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1. <세계를 향한 의지>

D-29
바로 정리할 수는 없지만, 서구 유럽 역사에서 기독교 신앙의 역할, 카톨릭과 개신교의 차이, 종교개혁이 당시 사람들에게 미쳤을 영향, 종교적 의미가 사라진 세계에서 연극(더 넓은 의미에서 콘텐츠)이 갖는 역할 등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제가 그동안 알았던 종교개혁에 대한 지식은 상당히 피상적이었구나 싶기도 하구요.
지금 @오도니안 님과 제가 동시에 559쪽을 읽고 있나 봅니다. 신기합니다. 아울러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며 읽고 있습니다. <햄릿>이 종교개혁 시대 사람들의 혼란한 내면을 반영한 작품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네요.
연옥에서 온 유령이 「햄릿」의 세계에 나타나서 자신을 기억해 달 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개신교 교리에 연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잠시 제쳐 두고라도, 여기서 말하는 암시는 수수께끼처럼 드러난다.
세계를 향한 의지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박소현 옮김
상식적으로 하느님이 세운 거대한 참회소에 속한 영들이, 누군가에게 살인 범죄를 저지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쨌든 그들은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 지금도 자신의 죄를 정화의 불로 태우고 있는 시점이므로. 하지만 이 유령은 미사나 자선을 행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결국 하느님이 모든 복수의 권한을 쥔 독점 체계에서, 그의 아들에게 자신을 죽이고 왕위를 탈취하고 아내와 재혼한 사람을 죽여 달라며 미리 선수를 친 복수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를 향한 의지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박소현 옮김
이쯤 되면 관객들은 이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 연극은 결국 신학 강의와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까. 하지만 햄릿은 그에 대해 걱정하고, 실질적인 복수 행위 대신 그를 점점 마비시키는 내적 의심과 불안이 연극의 중심에 들어앉는다.
세계를 향한 의지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박소현 옮김
세익스피어 시대의 공식 개신교 입장에서 유령이란 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중종 맞닥뜨리는 환영들-사랑했던 사람이나 친구의 외양과 기괴할 정도로 닮은 환영들-은 그저 망상이거나, 더 나쁜 경우에는 희생자에게 죄를 짓게 하려는 악마들이 가장하여 나타나는 것이었다. 햄릿은 처음에는 자신이 "정직한 유령"(1.5.142)을 보았다고 선언하지만, 이 자신감은 점점 불확실성으로 변한다.
세계를 향한 의지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박소현 옮김
등산할 때 후방가이드가 해지기 전에 산 내려가야 한다면서 뒤에서 바짝 따라오는 느낌.
셰익스피어는 아들의 무덤 곁에 서 있을 때, 혹은 내세에서의 도움을 원하는 아버지의 간청에 직면하면서 이러한 손상의 결과를 경험했을 것이다. 개신교 권위자들은 가톨릭교회가 죽은 자들과 협상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제공했던 믿음이나 의례들을 공격하고 불법화했다. 그들은 연옥에 대한 모든 관념은 거짓말이라고 말하며, 신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가져온 구원의 힘에 대한 왕성한 믿음뿐이라고 했다. 물론 이를 굳게 믿었던 사람들도 있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나오는 그 어떤 것도 그가 그런 사람 중 하나였음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세계를 향한 의지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박소현 옮김
하지만 자신의 아이를 묻는 장례식이라면, 그것보다 더한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 놓인 부모들은 신에게 의문을 제기하고 그들 자신의 믿음을 추궁하게 된다. 셰익스피어도 응당 자신이 속한 개신교 교구에서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이름이 종교적 반항자 목록에 올랐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자신이 듣고 암송하는 것들을 믿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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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596년에 아들의 장례식에서 그것을 느꼈고, 자기 아버지의 죽음을 예상하면서 다시 한 번 이중으로 배가된 그 감정들을 경험했다. 그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가장 깊이 표현한 예술 작품으로써 감정에 대답했다. 바로 「햄릿」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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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초반, 편집자이자 전기 작가였던 니컬러스 로는 셰익스피어의 배우 경력에서 무언가를 찾기 위해 수소문을 했지만 사람들의 기억은 이미 희미해진 뒤였다. "나는 이쪽 방면으로는 그에 대해서 이 이상의 이야기를 건질 수가 없었다." 로는 이렇게 썼다. "그가 보여 준 가장 훌륭한 연기는 자신의 연극 「햄릿」에서 맡았던 유령 역할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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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비극을 어떻게 조립할 것인지 다시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비극적 줄거리가 가장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데에 사건의 인과 관계 설명이 얼마만큼 필요한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했고, 한 인물을 설득력 있게 드러내기 위해 그의 행동을 설명하는 명쾌한 심리적 근거 또한 얼마만큼이나 필요한지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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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익스피어는 연극의 효과를 헤아릴 수 없이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만약 그가 줄거리에서 핵심적인 설명이 되는 요소를 빼 버린다면, 그래서 현재 일어나는 행위들을 뒷받침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 동기, 또는 도덕 원칙이 설명되지 않도록 가로막아 버린다면, 오히려 관객과 그 자신에게 특히나 열정적이고 강렬한 반응이 솟구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극작의 중요한 핵심은 풀어야 할 수수께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설명되지 않는 불투명성 (opacity)을 전략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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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심장한 작법이군요.
실력 어중간한 사람이 따라하면 가랑이 찢어질 작법인 듯합니다. ^^
이 불투명성이야말로 기존의 논리적 설명이 속박, 수납하고 있던 엄청난 양의 극적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사실을 셰익스피어는 깨달았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그 이전부터 줄거리상의 공식적 설명이나 구실에 대해 - 심리적이거나 신학적인,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 양식의 이유에 대해서 - 비꼬듯 회의적인 태도로 일관해 왔다. 그의 연극들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내리는 결정이 거의 전적으로 불가해하며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고, 바로 이런 관점에서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희극과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비극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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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적어도 사랑은 확연히 알아볼 수 있는 동기라도 됐다. 「햄릿」에서 세익스피어는 자신이나 관객에게, 극의 진행 사항들이 모두 이치에 들어 맞게 해주는 익숙하고 합리적인 근거나 설명을 제공하여 저자와 관객을 안심시켜 주기를 거절한다면, 무언가 헤아릴 수 없이 심오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세계를 향한 의지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박소현 옮김
핵심은 단지 불투명성을 만들 어 내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그저 혼탁하고 지리멸렬한 연극이 될 테니까. 그보다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천재성과 엄청난 성실성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희곡 작업에 매달린 결과 얻어낸, 극작에서의 내적 논리, 즉 시적인 일관성에 점점 더 기대게 되었다.
세계를 향한 의지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박소현 옮김
피상적인 의미 구조를 뜯어내 버리고, 그는 극 내부에서 울리는 핵심적인 주제들의 낭랑한 반향, 떠오르는 이미지들의 섬세한 발전 과정, 각 장면이 서로 의미 있게 배치되는 탁월한 편성, 관념의 복잡한 전개, 병치되는 줄거리들의 결합, 심리적 집착을 드러내는 폭로를 통해서 연극의 내적인 구조를 구축해 냈던 것이다.
세계를 향한 의지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박소현 옮김
「햄릿」에서 이 개념 구조상의 혁신은 기술적인 것이었다. 즉 그것은 셰익스피어가 비극을 구상하면서 내렸던 실제적인 선택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 시작이 되는 지점이 바로 왕자의 자살 충동적인 우울증과 그가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수수께끼적 광기였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미학적 전략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인물의 동기를 설명하지 않고 없애 버리는 것은 그가 작가로서 행하던 극작 기술의 실험적인 측면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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