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SF소설] 05.생명창조자의 율법 - 제임스 P. 호건

D-29
'수정 조각 위에 복잡한 패턴'이란 문구를 저는 기계의 기판에서 볼 수 있는 회로가 머리에서 떠올랐어요. 어쩌면 로빙 의사들이 분해한 것은 '뇌'가 아닐까 싶고요. 인간의 뇌 속에 존재하는 뉴런은 100억개를 넘는다고 하는데 끝없는 패턴이라는 표현이 뇌를 연상시켰거든요. 마치 사람을 해부한 해부도나 수술장면이 머리에 떠오르지만 대신 기계와 금속, 전선이 써져 있는 문장에서 두 장면이 겹치는 게 인상 깊었습니다. 직접 관찰과 실험을 통해 물리적으로 동물과 로빙의 구성이 차이가 없다면, 의식은 어디에서 발원하는지, 영혼이 곧 의식인지, 영혼은 실재하는지를 묻는 티르그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이 자의식이 가능한 수준으로 지성이 발달하면 영혼이라는 개념을 떠올리는 것은 필연적인 과정인지, 아니면 인간만이 떠올릴 수 있는 개념인지 생각하게 되네요.
타이탄은 기계가 거주하는 땅이었다. 전자기적 생태계가 존재하며, 그 안에는 문명이 발달하고, 지능이 있으며, 아마도 자기인식이 가능한 우점종 로봇이 있었다.
생명창조자의 율법 p.214, 제임스 P. 호건 지음, 조호근 옮김
그에 따르면 로빙의 영혼은 전반적인 품질 확인 검사를 거쳐서 그 결과에 따라 생명창조자 곁으로 돌아가거나 액체 얼음 화산의 근원이 되는 땅속 거대한 환원 용광로로 이송된다고 한다.
생명창조자의 율법 p.188, 제임스 P. 호건 지음, 조호근 옮김
이 대목은 타이탄의 천국과 지옥, 혹은 그 갈림길에서 벌어지는 심판을 의미하는거겠죠. SF는 이런 지점이 참 재미있는 것 같아요. 글을 따라 온갖 이미지를 상상하느라 뇌가 푹 퍼질 즈음에 이런 문장을 만나면 다시 뇌를 작동시킬 힘이 나요.
그에게 있어 영혼이라는 '사실'은 정답에 맞추어 발명한 개념이라는 의심이 들 뿐이었다. 질문에 대한 올바른 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그가 고안한 일련의 규칙에 의거해 판단해보면, 영혼이라는 답은 사실로부터 유추해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규칙은 어디에 적용해도 그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생명창조자의 율법 p.189, 제임스 P. 호건 지음, 조호근 옮김
생명창조자께서 우리가 지성을 가져 마땅한 존재라고 생각하셨다면, 우리가 그 지성을 사용하기를 원하셨음 또한 분명하지 않은가. 글쎄,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믿을 만한 방법을 발견하는 것보다 더 나은 사용처가 또 어디에 있겠나?
생명창조자의 율법 p.193, 제임스 P. 호건 지음, 조호근 옮김
단 하나의 질문도 용납되지 않는 교육이 그대의 신념을 만들었지만, 내 신념은 가능한 모든 질문을 던진 다음에야 배울 수 있는 것이니까. 비판적 검토를 견뎌내지 못하고, 반대의 말은 단 한마디도 던질 수 없는 신념에 대체 무슨 가치가 있겠나?
생명창조자의 율법 p.199, 제임스 P. 호건 지음, 조호근 옮김
은화님 말씀을 읽다보니, 인간 세계의 잠벤도르프와 로빙의 신정 정치가 상징하는 바는 '사고를 포기한 대중의 사회'이지 않을까 싶어졌어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는데, 제 주변에서 "생각 외주 맡겼네."라는 표현을 이따금 듣고 있어요. '생각 외주', 그러니까 아주 편리한 믿음의 대상을 제공하고 부록으로 믿음을 떠받드는 편리한 설명까지 제공한다는 점이 잠벤도르프와 신정 정치의 공통점 같아요.
저는 소설 속 대중의 무관심 또는 무지가 매시의 지적처럼 이념, 광고,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의 주의를 돌리는 것도 있겠지만, 대중들이 보기에 사회가 자신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느껴서 돌아선 것도 있다고 생각해요. 높이 올라서면 더 멀리 볼 수 있다는 잠벤도르프의 말에 반박하는 우주선 선원의 지적에서 그런 뉘앙스가 은근히 느껴졌거든요. 이념싸움과 이권에 흔들리는 지도계층을 보며 대중들은 관심을 잃고, 무관심 그리고 개선에 대한 필요를 못 느끼는 무기력함이 무지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로도 보이고요. 그렇기에 매시가 말하는 지적이나 중간 중간 보이는 태도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또 한명의 입장'일 뿐 대중의 눈높이에서 보지 못하는 반쪽짜리 지적이 아닌가 생각도 들었고요.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 타이탄 위성의 풍경이 어떨지 상상이 잘 안 되서 찾아봤어요. 타이탄은 토성의 위성들 중 유일하게 대기가 있으며, 지표면에 액체가 존재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소설에서 묘사했듯 강과 대양, 산맥과 대륙이 있으며 심지어 썰물과 밀물이 존재하고 메탄 비가 내리기에 태양계에서 지구와 가장 유사한 풍경을 가지고 있다고 하네요. 물론 온도나 대기와 액체의 구성성분은 전혀 다르지만요. 첫번째 링크는 NASA에서 만든 타이탄에 대한 요약 설명 영상입니다. 두번째 링크는 시뮬레이션을 통해 타이탄의 지표가 어떤 모습일지를 보여주고 있고요. 세번째 영상은 토성-타이탄 탐사목적으로 우주로 간 카시니 탐사선이 2005년에 타이탄 지표를 관측하기 위해 하위헌스 착륙선을 보냈을 당시 착륙선이 촬영한 풍경입니다. 마지막은 2027년에 타이탄을 탐사하기 위해 보낼 예정인 드래곤 플라이 호의 계획도입니다. 가는 시간을 감안하면 2034년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하네요. 드래곤 플라이 호는 아예 장기간에 걸쳐 비행을 하며 타이탄의 지표를 관찰한다고 하니 왠지 소설의 내용이 겹쳐 보이네요. (혹시..?) https://www.youtube.com/watch?v=lr4r70DWShk https://www.youtube.com/watch?v=w7vCYpr_ZKU https://www.youtube.com/watch?v=msiLWxDayuA https://www.youtube.com/watch?v=IdYeWN9ZivE&t=32s 타이탄의 대기가 두터워 지표에서는 볼 수 없지만 대기를 뚫고 가면 거기서 보일 토성의 풍경은 장관일 것 같아요.
흥미롭네요.
얼음이 있다고 해서 타이탄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유행이었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관심이 없어졌는줄 알았는데 2027년에 탐사선 발사 계획이 있었군요. 영상 잘 봤습니다.
어린 시절 자칭 초능력자라고 주장하던 유리 겔라가 우리나라에까지 와서 방송을 통해 숟가락을 구부리는 장면을 직접 시청했었는데 당시엔 그저 신기하다라고만 생각했지 저거 어떻게 하는 걸까 하는 식의 의문을 갖지는 못했었어요. 흥행이나 수익을 위해선 뻔한 사기행각도 방송해버리는 당시 상황이 떠올라 씁쓸합니다. 15장까지 읽었는데 사기집단 잠벤도르프가 어떤식으로 활약을 할지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소위 민주주의라는 시스템 하에서는, 여론을 조성하는 능력이 있다면 굳이 왕이 될 필요가 없다네. 대중의 표를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으면 간접적으로 사회를 조종할 수 있거든.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 그대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탈취제나 처방약을 받는 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부여받게 되지. TV의 롤모델이나 유명인사들은 그런 식으로 대중이 동일시하기 쉽도록 세심하게 만들어진 자들이고.”
생명창조자의 율법 p.217, 제임스 P. 호건 지음, 조호근 옮김
“처음 기계를 조립한 기계가 아닌 존재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지. 그 존재가 기계라면 그가 만든 기계는 우리가 가정한 최초의 기계가 아닐 수밖에 없으니까. 그 기계를 조립한 기계가 아닌 존재에게 ‘생명창조자’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것 또한 합당한 일이라 생각하네. 모든 로빙들이 그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상황 아닌가. 하지만 그런 결론이 내려졌다고 해서 이성 너머의 세계를 상정하고 질문을 던질 수 없는 불가지의 영역을 만드는 행위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네. 내가 부인하고 싶은 경계는 바로 그런 것일세.”
생명창조자의 율법 p.225, 제임스 P. 호건 지음, 조호근 옮김
“경계가 뒤로 물러났다는 말은 경계 안쪽 지식의 세계가 더 넓어졌다는 뜻일세.” 티르그는 대답했다. “그리고 그 세계가 다시 닫혀버리는 것이 아니라 무한하게 확장한다면, 경계를 영영 넘지 못하더라도 보상은 무한히 늘어날 수 있지.”
생명창조자의 율법 p.226, 제임스 P. 호건 지음, 조호근 옮김
전 이 문장이 좋았어요. 도른발트가 말하는 '어차피 알 수 없고 결론이 없는 불가지의 영역으로 귀결된다면 무엇하러 탐구하고 의문을 품어야 하는가'에 대해 왜 계속 생각하고 시도해야 하는가를 단순하면서도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어서요. 도달하지 못할 결론의 무의미함이나 허무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우리가 그동안 넓혀온 경계의 테두리에 의미가 있다는 지적과 관점의 전환이 와 닿았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로빙들이 기계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고 중세시대의 사람의 실루엣이 머리에 떠오를 정도로 인간적인 모습과 묘사가 많네요.
로빙 정비관으로 들어와 소켓에 플러그를 꽂을 때쯤에는 그대로 쓰러져버릴 지경이었다. 그는 자리에 누워 회로를 비활성화 하고 잠시 행복한 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완벽하게 충전을 끝내고 상쾌한 기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어링 안감, 필터, 전기 접촉자, 체액 모두 새것으로 교체되어 있었고, 연마한 표면에는 광택이 흘렀다.
생명창조자의 율법 p.230, 제임스 P. 호건 지음, 조호근 옮김
"과학자들이야말로 가장 속여 넘기기 쉬운 작자들이지." 잠벤도르프가 좋아하는 말 중 하나였다. "직선적이고 예측 가능하고 유도 가능한 방향으로 사고하니까, 손쉽게 잘못된 방향으로 유도할 수도 있지. 그들은 이 세상을 모든 일에 논리적 설명이 가능하고 모든 존재가 보이는 그대로인 곳으로 인지한다네. 내가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어린아이나 마술사 같은 친구들이지. 과학자들은 아무런 문제도 안 돼. 그 작자들을 상대하는 일에는 나름 자신이 있다네."
생명창조자의 율법 37p, 제임스 P. 호건 지음, 조호근 옮김
논리적으로 성립된 이론이 있어야 과학이 되는 거야. 내용물이 중요한 것이 아닐세. 과학이 되려면, 이론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 중 하나를 반박할 수 있어야 하네. 틀렸는지 시험해 볼 방법이 있어야 한다는 말일세. 어떤 이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아.
생명창조자의 율법 54p, 제임스 P. 호건 지음, 조호근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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