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꾼, 목동, 비평가』 혼자 읽기

D-29
[따라서 무조건적인 기본 소득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문제들 가운데 재원 마련은 가장 작은 문제이다. 훨씬 더 긴장감이 도는 것은 심리적 문제이다. 여기서는 현재와 미래의 인간상이 중심에 등장하고, 세계관을 비롯해 믿음의 원칙, 세속적인 선입견, 문화적 특성, 기질이 충돌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좌파들은 특히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는 생업 노동이 필요하다는 관념에 집착해 왔다. 하지만 여기서 〈인간〉이란 누구인가? 아우디의 개발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열린 전문가 토론회에서 한 기술자가 내게 인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인간이란 본디 〈문제 해결자〉로, 무언가가 최상의 상태가 아니면 항상 인간은 그것을 개선하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아우디에서 일하는 기술자들은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내 주변에는 무언가를 발명하는 것은 고사하고 무언가를 개선하겠다는 생각조차 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 〈인간〉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다. 니체가 말했듯이 인간은 〈확정되지 않은 동물〉이다. 또한 철학자 카를 슈미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다!〉 인간은 너무 많은 부분이 자신이 살아가는 조건에 종속되어 있어서 명확하게 정의 내릴 수 없다. 중세의 유럽인들에게는 너무나 자명했던 것, 예를 들어 신의 섭리, 또는 신이 다스릴 천년 왕국이 곧 지상에 도래할 거라는 확고한 믿음은 우리가 여전히 같은 유럽인임에도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생소하기 짝이 없다. 〈인간〉이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돈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삶의 의미가 사라진다는 주장도 굉장히 잘못된 규정이다. 이 규정에 따르면 전업 주부, 연금 생활자, 유한마담, 왕의 자식, 밀림의 원주민, 마사이족 전사는 모두 불행한 인간으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다.]
[다만 현재 독일과 같은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업 노동을 잃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지 못하면 스스로를 무척 못나고 쓸모없는 인간으로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인간학적 문제가 아니라 매우 현대적인 문제이다. 인간이 생업 노동으로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삶〉에서 무언가를 이루어 내야 한다는 것은 19세기의 농부나 공장 노동자들에게는 아주 낯선 문제였다. 우리가 자신의 재능을 계발하고, 창의력을 발휘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을 실현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고도로 현대화된 사회의 요구였다. 이 요구는 20세기가 흐르면서 서서히 생겨났는데, 그러다 지금은 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를 못난 인간으로 여기는 시류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생업 노동으로 그런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만일 그들이 자기실현이나 재능 발휘를 생업 노동과 연결시키지 않는 사회에 산다면, 그 자체가 분명 하나의 진보일 것이다. 그런데 작금의 사회에서 생업 노동의 상실은 동시에 사회적 인정의 상실, 즉 자존감의 타격을 의미한다. 이런 타격을 받은 사람은 스스로를 디지털 혁명의 패배자로 느낀다. 이들에게는 자기 삶을 창조할 능력이 누구에게나 본디부터 주어져 있다고 이야기하는 인문학 서적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기본 소득의 이념에서 바뀌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기존에 유지되던 관료 행정의 광범한 폐지로 인해 그전에 하르츠 Ⅳ 등급을 평가하던 그 사람들조차 실업자로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이후 이들이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직업들, 예를 들어 소포 배달이나 콜센터 상담원 같은 직업들조차 일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사회적 인정을 더 받지는 못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평생 학습〉의 필요성을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것은 기껏해야 냉소를 부를 뿐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디지털 지하 경제가 엄청나게 성장한 나라는 다른 곳이 아닌 바로 남부 유럽이고, 그런 상황이 고전적 노동 사회의 위기를 가리고 있다. 특히 스페인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집을 에어비앤비를 통해 세놓으면서도 사회 보험료는 전혀 내지 않는다. 게다가 예전에는 훌륭한 미풍양속이었던 행동, 예를 들어 누군가를 차에 함께 태우고 가거나 빈방을 단기간 동안 대학생에게 쓰게 하는 행동도 이제는 냉혹한 돈벌이 수단이 되었다. 공동체적 행동이 사업 아이디어가 되고, 실리콘 밸리의 긴 그림자가 일상의 도덕을 파괴한다. 이것은 결코 사회에 유익하지 않다.]
[생업 노동의 세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기본 소득의 반대자들이 생각하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그리고 2018년의 독일 현실에서는 임금 노동과 사회적 인정 사이에 여전히 끈끈한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생업 노동은 인정과 만족, 그리고 자신이 이 사회에 필요한 존재라는 감정을 안겨 줄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노동 사회에서 삶의 만족과 사회적 위상, 자존감은 직업 활동에 달려 있다〉라는 부터베게의 말은 이중으로 문제가 있다. 첫째, 그 말이 맞지 않는 사람도 많다. 둘째, 이제는 그런 노동 사회 자체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어쨌든 노동 사회가 우리 사회의 독점적인 주도 이념으로 자리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어찌 됐건 이 모든 것이 기본 소득에 반대하는 논거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을 실업자로 만드는 것은 기본 소득이 아니라 디지털 경제이기 때문이다. 기본 소득은 물질적 궁핍을 완화하려는 시도이고, 임금 노동을 하지 않는 상태를 심리적·사회적 압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노력이다. 가치 전환 없이는 기본 소득도 별 의미가 없다(이 점에서는 무조건적 기본 소득의 비판가들의 말이 맞다). 기본 소득의 열화 같은 지지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은 해결이 아니라, 그 해결을 위한 하나의 주춧돌일 뿐이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무조건적 기본 소득이 독일의 복지 시스템을 망가뜨릴 거라는 반박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우리의 복지 국가는 19세기에서 20세기로 이어진 노동 사회와 성과 사회의 산물로서, 많은 사람이 사회 보험에 가입할 의무가 있는 직장에서 일하고 완전 고용이 사회적 목표였던 시절에 뿌리가 닿아 있다. 이 시절에 뿌려진 씨앗이 독일 정치인 노르베르트 블륌이 〈연대적 자조(自助)〉라고 부른 형태, 즉 〈상호성의 원칙〉에 기초한 복지 국가로 성장했다. 이것이 노동 사회와 성과 사회의 거대한 업적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특히 기본 소득에 대해 비판적인 좌파에게는 그것이 성과 이념과 동떨어진 점이 거슬리는 모양이다. 과거의 복지 국가는 내는 만큼 받고, 그러면서도 서로를 지원하고 돕는 사회 보험료 납입자들의 성과 공동체였다. 반면에 기본 소득은 전적으로 세금으로 지불된다. 사회 보험료를 냈다고 해서 그 대가로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얼핏 정당하게 들리는 것도 엄밀하게 보면 소박한 낭만주의일 때가 많다. 평생 사회 보장 보험료를 내면서 벌이가 적은 직장에서 일한 사람은 지금도 빠듯하지만, 미래에는 훨씬 더 적은 돈으로 살아야 한다. 현재 예상되는 기본 소득 액수인 1천5백 유로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것을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존의 복지 시스템에 이상한 방식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다. 혹시 가난한 연금 생활자와 한 번이라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을까? 그것이 모두에게 적절한 최저 생계비보다 정말 더 공정할까? 〈공정함〉은 모호한 개념이다. 물론 누구에게나 원하는 대로 공정함을 해석할 권리는 있다. 자유주의자는 상한선 없이 무한대로 부를 획득할 기회가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 것을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사회주의자에게는 피자를 똑같은 크기로 나누는 것이 공정하다. 그런데 철학적으로 보면 이런 생각들 중에 어느 것도 〈본질적으로〉 다른 생각보다 더 공정하지는 않다. 그래서 사회적 시장 경제가 앞서 언급한 두 생각의 균형을 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물론 변하는 경제적 조건하에서 말이다. 복지 국가가 위협받고 있다면, 그것은 글로벌 경제가 급속도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독일의 복지 시스템이 지금까지처럼 유지될 수 있고, 생업 노동을 기반으로 그 시스템에 계속 재원을 마련할 수 있으며, 그런 가운데 하르츠 Ⅳ 등급의 액수만 높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실을 모를뿐더러 미래에도 무지한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과거의 상태도 그대로 유지되는 일은 없다. 시들어 가는 꽃에다 아무리 물을 갈아 주어도 시듦은 막을 수 없는 법이다.]
[인간의 품위를 지켜 줄 기본 소득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회를 원한다. 인간의 가치와 생업 노동의 연결 고리가 폭넓게 끊어진 사회이다. 부유한 국가들이 사회적 약자의 생계를 보장하는 것은 문명사의 커다란 진보이다. 이러한 진보에 돈을 대는 것은 평범한 생업 종사자들이 아니라 평생 쓰고도 주체하지 못할 만큼 많은 돈을 갖고 있어서 증권 거래소에서 주식 놀이나 하는 사람과 기업, 은행, 기관이어야 한다. 이들의 막대한 수익은 조금 줄어들 테고, 번개처럼 빠른 사업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인기를 누리지 못할 것이다. 〈고통을 견뎌 내는 사람들〉은 여기서 살아남을 것이다. 당연히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훨씬 더 심중(深重)한 문제는 구조적 딜레마이다. 디지털화가 생산성을 엄청나게 높인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로봇과 컴퓨터가 장차 인간들보다 더 많은 것을 더 저렴하게 생산한다면, 어째서 생산성의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겠는가? 물론 그 결과는 많은 사람들이 진단하는 대량 실업이다. 그전에 벌이가 좋은 직업을 갖고 있던 사람은 이제 예전과 같은 호사를 누릴 수 없고, 훨씬 적은 돈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때 인터넷 기업들이 좀 더 효과적으로 고객을 확보하려고 고객의 개인 정보를 평가하는 것은 국민 경제적으로 전혀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의 주머니가 가벼워질수록 소비 규모는 줄어든다. 인터넷 기업이 아무리 교묘한 방식으로 고객에게 접근하더라도 말이다. 생산의 합리화는 국민 경제적으로 더 많은 이익을 약속하지만, 소비의 합리화는 그렇지 않다. 어쨌든 구매력이 동시에 상승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데 행복 순위를 보면서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행복은 정말 객관적으로 측정이 가능할까?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행복하다고 느끼는 감정은 매일, 아니 가끔은 시시각각 바뀌지 않을까? 행복 경제학은 좀 수상쩍은 분야이다. 정확하게 측정될 수 없는 것을 정확하게 측정해 내기 때문이다. 행복을 측정하려는 사람은 행복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다! 행복에 기여하는 것, 즉 관심과 존중, 신뢰 문화, 자존감, 자기 효능감, 자신의 욕구를 처리하는 기술, 생존 불안을 가지지 않는 것, 좋은 환경, 친구, 이 모든 것들은 고대 그리스 이후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독일 같은 부자 나라는 국민의 행복을 향상시키거나 유지하기 위해 더 이상의 물질적 성장이 필요하지 않다. 국내 총생산이 증가하는 비율만큼 행복이 증가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사람들을 좀 더 행복하게 해주려고 국내 총생산을 늘릴 필요는 없다. 다만 국내 총생산의 증가는 옛 스타일의 복지 시스템에 재원을 마련하고, 경제 동력을 계속 밀어붙이는 데 필요하다. 우리에게 더 많은 복지와 부를 약속하는 것이 바로 이 경제 동력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더 이상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닐뿐더러 에너지 소비와 자원 착취의 증가, 지속적인 기후 변화, 쓰레기 양산을 야기하고 있다. 모든 기술적 진보는 인간에게 안락함을 제공하는 동시에 인간 삶의 차원을 축소시킨다. 예를 들어 19세기와 20세기 초의 기계 시대는 발전한 사회에 동력을 불어넣고, 사회를 더 시끄럽고 요란하고 분주하고 다채롭게 만들었다. 반면에 고요함과 한가함은 가치를 잃었고, 자기만족과 자족은 더 이상 미덕이 되지 못했다. 자연 역시 있는 그대로의 모습 이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대신, 이제는 효율적이고 최적으로 이용하고 착취해야 될 자원일 뿐이었다. 자연과 교류한다는 것은 최대한 자연을 바꾸는 것을 의미했다. 삶은 기계 공정처럼 시간으로 쪼개졌고, 변화는 존재보다 더 중요해졌다.]
[삶은 기계 공정처럼 시간으로 쪼개졌고, 변화는 존재보다 더 중요해졌다. 곳곳에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가 도사리고 있었다. 현대는 현 상태에 대한 만성 불만의 시대였고, 다들 어디서건 현재보다 더 나은 것을 갈구했다. 20세기 초에는 이런 시대적 흐름을 내면화하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말이다. 20세기 전환기 직후에 태어난 내 조부모 세대가 전반적으로 갈망한 것은 위험이 아니라 안정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경제 공황, 황국(皇國)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으로의 체제 변화, 또 이 공화국에서 히틀러 독재를 거쳐 독일 연방 공화국으로의 전환, 이런 요동치는 역사적 사건들을 줄줄이 겪은 뒤에야 비로소 평온과 습관, 틀에 박힌 생활, 어느 정도의 부를 찾을 수 있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그리고 1980년대에는 기대가 더 커졌다. 사람들은 더 많은 여행과 소비, 더 높은 지위를 원했다. 하지만 사실 펑크족과 록스타, 포뮬러 자동차 경주 선수가 아닌 다음에야 누가 파괴적인 삶을 원하겠는가? 광고가 날마다 더 많은 소비에 대한 탐욕을 부추기더라도 디지털화의 새로운 약속, 지속적인 변화, 전면적인 경제 변혁, 지금까지 통용되던 많은 경제적 규칙들의 몰락 속에서 사는 삶은 오늘날에도 대다수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건 인간과 기계의 융합, 현실과 허구의 융합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에 대한 지지층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실리콘 밸리 투자자들의 논리는 독일의 소도시 림부르크와 부퍼탈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현재 독일에는 몸으로 직접 하는 체험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분명 더 많다. 그들에게는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이 선호하는 것은 가상 세계가 아닌 현실 세계이다. 『세계 행복 보고서』가 보여 주듯 그들의 행복은 기술적 진보로 측정되지 않고, 예부터 전승되어 온 인간성의 영역으로 측정된다.]
[이것이 맞는다면 모든 유토피아의 목표는 가능한 한 인간성을 많이 지키고 되찾거나, 아니면 심지어 변화된 시대의 흐름 속에서 인간성의 반경을 확대하는 것이다. 제1차 산업 혁명이 인권에 대한 계몽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더 이상 쓸모 있는 도구로 보지 않기 위해 노동 운동을 교정 수단으로 필요로 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제4차 산업 혁명의 부정적 측면에 반기를 드는 강력한 노동 운동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노동 세계를 더 인간적으로 구축하는 것이 새삼 중요해졌다는 말이다. 또 중요한 것은 생업 노동 이외의 영역에서도 인간적인 것과 진실성을 지키고, 기술로 인한 인간상의 축소에 여지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계 부품으로서의 인간, 또는 세금을 내는 데이터 집합체로서의 인간, 이 두 인간상 뒤에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동일한 경멸이 깔려 있다.]
[이로써 과제는 명확해졌다. 극단적인 효율성의 시대에서 효율성과 다른 무언가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리콘 밸리가 꿈꾸고 부르짖는 기술적 발전은 우리를 〈슈퍼맨〉이 아닌, 보조 수단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의 수공업적 능력은 사라지고, 언어 표현은 제한되고, 기억력은 외장 메모리에 내맡겨진 채 감소하고, 판타지는 규격에 맞춘 이미지들에 구속되고, 창의력은 오직 기술적 모델만 좇으며, 호기심은 편리함에, 인내력은 만성적인 조급함에 자리를 내준다. 우리는 재미없는 상태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한다. 〈슈퍼맨〉이 이런 것이라면 누가 그런 존재가 되고 싶어 하겠는가?]
[인류의 역사에서 문화는 삶에, 기술은 생존에 복무해 왔다. 오늘날 기술은 우리의 삶을 규정하지만, 어떤 문화가 우리의 생존을 보장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유토피아의 사명이다. 좋은 이유에서 사랑받는 〈인간적인〉 가치들이 살아남고, 인간종 역시 멸종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미 한 가지 중요한 영역이 언급된 바 있다. 무수한 활동과 생업 노동 사이의 경계는 더 이상 고정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 경계가 고정된다면 두 가지 계급 사회가 도래할 위험이 있다. 즉 한쪽에는 기본 소득과 소비, 오락으로 살아가면서 데이터 소유자로서만 약간의 가치가 있는 〈쓸모없는 인간들〉, 다른 쪽에는 돈을 점점 더 많이 벌고, 자신의 직업을 자식에게 물려주며, 자신들만의 〈엘리시움〉에서 사는 소수의 부류로 이루어진 사회 말이다. 이런 위험을 없애려면, 원칙적으로 모든 기본 소득 수급자에게 시간제 근무든 전일제 근무든 창업이든 다시 일을 하게 하고, 자기 삶의 건설자로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것을 용이하게 해주는 모델이 필요하다. 변화된 노동 시장의 조건하에서는 생업 노동 없이 2년을 사는 것도 더 이상 사회적 오점이 되지 않아야 한다. 물론 미래에도 잘 교육받은 전문가는 분명히 필요하다. 오후에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에 사냥하거나 양을 치지 않는 그런 전문가 말이다. 하지만 이들은 사냥꾼과 목동, 비평가들이 한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옮기는 데 장애가 되는 것들을 모두 치워 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추가 수입은 기본 소득으로 계산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의 주문(呪文)은 충분한 물질적 안전장치에 기반한 〈자기 조직화〉와 〈자기 책임〉, 〈자기 주도〉이다. 그런데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구축하고, 계획을 세우고, 자신이 하는 일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는 것은 조건이 많이 필요한 능력이다. 그런 기술을 배우거나, 아니 최소한 잘못된 교육으로 그런 기술을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만이 자신의 삶을 장악할 수 있다. 이런 조건하에서야만 좋은 정보를 얻고 스스로를 구축해 나갈 목적으로 디지털 수단을 활용하는 자의식 강한 새로운 시민 계층이 실제로 생겨날 수 있다. 게다가 미래의 인간적 사회에 대한 문제는 단순히 〈밑에서부터〉 결정될 사안이 아니다. 사회적 변화라는 것이 늘 그렇듯 스스로를 구축하는 시민은 의식 전환을 추진하는 국가 정책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큰 도움이 되는 것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 네트워크가 아니라, 폐쇄적인 시스템으로 작동하지 않는 소셜 네트워크이다. 데이터 스파이 기관들도 여러 형태의 교환을 위해 거대 플랫폼을 만들기는 하지만, 그들의 무대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상업적 이윤이다. 플랫폼은 그 자체로 사용자들의 이해관계와는 완전히 구분되는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소셜 네트워크 운영자들이 사용자들의 데이터로 하는 일에 사용자들이 동참하는 경우는 없다. 그들의 사업 모델은 투명함이 아니라 흑막이다. 그들의 힘은 그들이 벌써 오래전부터 관여하지 않는 행위자가 아니라,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는 행위자로 이해될 만큼 막강하다. 따라서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사람은 권력의 중심추가 정치 영역에서 기술 콘체른의 영역으로 이동하는 것에 기여한다. 그렇다면 자기 주도권은 내가 이러한 디지털 공간으로 들어갈지, 아니면 들어가지 않을지 결정하는 시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결정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몹시 힘들게 느껴진다. 그 결과가 너무나도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의식 경작〉 ─ 키케로의 〈cultura animi〉(정신의 밭을 간다는 의미로 〈정신의 도야,〉 〈정신의 육성〉으로 번역할 수 있다.)라는 말에서 빌려 온 것이다 ─ 의 두 번째 지점은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일상적인 일과 상황의 가치를 예전처럼 다시 좀 더 높이 인정하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들어가자면 자신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전자 기기에서 나오는 삑삑거리는 소리와 새로운 이미지에 의지하지 말고 우리 주변의 사물 자체를 즐기라는 것이다. 언젠가 구글의 서배스천 스런 부사장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인간은 반복적인 일을 해선 안 된다. 그러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 아깝다.〉 이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하는 말인 듯싶다. 우리의 삶은 전적으로 반복적인 일로 이루어져 있고, 그런 일을 하는 것은 결코 아깝지 않다. 우리는 매일 먹고, 마시고, 자고, 이야기하고, 포옹하고, 요리하고, 함께 침대로 간다. 이런 반복되는 동형성과 일상적 제식(制式)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충만한 삶에 속한다. 이런 일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외적인 목표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그런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으로 돈을 벌지도 않는다. 카드를 치거나, 축구를 하거나, 정원을 가꾸거나, 어항 속의 물고기를 돌보거나, 개를 키우거나,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것은 생존에 꼭 필요한 일도 아니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우리를 부자로 만들지도 않는다. 물론 큰돈을 벌려고 카드를 치는 전문 노름꾼이나 개 사육사 같은 사람들은 다르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그 모든 일은 우리 사회에서 성과로 인정받지도 않는다. 보험 제국을 건설하거나 위험한 농약을 전 세계에 파는 활동과는 반대로 말이다. 인간은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인정받는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되는 활동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오직 그 자체로만 목적이 있는 활동도 많다. 이마누엘 칸트는 2백 년도 더 전에 그런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예술의 본질로 규정했다.]
[인간은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인정받는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되는 활동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오직 그 자체로만 목적이 있는 활동도 많다. 이마누엘 칸트는 2백 년도 더 전에 그런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예술의 본질로 규정했다. 미래의 인간을 예술가로 표현한 오스카 와일드의 말도 같은 맥락이다. 21세기에도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일을 하는 것은 삶의 기술에 큰 몫을 차지한다. 유머와 알코올, 스포츠, 그리고 대부분의 섹스는 어떤 실용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삶의 행복을 높이는 데 기여할 때가 많다. 유토피아주의자라면 당연히 이 모든 것을 고려해야 한다. 모든 유토피아의 핵심에는 자발적 동기, 즉 자기 규정적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각양각색의 화려한 변주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것도 바로 이 자발적 동기다. 반면에 늘 쓸모 있는 일만을 하는 것은 저급한 동물의 특징이다. 개미는 매일 쓸모 있는 일만 한다. 생물학적으로 포기할 수 있는 것의 수많은 다양성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행복은 〈목적의 독재〉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우정은 비용-이익의 계산에 따라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식을 그런 계산으로 키우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당연히 자식에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건실한 삶에 도움이 되는 것만을 하라고 주입할 수 있다. 또한 더 많은 돈과 명성을 얻으려면 모든 분야에서 항상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교육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다 잘못되면 오스카 와일드가 말한 것처럼, 아이들은 오직 가격만 알 뿐 가치는 모르는 인간이 된다. 남들에게는 교향곡에 대한 충만한 기쁨이나 깊은 문학적 체험이 그들에게는 판매할 수 있는 콘텐츠가 된다(누군가 지적·감성적 교양이 없는 사람이라는 건 이 단어를 즐겨 사용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예를 들어 행복한 어린 시절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명성과 성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일까?]
[문화는 단순히 쓸모 있는 것 이상이다. 그리고 진보는 그 자체로 좋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인간성으로의 진보일 때 좋다. 바로 그 때문에 실리콘 밸리의 대표적 이데올로그들은 자신들의 사업 모델을 그런 진보로 포장해서 팔려고 무던히 애쓴다. 다시 말해 투명성과 무한한 소통, 인식적 한계의 완전한 극복을 진보로 찬양하기 바쁘다. 인간은 항상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으려고 하지 않았던가? 또한 제한된 인간 의식의 좁은 상자를 탈피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늘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원치 않고, 오히려 인간과 사물을 고이 지키고 돌보면서 그것들에 애정과 충심을 다한 사람들도 있었다. 여기서도 상당한 주의가 요구된다. 즉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에 대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입맛에 맞게 재단한 발언들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자의적인 주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삶에 대한 긴 안목과 실재적인 인간들의 욕망에 대한 명철한 인식이다. 그것도 끝없는 논쟁과 정치적 토론을 통해서 말이다. 어쨌든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는 것을 지키고 돌보는 것 역시 과거의 것을 버리고, 내던지고, 탈피하고, 방치하고, 폐기하고, 평가 절하하는 것만큼이나 인간의 욕망에 속하는 듯하다. 젊은이들은 태블릿 PC만큼 증조부가 썼던 소파를 사랑한다. 변화는 어떤 경우든 존재보다 더 가치 있지 않고, 단절도 연속성보다 결코 부가 가치가 더 높다고 할 수 없다. 19세기가 흐르는 동안 서유럽 사람들이 신을 점점 믿지 않는 대신 진보를 점점 숭배하게 되었다고 해서 진보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미래는 현재보다 본질적으로 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늦어도 프랑스의 실증주의자 오귀스트 콩트와 함께 19세기에 진보는 민간 신앙이 되었다. 브라질 국기에 적힌 〈질서와 진보Ordem e Progresso〉라는 글귀도 콩트의 철학에서 빌려 온 것이다.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더 뛰어난 것을 향한 열망이고, 진보는 그 목표이다. 이러한 흐름하에서 만족의 기본 상태는 종말을 고한다. 현재는 비본래적인 상태가 되고, 오직 미래만이 중요하다. 이런 식으로 현 상태에 대한 불만은 빅토리아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진보의 동력이 되었다. 고객의 만족은 결코 오래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고객은 새로운 상품을 구입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과거의 욕구 충족 사회는 이제 욕구를 일깨우는 사회가 되었다. 이런 사회에서 행복은 항상 미래에 있다. 이러한 특색이 일종의 더 높은 논리나 이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모든 민족들의 삶의 지혜, 특히 동아시아 철학은 그런 주장에 상반되는 면을 보여 준다. 오늘 하루의 가치를 인정하고 지키고 음미하는 것은 기독교뿐 아니라 고대의 지혜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많은 똑똑한 기기들이 모든 것, 예를 들어 걸음 수, 층계 수, 혈압, 맥박, 수면 시간, 칼로리, 기분, 일과, 생리 기간, 비타민, 간 수치 같은 것을 측정해 주는 사회에서 하루를 데이터 속에 있는 것과 다르게 보내기는 쉽지 않다. 줄기차게 자신을 측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중심 밖에서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사람은 자신을 존재하는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서 다룬다. 이 대목에서 마르틴 젤의 말이 떠오른다. 세계의 측정할 수 있는 측면은 세계가 아니라 단지 세계의 측정할 수 있는 측면일 뿐이다! 이 말을 우리의 맥락에 맞게 변주하자면, 측정할 수 있는 자아는 자아의 측정할 수 있는 측면일 뿐이지 자아 자체는 아니다. 기억 속에 있는 것 중에 데이터보다 지루한 것이 있을까?]
[건강하게 살고 싶은 것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망이다. 그런데 건강 문제에서 항상 가장 효율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효율성 추구는 자연에 의해 인간에게 본디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다. 자연은 효율적이지 않다. 자연의 본질은 오히려 탕진이다. 다윈도 영향을 끼친 빅토리아 시대의 일차원적인 인간상은 생물학적 자연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일방적으로 협소화시켰다. 카를 마르크스는 다윈과 같은 시대에 이미 그 부분을 간파했다. 그는 이렇게 슬쩍 비꼰다. 〈다윈이 영국 사회에 존재하는 분업과 경쟁, 새로운 시장의 개척, 《발명》, 맬서스식 《생존 투쟁》을 야수와 식물의 세계에서 다시 찾아낸 걸 보면 참 기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55 그러나 생물학자와 진화 심리학자들은 오늘날에도 자연 곳곳에 나름의 〈전략〉과 〈장점〉, 〈계산〉이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이런 것들을 추적해 보면 동물의 행동은 에너지를 절약하는 것에 그 목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전체로서의 자연은 그 자체로 무의미한, 거대한 에너지의 탕진임에도 말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보면 인간에게 주어진 최적화 사명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자기 최적화가 왜 개인이나 심지어 인간종의 목표여야 할까? 인간은 왜 기계처럼 표면이 매끈해지고 아무 냄새도 나지 않을 때까지 동물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할까? 실리콘 밸리의 디지털광들은 자기 몸과 건강한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세계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 그곳에서 더 만연한 위생 집착증과 생식 불능 망상을 생각해 보라.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자신을 갈고닦으며 인식과 미덕을 넓히라고 추천했지만, 인간이 실존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기껏해야 플로티노스의 밀교적 가르침 속에서나 발견된다. 여기서 목표는 기계가 아니라 천상의 일자(一者)*와의 융합이다.]
[세계가 미리 정해진 경로에 따라 움직인다는 허구 같은 이야기는 실리콘 밸리가 자신들의 미래 판타지를 인류사의 확정된 미래로 팔기 위해 내놓은 마케팅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적 유토피아는 그런 것에 현혹되지 않는다. 또 그것은 디지털 기술을 인간 발전의 목적이 아닌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보조 수단으로 여긴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육체적으로 결함이 있는 인간이 예부터 자신의 지능을 이용해 불편한 환경에서 벗어나고, 삶을 좀 덜 수고스럽게 하려고 노력해 온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가능한 한 많은 편리함과 안락함이 인간의 목표가 되지는 않았다. 편리함의 증가는 곧 행복의 감소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인간에게 더 이상 할 일이 남아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극단적인 편리함의 상태는 정지 상태이다. 인간은 꼼짝 않는 스톤피시나 거미, 폴립이 아니라 늘 움직이는 동물이다. 그런 동물로서의 인간이 단추 하나 누르고 터치 한 번 함으로써 더 이상 아무 할 일이 없게 될 때 가장 행복할 거라는 생각은 참으로 터무니없는 인간 해석이다. 따라서 인간적 유토피아는 미리 확정된 세계 경로를 전제하지 않고, 인간의 진정한 욕망에 초점을 맞춘다. 시간과 우리의 관계만큼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 주는 것은 없는 듯하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시간이 정말 빨라!〉 〈세상이 갈수록 빨리 돌아가는 것 같아!〉 이 두 문장은 오늘날 많은 인간들이 살면서 갖게 되는 감정 표현이다. 그게 사실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렇다면 우리 문화권의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 대한 주원인은 우리가 시간을 철저하게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우리에게 제공된 가능성들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부산하게 이리저리 쫓겨 다니며 늘 주어진 시간 안에 모든 일을 끝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같은 시간 안에 더 많은 일을 처리하려면 결국 우리는 시간 규범의 노예가 되고, 특정한 시간표를 만든다.]
[디지털 시대를 위한 유토피아는 여기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삶의 속도를 더한층 높이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위협이다. 미래 사회는 휴식 지대와 속도에서 벗어난 해방구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요구되는 것은 전속력으로 몰아붙이는 대신 인간을 이웃이나 환경과 연결시키는 관계들의 가치를 깨닫는 관심의 문화이다. 봇물처럼 자극이 넘치는 우리 사회에서 하르트무트 로자가 말한 그런 〈반향〉을 깨닫고 키우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이 필요하다. 이것을 아이들의 머릿속에 불어넣고 훈련시키는 것은 21세기 교육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다. 지적인 기계들은 지적인 사용을 요구한다. 그런 기계들을 정말 탁월하게 장악하는 것에는 스위치를 아예 꺼버리는 행위도 포함된다.]
[21세기 초의 문화는 〈즉석〉의 문화이다. 〈고객은 모든 것을 원합니다, 그것도 지금 당장. 고객은 게으르고 조급합니다.〉 이것은 무수한 강연장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그 강연자는 만일 자기 자식이 게으르고 조급하게 자란다면 행복할까? 그것도 예를 들어 도널드 트럼프만큼 생각이 게으르고 조급한 인간으로 자란다면? 분명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교육학자들에게는 악몽이나 다름없는 그런 것이 경제 영역에서는 아무 의문 없이 전제될 수 있을까? 우리가 교육적·사회적·정치적·윤리적 이유에서 거부한 이 빗나간 발전 상황을 경제적인 이유로 활용하는 것이 정말 필요할까? 모든 것을, 그것도 즉석에서 원하는 사람은 우리 시대의 거대한 변혁에 제대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다. 관건은 장기적인 사고, 복잡한 과정에서의 결정력, 그리고 윤리적 태도이다. 이 모든 것을 훈련시키는 것은 우리 교육 제도의 중요한 사명이다. 우리 아이들이 미래의 도전들에 대처하기에는 몹시 불충분한 교육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선 다들 동의한다. 물론 일부 교사나 문화부 관료 같은 기존 제도의 몇몇 확고한 대변자들만 제외하면 말이다. 〈독일은 교육을 위해 더 많은 것을 해야 한다!〉 무슨 뜻일까? 단순화하면 여기에는 더 상반될 수 없어 보이는 두 입장이 충돌한다. 많은 경제 대표자들과 일부 대학 교육 전문가들에게 이 문제는 아주 간단하다. 디지털 사회에는 더 많은 디지털 노하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수업 시간에 디지털 기술이 점점 많이 투입될수록, 그리고 STEM 전공*이 더 적극적으로 장려될수록 아이들은 미래의 노동 시장에 더 적절하게 대비할 수 있다. 또한 기업가 정신을 조기에 훈련시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아이들이 나중에 더 많이 창업할수록 학교의 상황은 점점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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