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시간은 영혼 안에 있으며, 우리는 영혼 안에서 시간을 측정한다. 과거, 현재, 미래는 기억, 지각, 기대의 형태로 영혼 안에 있다.
『죽음을 사색하는 시간』 p. 271, 이창익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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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말
엘리아데가 그리는 세계에서 모든 사물은 우울한 낭만에 젖어 있다.
『죽음을 사색하는 시간』 p. 276, 이창익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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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말
“ 종말론에서는 '시간 밖의 시간', 시간의 끝, 즉 시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비시간이 강조된다. 우리는 '시간 밖의 시간'을 영원이라 부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종말론의 등장으로 인해, 이제 영원은 시간 안이 아니라 오로지 시간 밖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된다. ”
『죽음을 사색하는 시간』 p. 293, 이창익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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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말
기독교에서 신은 무에서 세계를 창조한다. 세계는 신의 속성을 조금도 공유하지 않는다.
『죽음을 사색하는 시간』 p.301, 이창익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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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코디
대체로 종교에서는 오로지 죽음을 통해서만 더 이상 죽지않는 불멸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128p.)
엔딩코디
인간에게 죽음은 '탄탈로스의 바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탄탈로스의 머리 위에 매달린 채, 언제 허공에서 떨어져 탄탈로스의 머리를 박살낼지 알 수 없는 이 바위로 인해, 탄탈로스는 감히 신의 음식을 먹지 못한다. 아마도 제우스는 탄탈로스의 오만함을 징벌하기 위해 머리 위에 바위를 매달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위는 인간과 신의 건널 수 없는 경계선을 의미한다. 탄탈로스는 바위의 추락을 감수하지 않는 한, 신의 음식에 손을 댈 수 없다. 신처럼 살려면 탄탈로스는 신들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러나 음식에 손을 대는 순간 바위가 떨어질 것이다. 신처럼 살려고 하는 순간 탄탈로스는 인간으로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죽음은 항상 신과 인간의 차가운 경계선을 알려준다.(124-125p.)
노말
기독교는 '시간 밖에 있는 고독한 신'이라는 개념을 통해, 불교는 '시간 밖으로 탈출하는 인간'이라는 개념을 통해 시간의 원을 깨뜨린다.
『죽음을 사색하는 시간』 P. 323, 이창익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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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말
“ 역사적인 세계에서는...조상이라는 집합적 범주에 녹아 버리지 않는 것, 개인적인 기억을 보존하는 것, 원형의 연못에서 익사하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이 죽음에 대처하는 역사적인 인간의 목표가 된다...원형으로 변하지 않는 것이 즉음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
『죽음을 사색하는 시간』 P. 328, 이창익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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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말
인간은 역사에 의해 모든 것이 인공적인 의미를 부여받는 인공 세계를 건축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무의미를 근원적으로 차단하려 한다.
『죽음을 사색하는 시간』 P.352, 이창익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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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말
@모임 안녕하세요. 어느덧 모임의 마지막 날입니다. 모임지기로서 완독을 못했다는 고백, 읽은 부분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는 기분을 고백합니다. 책은 모임 이후에라도 필히 완독하고 재독해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게 좋았습니다.
모임지기가 이끌기에 벅찬 책인 걸 사전에 알았다면 좋았을텐데요. 읽기 전에 알 수가 없었습니다. 문장 수집으로만 참여한 점 송구하게 생각하고 기회되면 다음 책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