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덧 밤이 오고
쉼표가 달빛을 내뿜자
물음 표 두 개가 가만히 일어섰다
네모 안의 우리 두 의문 부호가
내게서 그대까지 얼마만큼?
손을 가만히 내밀어 보았다
『또 다른 별에서』 p.45 <우리 두 사람>,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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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 둘!
- 간을 빼 주면 안 되니? 솔직히 말해서 고백이란 하고나면 시시해지는 거 아니니?
하나 반!
- 하나 반? 모두들 고백했다고? 넌 복도 많고, 애인도 많고
하나 반의 반!
- 반의 반? 때리지만 말고 네가 한번 해 봐. 그럼 널 따라하지, 내가. 정말이야. 그대로 따라 외친다니까. 너도 알다시피 난 창의력이 부족해.
하나!
- 앗, 끝이야? 그럼 좋아. ......사랑해. ”
『또 다른 별에서』 pp.40-41 <고백>,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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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 잘 닦인 소리들은 잘 부서졌다.
반짝이는 소리 하나 들고
가상의 눈 물 흘리면
보이지 않는 말들이
입술 밖으로 녹아 흘렀다.
보이지 않는 말들을 간수하기에
두 손은 늘 모자라고.
너는 얼음나라 밖에.
나는 얼음나라 안에. ”
『또 다른 별에서』 p.49 <무언극>,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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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 버스만 멈추었다가 떠나고 다시 와 멈추고 또 떠나오
이런 엽서가 몇 십 년째나 되는구려
아 또 모두들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오
우리들은 바다와 또 검은 악수를 나누게 될 거요
내년엔 꼭 버스를 타리다
복 많이 받기를 ”
밤이 오면 납작하게
슈샨 궁전을 접어 두고
푸른 뱀 한 마리 안고 든다네
두 눈에 파란 불을 켜고 든다네
『또 다른 별에서』 p.65 [에스더 왕비],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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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에스더 왕비, 에 대한 지식이 아무 것도 없어서 시를 읽다 말고 정지하게 [에스더 왕비] 그대로 검색창에 올려 나오는 글을 몇 편 읽었습니다. 가끔 이렇게 시를 얕고 넓은 지식을 채우는 일의 시작점처럼 대하는 것 같아요. 시의 본질에서 멀어진 듯 하지만, 그래도 머리에 무언가 남아 뜻깊은 활동인 것 같다고 위안 삼습니다.
https://m.blog.naver.com/hoisoon00/221848799188
하금
나는 그대를 은밀하게 따라가면서 <팥을 더 줄까> <팥을 더 줄까>, 오월에는 라일락 꽃잎이 세 가마니씩 팥을 게운다. 팥의 인플레.
『또 다른 별에서』 p.71 [오월에, 라일락 꽃잎이],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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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우리의 말이 팥으로만 발음된다. 그대 입술과 내 입술이 팥팥팥 붙었다가 팥, 팥, 팥 떨어진다. 우리의 호흡이 잠깐씩 정지된다. 내가 우리의 연애를 삶아서 팥고물을 만든다.
『또 다른 별에서』 p.71 [오월에, 라일락 꽃잎이],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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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 시 속에 사닥다리라는 말을 넣고 싶다.
사닥다리를 든 내가 계단에서 서성거린다.
창문이 열리고 흰 스카프를 쓴 죽은 여자의 얼굴이 걸려 있다.
아, 아직도 접시 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
『또 다른 별에서』 p.75 [담배를 피우는 시체],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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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너는 이제 너무 길어
물 흐르는 세상이
엎어져 보인다고 웃었다.
비오는 날 파밭에서
우리는 자꾸 자라
구름꽃이나 피울까.
뱀 두 마리 파밭에
웃고 서 있었다
『또 다른 별에서』 p.77 [세로],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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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 하늘 가득 벗어 놓은 빛나는 것들,
우리 가슴 속과 눈 속을 드나들면서
물 웅덩이에 등등
미류나무 줄기줄기 기어내리는
저 빛나는 것들을
오늘 밤 우리는 잡는다.
깊고 푸른 물 속으로 끝없이 떨어지는
저 빛나는 별들을
오늘 밤 우리는 하릴없이
하염없이 잡는다. ”
『또 다른 별에서』 p.79 [시],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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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네가 대본을 버리며
총총히 떠난 날
햇빛에 입 벌린 여자들을 빼앗기며
바다는 땀을 조금 흘렸다.
『또 다른 별에서』 p.81 [어느날 신안 앞바다에],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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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나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한 방 건너고 두 방 건너서
누가 아직도 돌아갈 수 있을까?
『또 다른 별에서』 p.86 [서울 신기루],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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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일생의 내 꿈들을 창피하게 창피하게 흩으며
옷을 입은 그들은 지겹다, 지겹다 말했다.
내 머리맡에는 백합 두 송이
썩고 있었다.
『또 다른 별에서』 p.89 [해부],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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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 마당에 입 대고 말해요. 네 잎 크로바가 사방 연속 무늬로 피어나고 말에는 시간 꽃이 피어요. 파도에 입 대고 말해요. 배들이 항구를 떠나고 갈매기떼 높이 그대 말이 뛰어오를 거예요. ”
『또 다른 별에서』 p.91 [말, 2. 말의 긴장],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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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 우리, 불을 켜고 돛단배라도 띠울까? 어서 입을 벌려 봐. 파도 소리, 돛단배 떠나는 소리. 초록, 초록 물 한 방울, 말 한 마디. 초, 록, 뱀, 한 마리. 세모꼴 부서지는 소리. 「 아」 「아 」 「아 」 입이라도 벌려 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