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0. <3월 1일의 밤>

D-29
3.1 운동 이전, 전근대적 왕조-가족-촌락 유대가 끊기고 1900년대식 애국주의도 불가능해졌던 1910년대에, 개인은 저마다의 생물학적 실존을 움켜쥐고 홀로 남겨졌던 바 있다. 전근대에도 1900년대에도 속박되지 않았던 도시 청년들, 특히 유학생들이 그러했다. 당연히 '죽음'을 화두로 한 1910년대의 문학 텍스트는 적지 않다.(...) 그러나 '죽음'이 문학적 주제의 핵심이 된 순간, 개체들이 저마다의 자유와 공허 속에서 씨름해야 했던 시절은 근대 한국에서 오래 가지 않는다. 3.1 운동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죽음을 직시하면서도 신생에의 의지와 공동체적 감성, 개조에의 의지를 키워내게 됐기 때문이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492-495쪽, 권보드래 지음
1910년대 내내 억눌려 있다가 3.1 운동으로 출로를 찾았던 민족 감정은 다시 갈 길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다른 한편 '조선'은 이제 지식과 담론의 층위에서라면 엄연한 현실로 자리 잡았다. 3.1 운동 이후 언론·출판 공간의 개방 속에서 '조선인 사회'가 형성된 것이다. 그것은 기만적 유사 사회(pseudo society)에 불과했지만, 입법권도 선거권도 없는 식민지 사회에 불과했지만, 형용모순인 채로나마 '자유'의 여지를 부여하는 듯 보였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497쪽, 권보드래 지음
청년대중이 가장 열렬하게 호응한 것은 다름 아닌 문화·예술 분야에서의 실험과 성취였다. 스스로 후진이라 여기는 처지로서 가장 역전 가능성이 높은 분야가 문화 쪽이기 때문이기도 했겠고, 신채호가 일갈한 대로 문예가로 행사하면 "혁명이나 다른 운동같이 체수와 포살의 위험은 없"기 때문이기도 했을 터이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498쪽, 권보드래 지음
그것은 선택의 문제라기보다 불가피한 변화였다. 많은 이들에게 있어 3.1 운동 후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식민권력에 의해 찍힌 낙인 때문이기도 했고, '더 알게 된' 주체의 어쩔 수 없는 운동성 때문이기도 했다. 마치 더 행복하지는 못할지라도 더 자유로워졌다는 실존의 주체처럼 3.1 운동 세대는 '자유'의 윤리에 충실한 새로운 존재 방식을 모색했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502쪽, 권보드래 지음
'허위의 생'을 거부하고 '가진 자들'과의 결별을 선언한 문학청년들은 어디로 가는가? 그들 중 일부는 "철두철미 예술(...)새로운 정열과 경이"를 지향했지만 보다 다수는 문학이로든 정치로든 현실에 더 깊이 관여하는 길을 택했다. (...) 3.1 운동 이후 청년 세대 문학의 핵심은 '개인성의 고양'이었으되 그것은 군중-대중-다중에 적대적이지 않고 오히려 친화적인 개인성이었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510쪽, 권보드래 지음
저는 3부까지 읽었는데, 이 책 정말 너무 좋습니다 :) 작가님 글 솜씨가 정말 예사롭지 않네요. 빠져들면서 읽게 되네요. 각 장들이 대체로 무명의 구체적인 인물에서부터 출발하는 도입부들도 좋더라구요. 3부까지 읽고 엄청 쌓여 있는 글들 읽으면서 마무리 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 너무 식견이 풍부하신 듯… ㅎㅎ 그냥 대화 흘러가는 것만 봐도 많은 걸 배우네요.
식민지시기에 3.1 운동을 민족주의적 숭고로 재현한 사례는 없다시피 하다. 그것은 이중의 난제였다. 외부적 규제, 즉 직·간접적 검열의 문제가 있었고, 그 숭고를 배반하면서 생활하는 자기 자신을 처리해야 한다는 자아의 난관이 있었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522쪽, 권보드래 지음
3·1 운동이 즉각 독립을 가져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제는 다 안다. (...) 침략주의·강권주의에 맞선 평화주의란 국제 정세를 오인한 결과에 불과했다는 견해가 주류화된 지 오래다. 3·1 운동 이듬해부터 이른바 문화통치가 조선에 시행되기 시작했지만, 그것을 운동의 성과로 인정하는 시각은 대체로 인색한 편이다. 봉기의 시간이 지나가고 나서, 한편으로는 파리평화회의와 워싱턴회의가 끝나고 나서 3·1 운동은 완연히 과거의 사건이 된다. 사회주의가 유행의 초점이 되는 가운데 3·1 운동 때 경험했던 민족의 공동체적 시간은 빠르게 박제화된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523-525쪽, 권보드래 지음
화제로 지정된 대화
오늘 3월 25일 화요일은 4부 3장 '낭만'을 읽습니다. 이른바 삼일 세대가 한국 문단에 남긴 족적을 중심으로 1920년대의 문화를 살펴보는 장입니다. 저자가 애초 그쪽 분야 연구자인 만큼 풍성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10대, 20대 혹은 문인-지식인의 문화야 우리 이미 앞서 유럽 사례도 볼 만큼 봤잖아요? 작년(2024년) 8월에 읽었던 『증오의 시대, 광기의 사랑』에서. :) 이 책에 등장했던 인물 가운데 오토 딕스의 판화가 『3월 1일의 밤』 2부 2장 '약육강식'에서 등장하는데 혹시 체크하신 분들 계실까요? 214쪽.
임시정부에서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등 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한편으로는 그런 국제회의를 불신케 된 사람들도 많았던 것 같다. 워싱턴회의를 '제국주의적'인 행사로 규정하고 대신 소비에트 러시아로 희망을 옮기는 자취는 회의 직전부터 보인다. 3·1 운동 후 여러 달이 지나고 심지어 1~2년이 지날 때까지 계속된 독립에의 기대가 이때쯤 좌절됐다고 해도 되겠다. 그야말로 센세이셔널했던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이 맥락에서 징후적인 글이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530-531쪽, 권보드래 지음
이 중요한 각성은 "과거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이라 하는데, 이것이 곧 3.1 운동을 가리킨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논리적으로 부연하자면 3.1 운동은 곧 '구원을 우리 밖에 구'하고 '목적을 요행에서 구'하려 한 어리석은 행동으로 평가되는 셈이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531쪽, 권보드래 지음
...신상우는 이광수가 꺼내든 문명/야만 이분법을 비판하는 가운데 문명국이라는 유럽 제국에 의해 자행된 각종 학살극을 상기시키며, 그런 문명을 표준 삼을 수 없는 만큼 이광수가 사랑하는 부(富)와 강(强)과 지(知)의 가치 역시 비판되어야 한다고 못 박는다. 문명화 정도는 이제 재부와 강력과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평등과 안전과 자유에 의해 측정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3.1 운동이야말로 문명화를 선도한 사건이다. 그 핵심 요구가 "인권에는 평등을 여(與)하라! 생활에 안전을 여하라! 자유롭게 생(生)하겠다"는 절규였기 때문이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532쪽, 권보드래 지음
거꾸로 해석하자면, 일을 성사시킬 자신과 실력이 없이 터져나오는 봉기는 의존심이나 요행심의 소산에 다름 아니다. 이 논리대로라면 존재란 사건 없이 성장하지 않는다(learning curve)는 명제는 어불성설일 터이다. 더불어 이광수는 3.1 운동 때도 문제됐던 바 있는 각자 행동을 극도로 경계한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533쪽, 권보드래 지음
"우리의 민족적 이상을 말할 때에 문화 한 가지만을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는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이 감각이란, 선진(국)/후진(국) 혹은 개화/미개라는 서열을 문화 부문에 한해서만 철폐한 고식적 대처에 지나지 않는다. 「개척자」에서 낭만적 저항의 한 극점을 보여준 바 있으나 근본적으로 문명과 성장의 서사를 추구했던 이광수는, 스스로 성장의 책임을 달성하기 전에 세계의 변혁과 폭발을 목표하는 일체의 기획을 혐오했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537쪽, 권보드래 지음
3.1 운동을 겪고 상해에서의 경험을 거쳐 귀국한 후 이광수는 이 모두를 주변적이고 잉여적인 존재로 만드는 선택을 감행한다. 청년 세대를 혁명적 존재로 만든 3.1 운동이 이광수에게는 오히려 고착과 보수화의 계기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 지점에서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537쪽, 권보드래 지음
이광수가 시간과 성장의 서사-따라서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타락의 서사를 중시했다면 동인지 세대는 공간의 상징, 회귀와 비약의 서사를 좇는다. 이들은 이미 1910년대 중후반부터 오이켄·베르그송과 신칸트학파 등을 동시대 사상으로 호흡했고, 더구나 제1차 세계대전을 목격하면서 구미 문명의 우월성이라는 신화의 몰락을 절감한 세대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538쪽, 권보드래 지음
3.1 운동에 대한 염상섭의 평가는 두 가닥이다. 하나는 3.1 운동을 통해 개선된 바는 사실상 전무하다는 내용이다. 무단통치가 문화정치로 치장을 바꾸었지만 일본의 경제·문화적 지배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으며, 넓게는 세계적으로도 해방의 과제가 전연 달성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염상섭은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백성이 3.1 운동을 통해 "그래도 우리가 민족적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중외에 선포하였고" "아직은 죽지 않았다는 입증을 하는 데서 마음 든든한 정적 결속을 얻었"다고 평가한다. 말하자면 3.1 운동은 폐색과 해방이라는 이중적 효과를 가져왔다는 것이 평가의 골자라 할 수 있겠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543쪽, 권보드래 지음
염상섭의 시각마따나 3.1 운동은 종착점보다 출발점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볼 때 적극적 의의를 갖는다. 3.1 운동은 개인적·민족적 층위에서 공히 불회귀적 사건인 동시, 실패냐 성공이냐의 질문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종류의 사건이다. 그것을 부정한다면 '나'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존재의 기초이자 폭발적 성장의 계기인 것이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543-544쪽, 권보드래 지음
그렇다고 염상섭이 3.1 운동을 영광의 계기로 수락해버리는 것은 전혀 아니다. 염상섭은 3.1 운동의 기억을 박제화하는 데 반대한다. 그 신화 때문에 상투화하고 그 알리바이 때문에 현재를 정당화하게 되는 기제를 경계한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544쪽, 권보드래 지음
이렇듯 문학사에서 계속 형상화돼 왔음에도 3.1 운동은 아직 미지의 영역이다. 이광수 장편에서의 타락-배신과 심훈 장편에서의 성장-사회주의를 두 축으로 둘 때 그 사이, 후일담 이전 3.1 운동을 그 자체로 탐사한 예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 편재하지만 결코 풍부하지 않은 3.1 운동의 유산 가운데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그 충격과 모순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특이한 지점에 도달하고 있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552쪽, 권보드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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