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1. <세계를 향한 의지>

D-29
독서가 아직도 10장에서 멈춰 있는 중인데; <햄릿>으로 가는 길에 리처드 왕 시리즈가 나오길래 수다 떨러 또 왔습니다. 먼저 <리처드 2세>는 아주 섬세하더라고요, 치열하기도 하고. 인물들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시와 같고… 아니 그냥 작품 전체가 한 편의 시처럼 느껴졌어요. 극 중간쯤에 가서 리처드 왕에 대한 쿠데타가 성공하는데, 이후부터는 하루아침에 권좌에서 끌려내려온 전직 군주의 심리 묘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가장 좋았던 대목은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리처드가 왕관을 내어 놓는 장면과, 폼프릿 성 감옥에서의 마지막 독백(그린블랫 책에도 나오죠)입니다. 연극 공연을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매력적인 작품이었어요. 그린블랫 책에서는 <리처드 3세>가 나중에 나온 <리처드 2세>보다 기량이 쪼금 딸린다는 얘기가 나오고 예시로 대사도 한 대목 실려 있지만, 저는 그 장면을 읽을 때 그런 건 잘 못 느꼈어요. 리처드가 보스워스 들판에서 최후의 결전을 앞둔 밤, 자신이 살해한 모든 이의 영혼과 조우하며 느끼는 공포가 극도의 분열과 혼란으로 나타나는 장면…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confrontation도 살짝 생각나고요.) ‘곱사등이 두꺼비’로 태어나 ‘지옥의 사냥개’로 살았기에 세상 모두에게서 멸시받고, 심지어는 낳아준 어머니로부터도 저주받은 존재. 그래서 천국이란 왕관에 있는 것이라고 믿었고, 믿어야만 했고, 그것을 위한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았으며, 완벽한 이기주의자인 자신을 부인하지 않았던 리처드. 보스워스 전투에서 타고 있던 말을 잃고 난 뒤, “말을 다오! 말을! 말 한 필이면 내 왕국도 주리로다!” 반복하며 부르짖는 외침이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대사라는 사실은, 리처드 3세의 ‘악’을 혐오할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로 남습니다.
리처드 2세'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15권. 학정으로 치닫던 리처드 2세가 에드워드 3세의 넷째 아들인 랭커스터 공작 아들, 즉 사촌 헨리 볼링브루크(훗날 헨리 4세)에게 밀려나 플랜타저넷 왕가에서 랭커스터 왕가로 바뀌는 잉글랜드 역사의 한 대목이다.
리처드 3세에드워드 4세 치하에서 왕위 계승 앞 순위 자들을 하나하나 제거하며 드디어 왕위에 오른 리처드 3세 통치 2년, 그리고 1485년 헨리 리치먼드(훗날 헨리 7세)가 보스워스 전투에서 승리해 튜더 왕조를 여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그렸다.
내가 뭘 겁내는 거지? 내 자신? 곁에 아무도 없는데. 리처드는 리처드를 사랑해, 말하자면, 나는 나다. 여기 암살자가 있나? 없지. 있다, 내가 암살자니까. 그렇담 도망쳐야지! 뭐라, 내 자신으로부터? 말도 안 돼. 왜? 내가 복수할까 봐. 내 자신이 내 자신한테? 슬프다, 난 나 자신을 사랑하는데. 왜? 무슨 좋은 일을 해 준 게 있나 나 자신이 나 자신한테? 오 없다, 슬프게도, 난 오히려 증오해 나 자신을 나 자신에 의해 저질러진 증오스런 짓거리들 때문에. 난 악당이야. 하지만 그건 거짓말, 난 악당이 아니다.
리처드 3세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리차드 3세 읽어봤지만 이런 인상적인 대사가 있었는지 기억이 안나요. 역시 떼어놓고 보는 대사들이 더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데 원작을 읽을 때는 줄거리 따라가기 바빠서 그런가 봅니다. 어차피 전투 나가 죽을 친구가 말이 많네, 그런 느낌. 좋은 책들이 다 그렇겠지만 다시 읽으면 느낌이 많이 달라지더라구요. 셰익스피어 작품 안 읽은 건 다 읽고 읽은 작품은 재독해보고 싶어요.
ㅋㅋㅋ 어차피 전투 나가 죽을 친구가 말이 많네..에서 빵터졌어요. 저두 사극을 시도해볼 엄두를 못냈는데 @향팔이 님 덕분에 정말 사극을 꼭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멋진 대사들이..
앜ㅋㅋ 저도 빵 터졌어요
저도 다시 읽을라고요. 햄릿이나 멕베스, 리어 왕 같은 작품은 반복해서 봤어도 읽을 때마다 새로워요;; 이번에 <세계를 향한 의지>라는 좋은 책을 접했으니 예전보다 보이는 것도 좀더 많을 것 같습니다.
말을 다오! 말을! 말 한 필이면 내 왕국도 주리로다!
리처드 3세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햄릿에 관한 극본 전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셰익스피어는 사실상 그 당시의 배우라면 마땅히 가져야 했던 어떤 능력을 매우 경악스러운 수준으로 지니고 있었다. 바로 정확한 기억력이다. 맞닥뜨리는 모든 것들, 심지어 단순히 스치거나 지나가는 것들까지도 그는 머릿속에 고이 담았다가, 수년이 지난 후에도 필요하기만 하면 바로 끄집어낼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계를 향한 의지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박소현 옮김
대화의 파편, 공공 선포문, 장황한 설교, 술집이나 길거리에서 넘겨들었던 말, 짐마차꾼과 걸걸한 여편네 사이에서 오가던 욕설, 책방에서 무심코 들춰 보았던 책의 몇 장 등 모든 것들이 그의 뇌 안에 어떤 방법으로든 저장되어, 그의 상상력이 마음만 먹는다면 바로 열람할 수 있는 파일들처럼 정리되어 있었다.
세계를 향한 의지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박소현 옮김
사실 셰익스피어엔 비극과 역사극의 구분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많은 극작가 동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인간 역사의 근원적인 구조는 그 끝없는 홍망성쇠의 반복으로 인해 그에게 비극적으로 느껴졌고, 역으로 그가 바라보는 비극도 역사에 그 뿌리를 두었다. 그러한 점에서 「베니스의 상인」이 충분히 보여 주듯이 희극을 수용하는 감각 역시 고통, 상실, 그리고 죽음의 위협과 교차했고, 비극을 수용하는 감각에도 광대와 웃음이 들어갈 여지는 있었다.
세계를 향한 의지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박소현 옮김
당시의 문학 이론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한 시학 법칙을 엄격하게 고수할 것을 종용했으며, 필립 시드니 경이 "왕들과 광대들을 한데 뒤섞어 버린다."라고 말했던 추세에 대해 맹렬하게 반대했다. 1579년 셰익스피어가 아직 문법 학교 학생이었을 시기에, 시드니는 전형적인 영국 연극이 갖는 느슨하고도 자유로운 형식의 줄거리 전개 방식에 조소를 남겼다. 시드니의 표현은 본래 독자들의 탄식을 자아내기 위한 것이었으나, 그것은 사실상 셰익스피어가 활동하는 내내 탁월한 솜씨로 해냈던 일을 매우 정확하게 예측한 듯한 표현이 되었다.
세계를 향한 의지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박소현 옮김
The genius of the play is bound up with this power of implication, by means of which the audience can never quite be done with them, for they are most suggestively present when they cannot be seen, when they are absorbed in the ordinary relations of everyday life.
세계를 향한 의지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440,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박소현 옮김
공포 및 불안감을 극도로 높이고 계속 머릿 속을 맴돌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들을 다 꿰뚫은 셰익스피어.. 이래서 맥베스가 가장 다양한 방식으로 연출된 연극 중 하나겠죠.. 아마 지금 세상같으면 셰익스피어는 심리스릴러나 호러영화의 대가가 되었을 듯..
If you are worried about temptation, fear your own dreams.
세계를 향한 의지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박소현 옮김
갠달프 같은 멋있는 할아버지 보면 나이듦에 위안이 되지만, 그들의 꽃미남 시절을 보면 헛된 위안임을 알게 되지요.
요즘은 이상주의자가 아니지만 아주 예전부터 쓰던 닉이라서. 링크된 책 안에 혁명 전날이라는 단편이 있는데 오히려 그 소설에 나오는 오도의 모습이 기억이 많이 나요. 혁명의 과정에서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새로운 세대의 혁명가들 속에서 환멸에 빠져 있는 늙은 오도의 모습이죠. 빼앗긴 자들 속에선 동상과 그가 남긴 문장들로만 만날 수 있어요.
바람의 열두 방향'SF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면, 1순위는 어슐러 K. 르 귄'이라 말할 정도로 문학성이 뛰어난 작가 르 귄. 이 책은 그녀의 첫 번째 단편집으로 인류학, 심리학, 페미니즘 등의 주제를 성공적으로 아우른다. 신화적 깊이와 섬세한 은유가 빛나는, 차분한 사색을 통해 끌어올린 멋진 작품집.
아, 오도가 한 작품에만 등장하는 캐릭터가 아니군요. 세계관이 이어져있나봐요.
이게 오도니안님 인생책인가 봅니다.
셰익스피어는 한때 완전하던 의례들이 모두 깨지고 손상되어 버린 후의 세계에서(대부분의 우리가 여전히 살아가는 바로 그 세계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느끼는 연민과 혼돈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끌어모았다. 왜냐하면 그 자신도 자기 존재의 핵심에서 그 같은 감정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세계를 향한 의지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박소현 옮김
셰익스피어는 그의 문화에 존재하던 죽음에 대한 결정적 의례들이 제자리를 잃고 처참하게 밀려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들의 무덤가에 서서 엄청난 고통과 함께 이 사실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극장이 — 그리고 특히나 그의 극적 예술이 — 그 자신과, 그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더 이상 만족스러운 배출구를 찾을 수 없게 된 그 열렬한 감정의 퇴적물을 모두 쏟아 버릴 수 있는 곳이라고 믿었다.
세계를 향한 의지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박소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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