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1. <세계를 향한 의지>

D-29
등산할 때 후방가이드가 해지기 전에 산 내려가야 한다면서 뒤에서 바짝 따라오는 느낌.
셰익스피어는 아들의 무덤 곁에 서 있을 때, 혹은 내세에서의 도움을 원하는 아버지의 간청에 직면하면서 이러한 손상의 결과를 경험했을 것이다. 개신교 권위자들은 가톨릭교회가 죽은 자들과 협상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제공했던 믿음이나 의례들을 공격하고 불법화했다. 그들은 연옥에 대한 모든 관념은 거짓말이라고 말하며, 신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가져온 구원의 힘에 대한 왕성한 믿음뿐이라고 했다. 물론 이를 굳게 믿었던 사람들도 있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나오는 그 어떤 것도 그가 그런 사람 중 하나였음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세계를 향한 의지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박소현 옮김
하지만 자신의 아이를 묻는 장례식이라면, 그것보다 더한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 놓인 부모들은 신에게 의문을 제기하고 그들 자신의 믿음을 추궁하게 된다. 셰익스피어도 응당 자신이 속한 개신교 교구에서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이름이 종교적 반항자 목록에 올랐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자신이 듣고 암송하는 것들을 믿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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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596년에 아들의 장례식에서 그것을 느꼈고, 자기 아버지의 죽음을 예상하면서 다시 한 번 이중으로 배가된 그 감정들을 경험했다. 그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가장 깊이 표현한 예술 작품으로써 감정에 대답했다. 바로 「햄릿」으로.
세계를 향한 의지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박소현 옮김
18세기 초반, 편집자이자 전기 작가였던 니컬러스 로는 셰익스피어의 배우 경력에서 무언가를 찾기 위해 수소문을 했지만 사람들의 기억은 이미 희미해진 뒤였다. "나는 이쪽 방면으로는 그에 대해서 이 이상의 이야기를 건질 수가 없었다." 로는 이렇게 썼다. "그가 보여 준 가장 훌륭한 연기는 자신의 연극 「햄릿」에서 맡았던 유령 역할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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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비극을 어떻게 조립할 것인지 다시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비극적 줄거리가 가장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데에 사건의 인과 관계 설명이 얼마만큼 필요한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했고, 한 인물을 설득력 있게 드러내기 위해 그의 행동을 설명하는 명쾌한 심리적 근거 또한 얼마만큼이나 필요한지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세계를 향한 의지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박소현 옮김
세익스피어는 연극의 효과를 헤아릴 수 없이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만약 그가 줄거리에서 핵심적인 설명이 되는 요소를 빼 버린다면, 그래서 현재 일어나는 행위들을 뒷받침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 동기, 또는 도덕 원칙이 설명되지 않도록 가로막아 버린다면, 오히려 관객과 그 자신에게 특히나 열정적이고 강렬한 반응이 솟구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극작의 중요한 핵심은 풀어야 할 수수께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설명되지 않는 불투명성 (opacity)을 전략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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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심장한 작법이군요.
실력 어중간한 사람이 따라하면 가랑이 찢어질 작법인 듯합니다. ^^
이 불투명성이야말로 기존의 논리적 설명이 속박, 수납하고 있던 엄청난 양의 극적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사실을 셰익스피어는 깨달았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그 이전부터 줄거리상의 공식적 설명이나 구실에 대해 - 심리적이거나 신학적인,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 양식의 이유에 대해서 - 비꼬듯 회의적인 태도로 일관해 왔다. 그의 연극들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내리는 결정이 거의 전적으로 불가해하며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고, 바로 이런 관점에서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희극과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비극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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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적어도 사랑은 확연히 알아볼 수 있는 동기라도 됐다. 「햄릿」에서 세익스피어는 자신이나 관객에게, 극의 진행 사항들이 모두 이치에 들어 맞게 해주는 익숙하고 합리적인 근거나 설명을 제공하여 저자와 관객을 안심시켜 주기를 거절한다면, 무언가 헤아릴 수 없이 심오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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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단지 불투명성을 만들 어 내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그저 혼탁하고 지리멸렬한 연극이 될 테니까. 그보다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천재성과 엄청난 성실성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희곡 작업에 매달린 결과 얻어낸, 극작에서의 내적 논리, 즉 시적인 일관성에 점점 더 기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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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상적인 의미 구조를 뜯어내 버리고, 그는 극 내부에서 울리는 핵심적인 주제들의 낭랑한 반향, 떠오르는 이미지들의 섬세한 발전 과정, 각 장면이 서로 의미 있게 배치되는 탁월한 편성, 관념의 복잡한 전개, 병치되는 줄거리들의 결합, 심리적 집착을 드러내는 폭로를 통해서 연극의 내적인 구조를 구축해 냈던 것이다.
세계를 향한 의지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박소현 옮김
「햄릿」에서 이 개념 구조상의 혁신은 기술적인 것이었다. 즉 그것은 셰익스피어가 비극을 구상하면서 내렸던 실제적인 선택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 시작이 되는 지점이 바로 왕자의 자살 충동적인 우울증과 그가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수수께끼적 광기였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미학적 전략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인물의 동기를 설명하지 않고 없애 버리는 것은 그가 작가로서 행하던 극작 기술의 실험적인 측면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세계를 향한 의지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박소현 옮김
햄넷의 죽음 이후, 그것은 존재 자체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근본적인 자각 변화를 의미했다. 이것은 곧 어떤 것들은 입 밖에 내어 말해야 하고, 어떤 것들은 그저 침묵한 채 가라앉혀야 하는지를 구분하는 그의 이해였으며, 또한 깔끔하게 정리되고 잘 다듬어지고 안정감 있게 잘 빠진 것들보다도 어딘가 어수선하고 손상되고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는 것들을 더욱 선호하는 그의 취향의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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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은 한시에 쓰인 글자 하나 갖고 자기를 비난하는 뜻이라며 역모죄로 처형했다는데, 카톨릭적인 함의가 많은 연극이 검열을 통과해서 상영될 수 있었다는 게 좀 신기해요.
조선시대 여러 사화도 떠오릅니다. 설공찬전이 금서가 된 배경도 생각나고요.
셰익스피어는 리어의 행동이 더욱 자의적으로 보이면서 또한 더 깊은 심리적 욕구에 기반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의 리어는 권력의 정점에서 은퇴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동시에 나약한 의존적 존재가 되는 것은 견디지 못하는 사람인 것이다. 국가와 가정에서 모두 절대 권력자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싶지 않은 그는 공식적인 제의를 일으킨다.
세계를 향한 의지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박소현 옮김
리어는 답을 요구한다. "말하라." 그녀가 "아무것도 아닙니다."(1.1.85-86)라고, 연극 전체에서 내내 어둡게 울려 퍼지는 이 의미심장한 말을 입에 올렸을 때, 리어는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것을 듣게 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 공허, 존경의 상실, 정체성의 절멸. 연극이 끝날 때, 이러한 절멸은 리어에게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형태로 다가온다.
세계를 향한 의지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박소현 옮김
오늘 완독했습니다. 사실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작품들은 많이 들어봤지만 읽어본 작품 두어개, 연극이나 영화로 접한 작품 서너 개정도 였습니다. 이번 벽돌책을 읽으며 거론된 작품들을 같이 따라가면서 예전에 읽었을 때보다 훨씬 이해도가 높아져서 정말 좋았습니다. 남아있는 자료가 별로 없어서 많은 부분이 추측으로 쓰여졌지만 그 바탕이 되는 자료가 그의 문학이었기 때문에 그의 현실을 작품 속에 녹여낸 작가로서의 모습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종교박해, 유대인의 실상, 개인적으로는 불행했던 결혼생활, 가족과 떨어져 지낸 일상, 신분의 문제.. 여러 측면에서 셰익스피어의 생애와 작품을 분석해서 이렇게 훌륭하게 서사를 만들어 내고 이렇게 잘 읽히게 쓴 그리블랫 교수님, 정말 대단하네요. @YG 덕분에 4월에도 좋은 책 읽었습니다.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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