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소설_여름] 『연매장』 함께 읽기

D-29
화제로 지정된 대화
두 번째 토론 주제인 "어머니의 과거를 끝까지 파헤치기보다, 기억에서 흘려보내기로 한 칭린의 결정을 여러분은 어떻게 보셨나요? 기억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용기일까요, 회피일까요?"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역시 여러분이 정리해주신대로 기억-망각의 대립 구조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네요. 제가 인용한 문장에서 딩쯔타오에게 기억이란 의식/무의식이나 언어/비언어의 층위를 넘어서 각인된 무엇을 해석하는 시도이거나, 혹은 과거와 무관한 현재에 계속해서 그 회로를 바꾸어 침입하는 무엇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177쪽에서 칭린에게 떠오른 어머니의 "이상한 모습"은 사실 그녀의 숨겨진 '진짜' 계급을 드러내기 위한 징표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생각보다 더 배운 사람이고, 더 높은 지위의 귀한 사람이고, 그 때문에 어떤 일을 겪었을 수 있다는 추론을 위한 것이죠. 그런데 좀더 생각해보면 이는 그 자체로 어떤 사람의 기억이 그 한 사람 개인의 것만은 아니라는 주장이 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한 명의 개인이 스스로의 기억에 대해 망각하기를 선택한다고 해서 해소되거나 사라질 수 없는 것. 그 '나'가 그것을 철저히 외면한다고 해도 말이죠.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 각인된 제스처, 습관, 말투나 앎의 흔적 등등은 사회적 기호이기도 하기에, 그 사람을 바라보는 누군가가 그 망각자의 기억을 '추론'할 수 있게 하며, 기억 자체가 일종의 픽션이라면 상대가 추론한 그 가능성이 그 사람의 기억이라고 하지 않을 수도 없을 테니까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생각을 거듭하다보니, 저는 마지막에 룽중융과 칭린으로 나뉜 기억(기록)-망각(삶)이라는 구도가 그 자체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조금 손쉬운 해법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점점 드는 것 같아요. 기억하기, 망각하기의 복잡한 속성을 생각한다면요. 최근에 저는 뒤라스의 <롤 베 스타인의 환희>라는 책을 읽었는데요. 이 소설의 주인공인 '롤라'는 10년 전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미친 여자가 되었다고 말해지는 여인입니다. 롤라는 제정신이 아니고, 사람들은 그 제정신 아님에 납득 가능한 어떤 이유를 설정하고 싶어 하는데요. 그 때문에 그녀는 무엇보다 10년 전의 기억으로부터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고, 그 기억이 유령처럼 그녀의 현재를 휘어잡고 있는 거라고들 말하죠. 그리고 정말 그렇게 보이기도 해요. 롤라는 어떤 때는 그것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굴다가도, 어떤 때는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다가서거나, 회피하는 '그것'이 대체 뭘까요?)뒤라스는 자신이 만든 이 인물에 대해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그녀는 기억과 타협하지 못하고, 기억에 짓눌립니다. 그 기억은 매일, 그녀가 살아가는 매일 새로워지고, 신선함을, 일종의 원초적 신선함을 다시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롤 베 스타인은 매일 모든 것을 처음으로 기억하는 인물이지요. 그 모든 것은 매일 반복되고, 그녀는 마치 롤 베 스타인의 날들 사이에 가늠할 길 없는 망각의 구렁텅이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매일 처음인 양 그것을 떠올립니다. 그녀는 기억에 습관이 들지 않아요. 게다가 망각에도 습관이 들지 않지요." <<뒤라스의 그곳들>>, 124p. 기억에 습관이 들지 않고, 망각에도 습관이 들지 않는 사람. 뒤라스는 이 인물을 글쓰기(기록하기), 우리로 치면 룽중융의 위치와 겹쳐놓긴 하지만, 사실 삶을 그저 살아간다는 행위 그 자체에도 위와 같은 작동이 번갈아 발생하고 있는 것 같아요. 시간이란 게 있을 수 있다면 그런 식으로 있는 거라는 생각도 들고요.
다들 주말 잘 보내고 계신가요? 오늘은 또 다른 질문을 드려볼게요. 1. 진실을 아는 것이 꼭 중요할까요? 칭린은 어머니의 과거를 끝까지 밝히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여러분이라면 같은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진실을 밝히는 것—그게 정말 중요할까요, 아니면 어떤 진실은 묻어두는 게 더 나은 걸까요? 2. 이 소설은 냉소적인가요, 희망적인가요? 마지막 장면에서 칭린은 “진실이 어떻게 언어와 글로 표현될 수 있겠니?”라고 말하며 냉소를 드러냅니다. 하지만 어떤 독자들은 딩쯔타오가 고통스러운 지옥의 18 계단을 올라 마침내 빛 속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에서 긍정적인 느낌을 받았다고 하시기도 했는데요. 여러분은 이 이야기가 결국 희망적인 이야기라고 느끼셨나요, 아니면 슬프고 씁쓸한 이야기로 읽히셨나요?
모든 망각을 배신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망각은 살아남기 위해서일 때가 많다.
연매장 p.17, 팡팡 지음, 문현선 옮김
사실 속는 일이 워낙 많다보니, 하나 더 속는다고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
연매장 p.19, 팡팡 지음, 문현선 옮김
시어머니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난 연매장 싫어요. 연매장하면 환생할 수 없어.” 시아버지가 타박했다. “또 태어나고 싶어? 이 세상에 또 와서 뭐하게?”
연매장 p.207, 팡팡 지음, 문현선 옮김
걱정 없이 잘 먹고 마시고 놀면 그만이야. 어떤 인생이든 사실은 소소한 인생이고 누구나 소소한 일상을 제일 많이 살아. 다시 말해 소소한 인생은 소소한 일상과 어울려야만 가장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고.
연매장 p.229, 팡팡 지음, 문현선 옮김
드니 빌뇌브의 영화 <그을린 사랑>을 봤는데 이 책이 떠올랐어요. 2010년 영화인데 재개봉해서 보았습니다. 엄마가 사망한 후 유언으로 자식들이 엄마의 과거(남편과 아들)를 찾아나가는 내용이에요. 이 책과는 완전 다른 결이지만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명작이니 궁금하신 분들은 추천드립니다!
<그을린 사랑>을 보지 못했는데, 꼭 봐야겠네요. 추천 감사합니다.
그을린 사랑쌍둥이 남매인 잔느와 시몽은 어느 날 갑자기 의식을 잃은 어머니 나왈의 유언을 전해 듣고 혼란에 빠진다. 유언의 내용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생부와 존재조차 몰랐던 형제를 찾아 자신이 남긴 편지를 전해달라는 것. 또한 편지를 전하기 전까지는 절대 장례를 치르지 말라는 당부도 함께 담겨있다. 시몬은 유언을 따르길 거부하지만 진실이 궁금한 잔느는 지도교수의 도움을 얻어 중동에 있는 어머니의 고향으로 떠난다. 베일에 싸여 있던 그녀의 과거와 마주한 잔느.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어머니의 과거의 끝에는 충격적인 진실이 기다리고 있는데...
'중국 토지개혁'과 관련된 소설이라길래 어렴풋이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첫장부터 술술 잘 읽혔습니다. 심지어 다음 장이 궁금해 쉽게 책을 놓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딩쯔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는 궁금증에 계속 다음 챕터가 궁금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많은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최근에 '패왕별희', '삼체'를 봐서 그런지 다이윈(딩쯔)이 가족들을 저버리고 자기비판 하는 모습은 '패왕별희'와 '삼체'에서 친구와 가족을 저버리고 자기비판 하던 인물들의 모습과 겹쳐 보이기도 했습니다. '잘못을 바로잡으려면 선을 넘을 수 밖에 없다'는 류진위안의 말. 하지만 그 선을 넘을지 말 지를 판단하는 사람은 아무나가 되면 안됩니다. 어떤 이의 목숨도 '회의를 열고 누구를 죽여야 한다'는 말에 죽여야 하는 상황이 되면 안됩니다. '지주의 땅을 가난한 소작농에게 나눠준다'는 취지의 토지개혁은 언뜻 보기엔 좋은 개혁인 듯 보입니다. 하지만 어떤 제도라도 폭력적으로 변질되어 갈 때는 그것을 멈출 제도적 브레이크도 필요합니다. 사실 그 시대는 중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가 폭력의 브레이크가 없던 시대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그런 폭력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것들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생각해준 책이었습니다.
마침 최근에 <패왕별희>와 <삼체>를 보셨다니 <연매장>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 좀더 두터운 층위로 느껴지셨을 것 같아요. 토지개혁 문제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사건이었지만, 동시에 그 시기를 살았던 개개인들에게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기도 했다는 것.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기억 혹은 망각할 것인지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것. 하지만 둘은 양립할 수 있고, 양립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소설이었다고... 남겨주신 댓글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이제 정말 막바지입니다. 오늘은 마지막 질문을 드릴게요. 질문 하나. 왜 이 소설의 갈등은 과거에만 있을까요? <연매장>은 과거의 비극적인 사건들, 특히 토지개혁 시기의 폭력과 희생을 중심으로 갈등을 펼쳐 보입니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는 어떨까요? 세대 간의 온도차나, 결말 부분에서 칭린과 륭중융 사이의 의견 차이가 드러나긴 하지만, 과거에 비해 현재의 인물들은 갈등을 피하고, 침묵하거나 무력한 태도로 조용히 흘려보내는 모습을 보입니다. 여러분은 이 점을 어떻게 읽으셨나요? 역사적 비극을 부각하기 위해 과거의 갈등에 집중한 것일까요? 아니면 과거의 극단적인 폭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침묵이 더 또렷하게 느껴지는 걸까요? 질문 둘. “진실은 언어와 글로 표현될 수 없다”는 말에 동의하시나요? “진실이 어떻게 언어와 글로 표현될 수 있겠니? 세상의 어떤 일도 진정한 진실을 가질 수 없는데.” 칭린의 독백으로 소설은 끝을 맺습니다. 작품 전체를 조망하는 듯한 이 말은, 작가가 독자에게 던지는 커다란 질문처럼도 느껴지는데요. 여러분은 이 말에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정말 언어는 진실을 담을 수 없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작가는 이 말에 동의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오히려 이런 냉소에 질문을 던지고 있는 걸까요? 혼이 빠질 것처럼 무더운 날들이네요. 마지막까지 힘내보아요!
이 소설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큰 갈등들은 과거에만 있다고 생각됩니다. 역사를 통해 배우고 깨달은 것을 실천했기 때문일런지요. 그것이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진실은 언어와 글로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이 존재하기도 하고요. 진실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남기려는 것이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진실을 문학으로 전하려고 해도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썼다고 생각합니다.
절대적이고 온전한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가닿을 수 있을 것인지 오래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만약 그런 진실은 존재하지 않고, 그렇기에 가닿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은 의미 있고 또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작가의 입장에서는 온전히 가닿지 못함을 아쉬워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그동안 함께 읽어주시고 좋은 생각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실을 담을 수 있다, 없다라는 단정보다는 진실을 담기 위한 노력에 더 가치를 두어야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담을 수 없다고 단정해 버리면 아무도 진실을 밝히려고도, 알려고도 노력하지 않을테니까요. 그동안 진행하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저도 말씀에 공감합니다. 결국 의미란 존재하는 것을 성취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것처럼, 진실 또한 그것을 담기 위한 노력을 통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이렇게 말하니 너무 상대주의적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아무래도 제 말주변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번 계절도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개인적으로 모든 언어는 실제 삶의 양상을 100퍼센트 재현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문자 기호로 우리가 읽게 되는 소설, 시 같은 텍스트 뿐만 아니라 사진, 드로잉 등의 세밀한 묘사를 담보하는 시각 언어조차도요. 하지만 그것이 이리저리 흩어진 진실보다 언어와 글로 기록된 결과가 더 열등하거나 모자르다는 뜻은 아니라고도 생각합니다. 창작자들이 흔히 괴로워하는 딜레마가 완벽한 재현, 감정의 구현, 기록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한계일텐데요, 어쩌면 듬성 듬성 이가 빠져있는 퍼즐처럼 상실될 진실의 어떤 부분을 끊임없이 사유와 상상을 통해 채워나가고자 하는 노력이 문학 혹은 예술의 역할 아닐까요? 그래서 연매장이 다큐멘터리가 아닌 소설인 것이고, 허구와 진실의 간극 사이에서 느슨하게 교차하는 공통된 경험이나 기억은 어쨌든 발생할 것이기 때문에...연매장을 통해 중국의 토지 개혁이라는 건조한 역사적 사례에 대해 독자가 정서적으로 더 내밀한 연결성을 느낀다면 그것이 이 책의 역할일 듯 해요. 작가는 다소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도 같지만, 떄론 소설 말미에 덧붙이는 작가의 말조차 포착하지 못하는 소설 텍스트 자체의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말씀해주신 것처럼 작가의 의도를 넘어서는 텍스트 자체의 가능성이 있기에 문학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걱정 없이 잘 먹고 마시고 놀면 그만이야. 어떤 인생이든 사실은 소소한 인생이고 누구나 소소한 일상을 제일 많이 살아. 다시 말해 소소한 인생은 소소한 일상과 어울려야만 가장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고.
연매장 p.229, 팡팡 지음, 문현선 옮김
소설의 갈등이 과거에만 있는 이유는 국가가 과거의 사건으로 인한 갈등을 꼭꼭 묻어버렸기 때문이고 그래서 진실이 묻혀버렸다는 것을 작가 팡팡이 말하고 싶었던건 아닐까요. 그런 현실속에서 진실은 직관적으로 드러내기 어렵고, 그래서 은유와 비유로 에둘러 보여주면 진실을 가리고 싶어하는 이들에 의해 왜곡된 진실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작가는 칭린의 입으로 말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읽고나서 많이 씁쓸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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