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시집 읽기 시즌 2

D-29
얘야 천년 묵은 여우는 백 사람을 잡아먹고 여자가 되고, 여자 시인인 나는 백 명의 아버지를 잡아먹고 그만 아버지가 되었구나 (...) 백 명의 아버지를 잡아먹고 그 허구의 이빨로 갈아놓은 문장의 칼을 높이 치켜들고 (...)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어쩌면 좋아, 이 무거운 아버지를> p.49, 김혜순 지음
이 시를 읽으며 그리스 신화 속 우라노스와 아들 크로노스의 대립, 크로노스와 아들 제우스의 대립이 떠올랐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대립한 예는 가부장제 역사와 신화 속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지요. “여자 시인”은 자신을 억압하는 수많은 아버지를 “문장의 칼”로 죽입니다. 하지만 ‘아버지 살해’라는 가부장제의 폭압적인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 역시 가부장제의 아버지가 되어버리는 모순에 빠집니다.
제 지나온 길 다 먹어치우며 천천히 초록길 오르고 있다 배추벌레 몸 빛깔은 먹은 길 그대로 초록이다 (...) 배추벌레 한 마리 제 길 다 먹어치우고 아무도 없는 저 하늘 배추흰나비의 길 혼자 놓아 가려고 저렇듯 안간힘 다해 초록길 먹어치우고 있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자동 인화기>, p.53, 김혜순 지음
감은 눈 속으로, 얼음 위를 번지며 녹는 물처럼 그대가 들어옵니다 하얀 블라인드 쳐진 방안에 들어온 그대는 내가 만든 것입니까 아니면 멀리 있는 그대가 내게로 보낸 것입니까? 눈 쌓인 바닥이 갑자기 솜처럼 푸근해집니다 잠들면 죽는다 내 안의 누군가 나를 흔들어대지만 얼음 눈꺼풀 너무 뜨겁습니다 감은 몸 속 방안이 더 뜨거워지려 합니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블라인드 쳐진 방 3> p.42, 김혜순 지음
車가 달려간다. 유리 속으로 숲이 들어왔다 나간다, 어느 것도 오래 머물지 않는다. 유리 속에선 아무것도 오래 머물지 않는다, 머물렀다 생각하면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車가 달려간다. 車는 앞으로 가지만 나무는 뒤로 간다. 車는 앞으로 가지만 江은 뒤로 간다. 車는 앞으로 가지만 너는 뒤로 간다. (...) 어느 바람도 옷 속까지 들어오지 않는다. 바람은 車 밖에서만 분다. (...) 내 울음 소리도 車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 車가 달려간다. 아직도 나밖에 실은 적이 없는 車가 달려간다. (...) 일평생을 달려도 하늘 한 방울 스며들지 않던, 그 車가 아직도 달려간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서울 3느 9916> p.35, 김혜순 지음
그가 감자를 심어오고 있다 무릎을 툭툭 쪼개어 그가 아픈 감자를 심어오고 있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숨은 감자>p.59, 김혜순 지음
아직 안 보이는 그가 비명을 내지를 때마다 새가 튀어올랐다 새들이 하늘과 땅의 경계를 자꾸 찢고 지나갔다 옥양목 찢어지는 소리가 강물 밑까지 울렸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저녁 달>p.63, 김혜순 지음
@숨쉬는초록 열심히 시를 읽으셨군요! 1980년대의 김혜순 시는 당대 정치적 상황에 대한 언어의 미학적 대응을 고민한 측면이 있다면 1990년대의 김혜순 시는 보다 개인의 실존과 고통, 상상력의 언어로 변모한 측면이 있는 듯 싶습니다. 현실의 경험에서 촉발된 언어이되 그 경험의 고통을 직설적이거나 즉각적인 재현 언어로 고발하거나 표출하지 않고 암시의 언어와 상상력으로 증폭시키는 언어의 진술이 돋보입니다.
도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달에 한 권이라도 읽어보겠습니다.
다음 시즌에도 김혜순 시집 전작 읽기는 계속됩니다. 참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몇십 개의 계단을 올라야 잠든 너를 깨울 수 있니 저 혼자 불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온몸으로 두근거리는 내가 잠든 너의 몸 속을 한밤중 소리도 없이 오르고 있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서울의 밤> p.69, 김혜순 지음
네가 내 손을 잡았던가 순간, 내 가슴속에서 두 날개를 세차게 퍼덕거리다 온몸 가득 필멸의 내장 위로 푸른 하늘을 밀어올리는 저 새를 보라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저 새> p.58, 김혜순 지음
내 마음엔 웬 실핏줄이 이리도 많은지요 이 실핏줄을 다 지나야 그곳에 당도하게 되겠지요 (...) 날마다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늘어나요 길 속에 길이 있어요  (...) 서울이 서울을 낳아요 마음이 제 몸을 한껏 부풀려 또 마음을 낳아요 (...) 언제 저 길을 다 뒤져 당신을 찾아내지요 당신이 보고 싶어요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서울 길> p. 82, 김혜순 지음
아침 일고여덟시경 나는 생각한다 서울에서 지금 일천이백만 개의 숟가락이 밥을 푸고 있겠구나 (...) 하늘이 빛의 발을 서울의 동서남북 환하게 내다 걸면 태양이 일천이백만 쌍 우리들 눈 속으로 떠오른다 그러면 (...) 바람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그대 안으로 들어가고, 다시 그대 숨이 내 숨으로 들어오면 머리 위에서 신나는 풀들이 파랗게 또는 새카맣게 일어선다 오오 그러다 밤이 오면 죽음이 오백 년 육백 년 전 할아버지의 배꼽을 지나 내 배꼽으로 들어오고 일천이백만 개의 달이 우리의 가슴속을 넘나들며 마음 갈피갈피 두루두루 적셔준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p. 125,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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