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왕비, 에 대한 지식이 아무 것도 없어서 시를 읽다 말고 정지하게 [에스더 왕비] 그대로 검색창에 올려 나오는 글을 몇 편 읽었습니다. 가끔 이렇게 시를 얕고 넓은 지식을 채우는 일의 시작점처럼 대하는 것 같아요. 시의 본질에서 멀어진 듯 하지만, 그래도 머리에 무언가 남아 뜻깊은 활동인 것 같다고 위안 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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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집 전작 읽기 시즌 1-2025년 5월. 4권 읽기
D-29

하금

하금
나는 그대를 은밀하게 따라가면서 <팥을 더 줄까> <팥을 더 줄까>, 오월에는 라일락 꽃잎이 세 가마니씩 팥을 게운다. 팥의 인플레.
『또 다른 별에서』 p.71 [오월에, 라일락 꽃잎이],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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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우리의 말이 팥으로만 발음된다. 그대 입술과 내 입술이 팥팥팥 붙었다가 팥, 팥, 팥 떨어진다. 우리의 호흡이 잠깐씩 정지된다. 내가 우리의 연애를 삶아서 팥고물을 만든다.
『또 다른 별에서』 p.71 [오월에, 라일락 꽃잎이],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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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 시 속에 사닥다리라는 말을 넣고 싶다.
사닥다리를 든 내가 계단에서 서성거린다.
창문이 열리고 흰 스카프를 쓴 죽은 여자의 얼굴이 걸려 있다.
아, 아직도 접시 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
『또 다른 별에서』 p.75 [담배를 피우는 시체],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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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너는 이제 너무 길어
물 흐르는 세상이
엎어져 보인다고 웃었다.
비오는 날 파밭에서
우리는 자꾸 자라
구름꽃이나 피울까.
뱀 두 마리 파밭에
웃고 서 있었다
『또 다른 별에서』 p.77 [세로],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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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 하늘 가득 벗어 놓은 빛나는 것들,
우리 가슴 속과 눈 속을 드나들면서
물 웅덩이에 등등
미류나무 줄기줄기 기어내리는
저 빛나는 것들을
오늘 밤 우리는 잡는다.
깊고 푸른 물 속으로 끝없이 떨어지는
저 빛나는 별들을
오늘 밤 우리는 하릴없이
하염없이 잡는다. ”
『또 다른 별에서』 p.79 [시],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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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네가 대본을 버리며
총총히 떠난 날
햇빛에 입 벌린 여자들을 빼앗기며
바다는 땀을 조금 흘렸다.
『또 다른 별에서』 p.81 [어느날 신안 앞바다에],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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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나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한 방 건너고 두 방 건너서
누가 아직도 돌아갈 수 있을까?
『또 다른 별에서』 p.86 [서울 신기루],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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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일생의 내 꿈들을 창피하게 창피하게 흩으며
옷을 입은 그들은 지겹다, 지겹다 말했다.
내 머리맡에는 백합 두 송이
썩고 있었다.
『또 다른 별에서』 p.89 [해부],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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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 마당에 입 대고 말해요. 네 잎 크로바가 사방 연속 무늬로 피어나고 말에는 시간 꽃이 피어요. 파도에 입 대고 말해요. 배들이 항구를 떠나고 갈매기떼 높이 그대 말이 뛰어오를 거예요. ”
『또 다른 별에서』 p.91 [말, 2. 말의 긴장],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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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 우리, 불을 켜고 돛단배라도 띠울까? 어서 입을 벌려 봐. 파도 소리, 돛단배 떠나는 소리. 초록, 초록 물 한 방울, 말 한 마디. 초, 록, 뱀, 한 마리. 세모꼴 부서지는 소리. 「 아」 「아 」 「아 」 입이라도 벌려 봐. ”
『또 다른 별에서』 p.92 [말, 3. <아>자 처음 피어나는 소리],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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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모두 귀 기울이고 들어 봐요.
하늘 나라 조상들이 땅 나라 사람들을 향해 일제히 물 시위를 당겨요. 비 맞은 오리가 쓰러지고, 쓰러져선 꿈의 나라로 거슬러 올라가요.
『또 다른 별에서』 p.93 [말, 4. 소나기 말씀],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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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시를 해석하기 어려울 때는 문자 적힌 그대로의 이미지를 머리에 그려보고, 그 이미지에서 어떤 소리나 냄새가 빛이 나는지 생각해보는 편입니다. 김혜순 시인의 시는 그렇게 했을 때 가장 받아들이기 편한 시 같아요. 시집을 읽을 때마다 좋아하는 영화 한 편을 만난 느낌이 들어요. 새롭고 또 반가워서 좋습니다.

송승환
@하금 하금 님. 열심히 시의 문장들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송승환
지난 주 온라인 모임에서는『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를 이야기 나눴습니다. 한 주씩 늦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 22일에는 『어느 별의 지옥』을 읽고 온라인 모임을 합니다. 언제든 참여 가능합니다. 읽고 계시는 시집의 멋진 문장들 올려주세요:-)

송승환
이번 주 온라인 모임에서는『어느 별의 지옥』을 이야기 나눴습니다. 한 주씩 늦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5월 29일에는 『우리들의 음화』를 읽고 온라인 모임을 합니다. 언제든 참여 가능합니다. 읽고 계시는 시집의 멋진 문장들 올려주세요:-)
숨쉬는초록
뒤늦게 참여합니다. 다시 뵈어 반갑습니다.
숨쉬는초록
“ (...)
그대는 어느 결에 슬며시 다가와
창문을 여시고
내 가슴 속 물을 길어 가셨습니다.
(...)
시린 햇빛이
웃음을 참지 못하는
당신과 나를
흔들기 시작한다.
사철나무 잎사귀들을 온 몸에 가득 달고
당신과 내가 흔들린다. ”
『또 다른 별에서』 <사랑에 관하여>,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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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는초록
“ 조상들은, 깊이 잠든 밤
잠시 돌아와 노래를 불러 주었다.
우리 조상들의 서러운 노래 소리는
한 가닥 희디흰 실처럼 풀려서
노래하면 풀어지던 내 가슴
한 오리와 즐거이 섞였다.
한밤내 봉선화 피는 소리
멀리서 들리더니
봉선화 핀 울 밑에도 비추더라던
그 달빛 한 자락도
우리들의 얽힘에 가담하였다.
가닥가닥 실 들은 얽혀서
소리를 발하고
별들 다가서는 소리
공중에 떠돌던 꽃망울들 터지는 소리
우리들의 사랑에 가담하였다.
노래는 늘 풀어지고
풀어져선 다시 짜였다.
조상들은 이렇게
외로이 깨어나
생시처럼 너 불러 보는 깊은 밤
잠시 돌아와
피륙처럼 짜인 우리를
단단히 당겨 보였다. ”
『또 다른 별에서』 <봉선화>,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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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는초록
<사랑에 관하여>와 <봉선화>를 읽으며
문태준의 <흔들리다>, 한강의 <마크 로스코와 나 2>,《흰》 중 <입김>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나와 타자, 나와 세계의 관계와 경계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는 나와 타자가, 나와 세계가 분리되어 있다고 착각하곤 하지만, 한 순간도 타자와 세계와 분리되어 있지 않지요. 우리는 공기와 물을 마시고 누군가 기른 농산물로 만든 음식을 먹고 땅을 딛고 타자와 더불어 세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세계 속에서 타자는 끊임없이 나를 흔들지요. 나와 타자, 나와 세계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김혜순, 한강, 문태준의 문장에서 타자는 나를 "흔들고" 내 마음의 "창문을 열고" 나에게 "얽히"고 "스며"듭니다. "노래는 늘 풀어지고 풀어져선 다시 짜"입니다.
우리는 먼저 살았던 "조상"에 빚지고 있지요. "조상"의 숨결은 문화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음식, 책, 예술 작품, 음악, 건축, 공간, 생활 방식 등에 조상의 흔적이 배어 있습니다. 문화는 우리에게 삶의 토대가 되어주면서 또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 의해 "늘 풀어지고 풀어져선 다시 짜"이며 변해갑니다.
<봉선화>에서는 "봉선화", "달빛", "별들", "꽃망울들"이 등장합니다. 일상을 바삐 살아가는 우리가 좀처럼 관심을 두지 않는 존재들이지요.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존재하고 세계의 한 부분을 구성합니다. 그것들이 이 세계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면, 그것들과 우리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것들과 우리가 이 세계 안에 함께 존재한다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지요. 달빛과 별들과 꽃이 이미 있는 세계에서 우리는 함께 살아가니까요. 달빛과 별들과 꽃이 없는 세계는 다른 세계일 텐데, 우리는 그런 세계에서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시인은 우리가 평소에 눈길을 주지 않는 그 존재들, 타자들을 포착합니다. "봉선화 피는 소리", "달빛 한 자락", "별들 다가서는 소리", "꽃망울들 터지는 소리"라니... 공감각적인 표현이라고 단순히 말할 수도 있겠지만, 시인의 표현을 따라 꽃망울들 터지는 장면을 그려봅니다. 꽃망울들이 터질 때 아주 느리고 미세한 움직임과 소리가 일어나겠지요. 인간의 눈과 귀로는 그 움직임과 소리를 감지할 수 없겠지만, 어쩌면 아주 예민한 존재에게는, 꽃망울에 매달려 있던 벌레에게는 그 움직임이 느껴지고 소리가 들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시인은 그렇게 예민한 감각으로 타자들을 느끼려 합니다.
<사랑에 관하여>, <봉선화>가 1980~1981년에 쓰였으니 나에게는 '조상'의 노래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시가 쓰인 지 45년이 지나 나에게 와서 나를 흔들고 내 마음의 창문을 열고 나에게 얽히고 스며듭니다. 이 시를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나는 다를 겁니다. 이 시의 한 가닥이 나에게 스며들고 얽혀 나의 피륙은 다시 짜이겠지요.
이 시를 읽기 시작한 건 @하금 @ICE9 님이 올려주신 문장이 저를 흔들었기 때문이에요. 함께 읽고 나누며 우리는 서로를 흔들고 또한 흔들리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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