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스퇴르의 해법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파스퇴르가 "발효균은 내 실험실에서 제조되었다."와 "그 발효균은 내 제조로부터 자율적이다."라는 두 문장을 동의어처럼 사용하기 때문이다. 더 명확히 하자면, 그것은 마치 그가 실험실에서 신중하고 솜씨 좋은 그의 작업으로 말미암아, 발효균이 자율적이고 실재하며 그가 행한 작업으로부터 독립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
“ 광학적 비유는 과학자가 자신이 '보는' 것을 '거르는' '탁한 렌즈'를 가졌다고, 그들이 대상을 보는 '관점'을 '왜곡하는' '선입견'을 가졌다고, 그들이 세계가 어떠할 것이라고 '해석하는' '세계관' - 혹은 '패러다임' '혹은 '재현' 혹은 '범주'를 가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의해 끊임없이 사용된다. ”
“ 상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분노를 숨긴 채 물을 것이다. "그렇지만, 파스퇴르가 만들어내기 전에 이미 발효균이 존재했던 거 아닌가요?" 대답을 피할 이유가 없다. "아니요, 그가 실험하기 전에 그것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 대답은 분명하고 자연스러우며 심지어 내가 앞으로 보이겠지만 상식적이기까지 하다! ”
“ 주체-객체의 틀 속에서, 양면성, 모호성, 불확실성, 유연성은 그 자체로 확실한 현상을 암중모색하는 인간들만을 괴롭혔다. 그러나 양면성, 모호성, 불확실성, 유연성은 실험실이 존재의 가능성과 역사적 기회를 제공한 창조물에게도 동반한다. 만약 파스퇴르가 망설인다면, 우리는 발효 역시 망설이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객체는 망설이지도 떨지도 않는다. 명제는 망설이고 떤다. ”
제가 하이데거도 안 읽어봐서 (그러고보니 참.. 니체 이후의 철학자 책은 거의 못 읽어 본듯;;) 몰랐는데 Gestell이라는 용어를 한국어로 '닦달'로 번역했나봐요? 보통 제가 아는 다그친다라기 보단 어디론가 몰아붙인다는 의미로 쓴 것 같은데 ㅎㅎㅎ 영어에서는 enframing 뭔가 틀에 넣는 것으로 번역되는 듯 하네요.
borumis
“ 각각의 인공물에는 그것의 각본script이 있고, 지나가는 이들을 붙잡아 그것의 이야기에 맞는 역할을 하도록 강요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NRA의 사회학적 설명은 총을 선과 악이 공평하게 전개될 수 있는 수동적인 전도체의 역할을 하면서 행위에 아무것도 더하지 않는, 의지의 중립적 매개체로 간주한다. (...)
실제로 총이 그것 스스로 사람을 죽인다고 주장하는 유물론자는 없다. 유물론자가 주장하는 바를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선한 시민이 총을 쥠으로써 변화된다transformed는 것이다. (...) 그러므로 유물론자는 주제로서의 우리의 자질, 우리의 능력, 우리의 인성이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것에 의존한다는 흥미로운 의견을 낸다. (...)
NRA에 관해 말하자면, 그 구성원이 총은 너무나 중립적인 대상으로서 살인 행위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진실로 고수할 수는 없다. 그들은 비록 총을 들고 있는 사람의 도덕적 상태는 아닐지라도, 총이 무언가를 더한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
“ 총의 의향, 총의 의지, 총의 각본은 행위자 1의 것을 대체하고, 인간의 행위는 중개물에 불과하다. 그림에서 행위자 1과 행위자 2가 역전된다고 해도 아무런 차이가 없음에 주목해라. 완전히 인간의 통제 하에 있는 '중립적 도구'라는 신화와 어떤 인간도 제어할 수 없는 '자율적 운명'이라는 신화는 대칭적이다. 하지만 셋째 가능성이 더 흔하게 실현되는데, 이는 어느 행위자의 행위의 프로그램에도 일치하지 않는 새로운 목표가 생성되는 것이다. 3장에서 나는 이것을 목표의 번역에 대한 불확실성이라 불렀다. ”
“ 유물론자와 사회학자의 꼭 같은 실수는 본질, 즉 주체의 본질 또는 객체의 본질로부터 시작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출발점은 과학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테크닉이 수행하는 매개의 역할을 우리가 측정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총과 시민을 명제로서 탐구한다면, 주체와 객체 (그리고 그들의 목표도) 모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
“ 행위는 단지 인간만의 특성이 아니라 행위소의 연합의 특성이며, 이것이 기술적 매개의 둘째 의미다. 임시적인 '행위자적actorial' 역할이 행위소에게 귀속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행위소가 서로에게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목표, 새로운 기능을 제공하면서 능력을 교환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용의 경우에서 그러했듯이, 제조의 경우에도 대칭성이 유지된다. (...)
대칭성은 변형을 거치면서도 유지되는 것에 의해 정의된다. 인간과 비인간의 대칭성 아래 나는 행위자가 서로 겹쳐짐으로써 교환할 수 있는 일련의 능력과 특성을 그대로 유지했다. ”
p.306 우리는 이제 객체와 주체를 완전히 다른 운명과 형태를 사실과 기술적 인공물로 대체해왔다 —> 우리는 이제 객체와 주체를 완전히 다른 운명와 형태를 “가진” “과학적“ 사실과 기술적 인공물로 대체해 왔다. We have now replaced objects and subjects with scientific facts and technical artifacts, which have an entirely different destiny and shape.
“를 ‘이 두 번 나오길래 무슨 뜻인가 했더니;;
그리고 같은 페이지에 또 오타 신고: 완전히 논쟁적이기 대문이다—> 때문이다
ssun
아이고..
ssun
“ 두 가지 주요한 오해가 과학의 순환계 지도 그리기라는 과학학의 프로젝트를 이해할 수 없게 해왔다. 첫째는 과학학이 과학적 사실에 대한 '사회적 설명'을 찾는다는 믿음이고, 둘째는 과학학이 담론이나 수사, 혹은 기껏해야 인식론적 질문들만을 다루며 '실제 바깥 세계'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믿음이다. ”
“ (외재론자 : 순수한 정치적 설명을 선호하는 사람
내재론자 : 순수한 과학적 설명을 선호하는 사람)
과학학은 이러한 이분법 자체를 전부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하는 프로젝트로 정의될 수 있다. (중략) 과학학의 목적은, 평행한 두 계곡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양 끝에서 문제점을 공격하고 가운데에서 만나기를 희망하는 두 팀을 함께 놓음으로써 그들 사이에 터널을 뚫는 것이다. ”
“ 은유, 패러다임, 방법은 완전히 다른 것이며, 또한 전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것이다. 아무리 과학 전쟁의 전사들과 대부분의 사회과학자에게 이러한 점이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과학을 연구하는 데서 실재론의 감각을 되찾기 위해서 우리는 사회라는 개념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