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에도 이어서 읽는 보르헤스의 일곱 번째 책입니다. 민음사 논픽션 전집판으로는 두 번째 책을 읽습니다. 함께 읽을 분들은 참여해주세요😀
『영원성의 역사』는 총 2부로 나뉘어 있으며, 이 모임에서는 2부에 수록된, 서문과 해설을 제외한 7편의 글을 읽습니다. 이전에 말씀드렸듯이, 2부는 번역상 읽기가 의아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틀에 걸쳐 한 편의 글을 다루되, 하루는 번역을 살펴보고 제 나름으로 대안문을 제시하고, 남은 하루는 전체 내용을 논하겠습니다. 목차는 이렇습니다.
[2부 영원성의 역사]
⏤영원성의 역사(Historia de la eternidad) 250
⏤케닝(Las Kenningar) 284
⏤메타포(La metáfora) 312
⏤순환 이론(La doctrina de los ciclos) 321
⏤순환적 시간(El tiempo circular) 337
⏤『천일야화』의 역자들(Los traductores de las 1001 Noches) 346
⏤두 편의 글: 모욕술(Arte de injuriar) 387
※ 이 모임은 나중에라도 보르헤스를 혼자 읽을 사람을 상상하면서 일종의 가이드처럼 참고하시라고 만들었습니다.
※ 2부는 번역상 읽기에 아리송한 부분이 많아서 제 나름대로 대안문을 제시합니다. 일종의 정오표처럼 활용하셔도 됩니다.
※ 보르헤스의 원문은 https://borgestodoelanio.blogspot.com을 참조했습니다. 원문의 제목을 검색하시면 해당 내용이 나옵니다. 영역문은 Eliot Weinberger가 편집한 ⟪Borges: Selected Non-Fictions⟫을 참고했습니다. Perplexity로 원문과 영역문을 비교해서 검토하라고 해본 뒤에 답변받은 내용을 바탕으로 대안문을 작성했습니다. 저는 전문 번역자가 아니기 때문에 틀린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12) [보르헤스 읽기] 『영원성의 역사』 2부 다시 읽어요
D-29

russist모임지기의 말
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영원성의 역사~] 제가 읽은 한국어 번역본은 2018년 1월 31일에 펴낸 1쇄임을 참고 바랍니다. 혹시 정오표가 있을까 싶어서 살펴봤지만 못 찾았습니다. 아시는 분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번역자의 노고가 느껴지는 글이었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보르헤스도 이 글의 말미에서 인정하듯이, 영원성이라는 것을 역사를 다루다 보니 한 세기를 대여섯 개의 이름으로 개괄하는 등, 애초 글의 전개가 난삽합니다. 더욱이 '영원'과 '무한'이라는 개념을 다루면서 게오르그 칸토어와 버틀런트 러셀의 수학적 개념을 적극 끌어들이고 있기에 해당 증명 내용에 익숙지 않다면 내용을 파악하기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내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몇 가지만 제 나름으로 정정해 보겠습니다. 글 구성에 따라, 네 개의 글꼭지로 나눴습니다.
대안문에서는 필요한 부분에 한에서만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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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글꼭지]
1.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시간을 영원성의 움직이는 이미지라고 했다. 이는 영원성이 시간이라는 실체로 이뤄진 이미지라는 확신을 버리지 못하게 하는 최소한의 표지다."
→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시간을 영원성의 움직이는 이미지[그림자]라고 했다. 하지만 이는 미약한 울림에 그칠 뿐, 영원성이야말로 시간이라는 물질로 빚어진 이미지라는 확신을 흔들지 못한다." (251쪽)
2. "이 퇴행적 시간은 쇠퇴나 비활성의 상태로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 어떤 강밀도의 시간이든 미래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 "이 시간상의 퇴행은 쇠퇴나 무미건조한 상태라고 느끼는 반면, 강렬한 경험을 할 때 우리는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것처럼 느낀다. "(251쪽)
3. "러셀은 이 논항에 반박한다. 그는 현실은 물론이고 무한수의 통속성도 수긍하지만, 무한수는 그 정의상 단번에 생성되는 것이지 끝없는 수열의 '최종적' 끝이 아니라고 한다. 이런 러셀의 변칙적인 수는 영원성에 대한 훌륭한 선례로서 영원성은 수열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 "러셀은 이 논증에 반박한다. 그는 현실은 물론이고 무한수의 통속성도 수긍하지만, 무한수는 그 정의상 단번에 생성되는 것이지 끝없는 열거의 '최종' 항이 아니라고 한다. 이런 러셀의 비정상적인 숫자(guarismos anormales/non-normal numbers)는 영원성을 미리 예증하는 것으로서, 영원성은 그 부분을 열거함으로써 규정되지 않는다." (254쪽)
[설명] 보르헤스는 이 단락에서 암묵적으로 실무한(actual infinity)과 가무한(potential Infinity) 개념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엘레아 학파는 시간을 가무한의 관점에서 자연수의 수열(1,2,3···)처럼 끝없이 계속되는 과정으로 봅니다. 하지만 러셀은 시간을 실무한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으며, 이때 시간은 열거 과정이 없이 '단번에' 주어집니다. 이는 바로 뒤에 나오는 문단과 연결됩니다. 다음 문단에서 보르헤스는 이레네오를 언급하면서,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나뉘어서 정의되지 않고, 신의 관점에서 "그 시간들의 동시성"으로 주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4. "이 세계에 그 세계의 능력, 아름다움, 영속적 이동의 질서, 그 세계를 주유하는 (비)가시적 신들, 정령들, 나무들, 동물들에 경탄할 인간이여, 모든 것이 그 가지적 실재의 사본이니 사유를 그 현실로 끌어올려라. 거기에서 인간은 가지적 형상을 보게 될 것이니, 그 형상은 영원한 것이지 영원을 차용한 것이 아니다. (···) 애초에 그런 상태가 필요치 않은 바, 그런 상태는 이내 극복되었다. 그 세계의 유일한 영원 속에서 사물은 저 자신의 것이다. 시간은 늘 과거를 밀어내고 늘 미래를 쫓는 영혼의 주위를 돌며 영원성을 모방한다."
→ "이 세계에⏤그 능력, 아름다움, 영속적 운동의 질서, 가시적이거나 비가시적으로 주유하는 신들, 정령들, 나무들에⏤경탄하는 인간들이여, 이 모든 것이 실재의 모사이니, 실재로 사유를 끌어올려라. 그대들은 거기서 빌려온 영원성이 아닌, 영원한 가지적 형상을 보리다. (···) 애초부터 그 상태로 부족함이 없었고, 그 상태란 나중에 얻은 것도 아니다. 그 세계의 유일한 영원 속에서 모든 것이 그의 것이다. 시간은 영혼의 주위를 멤돌면서, 언제나 그랬듯 과거를 뒤로 한 채 미래를 갈망하면서, 영원성을 모방한다." (256쪽)
5. "우리에게 사물의 최종적이고 확고한 현실은 물질, 즉 원자핵의 주위를 도는 회전 전자이다."
→ "우리에게 사물의 최종적이고 확고한 현실은 물질, 즉 원자적 고독 속에서 성간 거리를 가로지르는 스핀 전자다." (257쪽)
6. 258쪽 인용문 전체
→ "하나님 당신은 팔각의 황금 인장을 지니셨으니, 한 면에는 사자, 다른 면에는 말, 또 다른 면에는 독수리를 새기셨다. 밀랍에 사자를, 독수리를, 말을 찍어도 밀랍의 모든 것은 황금에 있다. 그러나 밀랍은 밀랍으로서 가치 없고, 황금은 황금으로서 가치 있다. 피조물 안에는 이런 완전함이 유한하고 가치가 떨어지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황금이며, 그분 자신에 다름 아니다." (258쪽)
7. "예컨대 탁자성 혹은 천상에 있는 가지적 탁자는 세상의 모든 장인이 꿈꾸는 것으로, 그 이데아 구현에 실패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따르고 있는 다리가 네 개인 탁자의 원형이다. (···) 예를 들어 가지적 삼각형은 세 개의 각이 있는 다각형으로 등변, 부등변 또는 이등변 삼각형으로 나타날 수 있다."
→ "예컨대 탁자성 또는 천상의 가지적 탁자는 세상 모든 목수가 꿈과 좌절 속에서 좇는 네 발의 원형이다. (···) 삼각성(Triangularidad)이란, 공간에 있지 않으면서도 이등변, 부등변, 정삼각형으로 폄훼되기를 거부하는, 세 변을 지닌 고귀한 다각형이다." (261쪽)
8. "플라톤의 가르침에 반하는 논지를 전개할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런 독자에게 나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자 한다. 먼저 원형 세계의 보고(寶庫)에는 양립할 수 없는 일반어와 추상어가 뻔뻔하게 공존한다. 그리고 그것의 창안자는 사물이 보편적 형상을 공유하는 과정을 밝히지 않는다. 또한 그 순수 원형은 혼합되고 다양해진다고 추정할 수 있다. 원형은 와해되지 않는 게 아니다. 원형은 시간의 피조물만큼이나 불확정적이다. 원형은 피조물의 이미지로 만들어졌기에 변칙적 와해를 반복한다."
→ "내 독자들에게 플라톤의 교리를 불신하기 위한 논거가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로서는 무수한 논거를 제시할 수 있다. 첫째, 원형 세계의 보고에는 보편성과 일반성의 목소리가 양립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럽게 공존한다. 둘째, 원형의 창시자는 사물들이 보편적 형상에 끼어드는 과정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셋째, 이 무균한 원형이야말로 혼종성과 다양성으로 고통받는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 원형들은 해결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시간의 피조물만큼이나 혼란스러운 것이다. 원형은 피조물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기에 해결하고자 하는 바로 그 결함들을 반복한다." (2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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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글꼭지]
1. 268쪽 두 번째 문단
→ "별개의 세계에 속했던 영원성이 신의 19개 정신적 속성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대중의 숭배를 받게 된 원형은 신이나 천사가 될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원형의 실재성이⏤항상 단순한 피조물보다 더 우월한 실재성이⏤부정되지는 않았지만, 창조주의 말씀 안의 영원한 형상[이데아]으로 한정되었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사물 이전의 보편자(universalia ante res)'라는 개념에 도달했다. 그는 이 보편자가 창조물보다 영원하고 창조물에 선행하는 것으로 간주했지만, 단지 영감이나 형상의 방식으로만 그렇다고 보았다. 그는 '사물 안의 보편자(universalia in rebus)'와는 엄격히 구분했는데, 이는 시간 속에서 다양하게 구체화된 동일한 신적 개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물 이후의 보편자(universalia post res)'와 엄격히 구분했는데, 이는 귀납적 사고에 의해 재발견된 개념이다. 시간적인 것은 창조적 효력이 없다는 점에서 신적인 것과 구분되며, 그 외엣 것들에서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신이라는 범주가 반드시 라틴 세계의 신에 상응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심이 스콜라 철학에는 없었다." (268쪽)
[설명] 별개의 세계에 속했던 '영원성'이라는 개념이 이레네우스 이후로, 신의 한 특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플라톤의 원형으로서 '영원성'이 독립적인 존재로 숭배되면, 종교는 다신교로 변질될 우려가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름다움'은 아프로디테로, '지혜'는 아테나처럼 추상적 개념을 신격화한 바 있습니다. 유일신 신앙인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다중의 원형은 우상숭배가 될 우려가 있었기에, 영원성 역시 신의 한 속성으로 편입된 것입니다. 중세 스콜라 철학을 완성한 철학자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사물 이전의 보편자'를 말하면서, 마치 건축가가 집을 짓기 전에 설계도를 그리듯 신은 세계 창조 이전에 모든 것의 청사진을 마음에 품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사물 안의 보편자'와 엄격히 구분되는 것이며, 이를테면 실제 의자들 속에서 공통적으로 추려낼 수 있는 '의자다움'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사물 이후의 보편자'와는 더욱 엄격히 구분되는 것인데요, 이는 인간이 여러 개별 사례를 통해서 일반성을 도출하는 과정입니다. '사물 이전의 보편자'와 달리, '사물 안의 보편자'와 '사물 이후의 보편자'는 "시간적인 것"이며, 창조적 효력이 없습니다. 이것이 스콜라 철학자들의 세계관이었습니다. 이 문단의 말미에 보르헤스는 "신이라는 범주가 반드시 라틴 세계의 신에 상응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심이 스콜라 철학에는 없었다"라는 다소 쌩뚱맞은 문장을 덧붙이는데요, 이 문장의 함의는 대단합니다. 논리적으로만 보면, 이러한 스콜라 철학자들의 생각은 타당해 보이지만 그것은 '라틴어'라는 인간된 산물 안에서만 그러함을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보르헤스는 이 한 문장으로써, 인간적 개념틀을 신적인 실재에 투사하는 오만함을 지적하는 미묘한 뉘앙스를 담아낸 것입니다.
2. "영원성을 각별히 연구한 신학서도 꾸준히 출판됐다. 그런 저작은 영원성을 모든 시간의 파편에 대한 동시적이고 총체적인 직관으로 봤으며, 히브리어 성서에서 기만적인 내용을 찾는 데 진력했는데, 이 성서에서는 성령이 아주 나쁘게 말한 것을 주석자가 좋게 말한 것으로 보였다."
→ "신학서에서는 영원성을 특별히 깊이 다루지 않는다. 그저 영원성이란 모든 시간의 파편을 동시적이고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라고 짤막하게 언급하거나, 히브리어 성서에서 기만적인 내용을 찾는 데 진력했는데, 그래서인지 성령이 아주 나쁘게 말한 것을 주석자가 좋게 말한 것으로 보였다." (269쪽)
3. "구원받을 자는 숙명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위선일 수도 신중함일 수도 있지만 신학자들은 천국에 갈 운명인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 "구원받을 자는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학자들의 위선인지 신중함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은 예정이라는 단어를 천국에 갈 예정인 이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272쪽)
4. "그들이 신의 말씀 없이 구원됐다고 상상하는 것은 그들 중 몇몇이 훌륭한 선행에도 은총받지 못했음을 부정하는 것만큼 오만한 일이다."
→ "그들이 말씀이라는 수단 없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탁월한 미덕을 지닌 그들이 천국에서 제외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만큼이나 오만한 일이었다." (272쪽)
5. "이 두 가지를 근거로 말씀의 권능은 영원으로 진입했다."
→ "이 두 가지를 근거로 가능성의 양태로서 말씀은 영원으로 진입했다." (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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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글꼭지]
1. "먼 과거의 사람들, 수염을 기르고 두건을 쓴 그들은 공개적으로는 이단을 몰아붙이고 하나로 결합된 삼위의 구분을 옹호하기 위해, 그리고 비밀스럽게 시간의 흐름을 특정 방식으로 확정하기 위해 영원성의 개념을 형성했다.(···) 영원성이라는 형상하에서가 아니라면 우리가 되돌리거나 보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먼 시대의 사람들, 수염 난 자들과 주교관을 쓴 자들이 영원성을 구상했다. 표면적으로는 이단을 공박하고 하나로 결합된 삼위의 구분을 변호하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비밀리에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든 멈추기 위해서였다. (···) 우리는 영원성의 형태로만 무언가를 회복하거나 보존할 수 있다." (276쪽)
2. "~완전한 구원을 상상하는 것보다 못한 것은 아니다."
→ "~완전한 구원을 상상하는 것만큼이나 믿기 어렵다." (277쪽)
3. "이는 시간이라는 다양한 시제의 긴밀한 결합에 대한 확인이지만, 시간의 연속성을 포함하고 있기에 영원이라는 전형에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 "이는 시간의 다양한 시제들이 내밀하게 연결돼 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속성을 포함하기에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영원성의 모델과 조화되지 않는다." (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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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글꼭지]
1. "길을 가다 보니 어느 모퉁이에 다다랐다. 나는 밤을 들이마시며 평온한 마음으로 생각에 잠겼다. 나른해서인지 눈에 들어오는 게 복잡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간결해 보였다. 그 광경은 전형적인 제 모습을 비현실적으로 바꾸고 있었다."
→ "걸음이 나를 어느 모퉁이로 데려다 놓았다. 나는 생각을 쉬면서 밤 공기를 들이마셨다.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란, 분명 복잡하지 않았고, 나의 피로 때문인지 단순해 보였다. 전형성 자체가 그 광경을 비현실적으로 보이게끔 했다." (281쪽)
2. "무화과나무가 벽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긴 벽 위로 돌출된 작은 대문들이 밤이라는 무한한 실체 속에 서 있는 듯했다. 길 위로 작은 길이 파여 있었다. 길은 아직 정복되지 않은 아메리카의 흙, 그 원래의 흙으로 되어 있었다. 풀이 자라난 길의 끝자락은 말도나도를 향해 사라지고 있었다."
→ "무화과나무가 [평평히 깎인] 팔각의 모퉁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가로로 기다란 벽 위로 돌출된 작은 대문들은 밤이라는 무한한 물질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보도는 길 위로 가파르게 솟아 있었다. 길은 아직 정복되지 않은 아메리카의 진흙, 그 원래의 진흙으로 되어 있었다. 팜파스풍의 골목길 저편은 말도나도를 향하여 차차 허물어지고 있었다." (281쪽)
3. "결론부터 말하자면, 삶은 빈한하기 짝이 없지만 그렇다고 불멸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 "미리 결론을 도출하자면, 삶은 너무 빈한하여 불멸에 이를 수밖에 없다." (282쪽)
화제로 지정된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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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성의 역사] 영원성이란 개념이 시대와 사상가를 경유하면서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설명합니다. 총 네 개의 글꼭지로 돼 있습니다.
간략히, 첫 번째 글꼭지에서는 '영원성'과 '시간' 개념을 살핍니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그러한 플라톤에서 영향을 받은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를 위주로 살핍니다. 그런 뒤에 논의를 확장하여 쇼펜하우어에 이르기까지의 흐름을 살펴본 다음, 그 한계점도 같이 짚어봅니다. 보르헤스가 적기를, 플라톤이 처음으로 영원성을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플라톤만큼 영원성 개념을 "장려하게 확장하고 개괄한" 사례도 드뭅니다. 두 번째 글꼭지에서 후술하겠지만, 이는 기독교의 교부이자 변증가였던 이레네오가 주장한, "상이하면서도 불가분한 삼위로 완성된 영원성의 개념"에 앞서는 것입니다.
먼저 초반부에서 보르헤스는 일찍이 플라톤이 "시간을 영원성의 움직이는 이미지[그림자]"라고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주장은 미약한 울림에 그칠 뿐이라고 말하면서, 그보다는 "영원성이야말로 시간이라는 물질로 빚어진 이미지"라는 세간의 인식이 더 보편적임을 인정합니다. 이 말인즉, 사람들은 영원성이 시간을 무수하게 열거하고 종합한 끝에 얻어지는 어떤 것이라고 믿지만, 기실 시간은 영원성의 파편에 불과하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명시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앞선 모든 것의 동시성이라는 겁니다. 보르헤스는 플라톤의 영원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플로티노스를 경유합니다. 플로티노스는 ⟪엔네아데스⟫에서 가지적 천상(inteligible heaven)을 언급합니다. "불가해한 것도 불투명한 것도 없으며 빛이 빛을 마주한다."(255쪽) 그곳에서 시간이란 영원성의 모방으로, 이 이상적 세계는 원형의 세계인 만큼 다양하지 않고, 다만 '충만'합니다. ⟪엔네아데스⟫에서 물질이란 실재하지 않으며, "보편적인 형상을 받아들이는 단순하고 공허한 피동체"(257쪽)라고 말합니다. 스페인의 성직자였던 페드로 말론 데 차이데가 적기를, 하느님은 팔각의 황금 인장을 갖고 있는데 거기에는 '완전함'으로서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밀랍에 황금 인장을 찍으면 거기에 형상이 나타나듯 피조물은 유한하고 가치가 떨어지나, 하느님 안에서는 그러한 완전함이 금으로 돼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형상'은 물질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다만 채울 뿐이며, 물질은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인식이 도출됩니다.
플라톤에게 이 황금 인장이 바로 '종(species)'이 되며, 이때 종에 비하면 물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플라톤은 이렇게 적습니다. "개체와 사물은 그들이 포함하는 종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한다. 이 종이 그들의 영구적 실재다."(259쪽) 쇼펜하우어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사자성(Leonidad)'과 뭇 사자들의 비유로 나타납니다. 사자성이 불멸의 형상을 지니는 반면에 개체로서 사자는 필멸합니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이러한 '사자성'을 마냥 옹호하기란 어려우며, 나아가 '영원한 인간성'이라는 것에도 큰 기대를 걸지는 말자고 합니다. 이유인즉, 앞서 설명했듯 영원성이란 '다양성'이 아니라 '충만함'이며, "플라톤식 원형이 공정된 끔찍한 박물관"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의 박물관은 불가능하고, 모든 것을 암시하는 원형들이 전시된 공간으로서 박물관만이 가능하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됩니다. 이러한 플라톤의 영원성 개념은 비유컨대, 인간을 이루는 물질을 모두 분석하더라도 원형으로서 '생명' 그 자체는 규명하지 못한다는 논리로도 이어집니다. 그러나 원형으로서 영원성 역시 한계가 있는데요, 보르헤스는 원형이 말 그대로 원형이기에 현실 세계보다 필연적으로 빈약하다고 말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훗날 '유일'신을 말하는 기독교에서 영원성 개념을 채택하고 확장하는 계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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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독자들에게 플라톤의 교리를 불신하기 위한 논거가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로서는 무수한 논거를 제시할 수 있다. 첫째, 원형 세계의 보고(寶庫)에는 보편성과 일반성의 목소리가 양립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럽게 공존한다. 둘째, 원형의 창시자는 사물들이 보편적 형상에 끼어드는 과정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셋째, 이 무균한 원형이야말로 혼종성과 다양성으로 고통받는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 원형들은 해결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시간의 피조물만큼이나 혼란스러운 것이다. 원형은 피조물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기에 해결 하고자 하는 바로 그 결함들을 반복한다. 예컨대 사자성은 가지적 오만함, 황갈색, 갈기, 할큄을 제거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는 답이 없고, 있을 수도 없다. 사자성이라는 말에서 접미사가 제거된 사자라는 말보다 월등한 미덕을 기대하지는 말자. ”
『영원성의 역사』 262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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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글꼭지에서는 기독교의 교부인 이레네오 데 리옹의 견해를 중심으로 플라톤의 '영원성' 개념이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살펴봅니다. 당시는 영지주의자가 득세했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교회의 정통적인 가르침과 권위에 대항하여 개인의 영적 지식을 강조한 집단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삼위일체의 교리적 핵심과 영지주의적 해석이 충돌하는 지점을 간파하여 삼위일체를 해체하려고 합니다. 바로 삼위일체의 세 위격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등하고 영원하고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교리가 "말씀은 성부로부터 나고, 성령은 성부와 말씀으로부터 난다"는 시간적 선후관계와 충돌한다는 겁니다. 이에 이레네오 주교는 영지주의자들로부터 삼위일체를 옹호하기 위해서 그간 교리 밖에서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그늘 속에 있던 플라톤의 '영원성' 개념을 다음처럼 끌어옵니다. "성부에 의한 성자의 탄생과 성부와 성자에 의한 성령의 출현은 시간 속에서 발생한 게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를 일소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265쪽)
이렇듯, 이레네오를 기점으로 기독교의 교리 안에서 영원성이라는 플라톤의 개념이 신의 속성 중 하나로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영원성은 과거-현재-미래를 일소하고, 신의 권능인 전지(全知)함과 같이 하나의 속성으로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즉 시간성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는 기념비적인 사건입니다. 영원성은 시간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모든 것을 포괄합니다. 보르헤스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합니다.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 구원받을 자를 '예정(predestinados)'할 뿐, 지옥에 떨어질 사람을 예정하지는 않으며 다만 '무시/간과(preterición)'하실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예정'과 '무시/간과' 개념을 통하여, 영원성은 단순히 시간이 무한정 지속되는 개념이 아니라 신의 주권적 선택(quia voluit)과 도덕적 질서가 내재된 복합적인 개념으로 변모합니다. 보르헤스는 "이로부터 영원성의 개념이 일신되었다"(272쪽)고 적습니다.
앞서 보았듯, "시간적인 것"이 해결되면서 기독교 이전에 살았던 성인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우상숭배자가 천국에서 제외되는 딜레마 역시 해결됩니다. 신의 전지함은 단순히 실제로 일어난 일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가능성의 양태로서 말씀(los modos potenciales del verbo)"까지 포괄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윗과 케일라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고라신과 뱃새다를 두고 예수가 책망하는 부분에서 성서적 근거를 갖추고 있습니다. 신의 말씀이 이미 일어난 세계 뿐만이 아니라 일어날 수도 있었던 "가능성의 양태"까지 포괄하게 됨으로써 영원성은 더욱 확장되는데, 결과적으로 예수 이전에 살았던 헤라클라스는 구원되고 레르나 히드라는 세례를 거부할 것임을 알기에 구원되지 못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씁니다. "우리는 현실적인 일을 인식하고 가능한 일(그리고 미래의 일)을 상상한다. 하느님 안에서는 그와 같은 구분이 없다. 그런 구분은 무지와 시간에 귀속되니 말이다. 하느님의 영원성은 이 충만한 세계의 모든 순간뿐만 아니라 가장 일과(一過)적인 순간이 바뀌는 순간, 심지어 불가능한 순간까지 모두 한꺼번에(하나의 지적 행위로) 담고 있다."(273쪽) 말미에서 보르헤스는 하느님의 창조성이 영원한 현재 속에서 지속된다는 이해에 힘입어서, '창조하기'와 '보존하기'가 동의어가 된다고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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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글꼭지입니다. 보르헤스는 인간의 욕망이 영원성을 두고서, 실념론과 유명론이라는 대조적인 두 가지 꿈을 꾸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실념론이란 "이상한 애착으로 피조물로부터 고정된 원형을 갈구하는 꿈"이고, 유명론이란 "원형의 진리를 부정하고 우주에 대한 세부사항을 단 하나의 순간에 모으려는 꿈"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대랍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유명론을 따르고 있으며, 그건 기실 "습득된 공리"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는 첫 번째 글꼭지에서 살펴본 다음 문장과 연결되는 듯합니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시간을 영원성의 움직이는 이미지[그림자]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미약한 울림에 그칠 뿐, 영원성이야말로 시간이란 물질로 빚어진 이미지라는 확신을 흔들지 못하고 있다.”⏤251쪽.
보르헤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시를 암송하는 과정을 묘사한 글을 인용합니다. 아우구스투스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현재에 통합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보르헤스가 보기에, 그렇게 시를 암송하는 순차적인 과정은 연속성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모든 시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영원성 개념과 모순된다고 말합니다. 세 번째 글꼭지의 말미에 이르러서 보르헤스는 우리가 영원성의 개념을 긍정할 수밖에 없음을 말합니다. 인간이라는 종에게 "기억은 격정에 사로잡혀 시간성을 초월하는 방향으로" 기울고, "과거의 행복을 하나의 이미지로 모은다"는 것입니다. 매일의 제각기 다른 낙조는 기억 속에서 테두리가 깎여 나간 강가의 조약돌처럼 하나의 이미지로 수렴되며, 우리는 거기에서 영원성의 흔적을 본다는 것입니다. 보르헤스는 인간의 기억하고자 하는 욕망을 영원성과 결합하면서 이렇게 적습니다. "다시 말해 영원성은 욕망의 양식이다."(279쪽)
마지막 네 번째 글꼭지는 이전에도 한번 다룬 적 있으니 간단히 넘기겠습니다. 보르헤스는 인간의 삶은 너무 빈한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빈한함이 그 모든 것을 불멸에 이르게 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제한된 삶을 살지만, 그러한 불완전성과 한계에서 언젠가 보았던 플라톤의 원형이 전시된 박물관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르헤스는 인간된 불완전함을 영원성으로 단번에 전환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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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닝~] 케닝(Kenning)은 고대 영어와 노르드 문학에서 사용된 문학적 표현 기법입니다. 사물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간접적인 비유를 활용하는데요, '바다'를 '고래의 길'이라고 표현하거나 '검'을 '전사의 불'이라고 표현하는 식입니다. 본문에서 몇 가지만 문장만 바꿔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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