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보르헤스 읽기] 『말하는 보르헤스』 1부 같이 읽어요

D-29
2025년에도 이어서 읽는 보르헤스의 여덟 번째 책입니다. 민음사 논픽션 전집판으로는 세 번째 책을 읽습니다. 함께 읽을 분들은 참여해주세요😀 『말하는 보르헤스』는 총 2부로 나뉘어 있으며, 이 모임에서는 1부에 수록된 6편의 글과 2부 전반에 수록된 2편의 글을 읽습니다. 대략 삼일에 산문 하나를 읽습니다. 목차는 이렇습니다. [1부, 말하는 보르헤스] ⏤서문 9 ⏤책 11 ⏤불멸 28 ⏤에마누엘 스베덴보리 47 ⏤탐정 소설 66 ⏤시간 85 [2부, 7일 밤] ⏤첫째 밤, 『신곡』 105 ⏤둘째 밤, 악몽 136 ※ 한 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제 짤막한 감상을 남기겠습니다. 대화하실 때는 단편별로 [이 대화에 답하기] 기능을 활용해서 대화 타래를 엮어가요. ※ 지나간 글꼭지에 대한 언급도 얼마든 가능합니다. 나눠놓은 기간에 구애하지 마시고 [게시판] 기능을 활용해서 언제든 대화 타래에 동참해주세요. ※ 제 아이디를 탭 하고 [만든 모임]을 보시면 이전에 열렸던 모임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대략적인 방향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모임에 대한 의견도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 참여 인원이 없어도 25/5/5에 시작하겠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서문] 이 책에 나오는 글은 강연에 사용된 것들이라서 따듯한 구연체로 돼 있습니다. 보르헤스도 말하듯, 그 주제는 다섯 가지이며, 1부에서는 책, 불멸, 에마누엘 스베덴보리, 탐정 소설, 시간을 살펴봅니다. 강연은 참 재밌는 형식입니다. 청중이 있기에 느슨한 형식성을 갖추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강연자의 즉흥성에 상당 부분 의존합니다. 강연자와 청중이 물리적으로 한 장소 안에서 호흡하면서 역동적으로 하나의 강연을 만드는 겁니다. 또한 강연자의 인간적인 매력이 직접 드러난다는 것도 재밌습니다. 말을 할 때 음성의 높낮이와 빠르기, 특유의 말투와 몸짓을 볼 수도 있죠. 직접 마주하기 때문에 강연의 내용과 흐름이 청중의 눈빛과 반응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변하는 걸 보기도 합니다. 이렇듯 사후에 책의 형태로 정리된 글에서는 다 읽어낼 수 없는 독특한 현장감이 있는 겁니다. 적지 않은 사상가가 책보다 강연을 꽤 즐겼다고 하죠. 우리는 책을 거의 숭배하는 시대에 살고, 마치 그것이 인류의 역사에 내재한 DNA처럼 여깁니다(그래서 우리는 책에 대해서 논할 때 스스로 불충에 가까운 죄책을 느끼며, 그래서 더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해도 될 것 같아요). 그러나 이는 비교적 근래의 일입니다. 보르헤스도 ⟨책⟩에서 말할 테지만, 책은 '말의 대용품'에 불과했고, 자신의 장서량을 자랑하는 것이 미덕은 아니었습니다. 저만 해도 책을 좋아하지만 그렇게까지 숭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매체에서 자신의 장서량을 자랑하는 지식인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고요. 제겐 도서관이 아닌 개인의 서재가 특정 이상으로 커지는 것은 별로 좋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심지어 그걸 공중에 자랑하는 일은 우스꽝스러운 일처럼 느껴집니다. 모든 사람에 개방된 도서관에 비해, 개인의 서재가 도서관처럼 커진다는 것은 소유와 축적의 욕망에 가깝지 않을까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상황과 지식인에 대한 낭만적인 향수가 결합되어서 그의 방대한 장서량이 하나의 장식품으로 소모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어느 곳에 가면 그 사람의 서재가 어떤지 궁금하고, 그것으로 또 그 사람을 유추해보기도 하지만, 책이 빼곡히 꽂힌 서재를 보면 그 공간이 책으로 억압되고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이 강연집에서도 그런 생각을 간혹 엿볼 수 있습니다. '책'에 이끌리면서도 그것에 이따금 염증을 느끼는 태도 말입니다. 어찌 보면 책에 관한 이런 강연이야말로 그 모순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형태인 것 같습니다. 책과 말 사이의 어딘가, 그런 걸 상상해보면서 글을 읽어보시면 좀더 흥미로우리라고 봅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책] 보르헤스가 말하길, 인간이 고안한 대부분의 도구는 인간의 신체를 확장한 것입니다. 반면 책은 인간의 도구 중에서 신체가 아닌 기억과 상상을 확장한 것이기에 좀더 놀라운 것입니다. 그런데도 고대 그리스의 현인들은 책에 그다지 큰 가치를 두지 않았습니다. 책은 그저 '구술된 말의 대용품'이었습니다. 피타고라스가 그렇게 생각했고 소크라테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스도와 부처 역시 글보다는 말로써 가르쳤습니다. 왜일까요? 고대의 현인은 책과 책에 쓰인 글이 고정불변한 것이며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플라톤에 이르러서야 조금씩 바뀌게 되었습니다. 플라톤은 죽은 책을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구술로 된 대화의 형식을 차용해서 책을 써 내려갑니다. 보르헤스는 플라톤의 대화집이 다루는 주제는 여러 가지이지만 진정 플라톤이 책으로써 이루고자 했던 것이 소크라테스의 불멸성이 아닌가고, 추측합니다. 플라톤은 대화집을 기술함으로써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스스로 위안함과 동시에 모든 문장의 끝에 '소크라테스라면 과연 뭐라고 말했을까'라는 암묵적인 질문을 붙임으로써 '소크라테스'란 인간 자체를 책 속에서 살아있게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보르헤스는 책이 숭배되기 시작한 역사가 생각처럼 오래되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서문에서도 말했듯, 오늘날에는 개인의 방대한 장서량을 자랑하는 것이 자기 학식을 드러내는 일과 비슷하지만, 고대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례로 세네카는 누가 책이 100권이나 되는 서재를 갖고 있겠냐고 말하면서, 대관절 100권이나 되는 책을 읽을 시간이 있느냐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보르헤스는 책에 '성스럽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 유래를 추적하면서, 이슬람교도들의 ⟪코란⟫을 언급합니다. 그 이전까지 '성스러운 책'이라는 개념은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은 ⟪코란⟫이 천지 창조 이전에 출발하였으며, 아랍어보다 앞선다고 믿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코란⟫은 작품으로서 책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속성이며, 천국에서 쓰인 코란의 한 부를 일컫는 '어머니의 책'은 훗날 플라톤이 주장했던 '원형'이 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책은 언제나 '책 이상의 것'입니다. 가련한 인간의 산물이라거나 저자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파편적인 지식이 아니라, 인간을 넘어서는 '말씀' 자체인 것입니다. 나아가, 보르헤스는 오늘날 하나의 국가가 "한 권의 책으로, 수많은 책을 썼을 수도 있는 한 사람의 작가로 대표"된다는 개념을 떠올려 보기를 권합니다. 영국은 셰익스피어로, 프랑스는 위고로, 독일은 괴테로, 스페인은 세르반테스로, 아르헨티나는 에르난데스로 대표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셰익스피어는 가장 영국적이지 않은 작가이며, 위고는 전형적인 프랑스인이 아니었고, 괴테는 독일인스럽지 않게 차분하고 관대했으며, 세르반테스에게는 당시 스페인의 엄격한 종교성이 없었으며, 에르난데스에게는 남미의 지역성을 되살리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단 겁니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적습니다. "마치 각국이 자기 나라와는 다른 누구, 그러니까 일종의 개선책 또는 테리아카처럼 결점을 치료하는 일종의 항독제로 대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22쪽) 한 명의 작가는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 봤자 한 개인에 불과하며, 그는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자기 시대라는 속박에서 단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권의 책은 다릅니다. 그는 미약한 인간에서 출발했지만 저 자신이 속한 시대를 관통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개선책으로써 제시될 수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에는 책이 '모두'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봉사하지 않고, '각자'라는 구체적인 진실에 복속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따라서 보르헤스는 인류가 탄생시킨 최고의 인물들에 대한 논평이나 비평으로 우회하기보다는 직접 읽기를 선호한다고 말합니다. 일전에 플라톤이 '죽은 것'으로서의 책에 대화 형식으로 생기를 주었듯이, 보르헤스는 우리가 한 권의 책을 반복해서 읽음으로써 그것을 살아 있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오래된 책을 읽는 것은 그 책이 쓰인 날부터 우리가 읽는 날까지 흘러간 모든 시간을 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직접적으로 대화로서 책 읽기에 동참한다는 것, 나아가 그것을 반복해서 읽는다는 것은 한 권의 책을 영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편, 이 책이 강연장의 말을 엮은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말'과 '글' 사이 그즈음에 놓인 이 책은 마치 엘리베이터 속의 마주 선 거울처럼 물리적으로 제한된 공간 속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오래된 책을 읽는 것은 그 책이 쓰인 날부터 우리가 읽는 날까지 흘러간 모든 시간을 읽는 것과 같습니다. 책을 지속적으로 예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말하는 보르헤스 27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불멸] 이 에세이는 '개인의 불멸'에서 '우리의 불멸'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먼저, 보르헤스는 미겔 데 우나무노를 언급하면서, 그가 개인의 불멸을 말한 반면, 자신은 영원히 보르헤스로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말합니다("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곧이어 보르헤스는 문학과 철학에서 불멸의 사례를 살펴본 뒤, 본격적으로 자신이 지향하는 불멸을 말하려고 플라톤의 ⟪파이톤⟫을 언급합니다. 이 대화집은 소크라테스가 죽기 마지막 날의 오후를 다루는데, 책에서 플라톤은 자신을 예외적으로 3인칭으로 언급합니다. 자신이 저자임에도 책에서 "플라톤이 병에 걸린 것 같아요"라고 말하게 한 것입니다. 보르헤스는 이 대목을 두고, 참 아름다우며 문학적이기까지 하다고 평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문학적 아름다움이란, 하나의 작품 안에서 우리가 개인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을 탈피하여 타인이 될 가능성을 모색했다는 데서 옵니다. 이어서 보르헤스는 "영원히 우리 자신을 계속 유지하면서 우리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하는"(30쪽) 우나무노 식의 불멸은 형편없는 주제라고 말합니다. 그에 비하면 플라톤이 믿었던 “영혼의 윤회(la transmigración de las almas)”야 말로 시적일 뿐 아니라 흥미롭기까지 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칫 이런 윤회를 논하다 보면, 영혼과 육체를 두 개의 본질로 보고 서로 대립시키는 오래된 논의를 맞닥뜨리게 됩니다. 자유로운 정신과 영혼에 비하면 육체는 장애물이며 골칫거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거나 거기에 반대하는 논거를 제시하는 것이죠. 이와 관련한 철학적 논의는 훗날 존 로크와 조지 버클리, 그리고 흄의 주장을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뒤이어 보르헤스는 개인의 불멸성을 옹호했던 사례를 살피는데, 바로 구스타프 페히너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우입니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영원히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개인의 불멸', 그리고 자신이기를 그만둠으로써 비로소 시작되는 '우리의 불멸'을 구분하면서, 후자 쪽에 손을 들어줍니다. 이는 문학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문학을 왜 읽을까요? 여러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문학이 언어를 경유한다는 얘기를 먼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어는 인류 공통의 지(知)를 나르는 수단이자, 오늘날의 우리와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이들이 써 왔던 공통의 우물입니다. 본디 빌려온 것입니다. 거기 접촉할 때 우리는 좋든 싫든 타인에 접촉하게 됩니다. 달리 말하면 언어는 타인을 경험하는 수단이며, 본디 "창작품이자, 불멸의 도구"인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역사 속의 유구한 내력을 지닌 관용어를 쓸 때, 지식의 광장인 고전을 함께 읽으면서, 독자들은 저자의 정신적인 거동을 목격하고 잠시나마 거기에 합류합니다. 미리 말하자면, 보르헤스는 책(들) 속에서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이 되고, 모든 사람이 다시 한 사람으로 수렴하는 윤회를 꿈꿨습니다. 그것을 '우리의 불멸'이라고 부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한 권의 책이 시대를 달리해 가면서 무수한 사람에게 읽힌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한 권의 책을 한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 한 권을 읽는 모든 사람은 그 잠깐의 시간 동안 한 사람이 되고 있다고 해도 될 겁니다(수업시간에 다 같이 낭독해보는 경험을 해 보신 분들이라면 이 말을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계속해서 우나무노가 되고자 하는 우나무노의 의미"가 아닌 "일반적이고 전체적인 방식"의 윤회란 그런 것입니다. 내내 언급하는 이 불멸성에 '자아'는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이 불멸성은 한 권의 책을 읽는 익명의 개개인이 만들어가는 것이며, 그리하여 비대한 자아의 장식물이 된 개인 서재가 아닌, 모든 사람에게 열린 공간인 도서관에서만 아마 가능할 겁니다. 여전히 저에게는 개인에 한정된 서재의 크기를 넓혀가는 사람은 우나무노식의 '개인의 불멸'을 추구하는 사람처럼 여겨집니다. 반면 모든 이에게 공유된 도서관의 크기를 확장시켜 나간다는 것은 우리의 불멸을 추구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개인의 서재를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이라면 늘 생각해봐야 할 사안입니다. 누구에게든 '첫 책'은 어떤 식으로든 빌려온 책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걸 우리는 쉽게 잊고 살아가니까요. 커다란 도서관에 비해서 커다란 서재란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며, 수줍은 것이자 수줍어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보르헤스는 작가로 명성을 얻기 훨씬 이전부터 번역을 했고 편집자도 겸했으며, 훗날 도서관장이 되기까지 했습니다. 번역가나 편집자나 도서관장은 자아를 내세우기 좋아하는 이가 가질 법한 직업군은 아닐 것이며, 그러한 직업을 거쳤다는 사실도 우연은 아닐 겁니다.
우리에게 자아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를 느낀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내가 보르헤스라고 느낄 수 있는 것과 여러분이 A나 B 또는 C라고 느낄 수 있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깡? 어떤 차이도 없습니다. 그 자아는 우리가 공유하는 것이며, 모든 피조물에게 이런저런 형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멸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개인적인 불멸이 아니라 다른 유형의 불멸 말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적을 사랑하고자 할 때마다 불멸의 그리스도가 나타납니다. 그 순간 그는 그리스도입니다. 단테나 셰익스피어의 시구를 되뇔 때마다 우리는 어느 정도 그 시구를 창조했던 순간의 세익스피어나 단테가 됩니다.
말하는 보르헤스 43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에마누엘 스베덴보리]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스톡홀롬에서 출생한 18세기의 신학자이자 과학자입니다. 그는 루터 교회의 주교였던 아버지를 따라 일찍이 주교로서 교육받았으나, 청년기에는 실용주의적인 과학자로 성장했습니다. 신비주의자라는 나중의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그는 실용주의적이고 과학적인 사고관을 견지했는데, 그가 집필한 50권의 저서 중에서 절반이 과학과 수학과 천문학에 할애되었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언급하듯, 훗날 스베덴보리는 인생의 2/3쯤 되는 지점에서 일종의 계시를 경험하고서 다시 영성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28년 동안 신학 연구에 전념했습니다. 생의 이력만 놓고 보면, 스베덴보리의 삶은 종교와 과학의 완벽한 결합, 혹은 '과학적인 영성으로의 회귀'라고 할 만합니다. 가장 지성적인 사고방식으로써 영성을 탐구했던 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서 다뤘던 주제인 ⟨불멸⟩과 이어지는 지점도 있습니다. 그가 제시한 영적 모델은 단테의 ⟪신곡⟫에서 보는 것과 다릅니다. 자유의지가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인해 끊기지 않는 불멸성을 제시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은 한갓 구원의 공간은 아니며, 지옥 역시 징벌의 공간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이 죽으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채로 계속해서 살아가며, '다른 세상'에서 천사에 걸맞는 사람은 천국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악마에 걸맞는 사람은 지옥 속에서 나름으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다고 말했습니다. 지옥은 천국으로 가지 못한 사람들이 영원히 고통받는 공간이 아니라, 지옥에 걸맞는 사람이 저 나름의 모함과 비열과 증오 속에서 행복을 누리는 공간인 것입니다. 심지어 구원의 공간으로 일컬어지는 천국조차 흔히 말하는 천국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음을 스베덴보리는 시사합니다. 일례로 한 남자가 천국에 가기로 마음먹고 극단적인 고행을 실천한 끝에 천국에 당도하게 됩니다. 그는 천국에 이르렀음에도 여전히 지상에서처럼 쾌락과 기쁨을 부정한 채, 자신이 창조한 사막 속에서 고행을 이어나가며, 그에게 천국이란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가능케 하는 사막화된 풍경에 다름 아닙니다. 그것이 다름 아닌 그의 행복이었고 천국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는 천국에 윤리적인 성격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진정한 의미의 '구원'이란 올바르게 사는 것으로는 부족하며, 지적으로 거듭나야만 비로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이후 블레이크가 등장하여 더 나아간 것, 즉 예술을 통한 구원을 주장합니다). 한편, 스베덴보리는 설교하지 않고 다만 소박하고 무미건조한 문체로 책을 썼던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는 여타 신비주의자들과 스베덴보리를 구분짓는 것이기도 한데, 스베덴보리는 교훈적인 상징이나 은유로써 글을 써 나가기보다는 "미지의 땅을 다니면서 차분하고 세세하게 묘사한 여행자의 작품"을 내놓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후에 나오는 제발트와 발저의 여행이 연상되는 면이 있는데요, 무엇보다 단테가 ⟪신곡⟫에서 보여준 다층적인 은유의 체계, 그 여정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보르헤스가 언급한 칼라일의 무서운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다름아닌 세계사는 한 편의 글이며, 한 명의 인간은 한 개의 문자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리하여 스베덴보리는 스스로 기적이되 세상에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지 않는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의 운명" 속에서 소박하게, 이름 없이 자족했습니다. 이는 진실을 견지하되 아무것도 바꾸려 하지 않기에 스스로 구원되는 문학적인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이는 훗날의 블레이크를 데려오는 계기가 됩니다.
나는 국립 도서관에 그의 책 ⟪천국과 그것의 경이로움, 그리고 지옥에 관해⟫가 한 권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몇몇 견신론 전문 서점에서도 스베덴보리의 책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신비주의자들보다 훨씬 복잡한 신비주의자였습니다. 다른 신비주의자들은 우리에게 환희를 경험했다고 말하면서, 심지어는 문학적인 방식으로 그 환희를 전하려고 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세계를 처음 탐험한 사람으로서,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탐험가입니다.
말하는 보르헤스 63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탐정 소설] 에드거 앨런 포를 향한 보르헤스의 존경과 애정이 담긴 글입니다. 보르헤스는 에드거 앨런 포가 오늘날 '탐정 소설 독자'라는 독특한 유형의 독자를 창조했다는 데서 그 비범함을 엿볼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포는 낭만주의 시대의 작가로서, '문학은 영혼의 산물'이라는 당대의 통념 속에서도 문학이 지성적인 장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에드거 앨런 포가 소설 속에서 만들어낸 지성적 존재로 '오귀스트 뒤팽'을 보십시오. 그는 훗날 등장한 셜록 홈즈와 브라운 신부로 이어지는, 일종의 '전통'이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뒤팽의 추리가 시시하며,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이 익히 예상된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에드거 앨런 포나 그가 창조한 뒤팽이 시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가 과거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지 못함을, 평가하지 못함을 방증할 따름입니다. 현재의 뒤팽은 포가 살았던 낭만주의 시대의 독자들이 열광했던 뒤팽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사람들에게 셜록 홈즈와 브라운 신부를 경유하지 않고서 뒤팽을 읽을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포는 문학이 '영혼의 산물'이라고 여겨지던 시대에 자신의 소설과 시가 지성적인 것이 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보르헤스는 포가 ⟨갈가마귀⟩를 쓰면서 자신의 지성에 대해서 얼마만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자세히 기술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현재 관점에서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들이 당시에는 그렇게 당연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았습니다. 에드거 앨런 포가 내놓은 소설과 시는 이전과는 다른 독법을 요구했습니다. 포의 탐정 소설 이후에라야 비로소 사람들은 사건의 디테일을 지성적으로 따지고 의심하면서, 그 논리적 전개 방식을 읽어내려는 전통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던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포는 탐정 소설이 사실주의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포는 탐정 소설이 지성적인 장르가 되기를 바랐고, 동시에 상상적인 것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보르헤스는 이를 "지적인 환상 문학이 되기를" 바랐다고 표현합니다. 훗날 포의 영향 하에서 '자유시'를 고안해냈던 보들레르는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탐정 소설은 어떤 의미로든 자기 시대에 하나의 '질서'를, 다시 말해 전에 없던 독자와 독법을 요구했습니다. 당대의 독자에 호소한 작품을 쓴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있게 될' 독자에게 호소하는 작품을 썼던 것입니다.
무슨 말로 탐정 소설을 찬양할 수 있을까요? 한 가지는 아주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바로 우리 문학이 혼돈의 성향을 띠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유시를 쓰는 경향이 있는데, 이유는 그것이 정형시보다 쉬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변변찮으나마 고전적 가치를 유지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탐정 소설입니다. (···) 나는 탐정 소설을 옹호하기 위해 아무것도 옹호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는 다소 경멸적으로 읽히지만, 그것은 무질서의 시대에 질서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탐정 소설에게 감사해야 하는 증거이며 이 장르의 공훈입니다.
말하는 보르헤스 84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시간’은 간명한 주제이지만 오래된 주제이며, 그런만큼 심오합니다.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보르헤스가 철학과 수학에 얼마나 조예가 깊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 뿐만 아니라 제논의 역설에 대한 베르그송의 철학적 반박, 러틀런트 러셀의 수학적 증명 과정까지 건드리고 있습니다. 먼저, 사소한 오류부터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러셀의 증명을 언급하는 내용에서 ‘급수’(serie)라고 돼 있는 단어는 ‘수열’로 바꿔 읽어야 합니다. 먼저 말하면, 이 에세이에서 보르헤스는 ‘시간’이야말로 유일하게 본질적인 문제임을 설득합니다. 보르헤스는 흔히들 시간과 공간을 묶어서 ‘시공간’처럼 표현하는 것이 못마땅하다고 말합니다. 마치 니체가 괴테와 실러를 동등하게 논하는 것을 마뜩찮아 했던 것처럼요. 그 이유인즉, 우리 사유(상상) 속에서 ‘공간’은 얼마든 배제할 수 있지만, ‘시간’은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르헤스는 이를 위해 사고 실험 하나를 제안합니다. 바로, 오감을 하나씩 소거해보는 것입니다. 이때 보르헤스는 시각, 미각, 촉각, 후각을 하나씩 제외한 끝에 오직 청각만 남는 세계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 세계란 공간이 배제된 곳으로서 오직 개인의 의식과 음악만 있습니다. 쇼펜하우어가 통찰했듯 그곳에서는 ‘음악 자체가 하나의 완전한 우주’를 이룹니다. 눈치 챘겠지만 이 완전한 우주에서는 결코 배제할 수 없는 한 가지가 무엇인지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바로 ‘시간’입니다. 공간은 우리 상상 속에서 얼마든 배제 가능하지만, 그런 동안에도 우리의 의식은 계속되며, 시간은 순차적으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변함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간이 의식 자체의 조건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은 밤 한가운데로 흘러간다”는 테니슨의 시구처럼, 시간은 잠든 순간에도, 침묵을 지킬 때도 계속됩니다. 시간은 단순한 측정 단위가 아닌,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자 모든 경험을 근저에서부터 가능케 하는 최초의 조건임이 이렇게 드러납니다. 한편, ‘시간’에 대한 보르헤스의 사유를 집약하는 단 하나의 은유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입니다. 우리가 같은 강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는 이유는, 강물이 흐르고 있는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우리 자신이 이미 하나의 강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시간에 관한 한 우리는 이중의 유동성에 매여 있으며, 그 때문에 우리는 시간의 문제를 논하기 어려워 합니다. 따라서 보르헤스는 시간을 넘어서는 오래된 논쟁을 끌어옵니다. 바로 ‘영원’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플로티노스, 그리고 플로티노스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영원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일전에, ⟨영원성의 역사⟩라는 다소 긴 에세이에서 한번 다룬 적이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플라톤에게 “시간이란 영원성의 움직이는 형상[idea]”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영원성에 비견한 시간에 대한 사유를 얻게 됩니다. 비유컨대 ‘영원성’이 한 권의 책을 대할 때 모든 페이지를 동시에 펼쳐놓고 읽는다면, ‘시간’은 순차적으로 모든 페이지를 읽습니다. 영원성이 현재-과거-미래의 동시성이라면,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은 연속적인 형태”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유의할 점은 시간이 영원성에서 비롯되긴 하였지만, 영원이 시간에 앞선다고 말하는 것은 오류라는 사실입니다. '앞선다'(anterior)’는 표현 자체가 이미 시간적인 것이기 때문이죠.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했듯이, “시간이 운동의 척도”라고 말하는 것도 오류이긴 매한가집니다. 운동은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인데, 그런 운동으로써 다시 시간을 정의한다는 것은 순환논리인 탓입니다. 훗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간 속에서(in tempore)”가 아니라 “시간과 더불어(cum tempore)”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윌리엄 블레이크는 우리 인간에게 “시간은 영원의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왜일까요? 바로, 인간은 과거-현재-미래의 동시성으로서 영원성을 감당하지 못하는 탓입니다. 그리하여 시간의 순차성이란, 영원성이 인간에게 베푸는 ‘자비로운 분할’입니다. 물론 이 선물로서의 시간은 순순히 주어지지 않습니다. 고뇌가 따릅니다. 플라톤이 말했듯이 시간은 영원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자신의 원형인 영원성으로 회귀하려는 충동을 가집니다. 이렇듯 우리는 언제까지고 영원성이라는 주제로 돌아가지만 오직 ‘시간’ 속에서만 그러합니다. 시간은 영원성이라는 완전함을 불완전하게 모방하는 연속된 흐름으로서, 시간이 순차적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씁니다. "시간이 영원의 형상이라면, 미래는 미래로 가는 영혼의 움직임일 것입니다. 미래는 동시에 영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즉, 우리의 삶은 계속된 고통과 몸부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성 바울의 구절에 이르게 됩니다. "나는 날마다 죽음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기억으로 이뤄져 있고, 그 기억은 망각으로 이뤄져 있는 것처럼, 인간된 삶 역시 ‘보존’과 ‘소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 사건 속에서 우리는 매일 죽고, 매일 태어납니다.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에 매달리는 것도 바로 이 매일의 죽음과 탄생 탓입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우리 각자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누구일까요?”라는 물음의 근저에는 무지가 있으며, 그 무지가 인간된 조건입니다. 시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해결되지 않음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적인 특징을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절망적이면서도 숭고한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신비한 존재입니다. 만일 기억이 없다면 우리들 각자는 무엇이 될까요? 그 기억은 상당 부분 소음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래도 본질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의 내가 되기 위해 팔레르모와 아드로게, 제네바와 스페인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장소에 있더라도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니며, 나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끝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항상 변화하는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변화'라는 말만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우리가 말하는 변화란 무언가 다른 것으로 대체된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식물이 자란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작은 식물이 보다 큰 식물로 대체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식물이 다른 것이 된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변성 안에 영속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말하는 보르헤스 10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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