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보르헤스 읽기] 『말하는 보르헤스』 1부 같이 읽어요

D-29
화제로 지정된 대화
[에마누엘 스베덴보리]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스톡홀롬에서 출생한 18세기의 신학자이자 과학자입니다. 그는 루터 교회의 주교였던 아버지를 따라 일찍이 주교로서 교육받았으나, 청년기에는 실용주의적인 과학자로 성장했습니다. 신비주의자라는 나중의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그는 실용주의적이고 과학적인 사고관을 견지했는데, 그가 집필한 50권의 저서 중에서 절반이 과학과 수학과 천문학에 할애되었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언급하듯, 훗날 스베덴보리는 인생의 2/3쯤 되는 지점에서 일종의 계시를 경험하고서 다시 영성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28년 동안 신학 연구에 전념했습니다. 생의 이력만 놓고 보면, 스베덴보리의 삶은 종교와 과학의 완벽한 결합, 혹은 '과학적인 영성으로의 회귀'라고 할 만합니다. 가장 지성적인 사고방식으로써 영성을 탐구했던 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서 다뤘던 주제인 ⟨불멸⟩과 이어지는 지점도 있습니다. 그가 제시한 영적 모델은 단테의 ⟪신곡⟫에서 보는 것과 다릅니다. 자유의지가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인해 끊기지 않는 불멸성을 제시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은 한갓 구원의 공간은 아니며, 지옥 역시 징벌의 공간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이 죽으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채로 계속해서 살아가며, '다른 세상'에서 천사에 걸맞는 사람은 천국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악마에 걸맞는 사람은 지옥 속에서 나름으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다고 말했습니다. 지옥은 천국으로 가지 못한 사람들이 영원히 고통받는 공간이 아니라, 지옥에 걸맞는 사람이 저 나름의 모함과 비열과 증오 속에서 행복을 누리는 공간인 것입니다. 심지어 구원의 공간으로 일컬어지는 천국조차 흔히 말하는 천국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음을 스베덴보리는 시사합니다. 일례로 한 남자가 천국에 가기로 마음먹고 극단적인 고행을 실천한 끝에 천국에 당도하게 됩니다. 그는 천국에 이르렀음에도 여전히 지상에서처럼 쾌락과 기쁨을 부정한 채, 자신이 창조한 사막 속에서 고행을 이어나가며, 그에게 천국이란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가능케 하는 사막화된 풍경에 다름 아닙니다. 그것이 다름 아닌 그의 행복이었고 천국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는 천국에 윤리적인 성격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진정한 의미의 '구원'이란 올바르게 사는 것으로는 부족하며, 지적으로 거듭나야만 비로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이후 블레이크가 등장하여 더 나아간 것, 즉 예술을 통한 구원을 주장합니다). 한편, 스베덴보리는 설교하지 않고 다만 소박하고 무미건조한 문체로 책을 썼던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는 여타 신비주의자들과 스베덴보리를 구분짓는 것이기도 한데, 스베덴보리는 교훈적인 상징이나 은유로써 글을 써 나가기보다는 "미지의 땅을 다니면서 차분하고 세세하게 묘사한 여행자의 작품"을 내놓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후에 나오는 제발트와 발저의 여행이 연상되는 면이 있는데요, 무엇보다 단테가 ⟪신곡⟫에서 보여준 다층적인 은유의 체계, 그 여정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보르헤스가 언급한 칼라일의 무서운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다름아닌 세계사는 한 편의 글이며, 한 명의 인간은 한 개의 문자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리하여 스베덴보리는 스스로 기적이되 세상에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지 않는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의 운명" 속에서 소박하게, 이름 없이 자족했습니다. 이는 진실을 견지하되 아무것도 바꾸려 하지 않기에 스스로 구원되는 문학적인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이는 훗날의 블레이크를 데려오는 계기가 됩니다.
나는 국립 도서관에 그의 책 ⟪천국과 그것의 경이로움, 그리고 지옥에 관해⟫가 한 권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몇몇 견신론 전문 서점에서도 스베덴보리의 책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신비주의자들보다 훨씬 복잡한 신비주의자였습니다. 다른 신비주의자들은 우리에게 환희를 경험했다고 말하면서, 심지어는 문학적인 방식으로 그 환희를 전하려고 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세계를 처음 탐험한 사람으로서,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탐험가입니다.
말하는 보르헤스 63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탐정 소설] 에드거 앨런 포를 향한 보르헤스의 존경과 애정이 담긴 글입니다. 보르헤스는 에드거 앨런 포가 오늘날 '탐정 소설 독자'라는 독특한 유형의 독자를 창조했다는 데서 그 비범함을 엿볼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포는 낭만주의 시대의 작가로서, '문학은 영혼의 산물'이라는 당대의 통념 속에서도 문학이 지성적인 장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에드거 앨런 포가 소설 속에서 만들어낸 지성적 존재로 '오귀스트 뒤팽'을 보십시오. 그는 훗날 등장한 셜록 홈즈와 브라운 신부로 이어지는, 일종의 '전통'이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뒤팽의 추리가 시시하며,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이 익히 예상된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에드거 앨런 포나 그가 창조한 뒤팽이 시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가 과거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지 못함을, 평가하지 못함을 방증할 따름입니다. 현재의 뒤팽은 포가 살았던 낭만주의 시대의 독자들이 열광했던 뒤팽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사람들에게 셜록 홈즈와 브라운 신부를 경유하지 않고서 뒤팽을 읽을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포는 문학이 '영혼의 산물'이라고 여겨지던 시대에 자신의 소설과 시가 지성적인 것이 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보르헤스는 포가 ⟨갈가마귀⟩를 쓰면서 자신의 지성에 대해서 얼마만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자세히 기술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현재 관점에서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들이 당시에는 그렇게 당연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았습니다. 에드거 앨런 포가 내놓은 소설과 시는 이전과는 다른 독법을 요구했습니다. 포의 탐정 소설 이후에라야 비로소 사람들은 사건의 디테일을 지성적으로 따지고 의심하면서, 그 논리적 전개 방식을 읽어내려는 전통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던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포는 탐정 소설이 사실주의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포는 탐정 소설이 지성적인 장르가 되기를 바랐고, 동시에 상상적인 것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보르헤스는 이를 "지적인 환상 문학이 되기를" 바랐다고 표현합니다. 훗날 포의 영향 하에서 '자유시'를 고안해냈던 보들레르는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탐정 소설은 어떤 의미로든 자기 시대에 하나의 '질서'를, 다시 말해 전에 없던 독자와 독법을 요구했습니다. 당대의 독자에 호소한 작품을 쓴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있게 될' 독자에게 호소하는 작품을 썼던 것입니다.
무슨 말로 탐정 소설을 찬양할 수 있을까요? 한 가지는 아주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바로 우리 문학이 혼돈의 성향을 띠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유시를 쓰는 경향이 있는데, 이유는 그것이 정형시보다 쉬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변변찮으나마 고전적 가치를 유지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탐정 소설입니다. (···) 나는 탐정 소설을 옹호하기 위해 아무것도 옹호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는 다소 경멸적으로 읽히지만, 그것은 무질서의 시대에 질서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탐정 소설에게 감사해야 하는 증거이며 이 장르의 공훈입니다.
말하는 보르헤스 84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시간’은 간명한 주제이지만 오래된 주제이며, 그런만큼 심오합니다.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보르헤스가 철학과 수학에 얼마나 조예가 깊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 뿐만 아니라 제논의 역설에 대한 베르그송의 철학적 반박, 러틀런트 러셀의 수학적 증명 과정까지 건드리고 있습니다. 먼저, 사소한 오류부터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러셀의 증명을 언급하는 내용에서 ‘급수’(serie)라고 돼 있는 단어는 ‘수열’로 바꿔 읽어야 합니다. 먼저 말하면, 이 에세이에서 보르헤스는 ‘시간’이야말로 유일하게 본질적인 문제임을 설득합니다. 보르헤스는 흔히들 시간과 공간을 묶어서 ‘시공간’처럼 표현하는 것이 못마땅하다고 말합니다. 마치 니체가 괴테와 실러를 동등하게 논하는 것을 마뜩찮아 했던 것처럼요. 그 이유인즉, 우리 사유(상상) 속에서 ‘공간’은 얼마든 배제할 수 있지만, ‘시간’은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르헤스는 이를 위해 사고 실험 하나를 제안합니다. 바로, 오감을 하나씩 소거해보는 것입니다. 이때 보르헤스는 시각, 미각, 촉각, 후각을 하나씩 제외한 끝에 오직 청각만 남는 세계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 세계란 공간이 배제된 곳으로서 오직 개인의 의식과 음악만 있습니다. 쇼펜하우어가 통찰했듯 그곳에서는 ‘음악 자체가 하나의 완전한 우주’를 이룹니다. 눈치 챘겠지만 이 완전한 우주에서는 결코 배제할 수 없는 한 가지가 무엇인지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바로 ‘시간’입니다. 공간은 우리 상상 속에서 얼마든 배제 가능하지만, 그런 동안에도 우리의 의식은 계속되며, 시간은 순차적으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변함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간이 의식 자체의 조건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은 밤 한가운데로 흘러간다”는 테니슨의 시구처럼, 시간은 잠든 순간에도, 침묵을 지킬 때도 계속됩니다. 시간은 단순한 측정 단위가 아닌,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자 모든 경험을 근저에서부터 가능케 하는 최초의 조건임이 이렇게 드러납니다. 한편, ‘시간’에 대한 보르헤스의 사유를 집약하는 단 하나의 은유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입니다. 우리가 같은 강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는 이유는, 강물이 흐르고 있는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우리 자신이 이미 하나의 강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시간에 관한 한 우리는 이중의 유동성에 매여 있으며, 그 때문에 우리는 시간의 문제를 논하기 어려워 합니다. 따라서 보르헤스는 시간을 넘어서는 오래된 논쟁을 끌어옵니다. 바로 ‘영원’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플로티노스, 그리고 플로티노스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영원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일전에, ⟨영원성의 역사⟩라는 다소 긴 에세이에서 한번 다룬 적이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플라톤에게 “시간이란 영원성의 움직이는 형상[idea]”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영원성에 비견한 시간에 대한 사유를 얻게 됩니다. 비유컨대 ‘영원성’이 한 권의 책을 대할 때 모든 페이지를 동시에 펼쳐놓고 읽는다면, ‘시간’은 순차적으로 모든 페이지를 읽습니다. 영원성이 현재-과거-미래의 동시성이라면,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은 연속적인 형태”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유의할 점은 시간이 영원성에서 비롯되긴 하였지만, 영원이 시간에 앞선다고 말하는 것은 오류라는 사실입니다. '앞선다'(anterior)’는 표현 자체가 이미 시간적인 것이기 때문이죠.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했듯이, “시간이 운동의 척도”라고 말하는 것도 오류이긴 매한가집니다. 운동은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인데, 그런 운동으로써 다시 시간을 정의한다는 것은 순환논리인 탓입니다. 훗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간 속에서(in tempore)”가 아니라 “시간과 더불어(cum tempore)”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윌리엄 블레이크는 우리 인간에게 “시간은 영원의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왜일까요? 바로, 인간은 과거-현재-미래의 동시성으로서 영원성을 감당하지 못하는 탓입니다. 그리하여 시간의 순차성이란, 영원성이 인간에게 베푸는 ‘자비로운 분할’입니다. 물론 이 선물로서의 시간은 순순히 주어지지 않습니다. 고뇌가 따릅니다. 플라톤이 말했듯이 시간은 영원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자신의 원형인 영원성으로 회귀하려는 충동을 가집니다. 이렇듯 우리는 언제까지고 영원성이라는 주제로 돌아가지만 오직 ‘시간’ 속에서만 그러합니다. 시간은 영원성이라는 완전함을 불완전하게 모방하는 연속된 흐름으로서, 시간이 순차적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씁니다. "시간이 영원의 형상이라면, 미래는 미래로 가는 영혼의 움직임일 것입니다. 미래는 동시에 영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즉, 우리의 삶은 계속된 고통과 몸부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성 바울의 구절에 이르게 됩니다. "나는 날마다 죽음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기억으로 이뤄져 있고, 그 기억은 망각으로 이뤄져 있는 것처럼, 인간된 삶 역시 ‘보존’과 ‘소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 사건 속에서 우리는 매일 죽고, 매일 태어납니다.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에 매달리는 것도 바로 이 매일의 죽음과 탄생 탓입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우리 각자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누구일까요?”라는 물음의 근저에는 무지가 있으며, 그 무지가 인간된 조건입니다. 시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해결되지 않음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적인 특징을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절망적이면서도 숭고한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신비한 존재입니다. 만일 기억이 없다면 우리들 각자는 무엇이 될까요? 그 기억은 상당 부분 소음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래도 본질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의 내가 되기 위해 팔레르모와 아드로게, 제네바와 스페인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장소에 있더라도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니며, 나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끝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항상 변화하는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변화'라는 말만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우리가 말하는 변화란 무언가 다른 것으로 대체된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식물이 자란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작은 식물이 보다 큰 식물로 대체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식물이 다른 것이 된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변성 안에 영속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말하는 보르헤스 10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신곡] 7일 밤의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단테의 ⟪신곡⟫을 다룹니다. 여담으로 시작하자면, 보르헤스는 고전이라고 해서, 누군가 읽을 만한 책이라고 해서 읽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책을 대할 때는 그것이 남들이 중요하다고 하든 아니든 똑같은 태도로, 마치 아이의 마음가짐을 가지고서 흥미와 호기심으로써 읽는다고 말합니다. 새겨들을 만한 말입니다. 누군가가 읽으라고 권해서, 그것이 '필독서'라고 해서 어떤 책을 읽으면, 거기에는 남모르게 '의무'가 씌입니다. 물론 이 자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의무감으로만 한다면 그 일을 오래 지속하는 데 적합한 동기가 되어주지는 못할 겁니다. 멀리 가는 데 신는 신발은 아닌 셈입니다. 멀리 가기 위해서 신는 신발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자발적인 호기심과 흥미라고 부릅니다. 한편, 보르헤스가 ⟨욥기⟩의 사례를 빌려서 단테의 위대함을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혹자들은 단테가 ⟪신곡⟫을 쓴 이유가 자신의 적들에 복수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보르헤스가 보기에 그것은 단테의 성취를 폄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단테의 작품이 오롯이 단테 개인의 욕망이 집적된 것에 불과하며, 마치 문학이 현실에 좌절한 이가 개인적 복수심에 불타서 매달리는 헛된 몽상이거나 현실 도피라고 주장하는 셈입니다. 보르헤스는 ⟪신곡⟫을 그렇게 읽지 않았습니다. 단테는 ⟪신곡⟫ 안에서 1인칭의 인물이 되어서 하느님이 만든 천국과 연옥과 지옥을 그려보이면서도, 그것을 단테 개인의 이해를 뛰어넘는 불가해한 공간으로 묘사함으로써 ⟪신곡⟫에서 자신을 낮추었다는 겁니다. 보르헤스는 그것을 ⟨욥기⟩의 사례로써 설명합니다. 언젠가 하느님은 자신을 판단하거나 정당화하는 신자와 불신자 양쪽을 모두 꾸짖으며, 조아리게 만든 적이 있는데, 이와 비슷한 변주가 ⟪신곡⟫의 등장인물인 프란체스카의 경우입니다. 여기서 보르헤스의 핵심적인 물음은 이러합니다. "만일 ⟪신곡⟫ 속 단테의 하느님이 항상 단테의 감정과 일치한다면?"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단테의 하느님은 거짓된 것이고, 단순히 단테의 복제품일 따름입니다(앞서 단테가 자신의 적들에 복수하려고 ⟪신곡⟫을 썼다는 입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단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단테는 자신이 동정하고 은근히 부러워해 마지 않는 프란체스카나, 존경했던 파타리나 같은 인물을 지옥에 내버려둠으로써 하느님이 창조한 천상의 공간을 불가해한 영역으로 받아들입니다. 마치 현실의 단테가 베아트리체의 사랑을 얻지 못하고, 고향에서 추방당하고, 고향이 아닌 라벤나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것처럼요. 즉 단테의 위대함은 자신의 감정과 이해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묘사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보르헤스는 이것이야말로 ⟪신곡⟫을 한갓 복수극이 아닌, 위대한 문학으로 만든 요소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보르헤스는 오디세우스가 나오는 부분 역시 "절정"이라고 치켜세웁니다. 사람들은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목마와 같은 거짓된 계략을 꾸몄기에 지옥에 떨어졌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가 "금지되고 불가능한 것을 알고자 하는 고결하면서도 대담한 작업"을 행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오디세우스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넘으로써 신이 정해둔 한계를 위반하였고, 자신들은 "무언가를 알고 이해하고자 태어났다"면서 동료들을 설득하여 모험에 나서게 만듦으로써 지식을 욕망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연옥의 산에 가닿음으로써 파멸했습니다. 보르헤스는 이와 비슷한 구조를 훗날 ⟪모비딕⟫에서 발견하고서, 멜빌이 롱펠로가 번역한 ⟪신곡⟫을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고 말합니다. 에이허브 선장은 흰고래라는 인간된 한계에 도전했고, 스스로 복수심에 불타서 흰고래를 찾아나섰으며, 끝끝내 흰고래를 만나서 파멸한다는 일련의 구조가 오디세우스의 여정과 대동소이하다는 겁니다. 다만 다른 부분이 있다면, 오디세우스는 원한과 복수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똑똑함을 과시하고 정당한 이유에 호소했다는 점에서 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보르헤스는 탁월한 해석을 이끌어냅니다. 이런 오디세우스 묘사하면서 단테는 그에게서 자신을 보았다는 해석입니다. 이 얘기인즉, 오디세우스야말로 단테의 거울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디세우스가 "금지되고 불가능한 것을 알고자 하는 고결하면서도 대담한 작업"에 착수했던 것처럼, 단테 역시 "우리는 하느님의 심판을 예견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누가 벌을 받고 누가 구원받을지" 모르는 인간이면서도, ⟪신곡⟫을 통해서 마치 아는 것처럼 썼습니다. 자신의 시를 통해서 하느님의 섭리를 내다보았다는 점에서 단테는 오디세우스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단테가 오디세우스의 죄과를 쓰면서도 이를 몰랐을 리는 없었다는 것이 보르헤스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단테는 ⟪신곡⟫이라는 의무를 떨면서 수행했으며, 이것이야말로 단테의 위대함이라고 보르헤스는 말하는 듯합니다. ⟪신곡⟫을 읽으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단테가 자신의 시대에 꼭 매인 채로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분투했다는 점이며, 그리하여 번번이 실패했으며, 그럼에서 불구하고 ⟪신곡⟫을 끝까지 쓺으로써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곡⟫을 읽을 때 한 시기의 실패가 성공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곡⟫의 대단함이라면 대단함일 것입니다. 위대한 작품은 작가보다 뛰어나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겠죠.
우리 각자는 인생의 어느 한순간에, 즉 우리가 자기 자신과 영원히 만나는 순간에 규정되고 맙니다. 단테는 프란체스카를 비난하고 그녀를 매정하게 다루었다는 평을 듣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3의 인물[하느님]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이 항상 단테의 감정과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곡⟫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단테가 자신의 적들에게 복수를 하고 친구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니체는 단테가 무덤 사이에서 시를 짓는 하이에나라고 헐뜯었습니다. 그러나 시를 짓는 하이에나란 그 자체가 모순입니다. 그 외에도 단테는 남의 고통을 보며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각각의 대죄를 위해 그는 그 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그런 죄인들 속에도 가치가 있거나 본받아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프란체스카와 파올로는 단순히 음란한 자들이 아닙니다.
말하는 보르헤스 126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악몽] 이 에세이에서 보르헤스는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꿈은 속(屬)이고 악몽은 종(種)입니다.” 그러고 나서 '꿈'이라는 주제에 천착했던 무수한 이름을 열거합니다. 구스타브 슈필러, 폴 그루삭, 토머스 브라운, 보에티우스, 존 던, 제임스 프레이저까지. 그 외에도 대단히 많은 작가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보에티우스와 존 던의 사유를 빌려서, 꿈의 동시적인 성격을 해설합니다. 하느님이 영원 속에서 모든 과정을 동시에 지켜보듯이, 연속되고 순차적인 현실의 삶에서와는 달리 우리가 꿈에 다층적이고 동시적인 서사를 부여한다는 겁니다. 한편, 프레이저를 인용하면서 어떤 이들은 (미개인이라고도 불리우는 이들은) 꿈과 현실을 뚜렷이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꿈에서 사자를 죽였다면, 이들은 자신의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 꿈속이라는 또 하나의 현실에서 사자를 죽였다고 믿었습니다. 마치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것을 '깨어있음' 쪽에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아이들처럼요. 그런 반면, 시인들은 주어진 모든 상황을 '꿈' 쪽에서 보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오스트리아 시인 발터 폰데어포겔바이데는 다음처럼 물었다고 합니다. "내가 인생을 꿈꾼 것인가? 아니면 내가 꿈이었던가?" 약간 딴 얘기를 하겠습니다. 앞서 언급한 발터 폰데어포겔바이데의 물음은 장자의 호접지몽과 대단히 유사합니다. 한국을 비롯한 동양권에서 어떤 사람들은 보르헤스의 소설을 읽으면서 동양적인 것을 발견하고 기뻐합니다. 추측컨대, 보르헤스 같은 뛰어난 장자의 호접지몽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는 것이 되레 '동양'의 위대함을 방증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이야말로 어떤 콤플렉스의 소산이 아닐까 합니다. 이 에세이에서 열거되는 무수한 이름을 보면, 보르헤스는 장자의 호접지몽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게 아니라, 장자의 호접지몽'도' 읽었던 것입니다. 엄밀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구스타브 슈필러를 읽었고, 폴 그루삭을 읽었고, 토머스 브라운 경을 읽었고,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를 읽었으며, 오스트리아 시인 발터 폰데어포켈바이데를 읽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름의 연장선상에서 장자의 호접지몽을 읽었을 테고, 아마 신기해 하면서 자신이 고민해오던 바가 동양의 어느 철학자의 글 속에도 있다는 것을 알고서는 기뻐했을 겁니다. 그렇게 자신이 앉은 자리에서 모든 곳의 모든 면이 보이는 단 한 점으로서 '알레프'에 대 구상을 키워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동양의 변두리에 있는 어느 국가에서는, 코스모폴리탄이었던 보르헤스가 일찍이 호접지몽을 알았다는 것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기고, 거기서 유일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하기를 바라겠지만, 현실은 많이 달랐던 셈입니다. 다시 본문 얘기를 해보자면, 보르헤스는 꿈이 최초의 미학적 형식이자 연극임을 주장한 뒤, 곧이어 종(種)으로서 악몽을 말합니다. 여기서 약몽의 이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공포가 제공하는 인상이나 감각 그 자체입니다. 보르헤스의 설명에 따르면, 현실에서 우리는 일반적인 인과관계를 통해서 공포와 억압을 느끼지만, 꿈은 그만의 특별한 논리, 즉 역전된 인과관계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사자를 보면서 두려움을 느끼고, 잠에서 깼을 때 사자가 자기 몸을 누르고 있는 걸 본다면 억압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꿈에서는 이 과정이 반대입니다. 꿈에서는 두려움과 억압감이라는 감정을 먼저 오고 나서, 그 다음에 앞선 감정에 대한 설명을 찾게 되는데, 이때 꿈의 이미지가 일종의 설명으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이불이 무겁거나 호흡이 곤란해진 사람이 꿈 속에서 스핑크스가 자기 몸에 올라타 있는 광경을 보는 식입니다. 이때 중요한 사실은 스핑크스가 억압을 일으킨 원인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억압을 섦여해주기 위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뒤이, 보르헤스는 비슷한 맥락에서 수사나 봄발이 꾸었던 꿈과 자신의 악몽을 이야기한 뒤, 마지막으로 워즈워스가 자기 시대에 느꼈던 막연한 불안감을 어떻게 걸출한 서사와 이미지로 재현해냈는지를 살펴봅니다. 꿈이 미학적 표현으로서 연출에 매달린다면, (꿈의 한 갈래인 종으로서) 악몽은 우리 감각과 인상에서 출발하는 지극한 문학의 형식인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놓여나지 않습니다.
깨어 있는 우리의 삶은 끔찍한 순간으로 가득합니다. 우리 모두는 어느 순간 현실이 우리를 짓누르기도 한다는 것을 압니다. 가령,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버리거나 하는 것들은 슬픔과 절망의 원인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이런 동기들이 악몽과 비슷하지는 않습니다. 악몽에는 특별한 공포가 있고, 그 특별한 공포는 이야기를 통해 표현될 수 있습니다. 돈키호테이기도 한 워즈워스의 베두인족이나 가위와 실 또는 내가 꾸었던 왕의 꿈이나 유명한 포의 악몽에 의해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바로 악몽의 '맛'입니다. 내가 참고한 서적들은 이런 공포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말하는 보르헤스 15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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