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글꼭지]
1. "그들은 기억이 변하여 그 논리를 부정할 수 있다는 것도, 시간이 그 기억을 (개인이 자신의 운명을 내다보고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 갈 머나먼 주기까지) 완성해 갈 것이라는 것도 망각하고 있다. 어쨌든 니체는 회귀에 대한 기억의 확신에 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 "그들은 기억이 회귀 이론을 부정하는 새로운 요소를 수반한다는 것, 그리고 시간이 그 기억을 (개인이 자신의 운명을 내다보고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 갈 머나먼 주기까지) 완성해 갈 것이라는 것도 망각하고 있다. 한편, 니체가 기억을 통해서 회귀를 입증하려고 한 대목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322쪽)
2. "또한 주지할 사실은 니체가 원자의 무한성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 그는 자신의 논리를 정립하기 위해 한정적 힘을 거론하는데, 이 한정적 힘은 무한한 시간 속에서 전개되지만 수는 무제한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니체의 작업은 충실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333쪽)
→ "또한 주지할 사실은 니체가 원자의 유한성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 니체는 자신의 논리를 입증하기 위해 제한된 힘을 거론하는데, 이 제한된 힘은 무한한 시간 속에서 전개되지만 무한한 숫자의 변형은 불가능하다. 니체의 작업은 교묘하게 이뤄졌다." (333쪽)
3. "예컨대 그는 우주적 힘의 균형은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전의 영원에서 우주의 역사는 무한히 발생했다."
→ "예컨대 그는 우주적 힘의 균형은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만약 가능했더라면 이전의 영원에서 우주의 역사는 무한히 발생했다. (333쪽)
4. "하지만 그 이전의 영원(또는 신학자들이 말한 '과거의 무한한 시간')은 시간의 원리를 인식할 수 없다는 우리의 선천전 무능력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공간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무능력의 병에 걸려 있다. 따라서 이전의 영원을 불러내는 것은 오른쪽의 무한, 즉 미래의 무한을 불러내는 것만큼 결정적이다."
→ "하지만 그 이전의 영원(또는 신학자들이 말한 '과거의 무한한 시간')은 시간의 시작을 개념화할 수 없다는 우리의 선천전 무능력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공간과 관련하여 이러한 무능력으로 고통받고 있기에, 이전의 영원을 불러내는 일은 오른쪽의 무한, 즉 미래의 무한을 불러내는 일 만큼이나 결정적이다." (333쪽)
5. "열역학의 두 번째 법칙은 에너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존재하고 이 과정은 돌이킬 수 없다고 단언한다. 색과 빛은 에너지의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검은 표면에 빛을 투사하면 색으로 변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반면에 색은 다시 빛의 형태로 돌아가지 못한다. 어딘가 무심하고 무료한 것 같은 이런 확신은 영원 회귀의 "순환적 미로"를 파기한다."
→ "열역학 제2법칙은 에너지가 비가역적인 과정을 따른다고 말한다. 열과 빛은 에너지의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검은 표면에 빛을 투사하면 열로 변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반면에 열은 다시 빛의 형태로 돌아가지 못한다. 어딘가 무해하고 무미건조하기까지 한 이런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영원 회귀의 "순환적 미로"를 파기한다." (334쪽)
6. "열역학의 첫 번째 법칙은 우주의 에너지가 항구적이라는 것이다. (···) 서로 다른 온도가 동일해질 때, 다른 물체에 대한 한 물체의 모든 행위가 제외(혹은 벌충)될 때, 세계는 원자의 우발적 집합이 될 것이다. (···) 상호 교환의 힘으로 전 우주가 균형적 상태에 이르면 미지근해지고 죽게 될 것이다."
→ "열역학의 첫 번째 법칙은 우주의 에너지가 보존된다고 말한다. (···) 엔트로피가 최대치에 도달하면, 온도가 균등해지고 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 미치는 작용이 상쇄되거나 벌충되는데, 이때 세계는 원자들의 우발적인 집합이 될 것이다. (···) 끊임없는 상호 교환을 통해 전 우주가 균형적 상태에 이르면 미지근해지고 죽게 될 것이다." (334쪽)
7. "빛은 색으로 사라지고 있으며 우주는 매 순간 알아볼 수 없게 변하고 있다. 또한 훨씬 옅어지고 있다."
→ "빛은 점차 열로 손실되어 가며, 우주는 매 분마다 보이지 않게 된다. 또한 더욱 가벼워진다." (334쪽)
8. 마지막 단락.
→ "마지막으로,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차라투스트라의 논리를 수용하고도 나는 어떻게 동일한 두 과정이 하나로 통합되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의 연속성 안에서 일어난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가? 아무도 그것을 입중해주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 숫자를 셈해주는 특별한 대천사가 없다면, 우리가 수열의 첫 항이나 322^2000째 항이 아닌 13514번째 순환 주기를 통과하고 있다는 사실이 대관절 무슨 의미란 말인가? 이는 실용적 관점에서 아무 의미도 없는데, 사상가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 지성적 관점에서도 아무 의미가 없으며, 이는 심각한 문제다." (335쪽)
(12) [보르헤스 읽기] 『영원성의 역사』 2부 다시 읽어요
D-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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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로 지정된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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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 이론] 첫 번째 글꼭지에서 보르헤스는 무한을 파고든 수학자인 게오르그 칸토어의 증명을 빌려, 니체의 영원 회귀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칸토어는 모든 무한은 크기가 똑같은지, 아니면 어떤 무한은 다른 무한보다 더 큰지를 궁금해 하고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업적을 이루었는데요, 대표적으로 칸토어는 (유한집합과 달리) '무한집합은 자신의 어떠한 부분 집합과도 동일한 집합'임을 알아냈습니다. 이것이 왜 흥미롭냐면 무한집합에서 부분은 전체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칸토어의 발견에 기대어, 보르헤스는 일찍이 니체가 주장한 영원 회귀의 논리적 취약성을 간파합니다. 니체는 영원 회귀를 말하면서 중요한 전제를 세웠습니다. 바로 세계를 이루는 원자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을지언정 유한하며, 그리하여 세계는 거대할지언정 유한한 수의 조합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무한한 시간 속에서는 가능한 모든 순열이 실현되기에, 우주는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핵심은 유한한 세계의 모든 가능성이 무한한 시간 속에서 무한히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칸토어의 발견은 이러한 영원 회귀에 배치될 가능성을 품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세계란, 자연수의 수열과 달리, 선행하거나 후행하는 점을 가지지 않는 공간상에 펼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숫자에 관한 고차원의 영역에서, 부분은 전체보다 결코 작지 않다"라는 관점에서 보면, 세계는 유한한 사물로 이뤄져 있지만 본디 무한한 요소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이는 시간의 무한함과 무관하게 무한합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도드라집니다. 만일 세계가 무한한 수의 항으로 구성될 수 있다면, 무한한 수의 조합이 가능하며, 우주가 정확히 똑같은 형태로 반복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해지기 때문입니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적습니다. “[칸토어의 집합론에 따라] 만일 우주가 무한한 수의 요소로 구성된다면, 엄밀히 말해 무한한 조합이 가능하므로 영원 회귀의 필연성은 사라진다. 남는 것은 단순한 가능성뿐이며, 그 확률값은 0으로 계산된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정확하진 않을 수 있습니다. 육면체의 주사위의 세계는 누가 보더라도 유한합니다. 주사위는 육면체의 구조와 각각에 쓰인 1부터 6까지의 유한한 숫자로 구성됩니다. 니체의 가설대로 무한한 시간 속에서 주사위가 무한히 던져진다고 생각해봅시다. 보르헤스의 주장은 주사위가 무한히 던져진다고 해도 특정 순열(1-2-3-4-5-6-1-2-3-······)이 반복된다고 말할 근거는 희박합니다. 왜냐하면 무한한 조합 속에서 그 한 순열이 반복될 가능성은 0으로 수렴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니체의 영원 회귀는 이후 칸토어가 정립한 집합론의 세계와 양립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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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글꼭지에서, 보르헤스는 니체가 1881년 8월 실바플라나 호수의 숲길을 산책하면서 문득 영원 회귀를 착상한 순간을 설명합니다. 분명 영원 회귀는 니체가 고안한 것이지만, 오롯이 니체의 사상적 결과물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고 유구한 내력을 지닙니다. 모든 명사에 물질 개념을 부여했던, 저 그리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주랑학파라고도 불리웠던 스토아학파는 만물회복설(apokatastasis)을 말하며, 이미 니체에 앞서 '순환'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신국론⟫에서 순환을 혐오스러운 교리로 낙인 찍고, 스토아학파와 피타고라스학파가 제시한 원환의 미로를 타파할 수단이자 '곧은 길'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합니다. 보르헤스는 헬레니스트였던 니체가 이러한 논박 과정을 몰랐을리는 없다고 단정하면서, 니체가 활용한 계시적 1인칭의 기법을 탐구합니다. 누구보다 뛰어난 헬레니스트였던 니체가 굳이 박식하게 저자를 인용하면서 따옴표를 쓰는 방식을 채택하지 않고 계시적 1인칭을 내세운 것은 수사적 효과였다는 것입니다.
보르헤스가 보기에, 니체의 영원 회귀란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한 가지 수단이었습니다. 니체는 적습니다. “머나먼 행복과 은혜와 축복을 갈망할 게 아니라 우리가 다시 살기를 바라도록, 그리하여 영원히 그럴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 그러나 마우트너는 니체의 영원 회귀에 '도덕적인 것', 즉 실용적 영향력이 끼어들 틈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회귀의 도덕적 영향력을 가정하는 순간 도래할 미래를 미리 생각하고 지금의 행동을 조정하는 것이기에 "무언가가 다른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영원 회귀는 깨어지게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니체라면 마우트너의 비판 자체도 영원 회귀의 일부로 여겼으리라고, 보르헤스는 추측합니다. 왜냐면 영원 회귀에서 중요한 것은 '확실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세계가 반복될, 그 일말의 '가능성'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썼습니다(“순환적 반복이라는 교리가 개연적이거나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단순한 가능성의 이미지조차 우리를 몸서리치게 하고 우리를 재건할 수 있게 한다. 영원한 형벌의 가능성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던가!”). 흥미롭게도 이 대목에서 보르헤스는 니체에 대한 자세를 고쳐 잡는 듯합니다. 분명 보르헤스는 영원 회귀가 단순한 형이상학적 이론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실천적 개념이자, 그 비판까지도 포용하는 철학의 체계였다는 것을 일부 긍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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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글꼭지에서 보르헤스는 다시 영원 회귀를 비판적으로 살펴봅니다.
먼저, '기억'을 통해서 영원 회귀를 논박합니다. 보르헤스는 흔히들 느끼는 '데자뷰 현상이 영원 회귀를 입증하는 한 사례'라는 주장을 검토하며 시작합니다. 보르헤스는 단호하게 데자뷰 현상이 영원 회귀를 입증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만일 어떤 이가 이전의 순환된 사건을 기억한다면, 그러한 기억 자체가 이미 순환에 없었던 '새로운 요소'가 되며, 이 없던 새로움이야말로 모든 순환이 완전히 동일하게 반복된다는 영원 회귀의 핵심 전제를 부정하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개인이 자신의 운명을 내다보고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 갈" 가능성까지 생겨나게 됩니다. 이는 데자뷰 현상이 영원 회귀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아니며, 외려 반박하는 증거임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보르헤스는 '기억'이 영원 회귀론의 내적 모순을 드러내고 있음을 날카롭게 간파합니다("한편, 니체가 기억을 통해서 회귀를 입증하려고 한 대목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다음으로, '원자'를 통해서 논박합니다. 보르헤스는 니체가 원자론 자체를 부정한 채, 영원회귀를 뒷받침하려고 '한정된 힘'을 언급했음을 지적합니다. 니체에게 원자란 산술적 이해를 위해서 고안된 모델에 불과할 뿐이라는 겁니다. 그 대신에 제시한 '한정된 힘' 안에서, 니체는 무한한 것은 시간일 뿐 변화 자체는 무한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보르헤스는 니체가 '이전의 영원/선행 영원(Eternidad Anterior)에 호소한 것이 논리적으로 모순됨을 간파합니다. '시간'을 하나의 연장선으로 상상할 때, 왼쪽으로 향하는 것이 '이전의 영원'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긍정하는 순간, 미래로 나아가는 '오른쪽의 무한'도 긍정해야 하는데, 보르헤스가 보기에 이 모델을 상정하는 것은 "시간의 시작을 개념화할 수 없다는 우리의 선천적인 무능력"을 반영할 뿐입니다. 나아가 시간의 무한함을 직관하는 것은 공간의 무한함을 긍정하는 것인데, '이전의 영원'은 현실에서 흘러가는 시간과는 무관합니다. 따라서 거듭해서 앞선 근거로 거슬러가는 무한퇴행을 막기 위해서라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가 '시간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창조 자체가 '시간과 함께' 일어났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보르헤스는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영원 회귀를 수용하더라도 하나의 회귀와 또 다른 회귀의 차이를 누구도 입증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보르헤스는 말미에 이렇게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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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숫자를 셈해주는 특별한 대천사가 없다면, 우리가 수열의 첫 항이나 322^2000째 항이 아닌, 13514번째 순환 주기를 통과하고 있다는 사실이 대관절 무슨 의미란 말인가? 이는 실용적 관점에서 아무 의미도 없는데, 사상가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 지성적 관점에서도 아무 의미가 없으며, 이는 심각한 문제다. ”
『영원성의 역사』 335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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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로 지정된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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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적 시간~] 보르헤스는 1934년에 발표한 ⟨순환 이론⟩에서 니체의 영원 회귀를 수학적으로든 철학적으로든 반박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7년이 더 흐른 1941년에 이 글을 쓰면서, 보르헤스는 "영원토록 영원 회귀로 돌아가곤 한다"면서 니체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보르헤스는 이 글에서 역사적으로 영원 회귀를 해석하는 세 가지 방식을 다시금 살펴봅니다.
마찬가지로 몇 가지 문장을 바꿔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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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에서 나는 (몇 가지 역사적 해설을 덧붙이면서) 영원 회귀의 세 가지 기본적 논리를 밝히고자 한다. / 첫 번째는 플라톤이다."
→ "이 글에서 나는 (몇 가지 역사적 해설을 덧붙이면서) 영원 회귀의 세 가지 기본적 해석 방식을 정의하고자 한다. / 첫 번째 방식은 플라톤의 것으로 여겨져 왔다." (337쪽)
2. "시간에 대한 플라톤의 논리는 그러했다. (···)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일반적으로 발생하는 것이지 (플라톤이 추정하듯) 개별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 "시간이 흐르면서 이 추측은 플라톤이 제시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일반적인 형태로 발생하는 것이지 (플라톤이 추정하듯) 세부적인 특수성까지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338쪽)
3. "대수학의 원리가 그를 정당화 해주는데, n 수의 대상은 (르 봉의 가설에서 원자, 니체의 가설에서 힘, 코뮌주의자 블랑키의 가설에서는 단순한 육체들) 무한한 순열의 수가 될 수 없다."
→ "대수학의 원리가 그를 정당화 해주는데, n개의 대상은 (르 봉의 가설에서 원자, 니체의 가설에서 힘, 코뮌주의자 블랑키의 가설에서는 원소) 무한한 수의 순열을 생성할 수 없다."
4. "에피쿠로스가 말한 무한한 물질이 아니라 한정적 물질을 상상해 보자. 한정적 입자의 수는 무한한 이항의 여지가 없는 반면, 영원한 지속성 안에서는 실행 가능한 모든 질서와 배치가 무한하게 발생한다."
→ "에피쿠로스처럼 물질이 무한하다고 가정하지 말고, 유한하다고 가정해 보자. 유한한 수의 입자들은 무한한 배열 가능성을 가질 수 없다. 영원한 시간 속에서 모든 가능한 순서와 배치는 무한한 횟수로 발생할 것이다." (340쪽)
5. "그 가정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후행하는 상태가 이전 상태와 정확히 동일하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하나의 상태가 두 번 발생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 그가 출발한 지점과 도착한 지점이 서로 다른 공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주 유사하기에 동일한 공간이라고 할 것이다. 역사가 순환적이라는 가정으로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정 상황에 대한 모든 동시대적 상황의 총체를 구성해 보면, 경우에 따라서 그 모든 총체가 제 자신에 선행한다."
→ "이 가설은 어떻게 정식화될 수 있을까? 우리는 이후의 상태가 이전의 상태와 순번상 동일하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그 상태가 두 번 발생했다고 말할 수 없다. (···) 그는 출발점과 도착점이, 서로 다르지만 매우 유사한 두 장소라고 말하지 않고, 같은 장소라고 말한다. 역사가 순환적이라는 가정도 다음처럼 이해할 수 있다. 특정 상황과 동시에 존재하는 모든 상황의 집합을 구성해 보자. 어떤 경우에는 이 전체 집합이 시간상 자기 자신에 선행한다." (340쪽)
6. "그 기간이 길든 짧든 마찬가지이다."
→ "가장 긴 기간과 가장 짧은 기간은 동일하다." (343쪽)
7. "과거와 미래는 이성의 원리에 구속된 의식의 속박에 의해 개념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 " 과거와 미래는 개념 속에서만, 그리고 이성의 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우리 의식의 연속적인 흐름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344쪽)
화제로 지정된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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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적 시간] 첫 번째는 이제껏 플라톤의 것으로 간주됐던 해석 방식으로, "행성의 주기가 순환적이라면 우주의 역사도 그와 같을 것"이라는 점성술에 바탕합니다. 유의해야 할 점은 플라톤의 해(Año de Platón/Plato's year)가 끝날 때마다 ‘운명’이 필연적으로 순환한다는 것입니다. 보르헤스는 자유론자였던 바니니의 글을 인용하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 운명이 "일반적인 형태로 발생하는 것이지 (플라톤의 추정처럼) 세부적인 특수성까지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플라톤의 해는 비교적 엄격하게 운명을 순환시킵니다.
두 번째는 니체의 방식입니다. 앞서 에세이에서도 살펴봤듯, 유한한 원소가 무한한 시간 속에서 유한한 순열을 반복합니다. 말미에서 보르헤스는 러셀이 제시한 엄격한 가설, "동일한 보편적 역사의 항구적 연쇄"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역사는 완벽히 동일하게 반복됩니다. 역사의 순환 속에서 이전 상태와 이후 상태는 유사한 것이 아니며, 전과 후는 ‘순번상으로(numéricamente)’ 동일합니다. 따라서 한 상태가 두 번 발생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 러셀이 제기한 가설의 핵심입니다. 이 해석에서 시간은 완벽히 순환합니다. 순환적 시간은 과거-현재-미래가 연대기순으로 펼쳐지는 선형적인 시간관과 다르게 흘러갑니다. 순환적 시간관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삼각형을 그리며 빙글빙글 도는 모델을 상상해야 합니다. '···과거-현재-미래-과거-현재-미래-···'처럼 순환합니다. 이때 미래는 과거로 굽어지게 되는데, 이 순간 '현재'는 과거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앞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일찍이 러셀이 제시한 "동일한 보편적 역사의 항구적 연쇄"가 보여주는 모델입니다(“역사가 순환적이라는 가정도 다음처럼 이해할 수 있다. 특정 상황과 동시에 존재하는 모든 상황의 집합을 구성해 보자. 어떤 경우에는 이 전체 집합이 시간상 자기 자신에 선행한다.”⏤340쪽). 이런 사고방식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우리는 연대기순의 시간관에 근거한 비평이 아닌 순환적인 시간관에 근거한 급진적인 비평론을, 피에르 바야르의 ⟪예상표절⟫ 같은 책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세 번째 해석 방식은 앞선 두 가지와 달리 섬뜩하지도 멜로드라마적이지도 않은 것입니다. 여기서는 앞서 살펴본 러셀 옹의 가설과 좀 다르게, 주기가 '동일'하게 순환하지 않고 '유사'하게 순환합니다. 보르헤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입니다. 아우렐리우스는 과거와 미래가 관념일 뿐 실재성이 없으며, "현재가 모든 삶의 형태"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모든 이들의 운명은 기실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가정합니다. (이는 훗날 보르헤스가 쓴 단편 소설 ⟨신학자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단조로운 세계를 상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사람들의 운명이 지닌 아날로지를 확인하는 것이지 동일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짧든 길든 모든 순간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옹호한 '현재'이며, 현재는 모든 역사를 품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보르헤스는 이렇게 적습니다.

예상 표절 - 문학과 예술의 전통적 연대기를 전복하여 무한히 확장된 독서의 세계로 빠져들다<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으로 독서의 근간을 뒤흔든 피에르 바야르가 이번에는 문학과 예술의 가장 민감한 이슈인 ‘표절’의 개념을 전복시키는 주장을 펼친다. 이 책에서 문제 삼는 표절은 과거의 것을 후대에서 도용하는 전통적인 표절이 아니라, 미래의 작품이나 아이디어를 앞선 세대에서 도용하는 이른바 ‘예상 표절’에 관한 이야기이다.

알렙환상적 사실주의와 추리소설적 기법, 반복 회귀라는 세계인식, 고도의 압축성 등이 특징으로 꼽히는 보르헤스의 단편 17작품을 한데 묶었다. 표제작인 <알렙>은 이 세상의 모든 사물, 상황, 모든 시간과 공간이 단 한순간으로 압축되어 있는 `알렙`이란 존재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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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시절에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변치 않고 항구적이라는 주장이 사람을 서글프게 하거나 분노케 하지만, 궂은 시절에는 어떤 수치도, 어떤 재난도, 어떤 독재자도 우리를 가난하게 하지 못하리라는 약속이 된다. ”
『영원성의 역사』 345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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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로 지정된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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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야화⟫의 역자들~] 총 세 개의 글꼭지로 구성돼 있으며, 말 그대로 ⟪천일야화⟫를 둘러싼 번역의 역사를 번역가를 중심으로 소개합니다. 소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첫 번째 글꼭지에서는 영역본의 권위 있는 번역자인 리처드 버튼 경을 다루고, 두 번째 글꼭지에서는 불어본의 번역자인 마르드뤼 박사를 다루며, 세 번째 글꼭지에서는 독어본의 번역자인 엔노 리트만을 다룹니다.
번역은 굉장히 의도적인 행위입니다. 모든 번역서는 번역될 대상으로 선정된 그 순간부터 번역될 책에 대한 기준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번역될 책으로 선택된 순간부터 '의도'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만큼 타인의 번역을 논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며, 모든 번역은 크든 작든 미진합니다. 단 모든 번역이 미진함에서 그치는 것 은 아니며, 좋은 번역서는 제 미진함으로써 인간된 한계를 드러내고, 그것을 갱신하고자 하는 의지를 후대에 계승합니다. ⟪천일야화⟫의 역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로 몇 가지 문장을 바꿔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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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턴 경]
1. "앙드레 지드는 1921년 ⟪에세이 선집⟫에 실린 경망스러운 송사에서 갈랑의 자격을 비난했다. 그런데 이 공격의 목적은 마르드뤼가 18세기의 갈랑만큼이나 '세기말'적이며, 갈랑보다 훨씬 충실하지 못하다고 비판함으로써 (지드가 평소 본인의 평판과 다르게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마르드뤼의 번역을 묻어 버리려는 것이었다."
→ "앙드레 지드는 1921년 ⟪에세이 선집⟫에 남아 있는 어떤 경망스러운 찬사에서, 갈랑의 자유분방한 번역을 비난하면서 (지드 자신이 얻은 명성을 가뿐히 뛰어넘는 무구함으로) 마르드뤼의 문자 그대로의 번역이라는 관념을 부각시키려 했다. 그러나 마르드뤼의 번역은 갈랑이 18세기적인 것만큼이나 '세기말'적이며 훨씬 불충실하다."(351쪽)
2. "(품격을 지키고자 한 갈랑의 절제된 글에 "침대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은 잔혹한 것이었다.)"
→ "(품격을 지키고자 한 갈랑의 절제된 글에서 "침대에 맞아들였다"와 같은 상황 묘사가 오히려 더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351쪽)
3. "레인의 박식한 버전의 ⟪천일야화⟫가 일탈의 백과사전인 (혹은 그렇게 보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 "레인의 박식한 버전의 ⟪천일야화⟫가 회피술을 망라한 백과사전인 (혹은 그렇게 보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352쪽)
4. "그가 책임질 전폭적인 삭제가 부조리하진 않지만 핑계가 지나치다. 레인은 조심성이라는 미덕을 지닌 사람으로 할리우드식의 아주 기이한 신중함의 선구자라 할 만하다."
→ "이러한 책임감 있고 전적인 거부는 내게 비논리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내가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청교도적 위장술이다. 레인은 위장술의 대가이며, 할리우드에서 볼 법한 기이한 과묵함의 최고봉을 보여주는 선구자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352쪽)
5. "그는 원문을 요약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 "그는 원문을 축약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353쪽)
6. "정신을 번역하는 것은 너무나도 거대하고 비현실적인 의지이기에 해가 되지 않으며, 글을 번역하는 것은 너무나도 무모한 정밀함을 요하기에 그 글이 현실화될 위험이 없다. (···) 그가 쓰는 어휘에는 간결한 기교로 대체되지 못한 라틴어가 지나치게 많다는 게 흠이다."
→ "정신을 번역한다는 것은 너무 거대하고 환영 같은 의도를 가지기에 [실제로는] 무해하다고 할 수 있다. 문자 그대로 번역한다는 것은 너무 무모한 정밀성응ㄹ 요하기에 현실화되기 어렵다. (···) 간결함에 이르는 기교를 아무리 활용한다고 한들, 어찌할 수 없는 라틴어 단어가 지나치게 많다는 점이 지적된다." (354쪽)
7. "버턴의 번역에 나무랄 데 없는 동양식 표현이 있는 게 의아하다. 반면에 레인의 번역에선 그런 표현이 드문 것으로 보아 그가 부지불식간에 독자적인 표현을 쓴 것으로 보인다."
→ "버턴의 번역에서는 나무랄 데 없는 동양식 표현이 있는 게 의심스럽지만, 레인의 번역에선 그런 표현이 너무 드물어서, 의도치 않게 진정성 있어 보인다." (355쪽)
8. "리트만은 ⟪천일야화⟫가 무엇보다 경이로움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동양의 모든 정신에 대해 이런 견해가 보편화된 것은 갈랑의 작품 덕이다. 이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아랍인은 ⟪천일야화⟫가 우리에게 들려주지 않은 사람, 관습, 부적, 사막, 정령을 이미 알고 있기에 원본을 업신여기고 있다고 주장한다."
→ "리트만은 ⟪천일야화⟫가 무엇보다 경이로움의 모음집이라고 관찰한다. 이러한 견해가 모든 서구인의 정신에 보편적으로 자리하게 된 것은 갈랑 덕분이다. 이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에 비해 아랍인들은 ⟪천일야화⟫를 읽고서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이미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 관습, 부적, 사막, 정령을 익히 들어 아는 탓이다." (3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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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드뤼 박사]
1. "나는 이 묘사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그렇듯이 시각적인 글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존경한다.) 재차 말하지만, 이 묘사는 13세기에 쓴 "문자 그대로의 완전한" 버전처럼 내게 무한한 놀라움을 야기했다.
→ "나는 이 묘사를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와 같은 시각적 산문의 일환으로 받아들이고 싶긴 하지만(심지어 존경하기까지 하지만), 13세기에 쓰인 글을 "문자 그대로 완전히 번역한" 판본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런 주장이 무한히 놀랍다고 거듭 말할 것이다." (372쪽)
2. "13세기 사람에게 '마술적'이라는 말은 아주 정확한 수식어겠지만, 고상한 마르드뤼의 세속적인 형용사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 "13세기 사람에게 '마술적'이라는 말은 아주 정확한 수식어였을 것이며, 한 점잖은 의사가 고안한 세속적인 형용사 따위는 아니었을 것이다."(375쪽)
3. "그는 미소를 머금지 않고는 초자연적인 것을 서술할 능력이 없다. 그는 이렇게 번역한다. "어느 날 압둘 말리크 칼리프가 악마 같은 검은 연기가 담긴 구리로 된 골동품 그릇에 대한 얘기를 듣고는 너무나도 경이로운 나먼지 모두가 현실을 의심하는 듯하자, 탈리브 벤 스탈이라는 여행자가 끼어들어야 했다.""
→ "그는 냉소하지 않고서는 초자연적인 것을 서술할 능력이 없다. 그는 번역하는 척한다. 예컨대, "어느 날 압둘 말리크 칼리프가 오래된 구리 항아리에 관한 얘기를 들었는데, 그 안에는 악마의 형상을 한 기이한 검은 연기가 들어 있었다고 했다. 그가 그토록 명백한 사실의 현실성에 의심을 품는 듯 크게 놀라워 했고, 여행자 탈리브 벤 스탈이 나서야만 했다.""(376쪽)
4. "전반적으로 봤을 때, 마르드뤼는 글을 번역한 게 아니라 책의 내용을 번역해 버렸다."
→ "전반적으로 봤을 때, 마르드뤼는 단어를 번역한 게 아니라 책의 표현을 번역해 버렸다." (377쪽)
5. "그의 충실함은 그의 창조적이고 즐거운 불충에 있으며, 우리는 바로 이 점을 알아야 한다."
→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그의 불충실함, 즉 그의 창조적이고 행복한 불충실함이다." (3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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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노 리트만]
1. "그 네 개의 번역은 "이스라엘 혈통의 사서"(카탈루냐어로 쓰인 어느 백과사전에는 이에 반하는 내용이 있다.)였던 구스타프 바일의 번역,"
→ "그 네 개의 번역은 "이스라엘인[유대인]이지만 사서"인⏤이 역접의 표현은 어느 백과사전에서 카탈루냐어로 쓰인 페이지에 나온다⏤구스타프 바일의 번역," (379쪽)
2. "이 훌륭한 외전이 버턴이나 마르드뤼의 번역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다. 번역자는 그 외전을 시 형식을 빌려서 했는데, 원문의 시구를 '대체' 혹은 '대신'했다고 할 만큼 아름다운 생기를 띠고 있다. 산문은 원문에 따라 번역했고, 위선과 파렴치함이 담긴 내용은 전반적으로 타당하게 생략했다. (···) 바일은 '사서'였지만 유대인이라는 게 헛되지는 않았다. 그의 언어는 글쓰기의 맛을 품고 있었다."
→ "이렇듯 훌륭히 개찬한 문장은 버턴이나 마르드뤼의 번역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다. 번역자는 개찬한 문장을 운문 부분에 배치했는데, 원문의 운율을 '대체' 혹은 '대신'했다고 할 만큼 아름다운 생기를 띠고 있다. 내가 이해하기로 그는 산문에서는 있는 그대로 번역했고, 위선과 무례함, 양쪽 모두와 동등하게 거리를 둔 정당한 태도로 몇 가지를 생략했다. (···) 바일은 '사서이지만' 유대인이라는 게 헛되지는 않았다. 그의 언어는 성서의 맛을 품고 있었다." (379-380쪽)
3. "1895년부터 1897년까지 출판된 두 번째 번역은 정확성도 문체도 매력적이다. (···) 이는 아랍인에 관해서는 버턴이 우위에 있음을 의미한다."
→ "1895년부터 1897년까지 출판된 두 번째 번역은 정확성 뿐만 아니라 문체라는 매력도 포기한다. (···) 이는 리처드 버턴 경이 아랍인들보다 우위에 있음을 확인해 줄 따름이다." (380쪽)
4. "버턴의 글의 원천 중 '하나'가 초서였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 "버튼의 활용한 어휘 목록의 출처 중 '하나'가 초서였다고 [담백하게] 말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381쪽)
5. "심지어는 1000번에 걸쳐 반복되는 매일 밤의 구절도 마찬가지였다."
→ "심지어 다음 밤으로 이동함을 표현하는⏤천 번이나 되는⏤단어들도 생략하지 않는다." (382쪽)
6. "문학에 정통한 누군가가 이견이 있다고 해도 그가 아르헨티나 사람이라면 전혀 신경 쓸 필요 없다. / 그 이유는 이렇다. 버턴과 마르드뤼와 갈랑의 번역은 '문학 이후'를 생각게 한다."
→ "한 명의 문인에 불과한⏤그것도 아르헨티나 공화국 출신에 불과한⏤이가 이견을 가지는 것은 전혀 중요치 않다. / 그럼에도 이견의 이유를 밝히자면 이러하다. 버턴과 마르드뤼, 심지어 갈랑의 번역은 하나의 문학 '이후'에만 상상 가능한 것들이다" (382쪽)
7. "조지 워싱턴처럼 거짓말할 줄 모르는 리트만의 작품에는 그저 독일의 고결함밖에는 없다. 적어도 너무 적다. ⟪천일야화⟫의 판매에 있어 독일은 뭔가 더 생산했어야 했다."
→ "조지 워싱턴처럼 거짓말할 줄 모르는 리트만의 작품에는 그저 독일의 정직함밖에는 없다. 그것만으로는 너무 부족하며, 매우 불충분하다. ⟪천일야화⟫와 독일 문학의 만남은 더 많은 것을 만들어냈어야 했다." (383쪽)
8. "히드라의 요상한 머리가 몸보다 훨씬 구체적이라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 문간에 거울이 마주하고 있어 얼굴 뒤로 거짓 얼굴이 생기면 더 이상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지 알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 무질서는 백일몽이 만들어 내듯 진부하기에 받아들일 수 있다.
우연은 대칭과 대조와 탈선의 유희를 즐겼다. 한 사람이, 한 카프카가 그 유희를 만들어 내고 증폭하여, 독일식 변형, 즉 독일의 '섬뜩함'에 따라 다시 만들어 내지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 "히드라의 부수적인 머리가 몸보다 훨씬 구체적이라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 문간과 거울이 혼동되고, 가면이 얼굴 아래에 있으며, 이제 아무도 진정한 자가 누구고 그의 우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 무질서는 가수면 상태의 상상물처럼 사소하고 용인할 만하다.
우연은 대칭과 대조와 여담이라는 유희를 즐겼다. 한 사람이, 이를테면 카프카와 같은 이가 이 유희를 만들어 내고 첨예화하며, 독일식 변형, 즉 독일의 '운하임리히카이트'에 따라 그것을 다시 만들어 내지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384-385쪽)
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천일야화⟫의 역자들] 한 권의 책이 시대를 달리해 가면서 전혀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서 달리 번역되는 것은 대단히 반길 만한 일입니다. 한 번역가는 이전의 번역자보다 조금이라도 더 낫게, 그리하여 더 다르게 번역하고자 노력합니다. 이 개인적인 열망이 모인 결과를 후대인들은 종합해서 판단하고, 거기서 배울 점을 추려냅니다. 좁게 보면 각 시대의 번역자들은 적대적 관계를 이루는 것 같지만, 넓게 보면 공생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 나오는 번역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18세기 앙투안 갈랑에 19세기 에드워드 윌리엄 레인으로, 레인에서 리처드 버튼으로, 버튼에서 여타 역자들로 이어지는 ⟪천일야화⟫의 각 번역 판본들은 이전 판본을 갱신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적대적 공생 관계로 묶일 수 있습니다. 참고로, 한국에서는 열린책 출판사에서 출간한 ⟪천일야화⟫라는 제목의 역서가 앙투안 갈랑의 버전이고, 월드북 출판사에서 출간한 ⟪아라비안나이트⟫가 리처드 버턴의 버전입니다. 제가 알기로 갈랑과 버턴 중간에 위치한 레인의 번역본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보르헤스의 설명에 따르면, 앙투안 갈랑은 14-15세기에 출판된 아랍어 필사본 4권을 입수하여 18세기 프랑스어로 된 7권짜리 ⟪천일야화⟫를 출간하였습니다. 독특하게도 이때 원본에 없는 몇 가지 이야기를 추가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유명한 알라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이야기가 대표적으로 추가된 이야기에 속합니다. 오늘날까지도 ⟪천일야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야기와 인물들이 원전에는 없으며, 18세기 갈랑이 마론교도였던 한나 디야브에게 들은 내용을 번역본에 추가한 부분이 오늘날까지도 마치 원전처럼 전해지고 있다는 겁니다. 과거의 느슨했던 저작권 인식 때문인 것인지, 아니면 당시 횡행했던 여러 해적판본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개찬에 가까운 번역이 원전의 권위를 뛰어넘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 흥미롭습니다. (보르헤스가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서 제시한 '틀뢴'의 백과사전 이야기와 흡사합니다.) 그럼에도 보르헤스는 갈랑의 판본이 최악이라고 평합니다. 갈랑 스스로가 소위 '품격'을 위해, 원전에서 저속하다고 판단한 부분을 검열∙삭제했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이후 등장한 에드워드 윌리엄 레인은 갈랑이 삭제한 부분을 모조리 찾아서 복원하긴 했지만, 번역을 읽을 독자층을 고려해서 여전히 저속한 부분을 프랑스화하여 파리 사회에 어울릴 법하게 고쳤습니다. 이에, 훗날 사람들은 갈랑과 레인이 과도하게 격식을 차렸으며 원문의 순박함을 파괴했다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천일야화⟫란 본디 순박하지 않으며, 옛날 이야기를 카이로에 사는 평민층의 속되고 천박한 취향에 맞춰 놓은 것이었노라고 말합니다.
레인 이후에 등장한 리처드 버턴 경은 또 달랐습니다. 그는 여행가이자 외교관이자 작가였습니다.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하고, 많은 언어를 습득했던 작가답게 버턴은 원문의 빈한한 문체를 뛰어난 영어로 번역했습니다. 게다가 저속한 부분을 함부로 고치지 않고 가감없이 옮겼고, 다양한 어휘를 사용한 만큼 풍부한 각주를 달았다고 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일정 부분 왜곡이 불가피했지만, 보르헤스는 "그 왜곡 또한 훌륭하다"며 버턴의 번역을 옹호하고 치켜올립니다. 버턴 역시 사람이기에 완벽하다고 할 순 없는 몇 가지 오류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후술할 두 명의 번역자에 대한 논조를 읽어보면 유추할 수 있듯이, 생전 보르헤스는 버턴 경의 번역을 가장 신뢰했던 것 같습니다. 재미있게도 리처드 버턴은 원전을 번역한 게 아니라 윌리엄 헤이 맥나튼의 19세기 판본을 번역했다고 합니다. 이걸 보면서, 오늘날 '중역'에 대한 우리의 열악한 인식도 떠올랐습니다. 이따금 원전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중역을 거쳤기 때문에 그 가치가 뒤떨어진다고 말하는 사람을 볼 때가 있는데, 그건 번역의 역사를 모르기 때문에 흔히 하는 오해입니다. 오히려 중역이기에 중역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고유한 결과물이 있습니다. 언어 자체가 무수한 반향임을 알고 보면 중역 자체를 두고 열등함이라고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중역은 단순히 원문을 직접 독해하지 못한다는 무능함의 결과물이 아니라, 원전과 그 번역과 중역 자체를 모두 고민한다는 점에서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며, 더 성실하기까지 한 작업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중역이 제대로 행해지는 과정에서, 번역자는 원전과 번역 저본의 차이를 모두 인식한 뒤에라야 중역을 행할 수 있음을 알게 되니까요. 여하튼 뒤에 보르헤스가 다루는 두 명의 번역자 이야기는 어렵지 않으니 각자 읽어보시면 될 듯합니다.

아라비안나이트 Ⅰ동서문화사 월드북 133~137권. 신비로운 모험과 환상, 가슴 떨리는 로망스와 유쾌한 웃음이 담겨 있는 천일야화 <아라비안 나이트>. 리처드 버턴의 완역판으로, 모두 5권으로 구성되었다. <아라비안 나이트>에는 중세 이슬람교도들의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는 다양한 삶이 그려져 있다.

천일야화 세트 - 전6권놀라운 마법과 흥미진진한 모험이 펼쳐지는 가운데, 아랍의 문화와 관습은 물론 아랍인들의 세계관과 기질을 재미있게 전하는 앙투안 갈랑의 <천일야화>가 국내 최초로 완역 출간되었다. 앙투안 갈랑의 <천일야화>는 출간된 1704년부터 유럽에서 폭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학자들은 물론 일반 독자에게까지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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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두 편의 글~] ⟪픽션들⟫에도 수록된 ⟨알모타심으로의 접근⟩이라는 단편과 ⟨모욕술⟩이라는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전에 다뤘으니, ⟨알모타심으로의 접근⟩은 간략히 언급하겠습니다. 이 단편은 말미의 각주에 쓰인 대로, '찾는 자'와 '찾는 대상'이 본디 하나임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고, '찾는 자'가 '찾는 대상'에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내용만 놓고 보면, 이 글은 ⟪알무타심으로의 접근(The approach to Al-Mu'tasim)⟫이라는 소설에 대한 서평 형식으로 쓰여졌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다루려는 바하두르 알리의 ⟪알무타심으로의 접근⟫이라는 책 자체가 허구이기 때문에, 이 글은 본디 없는 소설에 대한 서평이며, 그리하여 이 자체가 하나의 허구입니다. 이 글의 사실관계가 복잡하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겠습니다. 내용상, 보르헤스는 1932년 영국령이었던 봄베이에서 바하두르 알리가 출간한 초판본 ⟪알무타심으로의 접근⟫을 읽지 않았습니다. 아마 자세히 읽어보면 알 수 있을 텐데, 보르헤스가 읽은 것은 초판본이 성공한 뒤에 저자가 수정하여 출간한 삽화본 ⟪알무타심이라는 사람과의 대화(The conversation with the man called Al-Mu'tasim)⟫를 편집자 빅터 골란츠가 다시 런던에서 재판하면서 삽화를 빼고 서문을 추가한 재판본입니다. 따라서 허구의 서평인 이 글은 그야말로 ⟨알모타심으로의 접근(El acercamiento a Almotásim)⟩이 됩니다. 정리하면,
(1) 1932년 영국령 봄베이에서 바하두르 알리의 영어 소설 ⟪알무타심으로의 접근(The approach to Al-Mu'tasim)⟫의 초판본이 출간되었습니다.
(2) 초판본이 성공을 거두자, 1934년 봄베이에서 바하두르 알리는 초판본을 수정한 삽화본 ⟪알무타심이라는 사람과의 대화: 움직이는 거울과의 유희(The conversation with the man called Al-Mu'tasim: A game with shifting mirrors)⟫를 출간합니다.
(3) 그리고 거의 동시에, 런던에서 편집자 빅터 골란츠는 위 삽화본에서 삽화를 제거하고 서문을 추가한 재판본을 출간합니다. 이 책이 바로 보르헤스가 읽은 책입니다. 특이하게도 여기에는 부록이 있어서, 1932년 초판본과 1934년 수정본의 차이점이 개괄돼 있습니다.
(4) 따라서 보르헤스는 수정본과 그 부록을 통해서, 초판본 ⟪알무타심으로의 접근⟫으로 또 한 번 접근해 나가는 형식의 서평을 쓰고 있는 겁니다. 이 서평의 제목은 아이러니하게도 스페인어로 돼 있으며 ⟨알모타심으로의 접근(El acercamiento a Almotásim)⟩입니다.
과연 변태같은 설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용과 형식과 제목이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이쯤 설명하고 ⟨모욕술⟩을 다룰 텐데, 여기서도 몇 가지 문장을 바꿔서 읽겠습니다.

russist
1. "누구든 비난받고 싶지 않을 것이며 정말로 비난받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폴 그루삭의 선의의 분노와 애매모호한 칭찬을 대조하다가 (스위프트, 새뮤얼 존슨, 볼테르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루삭이 쓰는 방식을 살펴보려고 비웃음에 대한 즐거운 독서를 그만두자 그런 생각은 사라져 버렸다."
→ "누구든 자신을 난공불락으로 만들고자 하며, 몇몇 페이지에서는 그렇게 될 지도 모른다. 폴 그루삭의 건전한 분노와 애매모호한 칭찬을 대조해 보는 것이 (스위프트, 새뮤얼 존슨, 볼테르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그러한 논공불락을 상상하는 데 영감을 주거나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 상상력은 내가 그런 조롱을 즐겁게 읽는 것에서 벗어나서, 그루삭의 방법론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사라져 버렸다." (399쪽)
2. "따라서 포커에서 세 장의 킹을 들고 있다고 해도 속임수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독설과 조롱으로 논쟁을 일으키는 비평가가 인습적 틀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길거리에서 쓰는 욕설은 논쟁거리가 될 만한 조롱에 대한 실질적인 모델이다."
→ "따라서 세 장의 킹은 포커 게임을 장악하기에 충분하지만 트루코 게임에서는 별 소용이 없다. 논객 역시 인습의 산물이다. 게다가, 길거리에서 흔히들 욕설을 뱉는 방식을 보면, 장차 논쟁이 어떤 형태로 이뤄질지 그 설명적 모델을 알 수 있다." (400쪽)
3. "그렇게 인간의 기본적이고 고칠 수 없는 허망함만 남기는 것이다. 하지만 음악이 될 수 있는 소네트 또한 남는다. (어느 이탈리아인은 괴테로부터 벗어나려고 짧은 글을 썼는데, 그 글에서 그는 괴테를 끈질기게 '볼프강 씨'라고 칭했다. 그런데 이는 아첨과 다를 게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괴테에 대항한 강력한 논거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 "그렇게 모든 인간에 내재한, 중추적이고 치유 불가능한 허망함만 남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소네트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그 안의 음악은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어느 이탈리아인은 괴테로부터 벗어나려고 짧은 글을 썼는데, 그 글에서 그는 괴테를 끈질기게 '볼프강 씨'라고 칭했다. 그런데 이는 아첨과 다를 게 없었다. 왜냐하면 괴테를 향한 실질적인 비판의 논거가 충분히 존재함에도 그 논거를 무시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401쪽)
4. "한 경매사에 관한 질문에 누군가가 대답하기를, ~ 경매사의 일에 적합했다."
→ " 낭독가이기도 했던 한 경매사를 두고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그가 ⟪신곡⟫을 열성적으로 경매에 부치고[끝장내고] 있었다고. 이 에피그램은 그다지 기발하지는 않지만, 그 전형적인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에피그램이 대개 그러하듯) 이는 그저 [논리학의] '애매성의 오류(falacia de confusión/fallacies of ambiguity)'에 불과하다. 경매에 부치다(rematar)라는 동사는 ('열성적으로'라는 부사가 더해져) 경매사를 돌이킬 수 없이 추잡한 인사로 만들고, 단테 같은 그의 근면함을 상식 밖의 행동으로 만든다. 청자는 그 주장을 주저하지 않고 수용하는데, 논쟁으로 제시되지 않는 탓이다. 그 주장이 논쟁으로 제대로 제시되었다면 청자는 자신의 믿음을 철회해야 할 것이다. 첫째, 낭독하기와 입찰에 부치는 일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둘째, 낭독가의 오랜 소명이 공개적으로 말하기를 연습하게 해주며, 경매 업무에 도움을 주었다." (402쪽)
5. "그 유명한 방법론에 따르면, 의사는 감염과 죽음을 자백해야 하는 불가피한 피의자다. 마찬가지로 대신 공문서를 작성해 주는 대서인은 절도의 피의자고, 사형 집행인은 장수를 조장하는 장본인이다. 창작된 책은 독자를 재우거나 꼼짝 못하게 만들며, 떠돌이 유대인은 정착에 대한 피의자이고, 재단사는 나체에 대한 피의자이고, 호랑이와 식인종은 채식에 대한 피의자이다. 이 전통에는 다양한 표현이 있다."
→ "그 유명한 방법론에 따르면, 필연적으로 의사는 감염과 죽음을 조장한다고 비난받는다. 마찬가지로 공증인은 도둑질로, 사형 집행인은 장수를 장려하는 것으로, 이야기 책은 독자를 졸게 하거나 무감하게 만드는 것으로, 방랑하는 유대인은 정착으로, 호랑이와 식인종은 채식에 집착하는 것으로 비난받는다. 이러한 전통은 순진한 표현법으로서, 말살하고자 하는 것을 인정하는 척하는 식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403쪽)
6. "이런 방식의 유희는 필연적으로 혼란스러운 논항들이 집요하게 역전되는 데서 비롯된다."
→ "이 유희의 형식적 특성을 반복해서 말하건대, 그것은 필연적으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논증을 집요하게 몰래 끌어들이는 것이다." (403쪽)
7. "그의 표현은 효과적이며 과오가 없으나 그가 말하는 내용에는 과오가 있다."
→ "그는 구문론적으로는 오류를 범하지 않으며, 효과적인 표현이기까지 하지만, 제시된 논증상으로는 오류를 저지른다." (404쪽)
8. "여기에는 또 다시 동정의 표현과 말장난 같은 구문이 들어 있다. 여기에는 놀랍도록 진부한 조롱, 즉 그 책에 관심을 가질 사람도 얼마 되지 않고 출판도 더딜 것이라는 비웃음이 들어 있다. / 앞선 글의 부족함은 아리송한 풍자의 근원을 살펴봄으로써 품위 있게 보충될 수 있을 것이다."
→ "다시 한번, 그는 동정을 가장하고 구문론적 마수를 뻗친다. 여기에는 놀랍도록 진부한 조롱, 즉 그 책에 관심을 가질 사람도 얼마 되지 않을 뿐더러 그 창작 과정도 더딜 것이라는 비웃음이 들어 있다. / 그루삭의 글을 품위있게 옹호하기 위해서는 풍자(sátira/satire)란 단어의 어두컴컴한 뿌리를 살펴봐야 한다." (405쪽)
9. "사탄이라는 말은 보고밀파가 숭배한 신의 반역적 자식, 사타나일에서 접미사 'il'이 제거된 것인데, 'il'은 사탄의 왕관이자 광채이자 예지력을 담보하는 것이었다."
→ "사탄이라는 말은 보고밀파가 숭배한 신의 반역적 자식, 사타나일에서 접미사 'il'이 제거된 것인데, 'il'은 사타나일의 왕관이자 광채이자 예지력을 담보하는 것이었다." (406쪽)
10.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우화는 역효과를 노리고 있다. 그 외에는 문학적 구문이다. 결론에 이르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변호사, 소매치기, 대령, 바보, 귀족, 노름꾼, 정치인, 뚜쟁이를 봐도 불쾌하지 않다." 나열된 것 중에서 몇 단어는 원문과 다른 유의어이다."
→ "보다시피 이 우화는 역효과를 낸다[자기모순적이다]. 그 여남은 것들은 부차적인 문학적 표현과 구문론의 문제들에 불과하다. 결론에 이르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변호사, 소매치기, 대령, 바보, 귀족, 노름꾼, 정치인, 뚜쟁이를 봐도 불쾌하지 않다." 이 훌륭한 목록에서 특정 단어는 이웃한 단어들로 오염돼 있다."
[설명] 보르헤스는 스위프트의 풍자가 역효과를 낸다고(contraproducente) 지적합니다. 스위프트는 네 번째 여행에서 인간보다 말이 더 우월한 사회를 제시했지만, 정작 그 말들을 '고결한 대화'나 '일부일처제' 같은 인간적 특성으로 묘사함으로써, 결국 '인간적인 것'을 이상적 기준으로 삼는 모순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핵심적 모순을 빼고 나면, 소설은 문학적 표현과 문장 구조가 버무려진 맥빠진 무언가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징후가 존경받는 직업(변호사, 대령, 귀족)과 경멸받는 직업(소매치기, 바보 노름꾼)을 나란히 나열하는 문장입니다. 이 문장에서 고급한 것과 저급한 것들은 뒤섞여서 가치판단이 교란되어 있습니다. 결국 스위프트의 풍자는 세상을 향한 환멸에 그치고 말았다는 겁니다.
11. "바르가스 빌라의 이 뛰어난 추상성 덕분에 그는 맹렬히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초카노의 대항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치지 않고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으며 부도덕하다고 할 만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초카노라는 이름을 스치듯이 언급하지만, (불명예의 징후와 부차적인 것까지) 악의적 고상함으로 자신의 말을 모호하게 하면서 누구든 그 저주를 재구성할 수 있게 한다."
→ "바르가스 빌라가 가한 비난은, 이 뛰어난 추상성에 힘입어, 상대방과 관계 맺지 않게 해주면서도 상대를 다치지 않게 해줬다. 그러면서도 상대를 신뢰하기 어려우며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역설적이게도 불멸의 존재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누군가 초카노의 이름을 스치듯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그 저주 어린 비난을 되살리는 꼴이 되어, 그에게 악의 어린 광채를 드리우고 그에 관한 모든 것을⏤그 불명예의 세세한 내용과 그 징후까지도⏤어둡게 만든다." (408쪽)
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두 편의 글: 모욕술] 이 글의 원문 제목은 “Arte de injuriar”이며 영역본 제목은 “The Art of Verbal Abuse”입니다. 스페인어 injuriar와 영어의 verbal abuse는 모두 '경멸'이나 '모욕'을 의미하는 강한 뉘앙스입니다. 제목에서도 보듯, 보르헤스는 이 경멸과 모욕을 'Art'라고 해서 일종의 '기예'로 한정해서 말하고 있기는 합니다. 후술하겠지만, 참 중요한 지점입니다. 문학 비평에서 한정해서 말하건대, '모욕술'이란 기지와 참신함을 동반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보르헤스는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글에서 내내 언급되는 폴 그루삭은 생전 비평가로서 특유의 깔아뭉개는 말투로도 유명했다고 합니다. 에세이 도입부에서 한때 보르헤스는 그루삭의 신랄한 비평이 난공불락처럼 느껴졌지만, 그루삭의 방법론을 세세하게 연구하면서부터 그러한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문학 비판에서 정당한 비판과 교묘한 모욕을 구분하기란 여간 쉽지 않습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비판은 논변의 형태를 띠고, 조롱은 기지어린 유머의 형식을 차용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교묘한 모욕은 또 얼마든 논변의 외피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교묘한 모욕도 언젠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모욕에서 교묘함이란 '노름판 위에서의 주의'와 같습니다. 스스로 아무리 주의한다고 해도 본디 주의가 불가능한 측면이, 노름판의 특유의 허위가 있는 겁니다. (일본에는 "남을 비판하려거든 무덤을 두 개 파두어라"라는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모욕은 메시지를 부각하면서 모욕의 주체인 메신저를 교묘히 은폐하려고 하나, 나쁜 일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완벽히 은폐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보르헤스는 모욕이 그 특성상 '저잣거리의 조롱'에서 볼 법한 인습성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때 모욕은 농담이나 유머의 형식을 띠기 때문에 제대로 된 논쟁처럼 제시되지 않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유머는 애초 혼잡스러울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를 은근슬쩍 집어넣는 방식을 취하며, 모욕은 이러한 유머의 애매모호함을 십분 활용합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다양한 모욕 표현이 있습니다. 기자를 두고 '기레기'라고 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상대를 두고 '소설쓰고 자빠졌다'고 하거나, 분변처럼 글을 '싸지른다'고 하거나, 바쁘게 입을 놀리는 행태를 두고 '터진 입'이라고 표현하는 식입니다. 이런 표현은 일견 아무 논쟁거리도 만들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효과적으로 깔아뭉개는 수단으로 활용됩니다. 보르헤스는 이 모욕이 끝에 가서는 자기 모순을 드러내게 된다고 말합니다. 스위프트의 작품에서 보듯이요.
보르헤스는 풍자(sátira/satire)이라는 단어의 근원을 탐구하면서, 풍자가 본디 "분노라는 마술적 저주에서 나온 것이지 이성적 추론에서 비롯한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비판자의 이름에 내재한 저주가 그 이름의 주인에게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이는 '풍자'가, 나아가 모욕이 거울을 보고 짖는 개의 행태처럼 자신에게 돌아갈 것임을 암시합니다. 이렇듯 에세이 전반에서 보르헤스는 기예로 나아가지 못한 '모욕'의 다양한 사례를 살펴봅니다. 그렇다면 모든 모욕이 실패했다는 말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눈치챘듯이 보르헤스는 에세이 말미에서 ⟨모욕술⟩이라는 제목에 부합하는 '기예로서 모욕'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예시를 들며 글을 끝맺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분노라는 저주에서 벗어나서 이성을, 고도의 추상성을 되찾는 것입니다. 사무엘 존슨 박사와 콜롬비아 작가인 바르가스 빌라의 사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들은 저잣거리의 모욕에서 벗어나서, 모욕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는데, 여느 훌륭한 것들이 그러하듯 가볍게 휘발되지 않고 모욕을 '기억에 남을 만한 것'으로 만듭니다. "모욕가를 기리는 동상"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욕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이들의 동상은 어쩜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 동상은 추상적인 것입니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신학자 미카엘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 교리에 반론을 제기하여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는 자기를 화형에 처한 판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불타겠지만, 그건 하나의 사건에 지나지 않소. 우리의 토론은 영원 속에서 계속될 것이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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