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는 위선을, 가식을, ‘척’하는 것을 모두 경멸했다. 타인을 해치거나 이용하거나 타인의 마음을 갖고 놀거나 뒤통수를 때리는 등, 구체적인 나쁜 의도를 속에 품은 채 작정하고 착한 척 접근하는 위선들에 몇 번 크게 데고 나면, 누군가에게서 위선의 작은 기미만 보여도, 가식적인 미소 하나만 발견해도 마음을 재빨리 닫아걸고 바로 경계태세에 돌입하기 마련이다. 그런 기미를 나에게서 발견하면 깊은 자기혐오에 빠져 괴로워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위선보다는 솔직함이, 차라리 위악이 훨씬 나아 보였다. 그랬던 내가 위선도 다 같은 위선이 아니며, 때로는 가식이라는 게 필수 불가결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건, 대체로 솔직하고 다소 위악적이었던 팀장 A와, 동료들 사이에서 가식의 표본으로 평가되던 팀장 B와 연달아 일을 한 경험에서 비롯됐다. 결론부터 말하면, 전자의 경우가 지옥이었다면 후자의 경우는 과장을 조금 보태 천국이었다.
위선과 위악은 간단히 나눌 문제가 아니지만 (일단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를 철학적으로 따지고 들어가기 시작하면 끝이 없으니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합의된 선과 악의 개념을 차용해보면), 위선이 위악보다 나았던 이유는, '선을 위조한다는 것'은 적어도 위조해야 할 선이 무엇인지를 인지하기에 가능한 것이라 상대와 '선'에 대해 따로 합의할 필요 없이 엇비슷한 선상에서 대화할 수 있어서다. 그리고 위선을 부리는 사람은 대개 자신에 대한 타인의 평가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웬만하면 타인의 말을 귀담아들으려 노력한다.
반면, 선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설령 안다 한들 그것을 위조라도 하려는 노력이 전혀 없고(그렇다. 선을 위조하는 데에는 큰 노력이 필요하다), 아무런 포장 없이 자신의 마음 밑바닥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솔직함의 미덕이라고 여기는 사람과는 일단 말부터가 통하지 않았다. 서로 윤리관이 전혀 달랐다. ”
『다정소감 - 다정이 남긴 작고 소중한 감정들』 김혼비 지음

다정소감 - 다정이 남긴 작고 소중한 감정들에세이스트 김혼비의 신작 산문집. 책 제목‘다정소감’은 ‘다정다감’을 장난스레 비튼 말이다. 동시에 김혼비가 다정들에서 얻은 작고 소중한 감정의 총합을 뜻하기도 한다. 모든 다정한 사람은 조금씩 유난하다. 그렇게까지나 멀리 내다보고, 이토록이나 자세히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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