린 것일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아마 3.1 후의 후속 전개까지 내다보진 못했겠죠?

장맥주
“ 일찍이 건국 때부터 조선 왕조의 수명은 28대라는 예언이 있었는데 고종이 제28대 왕이니 "금회의 홍거에 의해 이조는 완전히 멸망"했다고도 했고, "이조도 28대에서 망하였으니 조선의 전도가 실로 암담하지만" 곧 조선 전도(全道)에서 한 명을 뽑아 "목하 지나(支那)에 있어서의 대통령과 같은 것을 두고 국사를 통제할 계획이" 있다고도 했다. 왜 고종을 제26대가 아닌 제28대로 헤아렸는지는 의문이지만, 순종을 제쳐두고 고종을 '최후의 군주'로 대접하는 동시에 그의 죽음으로 조선 왕조가 완전히 멸망했다고 진단하는 시각은 여러 풍설을 통해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권보드래 지음
문장모음 보기

장맥주
“ 3·1 운동은 봉기의 터전일 뿐 아니라 공론의 토대였다. 새로운 정치적 공통감각을 형성하는 토론의 장인 동시 행동의 장이었다. 그것은 유럽에서와 같이 살롱과 카페와 공원에서 대화와 토론과 연설을 통해 형성되는 공론의 장일 수는 없었다. 언어와 사상이 무르익은 후 행동과 제도화가 뒤따르는 장기적 과정일 수 없었다. ”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권보드래 지음
문장모음 보기

장맥주
촛불집회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