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드뤼 박사]
1. "나는 이 묘사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그렇듯이 시각적인 글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존경한다.) 재차 말하지만, 이 묘사는 13세기에 쓴 "문자 그대로의 완전한" 버전처럼 내게 무한한 놀라움을 야기했다.
→ "나는 이 묘사를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와 같은 시각적 산문의 일환으로 받아들이고 싶긴 하지만(심지어 존경하기까지 하지만), 13세기에 쓰인 글을 "문자 그대로 완전히 번역한" 판본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런 주장이 무한히 놀랍다고 거듭 말할 것이다." (372쪽)
2. "13세기 사람에게 '마술적'이라는 말은 아주 정확한 수식어겠지만, 고상한 마르드뤼의 세속적인 형용사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 "13세기 사람에게 '마술적'이라는 말은 아주 정확한 수식어였을 것이며, 한 점잖은 의사가 고안한 세속적인 형용사 따위는 아니었을 것이다."(375쪽)
3. "그는 미소를 머금지 않고는 초자연적인 것을 서술할 능력이 없다. 그는 이렇게 번역한다. "어느 날 압둘 말리크 칼리프가 악마 같은 검은 연기가 담긴 구리로 된 골동품 그릇에 대한 얘기를 듣고는 너무나도 경이로운 나먼지 모두가 현실을 의심하는 듯하자, 탈리브 벤 스탈이라는 여행자가 끼어들어야 했다.""
→ "그는 냉소하지 않고서는 초자연적인 것을 서술할 능력이 없다. 그는 번역하는 척한다. 예컨대, "어느 날 압둘 말리크 칼리프가 오래된 구리 항아리에 관한 얘기를 들었는데, 그 안에는 악마의 형상을 한 기이한 검은 연기가 들어 있었다고 했다. 그가 그토록 명백한 사실의 현실성에 의심을 품는 듯 크게 놀라워 했고, 여행자 탈리브 벤 스탈이 나서야만 했다.""(376쪽)
4. "전반적으로 봤을 때, 마르드뤼는 글을 번역한 게 아니라 책의 내용을 번역해 버렸다."
→ "전반적으로 봤을 때, 마르드뤼는 단어를 번역한 게 아니라 책의 표현을 번역해 버렸다." (377쪽)
5. "그의 충실함은 그의 창조적이고 즐거운 불충에 있으며, 우리는 바로 이 점을 알아야 한다."
→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그의 불충실함, 즉 그의 창조적이고 행복한 불충실함이다." (378쪽)
(12) [보르헤스 읽기] 『영원성의 역사』 2부 다시 읽어요
D-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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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노 리트만]
1. "그 네 개의 번역은 "이스라엘 혈통의 사서"(카탈루냐어로 쓰인 어느 백과사전에는 이에 반하는 내용이 있다.)였던 구스타프 바일의 번역,"
→ "그 네 개의 번역은 "이스라엘인[유대인]이지만 사서"인⏤이 역접의 표현은 어느 백과사전에서 카탈루냐어로 쓰인 페이지에 나온다⏤구스타프 바일의 번역," (379쪽)
2. "이 훌륭한 외전이 버턴이나 마르드뤼의 번역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다. 번역자는 그 외전을 시 형식을 빌려서 했는데, 원문의 시구를 '대체' 혹은 '대신'했다고 할 만큼 아름다운 생기를 띠고 있다. 산문은 원문에 따라 번역했고, 위선과 파렴치함이 담긴 내용은 전반적으로 타당하게 생략했다. (···) 바일은 '사서'였지만 유대인이라는 게 헛되지는 않았다. 그의 언어는 글쓰기의 맛을 품고 있었다."
→ "이렇듯 훌륭히 개찬한 문장은 버턴이나 마르드뤼의 번역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다. 번역자는 개찬한 문장을 운문 부분에 배치했는데, 원문의 운율을 '대체' 혹은 '대신'했다고 할 만큼 아름다운 생기를 띠고 있다. 내가 이해하기로 그는 산문에서는 있는 그대로 번역했고, 위선과 무례함, 양쪽 모두와 동등하게 거리를 둔 정당한 태도로 몇 가지를 생략했다. (···) 바일은 '사서이지만' 유대인이라는 게 헛되지는 않았다. 그의 언어는 성서의 맛을 품고 있었다." (379-380쪽)
3. "1895년부터 1897년까지 출판된 두 번째 번역은 정확성도 문체도 매력적이다. (···) 이는 아랍인에 관해서는 버턴이 우위에 있음을 의미한다."
→ "1895년부터 1897년까지 출판된 두 번째 번역은 정확성 뿐만 아니라 문체라는 매력도 포기한다. (···) 이는 리처드 버턴 경이 아랍인들보다 우위에 있음을 확인해 줄 따름이다." (380쪽)
4. "버턴의 글의 원천 중 '하나'가 초서였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 "버튼의 활용한 어휘 목록의 출처 중 '하나'가 초서였다고 [담백하게] 말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381쪽)
5. "심지어는 1000번에 걸쳐 반복되는 매일 밤의 구절도 마찬가지였다."
→ "심지어 다음 밤으로 이동함을 표현하는⏤천 번이나 되는⏤단어들도 생략하지 않는다." (382쪽)
6. "문학에 정통한 누군가가 이견이 있다고 해도 그가 아르헨티나 사람이라면 전혀 신경 쓸 필요 없다. / 그 이유는 이렇다. 버턴과 마르드뤼와 갈랑의 번역은 '문학 이후'를 생각게 한다."
→ "한 명의 문인에 불과한⏤그것도 아르헨티나 공화국 출신에 불과한⏤이가 이견을 가지는 것은 전혀 중요치 않다. / 그럼에도 이견의 이유를 밝히자면 이러하다. 버턴과 마르드뤼, 심지어 갈랑의 번역은 하나의 문학 '이후'에만 상상 가능한 것들이다" (382쪽)
7. "조지 워싱턴처럼 거짓말할 줄 모르는 리트만의 작품에는 그저 독일의 고결함밖에는 없다. 적어도 너무 적다. ⟪천일야화⟫의 판매에 있어 독일은 뭔가 더 생산했어야 했다."
→ "조지 워싱턴처럼 거짓말할 줄 모르는 리트만의 작품에는 그저 독일의 정직함밖에는 없다. 그것만으로는 너무 부족하며, 매우 불충분하다. ⟪천일야화⟫와 독일 문학의 만남은 더 많은 것을 만들어냈어야 했다." (383쪽)
8. "히드라의 요상한 머리가 몸보다 훨씬 구체적이라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 문간에 거울이 마주하고 있어 얼굴 뒤로 거짓 얼굴이 생기면 더 이상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지 알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 무질서는 백일몽이 만들어 내듯 진부하기에 받아들일 수 있다.
우연은 대칭과 대조와 탈선의 유희를 즐겼다. 한 사람이, 한 카프카가 그 유희를 만들어 내고 증폭하여, 독일식 변형, 즉 독일의 '섬뜩함'에 따라 다시 만들어 내지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 "히드라의 부수적인 머리가 몸보다 훨씬 구체적이라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 문간과 거울이 혼동되고, 가면이 얼굴 아래에 있으며, 이제 아무도 진정한 자가 누구고 그의 우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 무질서는 가수면 상태의 상상물처럼 사소하고 용인할 만하다.
우연은 대칭과 대조와 여담이라는 유희를 즐겼다. 한 사람이, 이를테면 카프카와 같은 이가 이 유희를 만들어 내고 첨예화하며, 독일식 변형, 즉 독일의 '운하임리히카이트'에 따라 그것을 다시 만들어 내지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384-3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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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야화⟫의 역자들] 한 권의 책이 시대를 달리해 가면서 전혀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서 달리 번역되는 것은 대단히 반길 만한 일입니다. 한 번역가는 이전의 번역자보다 조금이라도 더 낫게, 그리하여 더 다르게 번역하고자 노력합니다. 이 개인적인 열망이 모인 결과를 후대인들은 종합해서 판단하고, 거기서 배울 점을 추려냅니다. 좁게 보면 각 시대의 번역자들은 적대적 관계를 이루는 것 같지만, 넓게 보면 공생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 나오는 번역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18세기 앙투안 갈랑에 19세기 에드워드 윌리엄 레인으로, 레인에서 리처드 버튼으로, 버튼에서 여타 역자들로 이어지는 ⟪천일야화⟫의 각 번역 판본들은 이전 판본을 갱신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적대적 공생 관계로 묶일 수 있습니다. 참고로, 한국에서는 열린책 출판사에서 출간한 ⟪천일야화⟫라는 제목의 역서가 앙투안 갈랑의 버전이고, 월드북 출판사에서 출간한 ⟪아라비안나이트⟫가 리처드 버턴의 버전입니다. 제가 알기로 갈랑과 버턴 중간에 위치한 레인의 번역본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보르헤스의 설명에 따르면, 앙투안 갈랑은 14-15세기에 출판된 아랍어 필사본 4권을 입수하여 18세기 프랑스어로 된 7권짜리 ⟪천일야화⟫를 출간하였습니다. 독특하게도 이때 원본에 없는 몇 가지 이야기를 추가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유명한 알라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이야기가 대표적으로 추가된 이야기에 속합니다. 오늘날까지도 ⟪천일야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야기와 인물들이 원전에는 없으며, 18세기 갈랑이 마론교도였던 한나 디야브에게 들은 내용을 번역본에 추가한 부분이 오늘날까지도 마치 원전처럼 전해지고 있다는 겁니다. 과거의 느슨했던 저작권 인식 때문인 것인지, 아니면 당시 횡행했던 여러 해적판본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개찬에 가까운 번역이 원전의 권위를 뛰어넘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 흥미롭습니다. (보르헤스가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서 제시한 '틀뢴'의 백과사전 이야기와 흡사합니다.) 그럼에도 보르헤스는 갈랑의 판본이 최악이라고 평합니다. 갈랑 스스로가 소위 '품격'을 위해, 원전에서 저속하다고 판단한 부분을 검열∙삭제했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이후 등장한 에드워드 윌리엄 레인은 갈랑이 삭제한 부분을 모조리 찾아서 복원하긴 했지만, 번역을 읽을 독자층을 고려해서 여전히 저속한 부분을 프랑스화하여 파리 사회에 어울릴 법하게 고쳤습니다. 이에, 훗날 사람들은 갈랑과 레인이 과도하게 격식을 차렸으며 원문의 순박함을 파괴했다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천일야화⟫란 본디 순박하지 않으며, 옛날 이야기를 카이로에 사는 평민층의 속되고 천박한 취향에 맞춰 놓은 것이었노라고 말합니다.
레인 이후에 등장한 리처드 버턴 경은 또 달랐습니다. 그는 여행가이자 외교관이자 작가였습니다.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하고, 많은 언어를 습득했던 작가답게 버턴은 원문의 빈한한 문체를 뛰어난 영어로 번역했습니다. 게다가 저속한 부분을 함부로 고치지 않고 가감없이 옮겼고, 다양한 어휘를 사용한 만큼 풍부한 각주를 달았다고 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일정 부분 왜곡이 불가피했지만, 보르헤스는 "그 왜곡 또한 훌륭하다"며 버턴의 번역을 옹호하고 치켜올립니다. 버턴 역시 사람이기에 완벽하다고 할 순 없는 몇 가지 오류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후술할 두 명의 번역자에 대한 논조를 읽어보면 유추할 수 있듯이, 생전 보르헤스는 버턴 경의 번역을 가장 신뢰했던 것 같습니다. 재미있게도 리처드 버턴은 원전을 번역한 게 아니라 윌리엄 헤이 맥나튼의 19세기 판본을 번역했다고 합니다. 이걸 보면서, 오늘날 '중역'에 대한 우리의 열악한 인식도 떠올랐습니다. 이따금 원전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중역을 거쳤기 때문에 그 가치가 뒤떨어진다고 말하는 사람을 볼 때가 있는데, 그건 번역의 역사를 모르기 때문에 흔히 하는 오해입니다. 오히려 중역이기에 중역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고유한 결과물이 있습니다. 언어 자체가 무수한 반향임을 알고 보면 중역 자체를 두고 열등함이라고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중역은 단순히 원문을 직접 독해하지 못한다는 무능함의 결과물이 아니라, 원전과 그 번역과 중역 자체를 모두 고민한다는 점에서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며, 더 성실하기까지 한 작업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중역이 제대로 행해지는 과정에서, 번역자는 원전과 번역 저본의 차이를 모두 인식한 뒤에라야 중역을 행할 수 있음을 알게 되니까요. 여하튼 뒤에 보르헤스가 다루는 두 명의 번역자 이야기는 어렵지 않으니 각자 읽어보시면 될 듯합니다.

아라비안나이트 Ⅰ동서문화사 월드북 133~137권. 신비로운 모험과 환상, 가슴 떨리는 로망스와 유쾌한 웃음이 담겨 있는 천일야화 <아라비안 나이트>. 리처드 버턴의 완역판으로, 모두 5권으로 구성되었다. <아라비안 나이트>에는 중세 이슬람교도들의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는 다양한 삶이 그려져 있다.

천일야화 세트 - 전6권놀라운 마법과 흥미진진한 모험이 펼쳐지는 가운데, 아랍의 문화와 관습은 물론 아랍인들의 세계관과 기질을 재미있게 전하는 앙투안 갈랑의 <천일야화>가 국내 최초로 완역 출간되었다. 앙투안 갈랑의 <천일야화>는 출간된 1704년부터 유럽에서 폭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학자들은 물론 일반 독자에게까지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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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로 지정된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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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글~] ⟪픽션들⟫에도 수록된 ⟨알모타심으로의 접근⟩이라는 단편과 ⟨모욕술⟩이라는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전에 다뤘으니, ⟨알모타심으로의 접근⟩은 간략히 언급하겠습니다. 이 단편은 말미의 각주에 쓰인 대로, '찾는 자'와 '찾는 대상'이 본디 하나임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고, '찾는 자'가 '찾는 대상'에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내용만 놓고 보면, 이 글은 ⟪알무타심으로의 접근(The approach to Al-Mu'tasim)⟫이라는 소설에 대한 서평 형식으로 쓰여졌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다루려는 바하두르 알리의 ⟪알무타심으로의 접근⟫이라는 책 자체가 허구이기 때문에, 이 글은 본디 없는 소설에 대한 서평이며, 그리하여 이 자체가 하나의 허구입니다. 이 글의 사실관계가 복잡하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겠습니다. 내용상, 보르헤스는 1932년 영국령이었던 봄베이에서 바하두르 알리가 출간한 초판본 ⟪알무타심으로의 접근⟫을 읽지 않았습니다. 아마 자세히 읽어보면 알 수 있을 텐데, 보르헤스가 읽은 것은 초판본이 성공한 뒤에 저자가 수정하여 출간한 삽화본 ⟪알무타심이라는 사람과의 대화(The conversation with the man called Al-Mu'tasim)⟫를 편집자 빅터 골란츠가 다시 런던에서 재판하면서 삽화를 빼고 서문을 추가한 재판본입니다. 따라서 허구의 서평인 이 글은 그야말로 ⟨알모타심으로의 접근(El acercamiento a Almotásim)⟩이 됩니다. 정리하면,
(1) 1932년 영국령 봄베이에서 바하두르 알리의 영어 소설 ⟪알무타심으로의 접근(The approach to Al-Mu'tasim)⟫의 초판본이 출간되었습니다.
(2) 초판본이 성공을 거두자, 1934년 봄베이에서 바하두르 알리는 초판본을 수정한 삽화본 ⟪알무타심이라는 사람과의 대화: 움직이는 거울과의 유희(The conversation with the man called Al-Mu'tasim: A game with shifting mirrors)⟫를 출간합니다.
(3) 그리고 거의 동시에, 런던에서 편집자 빅터 골란츠는 위 삽화본에서 삽화를 제거하고 서문을 추가한 재판본을 출간합니다. 이 책이 바로 보르헤스가 읽은 책입니다. 특이하게도 여기에는 부록이 있어서, 1932년 초판본과 1934년 수정본의 차이점이 개괄돼 있습니다.
(4) 따라서 보르헤스는 수정본과 그 부록을 통해서, 초판본 ⟪알무타심으로의 접근⟫으로 또 한 번 접근해 나가는 형식의 서평을 쓰고 있는 겁니다. 이 서평의 제목은 아이러니하게도 스페인어로 돼 있으며 ⟨알모타심으로의 접근(El acercamiento a Almotásim)⟩입니다.
과연 변태같은 설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용과 형식과 제목이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이쯤 설명하고 ⟨모욕술⟩을 다룰 텐데, 여기서도 몇 가지 문장을 바꿔서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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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구든 비난받고 싶지 않을 것이며 정말로 비난받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폴 그루삭의 선의의 분노와 애매모호한 칭찬을 대조하다가 (스위프트, 새뮤얼 존슨, 볼테르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루삭이 쓰는 방식을 살펴보려고 비웃음에 대한 즐거운 독서를 그만두자 그런 생각은 사라져 버렸다."
→ "누구든 자신을 난공불락으로 만들고자 하며, 몇몇 페이지에서는 그렇게 될 지도 모른다. 폴 그루삭의 건전한 분노와 애매모호한 칭찬을 대조해 보는 것이 (스위프트, 새뮤얼 존슨, 볼테르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그러한 논공불락을 상상하는 데 영감을 주거나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 상상력은 내가 그런 조롱을 즐겁게 읽는 것에서 벗어나서, 그루삭의 방법론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사라져 버렸다." (399쪽)
2. "따라서 포커에서 세 장의 킹을 들고 있다고 해도 속임수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독설과 조롱으로 논쟁을 일으키는 비평가가 인습적 틀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길거리에서 쓰는 욕설은 논쟁거리가 될 만한 조롱에 대한 실질적인 모델이다."
→ "따라서 세 장의 킹은 포커 게임을 장악하기에 충분하지만 트루코 게임에서는 별 소용이 없다. 논객 역시 인습의 산물이다. 게다가, 길거리에서 흔히들 욕설을 뱉는 방식을 보면, 장차 논쟁이 어떤 형태로 이뤄질지 그 설명적 모델을 알 수 있다." (400쪽)
3. "그렇게 인간의 기본적이고 고칠 수 없는 허망함만 남기는 것이다. 하지만 음악이 될 수 있는 소네트 또한 남는다. (어느 이탈리아인은 괴테로부터 벗어나려고 짧은 글을 썼는데, 그 글에서 그는 괴테를 끈질기게 '볼프강 씨'라고 칭했다. 그런데 이는 아첨과 다를 게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괴테에 대항한 강력한 논거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 "그렇게 모든 인간에 내재한, 중추적이고 치유 불가능한 허망함만 남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소네트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그 안의 음악은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어느 이탈리아인은 괴테로부터 벗어나려고 짧은 글을 썼는데, 그 글에서 그는 괴테를 끈질기게 '볼프강 씨'라고 칭했다. 그런데 이는 아첨과 다를 게 없었다. 왜냐하면 괴테를 향한 실질적인 비판의 논거가 충분히 존재함에도 그 논거를 무시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401쪽)
4. "한 경매사에 관한 질문에 누군가가 대답하기를, ~ 경매사의 일에 적합했다."
→ " 낭독가이기도 했던 한 경매사를 두고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그가 ⟪신곡⟫을 열성적으로 경매에 부치고[끝장내고] 있었다고. 이 에피그램은 그다지 기발하지는 않지만, 그 전형적인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에피그램이 대개 그러하듯) 이는 그저 [논리학의] '애매성의 오류(falacia de confusión/fallacies of ambiguity)'에 불과하다. 경매에 부치다(rematar)라는 동사는 ('열성적으로'라는 부사가 더해져) 경매사를 돌이킬 수 없이 추잡한 인사로 만들고, 단테 같은 그의 근면함을 상식 밖의 행동으로 만든다. 청자는 그 주장을 주저하지 않고 수용하는데, 논쟁으로 제시되지 않는 탓이다. 그 주장이 논쟁으로 제대로 제시되었다면 청자는 자신의 믿음을 철회해야 할 것이다. 첫째, 낭독하기와 입찰에 부치는 일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둘째, 낭독가의 오랜 소명이 공개적으로 말하기를 연습하게 해주며, 경매 업무에 도움을 주었다." (402쪽)
5. "그 유명한 방법론에 따르면, 의사는 감염과 죽음을 자백해야 하는 불가피한 피의자다. 마찬가지로 대신 공문서를 작성해 주는 대서인은 절도의 피의자고, 사형 집행인은 장수를 조장하는 장본인이다. 창작된 책은 독자를 재우거나 꼼짝 못하게 만들며, 떠돌이 유대인은 정착에 대한 피의자이고, 재단사는 나체에 대한 피의자이고, 호랑이와 식인종은 채식에 대한 피의자이다. 이 전통에는 다양한 표현이 있다."
→ "그 유명한 방법론에 따르면, 필연적으로 의사는 감염과 죽음을 조장한다고 비난받는다. 마찬가지로 공증인은 도둑질로, 사형 집행인은 장수를 장려하는 것으로, 이야기 책은 독자를 졸게 하거나 무감하게 만드는 것으로, 방랑하는 유대인은 정착으로, 호랑이와 식인종은 채식에 집착하는 것으로 비난받는다. 이러한 전통은 순진한 표현법으로서, 말살하고자 하는 것을 인정하는 척하는 식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403쪽)
6. "이런 방식의 유희는 필연적으로 혼란스러운 논항들이 집요하게 역전되는 데서 비롯된다."
→ "이 유희의 형식적 특성을 반복해서 말하건대, 그것은 필연적으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논증을 집요하게 몰래 끌어들이는 것이다." (403쪽)
7. "그의 표현은 효과적이며 과오가 없으나 그가 말하는 내용에는 과오가 있다."
→ "그는 구문론적으로는 오류를 범하지 않으며, 효과적인 표현이기까지 하지만, 제시된 논증상으로는 오류를 저지른다." (404쪽)
8. "여기에는 또 다시 동정의 표현과 말장난 같은 구문이 들어 있다. 여기에는 놀랍도록 진부한 조롱, 즉 그 책에 관심을 가질 사람도 얼마 되지 않고 출판도 더딜 것이라는 비웃음이 들어 있다. / 앞선 글의 부족함은 아리송한 풍자의 근원을 살펴봄으로써 품위 있게 보충될 수 있을 것이다."
→ "다시 한번, 그는 동정을 가장하고 구문론적 마수를 뻗친다. 여기에는 놀랍도록 진부한 조롱, 즉 그 책에 관심을 가질 사람도 얼마 되지 않을 뿐더러 그 창작 과정도 더딜 것이라는 비웃음이 들어 있다. / 그루삭의 글을 품위있게 옹호하기 위해서는 풍자(sátira/satire)란 단어의 어두컴컴한 뿌리를 살펴봐야 한다." (405쪽)
9. "사탄이라는 말은 보고밀파가 숭배한 신의 반역적 자식, 사타나일에서 접미사 'il'이 제거된 것인데, 'il'은 사탄의 왕관이자 광채이자 예지력을 담보하는 것이었다."
→ "사탄이라는 말은 보고밀파가 숭배한 신의 반역적 자식, 사타나일에서 접미사 'il'이 제거된 것인데, 'il'은 사타나일의 왕관이자 광채이자 예지력을 담보하는 것이었다." (406쪽)
10.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우화는 역효과를 노리고 있다. 그 외에는 문학적 구문이다. 결론에 이르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변호사, 소매치기, 대령, 바보, 귀족, 노름꾼, 정치인, 뚜쟁이를 봐도 불쾌하지 않다." 나열된 것 중에서 몇 단어는 원문과 다른 유의어이다."
→ "보다시피 이 우화는 역효과를 낸다[자기모순적이다]. 그 여남은 것들은 부차적인 문학적 표현과 구문론의 문제들에 불과하다. 결론에 이르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변호사, 소매치기, 대령, 바보, 귀족, 노름꾼, 정치인, 뚜쟁이를 봐도 불쾌하지 않다." 이 훌륭한 목록에서 특정 단어는 이웃한 단어들로 오염돼 있다."
[설명] 보르헤스는 스위프트의 풍자가 역효과를 낸다고(contraproducente) 지적합니다. 스위프트는 네 번째 여행에서 인간보다 말이 더 우월한 사회를 제시했지만, 정작 그 말들을 '고결한 대화'나 '일부일처제' 같은 인간적 특성으로 묘사함으로써, 결국 '인간적인 것'을 이상적 기준으로 삼는 모순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핵심적 모순을 빼고 나면, 소설은 문학적 표현과 문장 구조가 버무려진 맥빠진 무언가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징후가 존경받는 직업(변호사, 대령, 귀족)과 경멸받는 직업(소매치기, 바보 노름꾼)을 나란히 나열하는 문장입니다. 이 문장에서 고급한 것과 저급한 것들은 뒤섞여서 가치판단이 교란되어 있습니다. 결국 스위프트의 풍자는 세상을 향한 환멸에 그치고 말았다는 겁니다.
11. "바르가스 빌라의 이 뛰어난 추상성 덕분에 그는 맹렬히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초카노의 대항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치지 않고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으며 부도덕하다고 할 만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초카노라는 이름을 스치듯이 언급하지만, (불명예의 징후와 부차적인 것까지) 악의적 고상함으로 자신의 말을 모호하게 하면서 누구든 그 저주를 재구성할 수 있게 한다."
→ "바르가스 빌라가 가한 비난은, 이 뛰어난 추상성에 힘입어, 상대방과 관계 맺지 않게 해주면서도 상대를 다치지 않게 해줬다. 그러면서도 상대를 신뢰하기 어려우며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역설적이게도 불멸의 존재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누군가 초카노의 이름을 스치듯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그 저주 어린 비난을 되살리는 꼴이 되어, 그에게 악의 어린 광채를 드리우고 그에 관한 모든 것을⏤그 불명예의 세세한 내용과 그 징후까지도⏤어둡게 만든다." (4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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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글: 모욕술] 이 글의 원문 제목은 “Arte de injuriar”이며 영역본 제목은 “The Art of Verbal Abuse”입니다. 스페인어 injuriar와 영어의 verbal abuse는 모두 '경멸'이나 '모욕'을 의미하는 강한 뉘앙스입니다. 제목에서도 보듯, 보르헤스는 이 경멸과 모욕을 'Art'라고 해서 일종의 '기예'로 한정해서 말하고 있기는 합니다. 후술하겠지만, 참 중요한 지점입니다. 문학 비평에서 한정해서 말하건대, '모욕술'이란 기지와 참신함을 동반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보르헤스는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글에서 내내 언급되는 폴 그루삭은 생전 비평가로서 특유의 깔아뭉개는 말투로도 유명했다고 합니다. 에세이 도입부에서 한때 보르헤스는 그루삭의 신랄한 비평이 난공불락처럼 느껴졌지만, 그루삭의 방법론을 세세하게 연구하면서부터 그러한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문학 비판에서 정당한 비판과 교묘한 모욕을 구분하기란 여간 쉽지 않습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비판은 논변의 형태를 띠고, 조롱은 기지어린 유머의 형식을 차용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교묘한 모욕은 또 얼마든 논변의 외피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교묘한 모욕도 언젠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모욕에서 교묘함이란 '노름판 위에서의 주의'와 같습니다. 스스로 아무리 주의한다고 해도 본디 주의가 불가능한 측면이, 노름판의 특유의 허위가 있는 겁니다. (일본에는 "남을 비판하려거든 무덤을 두 개 파두어라"라는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모욕은 메시지를 부각하면서 모욕의 주체인 메신저를 교묘히 은폐하려고 하나, 나쁜 일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완벽히 은폐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보르헤스는 모욕이 그 특성상 '저잣거리의 조롱'에서 볼 법한 인습성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때 모욕은 농담이나 유머의 형식을 띠기 때문에 제대로 된 논쟁처럼 제시되지 않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유머는 애초 혼잡스러울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를 은근슬쩍 집어넣는 방식을 취하며, 모욕은 이러한 유머의 애매모호함을 십분 활용합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다양한 모욕 표현이 있습니다. 기자를 두고 '기레기'라고 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상대를 두고 '소설쓰고 자빠졌다'고 하거나, 분변처럼 글을 '싸지른다'고 하거나, 바쁘게 입을 놀리는 행태를 두고 '터진 입'이라고 표현하는 식입니다. 이런 표현은 일견 아무 논쟁거리도 만들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효과적으로 깔아뭉개는 수단으로 활용됩니다. 보르헤스는 이 모욕이 끝에 가서는 자기 모순을 드러내게 된다고 말합니다. 스위프트의 작품에서 보듯이요.
보르헤스는 풍자(sátira/satire)이라는 단어의 근원을 탐구하면서, 풍자가 본디 "분노라는 마술적 저주에서 나온 것이지 이성적 추론에서 비롯한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비판자의 이름에 내재한 저주가 그 이름의 주인에게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이는 '풍자'가, 나아가 모욕이 거울을 보고 짖는 개의 행태처럼 자신에게 돌아갈 것임을 암시합니다. 이렇듯 에세이 전반에서 보르헤스는 기예로 나아가지 못한 '모욕'의 다양한 사례를 살펴봅니다. 그렇다면 모든 모욕이 실패했다는 말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눈치챘듯이 보르헤스는 에세이 말미에서 ⟨모욕술⟩이라는 제목에 부합하는 '기예로서 모욕'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예시를 들며 글을 끝맺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분노라는 저주에서 벗어나서 이성을, 고도의 추상성을 되찾는 것입니다. 사무엘 존슨 박사와 콜롬비아 작가인 바르가스 빌라의 사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들은 저잣거리의 모욕에서 벗어나서, 모욕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는데, 여느 훌륭한 것들이 그러하듯 가볍게 휘발되지 않고 모욕을 '기억에 남을 만한 것'으로 만듭니다. "모욕가를 기리는 동상"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욕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이들의 동상은 어쩜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 동상은 추상적인 것입니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신학자 미카엘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 교리에 반론을 제기하여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는 자기를 화형에 처한 판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불타겠지만, 그건 하나의 사건에 지나지 않소. 우리의 토론은 영원 속에서 계속될 것이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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