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오늘 밤에 완독을 했습니다.
셰익스피어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이 책을 읽었습니다. 그의 작품 중 유일하게 읽은 희곡이 <한여름 밤의 꿈>이었고, 며칠 전에 <폭풍우(템페스트)>를 읽어서 두 권이 되었네요. 여러 감정이 드는데 두서없이 적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이 책을 읽고 어디 가서 셰익스피어가 이랬다더라 하고 함부로 말은 못할 거 같아요. 저자가 각고의 노력 끝에 이 책을 썼겠지만(맨 마지막에 붙어 있는 참고문헌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장하는 바의 상당수가 모두 짐작이어서 말이죠. 오랜 세월 동안 수 많은 학자와 작가들이 셰익스피어에 대해 연구했겠지만 1차 사료의 부족으로 '사실'을 파악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소 소설적인 이 책의 성격을 인정하고 읽으면서 재미를 또한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둘째, 셰익스피어는 전형적인 '생계형 작가'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생계형 작가이겠지만 대중의 취향도 감안하고 왕권의 심기도 건드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상상력을 꽃피워 극을 쓰고 공연하고 극단을 운영하면서 은퇴 후 생활까지 계획하며 생계를 꾸려나가야했던 셰익스피어의 분투가 느껴지더라구요.
셋째, 비평이 문학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는 의견에는 대체로 동조하지만 가끔은 당황하게 됩니다. <폭풍우> 를 번역한 박우수 교수가 책 말미에 적은 역자 해설에 보면 이런 문구가 나옵니다. '<폭풍우>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중심으로 근대 초기 유럽의 식민지 체험을 극화한 작품이다.' 이 문구를 읽으면서 저는 "진짜? 그런 거였어?" 하고 놀랬는데요. 해설을 읽다보니 맞는 말 같았습니다. 문명인인 프로스퍼로가 미개인인 캘리번을 지배하는 관계가 유럽이 남미나 아시아를 식민지로 삼는 관계를 상징하는 것 같더라 이 말씀이죠. 그런데 과연 셰익스피어가 이런 의도로 <폭풍우>를 썼을까 하는데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관객들도 그걸 눈치챘을까?
넷째, 작가는 스스로 뭔가 부족한 것을 느껴야 좋은 작품을 쓸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높은 지위도 아니었고 환상적인 사랑을 해보지도 못 한 것 같습니다. 그 부족함이 염원이 되어 상상력의 날개를 타고 명작으로 탄생한 것 같아요. 그의 연극을 보던 대부분의 관객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며 인생을 살고 있었겠지요.
다섯째, 독창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썼던 대부분의 희곡이 원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말이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더니 셰익스피어는 원래 있던 것을 잘 가공해서 독창적인 이야기를 잘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벽돌책 읽기 모임 덕분에, 이 기회가 아니었으면 전혀 알지 못했을 셰익스피어에 대해 입문이라도 한 것 같습니다.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1. <세계를 향한 의지>
D-29
밥심

오도니안
공감이 많이 갑니다.
세익스피어가 생계형 작가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연극계의 현실이 훨씬 더 생생하게 와닿았어요. 스타트업 기업처럼 늘어나는 수요에 맞춰 정신없이 쪽대본을 써내야 하는 작가의 처지였던 게 아닌가 했습니다. 대부분 끝이 좋지 않았던 대학 출신 거친 친구들 이야기랑 반역자들의 목이 걸려있고 처형 장면이 일상화된 도시의 살벌한 풍경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여왕과 귀족들의 총애를 받으며 무난하게 살았다고 생각했었는데 개인사가 많이 안 알려져서 그렇지 다사다난한 삶이었을 것 같아요.
연극이 대중의 욕구를 환상으로 실현시켜 주는 장르라고 하면, 셰익스피어의 욕구 결핍과 기복이 심한 젊은 날의 경험들은 극작가로서의 성공에 큰 역할 을 했을 것 같습니다.
세번째라고 말씀해 주신 내용에 덧붙여보자면 꼭 작가가 의식하고 의도적으로 반영했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아요. 신비평이라고 했던가 YG님 알려주신 용어 다시 찾아봐야겠지만, 작가의 시대와 처했던 상황이 어떠했는지 보고 작품 속에서 그 반영된 흔적들을 찾아보는 방식이라고 느꼈어요. 셰익스피어가 작품 속에서 타 인종을 다루는 방식과 그 당시 작가가 몸담았던 사회의 일반적 정서와 인식들을 함께 보면 범상하게 봐넘겼던 부분에서도 더 풍부한 관점들을 발견할 수 있고, 그런 것이 비평의 재미인 것 같습니다.
완독 축하드립니다~~!
밥심
신역사주의에 대해 박우수 교수가 먼저 설명을 하고 <폭풍우>에 대해 해설을 했으니 오도니안 님 말씀처럼 비평의 타당성은 인정하는 바입니다. 비평가나 학자들은 본연의 임무를 다 하시는거라고 생각합니다. 신역사주의를 <폭풍우>와 엮어 설명한 글을 보고 싶으신 분들은 열린책들이 출간한 박우수 교수의 번역본 <폭풍우>를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borumis
아무래도 희곡은 배우들 월급, 무대공간 대여(또는 건축?), 의상 및 소품 비용, 관객들의 반응 등 문학 장르 중 현실과 가장 맞대고 있어야 하는 장르라 더 당시의 실질적 상황을 알고 나니 더 재미있는 것 같아요.
저는 템페스트를 Norton Critical Editions 판으로 읽었는데 여기는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비평가의 비평을 담아서 식민주의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정신분석학 등 다양한 각도의 비평을 다루었는데요. 박우수 교수님의 비평은 못 읽어봤지만 아마 가장 그쪽에 근접한 비평이 Octave Mannoni와 John Gillies의 비평일 것 같습니다. 특히 이 비평들에서 보인 점은 당시 미란다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순진하고 얕은 감탄 등이 당시 버지니아 식민지에 대한 팜플렛 등에 나온 낙관주의를 그대로 반영하고 템페스트 작품의 영감이 된 Sea Venture가 1609년 버지니아로 향하다가 버뮤다에서 난파된 당시 상황을 William Strachey의 글을 통해 읽을 수 있는데요.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이 1607년 세워지고 1610-1611년 템페스트가 첫 공연이 되었고 우리가 포카혼타스 영화로 알고 있을지도 모른 포카혼타스와 존 스미스의 결혼이 1614년, 그리고 1622년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에서 원주민들이 영국 식민지에 공격을 가했던 사건이 있었죠. 당시 일반 영국 시민들이 식민주의에 대한 뚜렷한 입장을 가졌거나 셰익스피어의 기저 사상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을지 몰라도 나름 신세계 아메리카에서 본국 식민지의 소식들이 어느 정도 핫 이슈이긴 했을 것 같고 그것이 이 연극을 보는 관객의 시선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긴 했을 것 같네요.

향팔
@borumis 님 새로운 세상에 대한 미란다의 순진한 감탄 얘기하신거 보니까 생각나는데,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제목도 미란다의 그 대사에서 따왔다고 들었어요.(맞나..?ㅎㅎ)
+ 시대 분위기나 당시의 지배적인 사상이 작가나 관객의 무의식(?) 중에 어느 정도 자연스레 반영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지금 이곳의 인간들이 자본주의나 인간중심주의를 굳이 의식하지 않더라도 그냥 당연한 전제로 두고 살아가는 것처럼요.

borumis
맞습니다. 제가 그래서 '멋진 신세계'를 읽고나서 바로 템페스트를 읽어보니 셰익스피어와 헉슬리의 냉소가 느껴지더라구요. 게다가 미란다가 그 대사 치고나서 바로 Prospero가 'Tis new to thee (너한테야 새롭겠지)라고 찬물 끼얹는 깨알같은 코멘트가 꼭 셰익스피어 자신이 하는 것 같아서 웃겼어요.

향팔
너한테야 새롭겠지 앜ㅋㅋ 너무 재밌습니다. 의미심장해요!

borumis
ㅋ 한글로는 어떻게 번역했을지 모르지만 제 귀에는 딱 그렇게 들렸어요 ㅋㅋㅋ

향팔
아침이슬 번역본도 비슷해요! “너한테는 새롭지” ㅋㅋㅋㅋ
전에는 읽고도 그냥 넘겼는데 @borumis 님 덕분에 저도 새롭게 보게 됐습니다ㅎㅎ

오도니안
ㅋㅋ 템페스트 이제 시작했습니다. 이 장면 재미있겠네요.

향팔
저는 <소네트>를 읽으면서 이 시의 대상들이 누구이든 적어도 셰익스피어는 눈먼 사랑과 욕망과.. 그 끔찍한 중독을 직접 겪어본 인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어요. 이건 분명히 갈 데까지 가본 거라고…
밥심
전 반대로 셰익스피어는 죽고 싶을 정도의 사랑을 못해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같은 텍스트를 읽어도 이렇게 감상이 다른 것이 재미겠지요. ㅎㅎ
피천득 선생이 번역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읽고 있는데 영문과 국문이 같이 소개되어 있지만 설사 영어의 뜻을 대충 알더라도 영시에 대한 기본이 갖추어져 있지 않아서 그 참맛은 알기 어렵더군요. 그냥 국문을 통해 감상 중입니다. 우리나라 글로 된 시도 시 읽기가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잘 이해가 안 되는데 하물며 영시는 더 하겠지요. 그리고 소네트보다도 같은 정형시인 우리나라의 시조에 대한 관심이 오히려 더 생기더라구요. 학창시절에 시험을 위해 공부했던 그 시조 말이죠.

향팔
네 감상이 정반대라는 게 재밌어요! 셰익스피어 작품들은 유독 읽는이에 따라 각자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당시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당시삼백수 이런 책 사놓고 찬찬히..

연해
와,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주시다니! 저는 @밥심 님의 글 중에서 둘째에 특히 공감했는데요. 오늘 출근길에 읽었던 『친애하는 나의 글쓰기』라는 책에서도, 이슬아 작가님이 자신을 '연재노동자'라고 말씀하시는 대목이 인상 깊었거든요. 셰익스피어도 그런 느낌이 많이 들었습니다. 양쪽의 균형을 맞춘다는 게 참 어려운데, 시대의 흐름을 잘 따르면서 영민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완독을 축하드립니다! 저도 부지런히 따라가겠습니다:) (영차영차)
화제로 지정된 대화

YG
어제(4월 22일)은 종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더니, 오늘은 날씨가 좋네요! 오늘은 계속 화제가 되었던 4월 23일입니다.
오늘 4월 23일 수요일과 내일 4월 24일 목요일에는 10장 '망자와의 대화'를 읽습니다. 10장은 셰익스피어의 걸작으로 꼽히는 『햄릿』을 중심에 놓고서, 어린 아들의 죽음과 셰익스피어가 가깝게 지내던 권력자의 반역 사건 등이 이 작품에 미친 영향을 가늠해보는 장입니다. 저는 처음 읽었을 때 그 유명한『햄릿』이 원작이 사실상 따로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 원작을 셰익스피어가 자기 실존에 의문을 제기하는 근대적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는 데에 또 놀랐습니다. 이번에 재독하면서는 훨씬 더 꼼꼼히 읽게 되는 장이었답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의 진짜 의미가 궁금하셨던 분들이라면 10장에 주목하세요!

YG
“ 18세기 초반, 편집자이자 전기 작가였던 니컬러스 로는 셰익스피어의 배우 경력에서 무언가를 찾기 위해 수소문을 했지만 사람들의 기억은 이미 희미해진 뒤였다. “나는 이쪽 방면으로는 그에 대해서 이 이상의 이야기를 건질 수가 없었다.” 로는 이렇게 썼다. “그가 보여 준 가장 훌륭한 연기는 자신의 연극 『햄릿』에서 맡았던 유령 역할이었다고.” 연옥에서 올라와 이 땅의 산 자들에게 자신의 말을 주의 깊게 들으라고 요청하는 유령을 선보이며-“그대 진지하게 귀 기울여/ 내가 펼쳐 놓을 말을 들으라.”(1.5.5-6)-셰익스피어는 자기 안에서 죽은 아들의 목소리로, 죽어 가는 아버지의 목소리로 그리고 어쩌면 그 자신의 목소리로도 목청을 높여, 마치 자기 무덤에서 돌아왔을 때 냈을 법한 목소리로 외쳤을 것이다. 그 역할로 그가 일생일대의 명연기를 선보였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세계를 향한 의지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10장, 562쪽,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박소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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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G
저는 10장에 나오는 이 대목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더라고요.

borumis
전 햄릿 배울 때도 그렇고 다른 연극들도 원래 이거 셰익스피어 오리지널이 아니라 다른 이야기에서 따왔다고 많이 들어서 그건 별로 놀라지 않았는데 (그당시는 정말 저작권도 없고 대본도 역할마다 낱장으로 나눠갖다 소실되기 쉽고;;; 후원자들한테 선물하거나 돈이 쪼달릴 때 대본을 팔다보니 그나마 셰익스피어 희곡이 살아남았던 것 같아요) 글로브 극장 자체가 그렇게 하룻밤 안에 해체하고 목재를 재활용해서 다른 곳에서 세웠다는 게 넘 웃겼어요. 게다가 열받은 건물주 앨런이 고소하고 싶은데 법적 탈출구를 이용해서 내뺀 게 어쩌면 한때 법률사무소에서 일했을 법한 셰익스피어의 꼼수가 아니었을까?하는 상상도 해봅니다. ㅎㅎ

롱기누스
저는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을 '존재할지 말지, 그것이 문제다' 라고 번역한 책이 왠지 어색했습니다. 입에 착 감기는 맛도 없고, 머리에 팍 박히는 느낌도 없어서 말이죠.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역시 익숙함의 문제인가 싶기도 하구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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