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0. <3월 1일의 밤>

D-29
@롱기누스 친일 얘기가 나오니까, 예전에 들었던 흥미로운 이야기가 생각나는데요. <녹색평론>의 고 김종철 선생님과 술자리에서 사담을 나누다가 아버지께서 일제 강점기 때 하급 공무원(?)이셨던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창비 계열의 민족 시인으로 아~주 유명하신, 교과서에도 나오는, 한 원로 시인과 나눴던 대화도 들려주셨는데, 그 분의 처지도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둘이서 막거리를 마시다가 '어휴, 우리도 친일 부역자의 자식이네요.' 하면서 씁쓸하게 웃으셨다는 얘기를 전해주셨어요. 김종철 선생님 말씀을 듣고 나서, 일제 강점기 35년, 1905년부터 시작하면 거의 40년 한 세대가 넘는 시간 동안 글 좀 읽고 쓸 줄 아는 조선 청년의 선택지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과감하게 외국으로 건너가서 (어느 시점에서는 국내 독립 운동의 싹은 거의 짓밟혔으니) 해외 독립 운동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건 거의 소수였을 테고. 국내에 남을 수밖에 없었던 다수의 젊은이의 선택지는 결국 그나마 이런 직장(하급 공무원, 각종 조합이나 은행, 친일 부역 기업의 직원 등)뿐이었을 테니까요. 그들은 해방 후에 새 나라의 초석을 마련하는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일제 강점기 때의 자신의 행적을 어떤 식으로든 반성하거나 변명하거나 은폐하거나 했어야 했겠죠.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렇게 생각하면 숨 쉬는 것 자체가 부역인 거죠. 30년 이상 자기 나라 말을 쓸 수 없다면 부역이란 말조차 의미없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그나마 해방을 맞았으니 잘 잘못을 가리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요? 이광수의 친일 때문에 그의 문학을 불편해했었죠.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윤치호를 다루니까 당대 지식인들의 회의가 이해가 갈 것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이루었다는 건 새삼 대단한 일이란 생각이 듭니다.
우리 지방만이라도 독립, 자치를 하자"는 결정은 3.1 운동을 통해 종종 발견되는 경향성이다. 식민통치의 수직성, 일원성, 관제성에 반해 봉기 주체들이 수평적, 다원적, 공동체적 대응 양상을 보여주었다고 할 때 그 증거로 들어도 좋을 경향이기도 하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121쪽, 권보드래 지음
3.1 운동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으나 독립 그 자체를 현실화하지는 못했다. 독립적 권리(independent right)도 획득하지 못했다. 대신 1910년대를 통해 유예됐던 일본에 대한 적대를 확고하게 했고 '독립했더라면' 맞이했을 미래에 온갖 유토피아적 소망을 투사하게끔 했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123쪽, 권보드래 지음
사람들은 '독립'에 실로 각인각색의 열망을 투영했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124쪽, 권보드래 지음
그러나 '독립'은 민족적 불만의 해소 이상을 가리킨다. 3.1 운동기의 구호, '독립만세' 혹은 그 축약형으로서의 '만세'에 이르면 더욱 그렇다. '만세'는 불만의 승화이자 희망의 표현인 동시,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질서를 축원하고 환영하는 기호다. (...) 3.1 운동 당시 '만세'와 '독립은 민족해방으로 소진되지 않고 계급 이동으로 다 해소되지 않는 미정형의 유토피아적 충동을 표시한다. '만세'가 저마다의 불만과 희망을 표현했듯 '독립'은 그런 불만과 희망이 해결된 미래상을 지시했다. 인민은 고통스런 현실이 철폐되길 소망했고 또한 현재의 부조리를 보상할 만한 새 나라를 꿈꾸었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125쪽, 권보드래 지음
"희망과 요구, 불쾌와 평화의" 또한 '희열과 공포가 뒤섞인" '만세'란 그 희망, 요구, 희열, 공포의 방향이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 또한 의미했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130쪽, 권보드래 지음
'좋거나 언짢거나'의 방향성보다 '새로운 세계'의 인력 자체가 더 중요한 순간, '만세'는 그 순간의 발성법이었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131쪽, 권보드래 지음
3.1 운동은 1910년 강제병합 당시 '의외로 평온했던' 배후의 대중 심리, 즉 '병합' 후를 일단 방관했던 태도가 불만과 분노로 귀결되었음을 알려주는 사건이었으나, 비교급 속에서나마 대한제국기의 과거가 전면 긍정되기는 어려웠을 터이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132쪽, 권보드래 지음
토지에 대한 희망 외에도 '독립'에 얽혀 있는 생활주의적 현세주의적 기대는 다양했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135쪽, 권보드래 지음
천도교에 있어 '독립'은 교단 기구의 사회화 및 천도교인들에 대한 보상의 실현을 의미했다. (...) 그것은 동학농민운동 시절부터의, 또한 동학 내 분파에서 출발했던 1900년대 일진회의 기대를 닮은 순진한 야망이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138쪽, 권보드래 지음
결국 인종차별 철폐 조항은 영국 대표단의 완강한 거부로, 그리고 "이 조항을 통과시킨다면 전 세계적으로 인종 문제를 일으키게 될 것"이라는 윌슨의 발언으로, 표결에 부쳐지지 못한 채 사산된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142쪽, 권보드래 지음
조선에 동정적이었던 일본인들 대부분은 최종적으로 조선의 독립이 아니라 자치를 대책으로 삼았다. 일본 내 정치에 있어서도 천황제를 유지하는 위에서의 민본주의적 개혁으로 그 한계를 그었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143쪽, 권보드래 지음
3.1 운동의 봉기 대중은 일본인들과 달리 모든 층위에서의 '개조'를 원했다. 그들은 동등한 지평 위의 세계를 바라보고 세계의 개조에 희망을 걸었다. (...) 조선인들이 열강, 특히 미국에 걸었던 기대가 높았던 것은 사실이다. 3.1 운동의 기원에서부터 그 자취가 엿보이기도 한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143쪽, 권보드래 지음
그러나 3.1 운동의 대중은 민족자결주의가 윌슨의 독자적 발명품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뚜렷이 의식했다.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 약소민족의 해방투쟁이 먼저 있었고, 윌슨의 "도덕적 동기와 선의"란 그 투쟁을 인정하고 명명한 데 있었음을 간파했던 것이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144쪽, 권보드래 지음
내가 고향 마을에서 부른 만세가 한반도로, 일본으로, 세계로 퍼져 나가리라는 이 낙관적 기대는 물론 거의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폭압적 식민통치에 시달리던 평범한 조선인으로서 감히 지역과 민족과 세계를 의식하며 사고하고 행동한 경험은 개인과 민족의 생애에 오래도록 영향을 남겼다. 3.1 운동의 '만세'는 한반도를 넘어 전 세계를 지향했으며, '독립'이라는 말로써 상상한 미래상 역시 전 지구를 겨누었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147쪽, 권보드래 지음
조선인들만이 순진하고 낙관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유럽의 노회한 정치가들마저 유토피아니즘에 의지하려 한 예외적 시기였다. 미래 세대인 우리가 보기에 이것은 물론 환상에 불과한 한때다. 파워 폴리틱스는 그 순간에도 틀림없이 작동했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권보드래 지음
더 나아가서 보자면 프랑스혁명 전후 본격화되어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절정에 올랐던 역사적 유토피아니즘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할는지 모른다. 좌우를 막론하고 20세기 전체를 지배했던 이 사상이 가장 순도 높았던 것으로 보이는 때가 3.1 운동 전후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148쪽, 권보드래 지음
실제로 파리평화회의 이후 잠시 잊힌 듯 보였던 국가 간 이권다툼은 더 극심한 형태로 분출되었다. (...) 프로이트는 당시의 코스모폴리탄적 분위기에 대한 혐오를 감추지 않으면서, 그것은 유토피아의 현현이 아니라 병리적 증후에 불과했다고 쓴다. 과연 20세기의 역사는 '진보'와 '유토피아'의 사상이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증명했다. 대중 정치와 유토피아의 이념이 결합할 때의 무시무시한 부작용은 오늘날 세계가 짐 지고 있는 역사적 과제 중 하나다.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148쪽, 권보드래 지음
3·1운동으로 독립에 성공했다면 조선은 어떤 나라를 만들었을까? 군주제와 공화제 사이 정체뿐 아니라 소유와 세금, 노동과 군대, 교육과 보건 등 제반 정책을 결정하는 데 어떤 원칙과 방법을 동원했을까? 누가 인민을 대표해 그 원칙과 방법을 구성해 나갔을까? 과연 식민통치 시절에 비해 더 나은 세상이 되었을까? 일본인과의 차별은 당장 해소되었겠으나 식민통치에 대한 주된 불만, 즉 세금 증가와 강제 노역, 폭압적 통치 질서 등을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을까?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p.122, 권보드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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