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err is human!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3. <냉전>
D-29
청사죽백
청사죽백
회신을 보고서, 번역자와 해제 작성 담당 감수자 모두가 금융 비전문가들이라고 깨달았습니다.

borumis
제가 구독하는 잡지 중 하나가 Economist인데 1944년 브레튼우즈 협정 당시 전후 금융 체계를 결정하는 역사적 순간을 다루던 기사를 2014년 7월4일 다시 회고한 게 있는데요. 이 기사와 2014년 6월 30일 기사로 What Was Decided at the Bretton Woods Summit 기사가 읽을 만했어요. 타임스나 뉴스위크처럼 이코노미스트는 한국판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있다면 이코노미스트가 영국잡지여서 그런지 꽤 쉽고 재미있게 풀어 쓴 기사들이 많아서 읽어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저는 경제를 선택과목으로 선택하지 않았고 경제개념 정말 없는 경알못인데.. 어릴적 이 잡지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71년까지 유지되던 브레튼 우즈 체제는 닉슨이 금태환 정지 선언 이후 끝났지만 여전히 브레튼 우즈 2.0, 브레튼 우즈 3.0이라는 용어가 나올 정도로 그 여파가 남아있고 지금도 변동환율제도 불안정성 등 아직도 세계 자본주의의 해답을 찾아 방황하는 중이어서 외환 금융 경제 등을 공부할 때도 역사가 참 중요한 것 같네요.

롱기누스
와...2014년 기사까지 기억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만큼 이 기사가 좋다는 의미였겠지요? 찾아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borumis
아뇨. ^^;;정확한 날짜는 기억 못해서 대충 검색해서 다시 찾아봤는데요. 당시에 이런 관련 기사가 많이 우르르 올라왔어요. 어릴적엔 아빠가 가져오는 이코노미스트를 그냥 타임즈나 뉴스위크보다 쬐끔 더 재미없는데 글은 잘 쓰는 잡지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첫째 아이를 낳고나서 세계 금융위기가 한창일 때 나도 뭐 주식이나 펀드에 아무리 손놓고 있어도 적어도 거시경제에는 관심 좀 가져봐야겠구나..해서 끄적끄적 조금씩만 생각날 때 읽어보게 되더라구요.
청사죽백
+1. Economist→The Economist(현존하는 한국어 잡지『이코노미스트』와는 무관하므로, 구별하려면 관사 표기는 필수임).
+2.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BD%94%EB%85%B8%EB%AF%B8%EC%8A%A4%ED%8A%B8_(%EB%8C%80%ED%95%9C%EB%AF%BC%EA%B5%AD%EC%9D%98_%EC%9E%A1%EC%A7%80) 참조.

borumis
앗 감사합니다. 안그래도 이게 궁금했는데... 한국어 잡지 이코노미스트는 또 다른가봐요..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나 타임스처럼 한국어판이 나오는 건 아닌 건가보네요.. 아쉬비..
청사죽백
타임스:
1)→Time?
2) Newsweek는 과거에 한국어판을 발행하다가 중지하였지만, Time은 한국어판아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기억합니다.

borumis
앗 죄송 Time맞아요. ㅋㅋ
아 타임은 한국어판이 없었나요? 제가 그럼 잘못 들었네요. 예전에 제가 읽는 잡지들 (Time, Newsweek, National Geographic)보고 친구가 자기는 한국어판으로만 읽어봤다고 해서 다 한국어판으로 있는 줄 알았어요. 실제로 한국어로 읽어본 적은 없지만.. 이제 뉴스위크도 중단되었군요. 하긴 저도 요즘은 다 종이가 아닌 디지털로 구독하니깐요.. 유명잡지도 살아남기 힘든 것 같아요..ㅜㅜ

롱기누스
말씀하신 the economist 6월 30일 기사 'What Was Decided at the Bretton Woods Summit'를 찾아서 읽어봤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영국의 케인스와 미국의 화이트가 대립했지만, 미국의 압도적인 경제력 덕분에 미국의 주장이 반영되면서, 모든 통화를 미국의 달러에 연결하고 미국의 달러는 금본위제로 연결되는(나중에 1971년 닉슨이 포기하게 되지만) 과정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기사에는 브레튼우즈 체제로 20여년 동안 급속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지고, 금융위기가 감소했으며, 국제무역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고 평가하면서 한편으로는 한계까지 언급했는데요, 바로 일본과 독일의 경제성장에 대응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일본의 성장은 플라자회의를 통해 억제했는데, 독일은 어떻게 했는지 궁금합니다.
p.s. 관심있는 분들도 있을 것 같아 공유합니다.



롱기누스
아울러 마지막에 IMF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언급되었는데요, " IMF는 대출에 붙이는 조건들 때문에 비판받아 왔는데, 이는 긴축정책과 채권자들의 권리에 너무 집중되고 빈민들의 복지에는 너무 적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1997년 IMF의 금융구제를 받았던 우리나라가 치뤄야 했던 희생과 댓가가 생각났습니다.

향팔
학교 다닐 때, IMF의 의사결정 구조에서는 각국이 출자한 돈의 비율대로 의결권을 가져간다는 것을 배우고 순진한(?) 머리통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돈많은 나라 맘대로 굴리는 조직이구나, 하고…
청사죽백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 제공용 정책들 패키지에서의 전환은 2000년대에 본격화하는데, 그 주요 양대 원인들 가운데에서 하나는 남한 대상 구제금융 제공용 정책들 패키지가 과도하게 가혹하면서도 부적절하였다는 반성이고 다른 하나는 2000년대 후반에 서방 고소득국가들 가운데에서 일부가 경제위기들을 경험하면서 더는 중소득국가들과 저소득국가들에게만 지나치게 가혹한 경제적 구조조정을 강요하기가 불가능해졌던 정치적 제약의 본격화입니다.

부엌의토토
제 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미국은 세계 패권을 확보했고 소련과 그에 고무된 각국 공산당이 대규모 도전 세력으로 유일하게 남았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냉전의 국제체계를 창조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세계대전을 다가올 미래를 위한 서곡만으로 축소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73쪽)
양국은 공동의 적이 일으킨 세계적 전쟁에서 우연히 연합국이 되었다.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공격했고, 그해 12월 일본이 미국을 공격했다. 대부분의 성공한 연합과 달리, 소련과 미국, 영국이 이룬 대연합( Grand Alliance ) '은 공동의 목표를 위해 오랫동안 협력한 바탕에서 형성되지 않았다. 이 연합은 각국이 당면한 위협을 물리치기 위해 도움을 찾아야 하는 순간에 현실적인 필요로 생겨난 일종의 강제 결혼( shotgun marriage )이었다. (74쪽)
하지만 외국 지도자들은 미국이 참전하지 않는 한 영국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기회는 소련이 최대한 오랫동안 독일군에 저항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영국과 미국이 소련에 지원하고 원조해야 했다. (75쪽)
미국이 전쟁에 뛰어들었는데도 스탈린은 자본주의 연합국이 어느 시점에 나치 독일과 독자적으로 평화를 이루어 공산주의 소련을 저버리려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스탈린의 붉은군대가 인적 · 물적으로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서서히 독일군 사단을 밀어내는 가운데, 소련 지도자는 연합국에 독일에 맞서 유럽 북서부에 제 2의 전선을 만들라고 끊임없이 요구했다. 소련 군인 900만 명이 전사 한 뒤에도 1944년 6월까지 그런 제 2의 전선이 형성되지 않은 사실은 스탈린에게 영국과 미국의 배신과 적대감을 보여 주는 증거였다. (80쪽)
연합국은 런던에 있는 폴란드 망명 정부가 아니라 붉은군대의 점령 이후 바르샤바에 이미 만들어진 공산당 중심의 폴란드 정부를 세우는 데 합의했다. 소련은 혁명 전에 중국 북동부(만주)에 가진 권리 일부를 돌려받는 식으로 아시아에서 기울인 노력을 보상받을 터였다. 이 문제에 대해 중국의 견해를 물어본 열강은 없었다.(84쪽)
제 1차 세계대전이 유럽의 세계 지배에 종말을 알리는 사건이었다면, 제 2차 세계대전은 특히 유럽인에게 이 지배의 폐지를 필연으로 만들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유럽 젊은이는 자국의 식민지에서 벌어진 사태보다 자국 내의 복지에 훨씬 몰두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수많은 젊은이는 그들 자신의 소득과 지위가 이제 더는 해외 식민 지배를 유지하는 데 좌우된 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특히 아시아에서 반식민주의 저항이 고조되었다. (89~90쪽)
미국의 관점에서 제 2차 세계대전은 개인의 자유와 헌법 질서, 생활방식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91쪽)
제 2차 세계대전은 세계 경제의 전면적인 전환으로 이어졌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미국이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부상한 것은 일찍이 20세기 초부터였고, 전간기에 그 속도가 빨라졌다. 장기적 변화가 급속히 전환되게 한 계기는 바로 제 2차 세계대전이었다. 미국의 경제 규모는 전쟁 중에 2배 가까이 커졌다. 이와 대조적으로, 세계의 다른 지역은 거의 전부 황폐해졌다.
전쟁 중에 루스벨트 행정부는 미국을 위해 더 잘 작동할 전후 세계를 이룩하려면, 미국의 독특한 지위를 활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스벨트의 핵심 구상은 독일과 일본에 맞선 전시 연합을 영속화하는 한편, 모든 나라가 속할 수 있는 세계 기구를 창설하는 것이었다. (104쪽)
새로 만들어진 세계 기구의 주요 임무 가운데 하나는 전 지구적 경제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다. 경제가 가장 강한 미국은 자유무역과 해외시장 진출을 원했다. (105쪽)
하지만 유럽과 아시아에서 정치적 분단선이 그어진 것처럼, 이 협정도 전쟁으로 이미 생겨난 결과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장기적으로 보면 미국은 브레턴우즈에서 기회나 안정성 어느 것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이 협정은 어쨌든 미국이 세계 경제 대국으로 등장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체계를 마련해 주었다.(106쪽)
한편 미국은 국제 문제에서 미국의 우세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소련에 인내심을 보이지 않았다. 트루먼 대통령은 루스벨트 같은 정치적 기민함과 개인적 매력이 없었고, 소련에 대해 오래전부터 강경 노선을 주장한 트루먼의 핵심 보좌진은 소련을 통합하기보다 오히려 봉쇄하는 쪽으로 결정하게 했다. 앞으로 살펴볼 것처럼, 전후의 충돌을 냉전으로 뒤바꾼 것은 바로 이 봉쇄였다.(107~108쪽)
1945년에 이르러 스탈린은 유럽의 심장부와 중국과 이란에서도 동유럽에서 보인 행동과 비슷한 행보를 취했다. 이 지역에서 소련이 벌인 행동 때문에 미국의 정책이 급변했고, 멀찍이서 지켜보는 다른 나라도 공포를 느꼈다. 이런 행동이 그 자체로 냉전을 재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후 소련을 겨냥한 봉쇄 가능성을 한층 높인 것은 확실하다.(108쪽)
청사죽백
'이란에서도' 대상 설명:
1) https://en.wikipedia.org/wiki/Anglo-Soviet_invasion_of_Iran 참조.
2) https://en.wikipedia.org/wiki/Iran_crisis_of_1946 참조.
청사죽백
'북동부':
1)→동북부.
2) 한자 사용권에서 방위들 언급 의 기본적 순서는 동서남북이고 중화권에서 해당 지역을 동북3성이라고 지칭한다는 사실까지 고려한다면 해당 번역 표현이 부적절하다고 확인가능함.

부엌의토토
고맙습니다^^ 문장 수집에 급급해서 실질적인 데 놓치네요. 오늘도 많이 배우니 즐겁습니다~

오도니안
전 책을 읽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참여해두고 눈팅만 하겠습니다. ^^
청사죽백
Opt-in and opt-out matter.

롱기누스
오늘은 3장 '유럽의 불균형'을 읽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마지막을 지나면서 국가사회주의와 파시즘이 완전히 붕괴되었고, 히틀러를 제거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소련은 동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공산당과 붉은 군대의 무력에 힘입어 공산주의 세력이 정권을 불법(?)으로 획득하는데 노력을 기울였음을 보았습니다. 아울러 미국은 서유럽을 중심으로 마셜플랜을 가동하였으나 다만 초기부터 미국이 서유럽과 일부 동유럽 - 폴란드, 불가리아 등 - 에 더욱 적극적인 경제원조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마셜플랜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는 것을 보면서 소련은 그것이 자본주의의 덫임을 일찌감치 감지하고 자국을 비롯한 여러 위성국가들을 단속하는 모습도 꽤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최근에 일어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초기에 독일을 비롯한 여러 유럽국가들이 단호하고 신속한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것이 러시아가 설치했던 '노르트스트림' 이라는 덫 때문이라면 이와 같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읽은 '노르트스트림의 덫'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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