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왜 하필 18개일까 생각을 해서 혹시 불교에서 말하는 그게 18지옥이었던가?? 생각을 하긴 했었는데 역시 그렇군요 발설지옥이라...참 적절하게 배치를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계절의 소설_여름] 『연매장』 함께 읽기
D-29

하료
화제로 지정된 대화

고양이라니
류진위안은 책의 상반부에서 창린과 더불이 비중이 큰 화자 중 하나로. 다행히 부상으로 토지개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는 면죄부를 쥐고, 자신의 경험을 추억합니다. 그 추억의 조각들은 중국의 역사와도, 다이윈의 가족과도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산시 국숫집에서 만난 라오치나, 완저우로 가서 만난 옛 동료 리둥수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엔가 모르게 삼국지나 수호지 같은 중국의 옛 소설 속 인물 같은 느낌, 이제는 옛사람이 되어 뒤안길로 사라질 것을 당사자도 독자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노래하는 추억은 호메로스의 노래 일리아스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어요. 희생자들은 이름도, 삶의 역사도, 죽어가는 모습도 노래돼지만, 죽인 자는 역사의 뒤에 몸을 숨긴 채 희미하게 존재합니다. 모든 비극은 역사의 짓일까요? 잘못을 바로 잡으려면 선을 넘을 수 밖에 없었다던 류진위안의 말 그대로 당시는 상황은 상상이상으로 훨씬 더 복잡했을 것(184p)입이다. 남겨진 저택의 흔적, 유적에서 우리는 부자가 얼마나 부유했는지는 알지만, 가난한 사람이 얼마나 가난했는가는 남지 않는다는 말이 와닿네요(185p). 지금 시선으로 보면 당연히 이것도 틀렸고 저것도 틀렸다고 느낄 느끼겠지만 그때 사회는 음험하고 혼란스러웠다고 ‘그때’를 함께 지나온 마노인도 말합니다.(184p)
화제로 지정된 대화

고양이라니
류진위안의 말처럼 잘못을 바로 잡으려면 선을 넘어야 하는 시점이었을까요? 당시는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그랬겠지요. 그래서 책 속의 잔인한 행위들은 개인의 행위가 되지 않고 뭉뚱그려지나 봅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죽어간 자들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다이윈의 18개의 지옥을 따로 떼서 읽어보겠습니다. 떠내려온 강물을 거슬러가는 역순이 아니라 다이윈이 겪은 시간 그대로요.
그리고 희생자로서 다이윈의 기록과 애도, 그리고 훗날 과거사를 더듬어가는 칭린과 룽중륭의 태도에 대해서도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싶네요.
“내가 흥미를 느끼는건 이런 가문이 어떻게 흥성했고 쇠락했느냐야. 그 과정을 이해하면 중국의 건축사를 이해하믄 데 도움이 될 거야. 거꾸로 이런 건축사와 그들의 흥망성쇠 과정을 명확히 알면 중국 역사의 전환점과 진정한 발전 궤적을 파악할 수 있 을 거고.”(144p)
“많은 사람들이 정권 교체와 정국 안정화는 필연적 과정이었다고 생각하지. 그래도 우리는 꼭 그렇게 잔혹해야 했는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어.”(149p)

금정연
개인과 사회의 문제는 늘 어려운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정권 교체와 정국 안정화는 필연적 과정이었다고 생각하지. 그래도 우리는 꼭 그렇게 잔혹해야 했는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어"라는 룽중륭의 말이 저도 내내 가슴에 남더라고요. 모든 부자들이 잔혹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들의 부는 분명 다양한 층위의 착취 위에서만 가능했다는 것, 반대로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은 착취당하는 이들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지닌 원한과 욕망이 모두 긍정될 수는 없다는 것. 하지만 모두를 위한 완벽한 사회는 불가능하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회를, 어떤 정의를 추구해야 하는지 묻게 만드는 것 같아요.

강보원
이 책에서 팡팡이 던지는 문제의식은 아주 보편적이면서도 정말 쉽게 답을 내리기 어려운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책 속의 잔인한 행위들은 개인의 행위가 되지 않고 뭉뚱그려지나 봅니다"라는 문장을 읽고 생각해보니 그건 또한 한 개인으로서의 주체와 역사적 행위자로서의 주체의 분열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연매장>에서 망각은 단지 회피가 아니라 삶의 본질과 관련된 아주 강력한 대안으로 제시되는데요. 다이윈에게도 그렇고, 평생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살았던 노병에게도 그렇고, 우리는 단순히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잊고 그 다음으로 나아가야 하죠. 하지만 반대로 역사적 행위자의 층위에서 망각이란 타자에 대한 폭력이면서 그 자신에 대한 배신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기만을 넘어선 자기-소멸이기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연매장>에서는 개인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칭린에게는 망각을, 그리고 역사적 주체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룽중륭에게는 기억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 같아요. 문제는 우리가 단순히 한 개인으로서만 살아갈 수도 없고, 또 언제나 역사적 주체로서 살아갈 수도 없다는 것이죠.

고양이라니
다이윈의 시어머니나 다이윈 역시 연매장하면 환생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섭고, 싫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서율님께서 알려주신대로 중국, 한국, 일본 불교에서는 대개 18지옥이 있고, 그 18개의 지옥을 모두 통과하면 죄업이 소멸되었다는 것을 뜻하며 윤회하여 다음 생을 산다고 합니다. 다이윈은 이 지옥을 모두 통과했죠. 그것이 연매장된 자들을 위한 애도였으며, 함께 가지 못했던 본인과, 놓쳐버린 아들에 대한 애도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동시에 토지개혁이라는 시기를 지나온 죽은 자와 산 자, 모두에 대한 애도요. 알츠하이머에 걸린 룽즁융의 아버지가 다오윈을 만나 "그녀의 영혼은 현세에 없다"(101p)고 하며 룽중융은 두 분의 이런 상태가 병이 아니라 두 분의 소망일 수도 있다(101p)고 합니다. 칭린이 성공해서 이사온 다음 날 다이윈의 영혼은 현세를 떠나 죽은 자들을 위해 지옥을 건넙니다.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시간이 끝나고 죽은 자들을 위한 시간인거죠. 저는 사실 칭린이 너무 완벽한, 모두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여서 호감과 동시에 작은 의심을 품고 있었는데, 부모님을 따른 그의 궤적 역시 우리가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한 방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아직까지 공산당 군에서 간부로 끝까지 남아 퇴역한 류진위안이나 중국 개방시기에 부동산으로 재벌이 된 류사오찬이나, 개발 과정에서 거래가 모두 만족스럽게 끝났다는 칭린의 말을 떠올리면 어쩜 이리 좋은 모습으로만 묘사되었나라는 의문이 남지만, 이거야말로 작가의 영역이고, 찌들고 때가 묻은 저의 탓이겠죠.
(저는 다이윈이 망각을 선택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금정연
주말 잘 보내셨나요? 저는 도서전에 다녀왔는데요, 간만에 책과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 다녀오니 힘이 생기기도 하고, 동시에 기가 빨리는(?) 기분이 들기도 했네요.
7장에서는 다시 딩쯔타오(다이윈)의 지옥으로 돌아갑니다. 5장에 나왔던 두 번째 지옥에서 다이윈은 어째서 샤오차를 구해주지 않았느냐는 푸퉁의 절규에 "내가 묻지 않으면 달리 뭘 할 수 있는데? 너랑 결혼할 수 있을 것 같니?"라고 쏘아붙이는 바람에 결국 물에 빠지게 되는 모습이 나오는데요. 네 번째 지옥에서 실은 다이윈이 샤오차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집니다. 시간 역순으로 흘러가기에 가능한 구성이죠.
한편 다이윈의 시가인 루씨 집안의 면면이 보여지기도 하는데 그중 작은 우연의 일치가 이곳 '이 계절의 소설'에서 함께 소설을 읽는 우리를(적어도 저를...) 헛웃음 짓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오랫동안 병을 앓았던 시숙 보원은 기력이 달려 깊게 파지 못하고 그냥 누워버렸다. 그러면서 관은 없어도 대나무가 곁에 있으니 우아한 죽음이라고 말했다." (198쪽)
물론 우리와 함께 읽는 강보원 평론가는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지는 않고 무척 건강하지만, 어쩐지 나도 모르게 겹쳐 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네요...
거대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일어난 사회적 사건이지만, 정작 거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개개인의 사적인 관계라는 부분도 흥미로운 지점인 것 같아요. 앞서 언급했던 다이윈이 물에 빠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그녀의 말투와 태도였고, 마을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았던 루씨 집안이 피해갈 수 없었던 건 '왕씨 집안'과 관련된 일이었다는 것 같은 부분들이요.
8장은 다시 류진위안의 시점인데요. 칭린에게 묘한 친밀감과 기시감을 느끼던 그가 조금씩 진실에 접근하는 장입니다. 과연 류진위안이 칭린이 우의사의 아들임을 알아볼지, 알아본 후에는 과연 소설이 어떻게 진행이 될지 긴장하며 읽었는데 그 끝은... (아직 덜 읽으신 분들을 위해 언급을 자제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라오치의 이런 말이 기억에 남더라고요.
"그때가 어떤 사회였습니까? 또 우리가 살았던 사회는 어떻거요? 예쩐에 아버지, 어머니가 걱정하실 때는 편지 오가는 데도 한 달이 더 걸렸는데, 지금은 일 초면 되지요. 휴대폰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마을 어디에도 전화가 없었지만, 지금은 젊은이들 모두 휴대폰이 있지 않습니까? 과거에는 상상도 못했지요. 형님 아들은 차가 있다고 하셨지요. 우리 사위도 몇 년 뒤에 산다더군요. 저는 생각할수록 겁이 납니다. 옛날에는 지주도 이렇게 살지 못했잖아요. 아닙니까?" (236쪽)
'옛날에는 지주도 이렇게 살지 못했잖아요'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것이 긍정적인 마음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부분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읽고 계신가요? 이번주도 다양한 감상, 의문, 밑줄 기다릴게요!

호디에
저는 6월이 한창 바쁜 때라 시간 낼 수 있을 때 현장 구매 티켓으로 다녀오려고 했는데 올해는 현장분 없이 매진이어서 조금 당황했습니다. SNS 피드에 도서전 사진 올라오는 걸 보면 살짝 샘이 났다가 나같은 사람은 저 인파에 지레 죽을 뻔했다며 정신승리로 위안을 삼았습니다. ㅎㅎ
말씀대로 시간이 역순대로 흘러가 양파 껍질 벗겨지듯 진실이 하나씩 드러나는데요, 그때마다 "아이고, 이런!"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면서 제 마음도 쿵. 한 계단씩 올라갈 때마다 제 마음은 한 계단씩 내려가는 기분이었습니다.

금정연
맞아요, 현장 판매가 없었던 게 좀 그렇더라고요. 아쉬워하는 분들도 많고요. 저는 마지막 1층에 갔을 때 심장이 덜컹, 하는 느낌이었어요...

고양이라니
이 표현이 딱입니다. 마음이 쿵하고 내려앉더라구요. 비극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데도 이렇게나 가슴이 내려 앉다니, 역사의 한 줄을 벗겨 그 사이에 생략되고 지워진 개인의 이야기를 보는거 같아서 더 슬프더라구요. 읽을 때마다 눈물이...ㅜㅜ

호디에
이런 밤을 겪었는데 제가 살아 있는 것 같나요?
『연매장』 p201, 팡팡 지음, 문현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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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로 지정된 대화

강보원
[앞선 댓글에 이어서] 개인적 주체와 역사적 주체(편의상 나눈 용어입니다...) 중 '진실'은 어느 편에 있을까요? 우선은 후자쪽에 있다고 생각되어요. 내가 느낀 것보다 내가 실제로 타자와의 관계라는 구조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나'를 더 본질적으로 정의하니까요. 하지만 육체를 지니고 이런저런 일상을 감각하는 내가 없다면 역사적 주체로서의 나 또한 존재할 수 없고요. 말하자면 개인으로서 주체는 자신의 본질을 망각하는 한에서만 살아갈 수 있고, 그 주체의 본질을 담보하고 있는 역사적 행위자로서의 주체는 반대로 자신을 망각하는 개인적 주체를 전제조건으로 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요. <연매장>에서 다루어지는 건 나를 이루는 이 두 종류의 주체성의 화해 불가능성인 것 같기도 해요.
이 책에서 다이윈의 결정적인 과오가 있었다면 다른 어떤 것이라기보다 이 둘의 화해불가능성을 말 그대로 간과했다는 데에 있지 않을까요? 일상의 경제 속에서 진뎬은 아주 친숙하고 서스럼없는 하인이죠. 그렇지만 집안의 역사 속에서 그 둘의 관계는 깊은 원한으로 엮여 있습니다. 이 두 층위를 나누고 있는 경계를 함부로 흩뜨리고 뒤섞어버리는 순간 다이윈에게도, 진뎬에게도 이전과 같은 '삶'은 불가능해지고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강보원
그렇다면 개인으로 살면서 자신의 위치성을 잘 고려하면 해결되는 문제일까요? 언뜻 그것이 상식적인 답처럼 보이지만 <연매장>에서는 비교적 그런 노력을 기울인 이들도 똑같이 끔찍한 결과를 맞이하는 모습들이 그려지는 것 같아요. 그에 더해, 얼마 전에 읽은 테리 이글턴의 <문화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나온 이런 구절들이 더 생각을 복잡해지게 하네요.
"하지만 프로이트의 관점에 따르면, 그런 자기 성찰만으로 구원받는 건 아니다. 단지 자신의 심리를 영리하게 대함으로써 신경증을 치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말이지 그건 해결책이라기보다는 문제의 일부일 공산이 크다. 심리의 형성자인 주체의 핵심에는 맹점이 있으며, 그저 단순한 자기 성찰로 주체가 의식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일은 신고 있는 신발 끈으로 자신을 들어올리려 한다거나, 뭔가를 보는 자기 모습 자체를 보려고 하는 것과 같다."
TerryJ
저는 지난달에 이달의소설로 <연매장>을 이미 완독하였습니다. 이계절의소설로 뽑혔다는 걸 알고 재독하고자 했지만 개인적 사정으로 바빠서 완독은 못하고 일부 발췌독만 다시 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지난달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 중국풍의 문체와 중국 현대사에 대한 배경지식 부족으로 읽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문체에 적응하고, 관련 지식을 인터넷으로 간략하게 조사한 후 읽기 시작하니 훨씬 빠르게 이해하고 소설 속에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중반부 이후에는 비밀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점점 더 흥미롭게 느꼈습니다.
중국의 현대사를 이토록 극적으로 재미있으면서도 의미있게 그린 소설이라서 저도 비교적 높은 점수를 부여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금정연
극적으로 재미있으면서도 의미 있게 그린 소설이라는 말씀에 동감합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조금씩 비밀이 밝혀지는 구성이 특히 매력적인 소설인 듯 합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금정연
소설을 읽다 보면 ‘비적’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무장을 하고 떼를 지어 다니면서 사람들을 해치는 도둑”이라고 하는데요, 굳이 사전을 찾지 않아도 문맥으로 대충 ‘도적’과 비슷한 뜻이라는 걸 알 수 있죠. 근데 도적이 왜 이렇게 많지? 의아하며 읽으셨던 분들도 계실 거 같아요.
하지만 사실 중국 현대사에서 ‘비적’은 단순한 도둑이 아니라고 해요.
비적은 공산당 정권이 등장한 뒤, 지주 계급, 국민당 잔당, 무장 반대 세력 등을 통칭하던 용어였는데요. 실제로 무장 산적 무리가 있었던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정치적 반대파를 지칭하는 공식적인 표현으로 쓰인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해요. (반대로 국민당 측에서는 공산당을 가리켜 비적이라고 불렀다네요. 그게 바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 공비’죠.)
따라서 ‘비적을 소탕했다’는 무용담은 단순히 범죄자를 쫓아내서 치안을 유지했다, 같은 의미가 아니라 정치적 사상적으로 반대편에 있는 이들을 몰아냈다는 뜻이 되겠죠. 따라서 비적을 얼마나 소탕했는지가 그 사람이 얼마나 혁명에 진심인지, 당에 열성분자인지 보여주는 일종의 지표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료
아..비적이 단순히 중국 군벌 같은 그런 느낌이 아니라 각 진영에서 상대편을 싸잡아 부르는 그런 것이기도 했던 거군요..알고 나니 확실히 더 먹먹하게 만드는 게 있네요

최가은
“ 그랬다. 딩쯔타오는 자신이 이제 다섯번째 층에 올랐다는 걸 알았다. 자신이 살아온 길을 거슬러올라가는 중이라는 것도 이미 알아차렸다. 그녀는 갈수록 점점 더 많은 것을 보았다. 사건들의 세세한 부분, 그때그때 상황의 분위기, 한 사람 한 사람의 표정 그리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전부 분명하게 느껴졌다.
언젠가 시아버지 루쯔차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은 풍성한 혼백을 가지고 태어났다가 살면서 차츰 잃어간다. 그러나 다 잃어버리면 혼이 사라지지. 옆에서는 그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라진 거다. 그 사람은 다시 몸을 돌려 조금씩 자기가 뿌려놓은 혼백을 줍기 시작하지. 도로 다 회수하면 득도할 수 있다. 그러면 좋은 집에서 다시 태어날 수도 있어. 다 회수하지 못하면, 잘은 모르지만 내세 에 돼지나 개로 태어날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 혼을 조금씩 모두 회수해야 해, 다음 생에는 좋은 삶을 살 거야, 더는 생고생하기 싫어, 하고 생각했다. ”
『연매장』 197, 팡팡 지음, 문현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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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로 지정된 대화
희귀동물
“거대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일어난 사회적 사건이지만, 정작 거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개개인의 사적인 관계라는 부분도 흥미로운 지점인 것 같아요.”
@금정연
@강보원
두 분의 담론이 제가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부분들과 맛닿아 있어서 그 맥락에서 느낀점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오늘 책을 다 읽었지만 아직 못 읽으신분들이 계실 것 같아 최대한 스포없이 적어볼게요 ㅎㅎ
글을 다 읽고 나면 왜 저 사진을 첨부했는지도 조금 이해가 가실 거예요. ^^;
“작가는 중국의 역사와 이데올로기, 건국 이념들이 모두 그저 개인들의 삶이 엮어낸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좋아하는 인용구가 하나 있는데요,
"I’m not interested in how people move; I’m interested in what makes them move."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는가에는 관심이 없다.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가에 관심이 있다.)
독특한 움직임과 드라마로 명성을 얻었던 독일 안무가 피나 바우쉬가 한 말입니다. 사람들이 그만의 독특한 창작 방식에 질문을 던졌을 때 한 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보통의 안무가들은 특정 동작이나 움직임을 지시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만드는데, 피나 바우쉬는 독특한 질문과 워크샵을 통해서 무용수들이 내면의 충동에 반응하여 스스로 움직임을 찾아 표현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었거든요.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팡팡’역시 이 작품에서 거대하고 충격적인 역사 속에서 개인들이 특정한 삶을 선택하게 된 동기를 강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시대적 사명과 이데올로기적 명분을 차려입고는 결국 자신들의 욕망(탐욕, 명예, 생존 등)을 좇아 행동하고 있다는 생각을 거듭하게 되더라고요.
작가는 인간의 역사와 이데올로기가 결국 개인들의 삶과 그 생명의 역동성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짜인 거대한 카펫(다른 층위의 큰 그림을 가진)과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지금의 틀 안에서 보게 되는 큰 그림은 결국 누군가의 의도에 따른 편집을 거친 결과물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첨부한 사진에서 각각의 개별 사진이 한 개인의 삶이라면, 큰 그림을 우리가 흔히 단순화 한 역사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건 사람이 기억을 저장할 때의 과정과도 같은데요.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기억들도 결국은 우리 뇌의 처리 과정을 거쳐서 감정을 덧입힌 가공물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작가가 ‘기억’과 ‘망각’이라는 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은 더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작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볼지, 어디까지 볼지 질문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엉뚱하게도 류진위안이 북한에 가서 활약한 것처럼 묘사되는 부분에서 한국전쟁의 형세를 떠올렸습니다. 류진위안 같은 중국의 ‘전쟁 영웅’들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분단국가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혹은 그 반대의 상황이 펼쳐졌을 수도 있었을까? 하는 이런 생각이요.
작가의 질문은 작년 12월에 대한민국에 일어난 정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토지개혁에 대한 증언과 그 시대상에 대해 입장이 엇갈리는 것처럼 우리는 12월의 사태에 대해 엇갈린 입장의 목소리들을 듣고 있으니까요. 그저 스스로에 대한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내가 옳다’는 확신에 갇혀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보지 못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생명보다 명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알맹
저도 류진위안이 북한에 갔다는 이야기를 보며 이 때 중국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것인데 어째서 한국전쟁까지 참견(!)을 했단 말인가 하는 분노와 함께 류진위안은 이 책에서 가장 운 좋고 행복한 삶을 누린 인물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다친 곳도 없이 살아남고 그 공을 인정받아 자식들이 편하게 살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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