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보르헤스 읽기] 『말하는 보르헤스』 2부 같이 읽어요

D-29
2025년에도 이어서 읽는 보르헤스의 여덟 번째 책입니다. 민음사 논픽션 전집판으로는 세 번째 책을 읽습니다. 함께 읽을 분들은 참여해주세요😀 『말하는 보르헤스』는 총 2부로 나뉘어 있으며, 이 모임에서는 이어서 2부의 다섯 편을 마저 읽겠습니다. 대략 5일에 산문 하나를 읽습니다. 목차는 이렇습니다. [2부, 7일 밤] ⏤셋째 밤, 『천하루 밤의 이야기』 161 ⏤넷째 밤, 불교 186 ⏤다섯째 밤, 시 212 ⏤여섯째 밤, 카발라 238 ⏤일곱째 밤, 실명 259 ⏤후기 284 ※ 한 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제 짤막한 감상을 남기겠습니다. 대화하실 때는 단편별로 [이 대화에 답하기] 기능을 활용해서 대화 타래를 엮어가요. ※ 지나간 글꼭지에 대한 언급도 얼마든 가능합니다. 나눠놓은 기간에 구애하지 마시고 [게시판] 기능을 활용해서 언제든 대화 타래에 동참해주세요. ※ 제 아이디를 탭 하고 [만든 모임]을 보시면 이전에 열렸던 모임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대략적인 방향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모임에 대한 의견도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 참여 인원이 없어도 25/6/7에 시작하겠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천하루 밤의 이야기] 셋째 밤입니다. 이전에 ⟪영원성의 역사⟫ 2부에서도 한번 다룬 적이 있는 '천일야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는 여러가지 제목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천일야화'라고도 하고, '아라비안나이트', '천하루 밤의 이야기'라고도 합니다. 편의상 ⟪천일야화⟫라고 부르겠습니다. 전에도 설명했으니 간단히만 설명하자면, ⟪천일야화⟫는 17세기 프랑스의 고고학자였던 앙투안 갈랑에 의해서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되었습니다. 갈랑은 동양 문화권에 큰 관심이 있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동양(Orient)'은 아랍 국가를 포함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랍이 왜 동양인지 의아하게 여기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서양'은 단순히 지정학적 위치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 기독교권과 비기독교권를 가름하는 당시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편할 겁니다(엄밀하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천일야화⟫는 15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채집된 이야기를 시작으로, 인도와 페르시아, 소아시아에서 구전으로 떠돌던 이야기도 섞여 있습니다. 원전이라고 할 만한 것이 집대성된 시기는 14-15세기로 당시에는 아랍어 판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랍어 원전'이라고 할 수도 없는게, 애초에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언어로 된 이야기가 뒤섞여 있기 때문이죠. '천일'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아랍어 판본조차 282번째 밤에서 끊겨 있었습니다. 앙투안 갈랑이 프랑스에 들여오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삽입하여 오늘날 우리가 아는 '아라비안나이트'로 만들었습니다. 책의 배경 자체가 모호하고, 원전이라고 할 만한 판본도 불명확하며, 이후에 각국으로 번역되면서 내용이 조금씩 추가되거나 각색되었습니다. 이따금 한국어판 서평 중에서 이 책이 중역이기 때문에 가치가 떨어진다고 열등하다고 말하는 분을 볼 때가 있는데, 그건 '원전 없는 번역본'으로서 ⟪천일야화⟫가 지닌 독특한 배경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죠. 우리가 접하는 천일야화는 모두 중역판이고, 그건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겁니다. 보르헤스도 말했듯이, '천하루 밤'이라는 표현은 매우 독특합니다. 왜 '천 밤'이 아니라 왜 '천하루 밤'일까요? 아마 당시 '천(千)'은 '무한'과 동의어처럼 쓰였을 겁니다. 무한은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천배만배'라는 표현처럼, 진짜 숫자 '천'이나 '만'이 아니라 '셀 수 없이 많다'는 관용적인 의미로 우리는 받아들이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 추상적인 무한 개념에 비하면 거기에 더해지는 '하루'는 너무 사소하지만 매우 구체적입니다. 그래서 '천하루'라고 하면, 이상한 구체성을 단번에 얻게 됩니다. 단적으로 저에게 '천하루'란 '무한과 무한에 더한 단 하루'처럼 추상과 구상이 더해진 어떤 인상으로 다가옵니다. 모르긴 몰라도 '천하루 밤'을 처음 말했던 사람은 스스로 명료하게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추상으로서 '무한'과 구상으로서 '하루'를 은연중에 결합하면 더욱 풍성한 무한이 암시될 것임을 직감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렇게 '천하루'는 그 당시에는 가장 구체적인 무한이면서도 무한을 넘어서는 무한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얻게 됩니다. 탁월한 표현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늘 드는 비유이지만, 붉은 체리 한 알이 올라간 생크림케이크가 떠오릅니다. '디저트'의 관점에서 보면, 생크림케이크의 본체는 생지 시트와 그 위에 덧발린 생크림입니다. 그에 비하면 붉은 체리 한 알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소한 것입니다. 하지만 생크림케이크를 '이미지'의 관점에서 보면, 상황은 완전히 역전됩니다. 피처럼 붉은 체리 한 알은 생크림케이크 전체를 지배합니다. 이미지에 관한 한, 이 작고 붉은 체리 위에 생크림케이크가 올라타고 있습니다. '천하루 밤'이라는 표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천하루'를 무한으로 보내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천이라는 글자에 보태어진 단 '하루'입니다. 보르헤스도 말하듯 영어에서는 'forever'이라는 말 대신에 'forever and a day'라고 쓴다고 합니다. 영원에 더해진 하루는 영원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듭니다. 이 하루는 여느 하루와 다르지 않은, 고작 하루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여느 하루와는 달리 영원을 향합니다. 세헤라자드에게 주어진 하루가 뭇사람들의 하루와 달랐듯이요. 천하루 밤의 이야기에서 세헤라자드는 오늘 하루 몫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딱 하루치의 목숨을 연장합니다. 그녀에게 오늘 모면해야 하는 그 '하룻밤'은 매우 중합니다. 그에 비하면 '천일밤'은 대관절 언제 주어질지, 주어지기나 할지도 알 수 없는 공허합니다. 처녀들과 밤을 보내고 나면 목을 치는 마술적인 왕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세헤라자드는 그 '덤'으로서 하루를 구원함으로써 그 마법 같은 밤을 무한히 연장했던 셈입니다. 보르헤스도 말하듯, 서양이 이성을 말한다면 동양은 마술을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마술이란, 이성이 주장하는 인과관계의 바깥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마술은 전혀 다른 인과관계이며, 그것은 이성의 사각에서 새로운 인과관계를 파고 있습니다. ⟪천일야화⟫는 이야기들의 성경에 비견될 만합니다. 우리가 하루 속에서 다른 하루로 건너가듯, 세헤라자드는 이야기 속에서 또 다른 이야기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성경은 신자들을 되비추는 거울이라고 합니다. 신자들은 거기서 모순을 보고 분통을 떠뜨릴 때도 자신의 모순에 화낼 따름이고, 진리에 감동할 때도 기실 자기 자신을 보고 있을 따름입니다. 천일야화도 거울이되, 다만 시대라는 또 다른 거울 앞에 마주 세우는 거울이라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천일야화⟫는 거울 앞에 세워진 또 하나의 거울로서 무수한 '사이'를 창출하고, 그 사이 공간을 왕복운동합니다. 어쩌면 동양에 매혹된 서양의 갈랑이 ⟪천일야화⟫를 옮겨왔을 때부터, ⟪천일야화⟫는 서양인들에게는 건너갈 수 없는 동양을 머릿속으로 건너가는 방식이었을 겁니다. ⟪천일야화⟫야말로 이 무수한 '사이'를 이어주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책 속에서 이야기들은 또 다른 이야기를 증식하고, 꿈을 꾸는 자는 상대방이 간밤에 꾼 꿈 속에서 자신의 집과 마당에 숨겨진 보물을 봅니다. 한편, 보르헤스는 이런 ⟪천일야화⟫가 얼마나 독특한 결과물인지 설명합니다. 성당을 짓는 기술자들과 장인들은 자신이 무엇을 만드는지 알고 있었던 반면, ⟪천일야화⟫의 일화를 처음으로 들려준 익명의 이야기꾼들은 자기가 ⟪천일야화⟫를 쓰고 있는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익명의 이야기꾼들은 ⟪천일야화⟫를 몰랐지만, ⟪천일야화⟫를 짓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일야화⟫이 지닌 힘이자 경이로움이지요. 이런 이유로 보르헤스는 ⟪천일야화⟫를 수 세기에 걸쳐서 지어지고 있는 궁궐에 비유합니다. 17세기 앙투안 갈랑은 14-15세기 아랍에서 최초로 발견한 아랍어 필사본 4권을, 그 익명의 저자들이 채집한 불완전한 책을 프랑스어로 옮기면서, 자기 입맛대로 이리저리 첨삭을 가했습니다. 이후 개찬에 가까운 번역본들이 쏟아집니다. 19세기 레인과 버턴이라는 걸출한 번역가들이 여기 동참합니다. 결과적으로 현재 우리가 접하는 ⟪천일야화⟫는 모두 직역본조차 아닌 중역본이며, 원전의 내용은 아무도 모르고, 심지어 궁금해하지도 않습니다. 오늘날 ⟪천일야화⟫는 '원전 없는 번역본'인 모든 책의 상징이라고 할 만합니다. ⟪천일야화⟫는 앞으로도 번역될 것이며, 아마 수 세기 후에는 지금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말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천일야화⟫는 오직 번역본으로만 존재할 것이며, 따라서 한 시대는 자신의 시대에 걸맞은 ⟪천일야화⟫를 가지게 될 겁니다. 14-15세기의 ⟪천일야화⟫는 17세기 앙투안 갈랑의 ⟪아라비안나이트⟫와 달랐고, 그 이후에 등장한 레인과 버턴의 ⟪천일야화⟫와도 역시 달랐습니다. 언어 자체가 무수한 반향임을 감안하고 보면 ⟪천일야화⟫는 언어에 무엇보다 충실하다고 할 만합니다. ⟪천일야화⟫는 완성된 적이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완성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모두 읽었다고 말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원전이 없다는 흥미진진한 사실에 더해서 완독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되레 ⟪천일야화⟫ 속에 까마득한 심연을 팝니다. 보르헤스는 자신의 집에 열일곱 권으로 된 버턴의 번역본이 있지만, 자신이 그것을 절대로 모두 읽지 않을 것이라고 능청을 떱니다. 완독 여부와 무관하게 ⟪천일야화⟫는 여전히 가치 있다고 말하면서요. 이것이 ⟪천일야화⟫가 지닌 무한한이며 흥미진진함일 텐데, 이런 특성마저 마주 선 두 장의 거울이 자아내는 압도적인 깊이감, 그 사이에 놓인 채 무한히 얇아진 인간이 느낄 법한 소회일 따름입니다. 보르헤스의 작품 세계를 요약하라고 하면 아마 ⟪천일야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우리는 '서양'이란 말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서양 문화는 서양의 노력 덕분에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순수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서양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나라는 바로 그리스(로마는 헬레니즘 전통의 연장선에 있습니다)와 동양 국가인 이스라엘입니다. 두 나라는 우리가 서양 문화라고 부르는 말 속에 합쳐져 있습니다. 동양이 드러났다고 말할 때, 우리는 계속된 드러남, 즉 성경을 떠올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건은 상호성을 띠고 있습니다. 서양이 동양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어느 프랑스 작가는 자신의 책에 ⟪중국인의 서양 발견⟫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것은 사실이며,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기도 합니다.
말하는 보르헤스 170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불교] 넷째 밤입니다. 이번에는 '불교'를 다룹니다. 그러나 여기서 보르헤스가 말하려는 것은 가르침이자 종교로서 '불교'입니다. 생전 부처의 생몰을 추적하고, 그 역사적인 사실 관계를 따지는 것은 아마 학문의 영역이 될 겁니다. 종교는 어느 순간, 믿음의 영역으로 진입해야 합니다. 이성적으로 이러저러한 이유를 모두 따져본 뒤에라야 믿을 만하다고 느껴서 믿기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지불식간에 그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에 가깝습니다. 마치 카프카의 인물이 스스로 원하지도 않았는데도 법의 문지기 앞에 선 것처럼요. 인과관계는 물론 중한 것입니다. 따져야 합니다. 하지만 인과관계를 따진다는 말이 인과관계에 속박된다는 말은 아닐 겁니다. 우리는 종교를 가지거나 그것을 논할 때 인과관계를 고스란히 따지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그것은 '믿음'에 대한 호기심일 수도 있고, 절대적인 존재에게 자신을 의지하고 의탁하고자 하는 나약함에서 비롯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분명한 사실은, 종교를 가진다는 것이 물건을 사는 행위와는 다르다는 겁니다. 보르헤스는 한 불자 친구와 토론을 하다가, 친구가 부처가 카필라바스투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왜 그것을 믿지 않느냐고 물어봅니다. 친구의 대답은 간단하면서도 지극히 불교스럽습니다.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죠. 중요한 것은 가르침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며 종교의 핵입니다. 부처가 설법한 바에 비하면 부처의 인간된 출처는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물건을 고르고 사듯, 혹은 학문에서 논변을 파악하듯이 종교에 접근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보르헤스는 흔히들 주체-객체, 원인-결과, 논리-비논리, 정-반과 같은 용어에 의지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불교는 이런 범주를 넘어설 것을 요구합니다. 선불교의 스승들은 갑작스러운 직관으로 진리에 이르려면 비논리적인 대답이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신참 수도승이 '부처가 무엇이냐'고 묻자, "보리수나무는 과일나무다"라고 대답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이 대답은 비논리적이지만, 진실을 일깨운다는 것이죠. 이것은 문답의 논변 관계를 피할 뿐 아니라 파(破)하며, 갑작스레 충격을 줍니다. 이 선문답은 논리를 넘어서는 시적인 도약을 가능케 해줍니다. 그 유명한 '화살의 비유'가 있습니다. 논리적인 인과를 따지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화살의 비유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화살이 살에 박혀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자가 제게 박힌 화살을 빼낼 궁리는 하지 않고, 누가 제게 화살을 쏘았는지, 화살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자신이 어떻게 해서 화살을 맞았는지 따위만 고민하다가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이는 논리와 인과에 매몰되어서 정작 피흘리며 죽어가는 현실은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화살'은 단순히 타인의 시선이나 타인에 내게 행한 일을 상징하지는 않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화살'은 타인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과 그것을 둘러싼 관념을 의미합니다. 그 관념을 우리는 '자아'라고 부릅니다. '화살'은 흔히 타인이나 타인이 내게 보낸 음해로 오해되고는 하지만, 기실 '자아'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타인'은 계기이며 부차적일 따름입니다. 화살의 비유가 알려주는 사실은 무엇일까요? 바로 '자아'에 관한 한 우리는 모두 몸에 화살이 박혀서 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알다시피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치의 죽음을 경험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요. 보르헤스는 자살이 열정의 과잉 탓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에 대한 열정인가 하면 당연히 '자아'입니다. 보르헤스는 그러한 열정을 가지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생각해보면 '자아'가 그토록 중한 사람만이 자살에 이릅니다. 자아가 너무 소중하고 버겁도록 무겁게 느껴져서,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을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로 비대해졌을 때, 그는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세상, 아니면 자신을요. 자아가 비대해진 인간이 세상을 택하긴 어렵습니다. 자살하는 사람이 죽는 그 순간까지 매달리고 있는 단 하나의 주제는 '자신'입니다. 자아는 바닷물과 같아서 아무리 마셔도 해갈되지 않습니다. 다행인 것은 자아라는 화살이 박히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다만 화살이 박힌 채 화살의 출처를 궁금해하고 그 성분을 분석하고 출처를 추측하면서 죽어가는 사람이 있고, 화살촉을 얼른 뽑고서 그 후유증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있을 따름입니다. 불교는 차라리 후자를 말합니다. '자아'를 붙들고 채색하고 짙게 만드는교리가 아니라, 한정된 시간 속에서 '자아'라는 단어를 잊어버리고서 심지어는 투명해지기를 권하는 교리를 말합니다. 제 생각에는 '자아'야말로 그 자체로 현대인의 질병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들은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아서", 소위 '자기 과잉'이라서 버겁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생각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자기 과잉이 문제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만나는 수단이 한정적이어서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과거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대면했습니다. 스마트폰과 텔레비전과 유튜브와 스타와 아이돌와 인플루언서가 없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조금 더 한가롭고 심심한 시간을 많이 보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배경음악 없이도 자기 안으로 침잠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자신과 만난다는 것은 '자아'라는 거창한 단어 없이 단번에 이해되었습니다. 하지만 정보가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줄줄 새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한가롭고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만나기 보다는, '자아'라는 컴팩트하고 간결한 단어로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아'라는 말이 현대인에게 그럴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자기 내면에 있는 거대한 공백에 꼭 맞춤한 단어처럼 느껴지는 탓입니다. 무언가 결핍된 사람은 결핍된 것이 있는 쪽으로 돌아 앉거나, 결핍된 것을 등지고 앉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자아'라는 생색내기 단어가 아니고서는 자신과 만나지 못해서 고통받는 것일 겁니다. 한편, '자아'는 '개인의 불멸성'을 신봉하는 사고방식으로 반드시 이어집니다. 자신이 너무 중해서, 시대와 몸을 달리해가면서까지 자신의 영혼과 정신을 영속시키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르헤스의 설명에 따르면, 거기에 대한 불교적 처방은 궤를 달리 합니다. 이를테면 주어의 사용을 피하기까지 합니다. 보르헤스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오류라고 말합니다. '덥다', '춥다', '비오다'처럼 무인칭의 주어를 활용하기를 권합니다. 이는 부처가 기적을 저속한 과시라고 여겼던 것과 궤를 같이 합니다. 부처에게 기적이란, 모두 알기 때문에 한 글자도 책으로 남기지 않겠다고 선언한 고대의 현인들의 태도를 연상시킵니다. 부처는 기적을 행할 수 있었지만, 사람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기적을 행하는 자체는 저속한 과시라고 보았습니다. 능력이 있다면 능력이 있는 것일 따름이다, 꼭 선보여야 할 이유는 없다, 뭐 그런 생각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심지어 부처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선보인 제자를 종단에서 추방하기도 했으니까요. 불교의 '윤회' 개념도 비슷하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흔히들 '윤회'를 영원불변하는 영혼이 세대에 따라 몸을 달리해 가면서 자기 의지를 거듭 구현해 나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는 앞서 말한 '개인의 불멸성'을 옹호하는 것이며, 불교의 윤회에 대한 오해입니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외려 불교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며, 개인의 영혼이 거듭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카르마(業) 즉 우리 모두의 정신적 조직체가 윤회하는 것이라고요. 이로써 피타고라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자신이 전혀 다른 이름으로 참전하여 쥐었던 방패를 알아보고, 병사는 망각의 강에서 물을 마시기 전에 자기 운명을 선택하는 전혀 다른 영혼들을 목격합니다. 또 아가멤논은 독수리의 운명을 택하고, 오르페우스는 백조의 운명을, 오디세우스는 가장 천하고 이름 없는 이의 운명을 택합니다. 영원불변한 영혼이 몸을 바꿔가며 시대 속에서 자신의 야심을 지속해 나가는 '개인의 불멸성'이 전혀 아닙니다. 외려 그런 것들은 불교의 윤회에 대한 극심한 오해, 서구적인 오판인 것이죠.
불교는 고행과 수도가 필요하지만, 그것은 인생을 맛본 후에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불교는 그 누구도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시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우리의 삶을 정화한 다음, 인생의 모든 허망한 꿈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인생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는 보르헤스 194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시] 다섯째 밤입니다. 보르헤스는 '문학은 무엇보다 표현'임을 강조했던 크로체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시작합니다. 문학이 표현이라면, 문학은 언어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언어는 무엇보다 미학적인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보르헤스는 언어가 미학적이라는 개념은 쉽사리 받아들이기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에게 언어는 미학적인 것이 아니라 수단에 더 가깝습니다. 언어를 미학적으로 대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흔히들 말합니다. 언어는 정보 전달의 도구이고,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며, 따라서 쓰기에 따라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매체가 될 수 있다고요. 하지만 크로체와 그런 크로체를 지지하는 보르헤스에게 언어는 그 자체로 창조 행위이고, 모든 단어는 미학적 선택의 결과이며,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곧 예술의 실천입니다(그리고 여기서 다루려는 '시'야말로 미학적인 언어에 충실한 장르입니다). 언어가 미학적이라는 개념은 일견 당연한 주장처럼 보이지만, 현실에서 언어를 미학적으로 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겁니다. 하지만 이 미학으로서 언어 덕분에 우리는 한 권을 읽더라도 각자의 읽은 경험을 한데 같이 펼쳐놓고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한 권의 성경이 수십억 독자에게 수십억 가지의 의미로 다가가듯, 좋은 책, 좋은 글, 좋은 표현은 시대와 상황과 사람에 따라서 끊임없이 유동하고 변화합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강물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이라는 은유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는 물처럼 모호한 동시에 명료합니다. 바로 인간 자신이 물이며, 물이 된 자기로서 뱉는 표현 역시 물의 역사에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이라는 은유에서 인간을 물살 속에 고정된 바위처럼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오해입니다. 흔히들 가만히 서 있는 인간을 에워싸고 물이 흘러가는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물은 기원 모를 곳으로부터 내려오며, 인간을 휘감고 돌아나가는데, 이때 인간은 시간의 물결 속에서 서서히 마멸되는 거대한 바위의 처지에 다름 아니라는 겁니다. 반복하지만 이런 이미지는 쇄신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생물이며 무생물인 바위로 은유될 수 없다는 하나마나한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인간 역시 하나의 강물인 탓입니다. 보르헤스의 말대로 어제의 인간은 오늘의 인간이 아니며, 오늘의 인간은 내일의 인간이 아니게 될 겁니다. 인간은 바다를 포기하지 못하는 물결이며, 혹은 물결을 포기하지 못하는 바다입니다. 모든 물에는 바다였던 자기를 크든 작든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흘러가는 물을 논할 때, 인간은 스스로 흘러가면서도 같이 휩쓸려가는 어느 지점의 물결을 말하는 것만큼이나 헛된 포즈를 취하게 됩니다. 이를 각주구검(刻舟求剑)이라고 합니다. 다시, 인간의 언어는 미학적이며, 동시에 반향적입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주위의 상황과 사물에 호응하여 메아리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보르헤스는 본격적으로 설득하려는 바를 말합니다. 언어가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신비스러운 것과 상응한다"는 가정은 잘못된 것이라고요. 더 쉽게 말하면, 언어는 현실과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어가 현실에 완벽히 대응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면, 그건 한 시절 자신의 앎과 이해가 얼마나 좁은지 모르는 사람임을 자인하는 것입니다. 흔히 저널리즘적인 산문을 쓴다거나 사실주의 소설을 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런 오해를 하고는 합니다. 바로 산문은 현실에 더 가까운 반면 시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말하는 식입니다. 하지만 그건 오해입니다. 보르헤스는 사실주의를 표방했던 소설가 오라시오 키로가(Horacio Quiroga)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써야 한다"고 말했던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차가운 바람이 강둑에서 불어온다"는 문장이 현실과 일치한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마 그가 방금 전의 문장을 모국어의 통상적인 용례에 부합한다고 느꼈기 때문이지, 언어가 현실 자체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더 엄격히 파고 들어볼까요. 움직이는 공기를 '바람'으로 개념화하고, '분다'라는 동작을 동사로 표현하고, '강둑에서'라는 상황을 설정하는 자체는 현실과 완전히 무관합니다. 이는 현실이 아니라 언어적 구성일 따름입니다. 따라서 "차가운 바람이 강둑에서 불어온다"라는 문장은 사실상 현실과 동떨어져 있으며, 흔히 시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카르투치의 "들판의 푸른 침묵"이라는 표현 만큼이나 현실에 정확히 대응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산문의 언어가 현실 그 자체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엄청난 혼란을 얻게 되는 것일까요? 언어로 현실에 대응하려는 노력은 무용한 걸까요? 특별히 그렇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일종의 '해상도'의 문제라고 받아들여도 됩니다. 나아가, 진정 문제는 '산문은 현실적이지만 시는 현실적이지 않다'는 명제를 재검토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언어가 현실에 느슨히 달라 붙어 있는 무언가이기에 현실에 대응할 다채로운 '표현'이 가능해지고, 나아가 이런 다채로움이 언어를 보다 자유하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산문이란, 불가해한 현실 전체에서 이해 가능한 부분을 모색하는 방식이며, 그럼으로써 잠정적인 이해와 화해의 공간을 만들어낸다고 받아들이는 편이 낫습니다. 그러고 나면 시는 현실의 이해 가능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즉 현실의 불가해함을 아우른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리하여 산문과 시는 모두 '현실의 이해'를 둘러싼 이쪽과 저쪽 모두에 대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는 산문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현실에 대응하고 있는 겁니다.
한편, 보르헤스가 카르투치의 대환법(hipálage)을 논하는 부분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다시 "들판의 푸른 침묵"이라는 시구를 살펴봅니다. 이 시구를 익숙한 형태로 바꾸자면, '푸른'이라는 형용사는 '침묵'이 아닌 '들판'을 수식해야 합니다. 하지만 과연 카르투치가 그 간단한 사실을 몰랐을까요? 들판이 푸르다는 것을 익히 보고 들어서 아는 사람에게 "푸른 들판의 침묵"은 전혀 놀랍지 않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재확인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의도적으로 '푸른'이 '침묵'을 수식하게 함으로써 "푸른 들판의 침묵"이라는 이해 가능한 현실을 포함하고 넘어서려고 합니다. 보르헤스는 이것이 대환법의 묘미라고 보았던 게 아닐까요. 또 다른 예시로는 베르길리우스의 "외로운 밤 아래로 어둡게 걸었다"는 시구입니다. 앞서 살펴본 예시와 같습니다. 베르길리우스는 "외로운 밤 아래로 어둡게 걸었다"라고 표현함으로써 "어두운 밤 아래로 외롭게 걸었다"는 익숙한 현실을 아우를 뿐 아니라 넘어서고자 했을 것입니다. 이 표현들은 구체적인 표현은 달라도, 모두 자신이 마주한 현실을 익숙한 방식이 아니라 생소한 방식으로 아우르고 넘어서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야 할 겁니다. 이런 표현은 주변에서 얼마든 찾을 수 있습니다. 제가 애정해 마지않는 윌리엄 포크너의 ⟪As I lay dying⟫(1930)의 한국어판 제목은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입니다. 원제 자체는 명료합니다. 한국어로 "내가 누워 죽어갈 때" 정도로 옮길 수 있을 겁니다. 아마 그렇게 번역했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뭐라고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한국어판 독자에게는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로 더 유명합니다. 이 제목을 두고 혹자는 오역을 지적하면서 "As I lay dying"이라는 원제로 미루어 볼 때, 역자가 '죽어'와 '누워'를 뒤바꾸어 썼을 거라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원문 그대로 "내가 누워 죽어갈 때"라고 하거나, 다 양보하더라도 "내가 누워 죽어 있을 때"라고 해야 한다는 겁니다. 실제로 "내가 누워 죽어갈 때"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나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눈치 챘을 사람도 있겠지만, 이 번역본은 '전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대형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 아니라서 그랬을까요?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보다는 "내가 누워 죽어갈 때"라고 정직하게 옮긴 사람의 번역이 그다지 매혹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As I lay dying”를 원문에 준하여 “내가 누워 죽어갈 때”라고 옮긴 이는 스스로 ‘글자’를 번역하기에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이 작품이 무엇보다 '문학'임을 잠시 잊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진정 "내가 누워 죽어갈 때"라고 의미로 표현하고자 했다면, 굳이 포크너가 "As I lay dying"처럼 썼을지 번역자는 스스로 물어보았어야만 합니다. "As I lay dying"은 포크너 시대에서 보더라도 고전적이고 문예체에 가깝기 때문이죠. 포크너는 해당 제목을 1925년 윌리엄 싱클레어 마리스 경이 번역한 ⟪오디세이아⟫에서 고스란히 가져왔습니다. 해당 구절은 ⟪오디세이아⟫ 11권에서 오디세우스가 죽은 아가멤논의 혼령과 만나서 대화하는 장면에서 나옵니다. 아가멤논은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지만,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연인 아이기스토스에게 살해당합니다. 그를 죽인 이유는 아가멤논이 트로이 출정 전에 딸을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제물로 바쳤던 탓입니다. 혼령이 된 아가멤논은 오디세우스에게 아내가 감히 자신을 죽이고도 눈을 감겨주지 않았노라고 말합니다(“As I lay dying, the woman with the dog's eyes would not close my eyes as I descended into Hades”). 하지만 굳이 이런 배경을 모르더라도, "내가 누워 죽어갈 때"처럼 원문에 준하는 제목은 작품의 뉘앙스를 온전히 반영하지 못합니다. 소설에서 숨겨진 주인공이자 '애디 번드런'의 목소리는 다분히 문제적임에도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가 누워 죽어갈 때"가 아니라,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여야만 소설의 미묘한 늬앙스를 포착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야 소설에서 마치 혼령의 목소리처럼 이야기 전반을 부유하는 애디 번드런의 위치가 설득될 테니까요. '내가 죽어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신의 죽음이 여정되고 있음을 아는 혼령의 화자여야만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비로소 독자는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현실의 통념을 벗어나, 문학 안의 새로운 인과관계를 논하게 됩니다. 그러지 않고 "내가 누워 죽어갈 때"로 옮기게 되면 소설 내부의 문학적인 여백을 완전히 들어내는 꼴이 됩니다. "들판의 푸른 침묵"이라는 시구를 붉은 글씨로 지우고 "푸른 들판의 침묵"으로 고치고 나서 흡족해 한다면, 그야말로 비극이 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고향인 미시시피의 자연과 미국 남부의 뿌리깊은 지방색을 담은 포크너의 문학세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 각각의 인물의 내면 독백 형식으로 쓰여졌으며, 각 장마다 다양한 서술 기법이 동원된다. 단조로워 보이는 인물의 이면을 파고드는 의식의 흐름 기법,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고도의 상징 등.
언젠가 우치다 다쓰루 선생은 '왜 우리가 외국어를 공부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두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여기는 모국어가 다름 아닌 감옥이라는 인식을 얻기 위해서라고요. 정말 그러합니다. 외국어를 깊게 공부해 본 사람은 모국어보다 깊고 너른 세상이 있으며, 모국어로 가닿을 수 없는 국경 너머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아니, 아는 것이 아니라 모국어의 국경을 느끼게 된다고 해야 할 겁니다. 그러고 나면, 모국어를 더욱 깊게 알기 위해서라도 외국어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익숙한 것'과 '잘 아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외국어 공부를 통해서 알게 되는 거지요. 먼 순례길을 떠났다가 깨달음 하나를 얻고 돌아와서 자기 집 마당을 파서 보물을 발견했다는 유의 신화와 동일한 구조입니다. 우린 이 질문을 뒤집어 볼 수도 있습니다. 모국어가 감옥임을 알기 위해서는 꼭 외국어를 공부해야 하는가 하고요. 대답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다시 '시' 얘기로 돌아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저에게 시는 모국어 안의 외국어를 찾아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 대 이후의 시집을 읽어보면 아실 텐데,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같은 시가 참 많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우리가 매일 쓰는 그 익숙한 모국어를 '그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들리게 하려면 여간 노력이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이처럼 시집은 모국어를 생경하게 만드는 데 그 일정부분 역할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일례로 외국인들은 한국어가 빼곡히 담긴 지면을 보면서 세로 획의 직선과 동그라미가 아주 많다고 느낀다고 합니다. 간접 경험을 해보려면, 당장 책장으로 가서 책을 펼치고 상하를 뒤집어서 거꾸로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시를 읽는 것도 비슷한 경험을 제공합니다. 모국어를 생경하게 읽는 것 말입니다. 실제로 시집은 최대한 느리게 읽도록 편집돼 있습니다. 가독성을 위해서 어떤 책에서는 왕왕 의존명사를 붙여 쓰고 있지만, 시집에서는 띄어쓰기가 예외없이 적용돼 있을 겁니다. 행간도 일반 단행본보다 넓고 책의 여백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시집은 가장 얇지만 역설적이게도 가장 느리게, 가장 두껍게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는 시집이 독자에게 모국어를 외국어처럼 생경하고 느리게 읽기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있어서 아름다움은 물리적인 감각입니다. 온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평가의 결과가 아니며, 특정한 법칙을 통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느끼거나, 느끼지 않을 뿐입니다.
말하는 보르헤스 236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카발라] 여섯째 밤은 카발라를 다룹니다. 우선, 보르헤스는 카발라가 '성스러운 책'이라는 개념에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은 성스러운 책은 '고전'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고전은 특정한 '문맥'에 놓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렇기에 역사적인 방식으로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습니다. '고전'을 논하려면 그것이 본디 인간의 산물이며, 처음에는 구어(口語)의 대용품으로서 처음에는 가르침을 위한 안내자에 불과했다는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피타고라스는 자신의 가르침으로써 논쟁이 계속되기를 바랐고, 따라서 그것을 책의 형태로 짓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명철들은 자신의 가르침이 고정불변한 활자가 되기보다는 제자들의 입을 오르내리며 무한히 가지를 뻗어나가기를 바랐습니다. 훗날 플라톤이 등장하여 대화체 형식으로 책을 기술함으로써 '활자는 고정불변한 것'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책 역시 열려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고전을 읽을 때마다 그 의미가 계속해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좋은 텍스트일수록 과거와의 대화가 더욱 활발하게 이뤄진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쓰는 사람도 마찬가집니다. 작가는 어렴풋이 무엇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되,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또 어떤 결말에 이르게 될 것인지 모르며, 그 '모름'을 심지어 자연스럽게 여기기까지 합니다. 그에 비해 카발라는 '성스러운 책'이 있다는 개념에서 출발합니다. '성스러운 책'과 앞서 말한 고전은 여러모로 다릅니다. 이를테면 고전이 인간된 산물로서 인간의 결함과 걸출함을 나란히 펼쳐놓고 탐구하는 것이라면, ⟪성경⟫은 인간이 아닌 성령이 저자입니다. 이른바 "무한한 지성이 한 권의 책을 만들어 내는 인간적인 과제를 수행"한 산물이라는 겁니다. 호라티우스는 "때로는 위대한 호메로스조차 잠에 든다"고 말하며 그 인간된 속성과 한계를 지적합니다. 반면, ⟪성경⟫의 저자인 성령은 결코 잠들지 않습니다. 다만 성령은 보다 친밀한 방식으로, 마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지상에 나타나듯 자신을 낮추었으며, 문학이 되어서 책을 썼던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카발라주의자들이 여느 교인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읽었다는 것입니다. 단, 카발라주의자들은 ⟪성경⟫을 대할 때, 그것이 처해진 '문맥'에 따라서 계속해서 의미가 변하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신의 '완전함'을 이미 갖추었다고 보았습니다. ⟪성경⟫은 활짝 열려 있는 텍스트가 아니라 완전함으로 꽉 닫혀 있으며, 인간은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완전무결한 보고(寶庫)였기에 그 은유와 상징을 발견하는 것이 인간이 할 일이었습니다. 카발라주의자들은 '글자' 자체를 '신'과 등치시킨 최초의 비의주의자였다고 해도 됩니다. 그들은 ⟪성경⟫의 모든 글자에 숨겨진 의미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거기 우연이란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필연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목표는 단순히 ⟪성경⟫에 써진 말씀과 교리를 삶에서 실천하고 세상에 전파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았고, ⟪성경⟫이라는 텍스트를 통해서 신의 본질을 직접 경험하고자 했습니다. 거기 써진 글자 하나하나가 상징이자 은유였습니다. 단적인 예로, "빛이 있으라"라고 말하자 빛이 생겨났다는 ⟪성경⟫ 구절에서, 일반적인 신도들은 일차적으로 그것을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셨다'라는 단선적인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반면 카발라주의자들은 의미화되기 이전의 글자 수준에서부터 천착합니다. ⟪성경⟫이 “왜 글자 ב(베트)로 시작되는가?”, “왜 동사는 단수로, 그리고 주어는 복수로 사용하는 것인가?” 따위의 질문을 던지며, 의미 뿐만 아니라 글자 자체의 기원을 추적하는 겁니다. 거듭 말하지만, 카발라에서 ⟪성경⟫은 시대와 상황과 사람이라는 특정한 '문맥' 속에서 매번 의미가 다채롭게 바뀌고, 완성되어가는 중에 있는 (그리하여 어떤 의미로 완성 자체를 무한히 지연하는 유의) 텍스트가 아닙니다. 카발라주의자들에게 ⟪성경⟫은 신께서 모든 의미를 미리 숨겨놓은 절대적이고 유일무이하게 성스러운 텍스트입니다. 이렇듯, 책은 한갓 구어의 대용품에서 출발하여 서서히 오늘날 '고전'의 형태를 갖추었다는 주장의 정반대편에서, 카발라주의자들은 ⟪성경⟫의 '언어'가 스스로 완벽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믿습니다. 카발라에서 책은 구어의 대용품이 아니며, 외려 책에 쓰인 글자가 구어에 선행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작가 사아베드라 파하르가 말하기를 하느님의 말은 하느님이 반드신 작품의 도구이며, 하느님은 그로써 통해서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이를테면 "빛이 있으라"라고 말하자 빛이 생겨났다는 것인데, 여기에서 '빛'이라는 단어로 말미암아 세상이 창조되었거나 '빛'을 발음하는 어조에서 세상이 금세 이루어졌다고 추측합니다. 고전에서와는 달리 ⟪성경⟫을 가득 매운 '글자'야말로 하느님의 도구이며, 구어보다 우선시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득 채운 글자와 글자가 암시하는 바는 결코 우발적이지 않으며, 이미 결정되어 있던 계획의 일부여야만 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성경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았던 카발라의 사고방식이 드러납니다. ⟪성경⟫은 구어에 앞서서 쓰여져 있었고, 구어에 앞서서 모두 결정지어 놓았습니다. 이런 면에서 자구 하나하나를 따지는 작가들은 카발라주의자들의 후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여담입니다. 그렇다면 카발라주의자들은 왜 이렇게 ⟪성경⟫의 완전함을 강변했던 것일까요? 왜 ⟪성경⟫은 '존재'와 '생각'과 '원함'과 '작용'이라는 기준조차 적용되지 않는 완전한 것이어야만 했을까요? 먼저 말하면, 당대의 카발라는 '그토록 완전한 신이 왜 이토록 세상을 불완전하게 창조했는가?'라는 오래된 물음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제공했습니다. 아이러니하지요. 카발라의 세계관은 거대한 한 그루의 나무로 묘사됩니다. 쉽게는 생명의 나무라고도 하고, 세피로트의 나무라고도 합니다. 일종의 '완전한 신성'이자 '무한'을 일컫는 아인 소프(Ein Sof)가 햇빛처럼 이 나무의 우듬지로 끼얹어지면, 차츰 흘러내리며 총 열 개의 세피로트라는 결과물이 생겨나게 됩니다(정확한 표현이나 설명은 아니니 참고만 바랍니다). 이 최초의 아인 소프가 흘러내리는 과정을 유출(emanaciones)이라고 하며 그 유출된 정도에 따라서 10개의 세피로트가 만들어집니다. 이를테면 우듬지 부분이 가장 많은 신성이 노출되며, 점차 많은 유출을 겪으면서 마지막 뿌리 부분에 이르면, 비로소 우리가 살아가는 모순 가득한 세상을 창조한 여호와를 만나게 된다는 식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최초의 신성이 끼얹어진 상태에서 가장 먼, 가장 불완전한 신에게서 창조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세상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완벽한 신이 창조한 세상이 왜 이렇게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지 일정 부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신의 완전함을 의심하거나 신을 모독하지 않고도 세상이 왜 이렇게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지 모순 없이 이해 가능하게 됩니다. 요컨대 카발라는 완벽한 신과 그런 신의 창조물인 세상이 왜 이렇게 불완전한지를 모순 없이 설명해주는 하나의 세계관이었던 것입니다.
카발라의 광대한 체계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습니다. 태초에 스피노자의 하느님과 유사한 존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하느님은 무한히 풍부한 반면, 카발라의 무한한 신인 아인 소프는 무한히 빈약합니다. 그것은 원시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 존재 만으로는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별도 존재하고, 사람과 개미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별, 그리고 사람과 개미를 어떻게 동일한 범주에 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원시적인 존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 존재가 생각한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논리적인 과정, 즉 전제에서 결론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존재가 원한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은 부족함을 느낀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일한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아인 소프는 일하지 않습니다. 일한다는 것은 목표를 제시하고 그것을 향해 애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아인 소프가 무한한데(여러 카발라주의자들은 그것을 무한의 상징인 바다와 비교합니다) 어떻게 다른 것을 원할 수 있겠습니까?
말하는 보르헤스 247-24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실명] 마지막 밤입니다. 공교롭게도 마지막이자 어두운 밤이며, 주제는 실명입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왜 굳이 실명을 다뤘을까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습니다. 앞서 엿새 밤의 주제들은 '신곡', '악몽', '천하루 밤의 이야기', '불교', '시', '카발라'였습니다. 단연 보르헤스가 평생에 걸쳐 천착해 온 주제들입니다. 동시에 누구에게나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누구라도' 얘기할 수 있는 주제라고 할 여지도 있습니다. 이 마지막 주제인 '실명'만 빼고요. 실명은 '누구라도' 얘기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닐 겁니다. 실명은 보르헤스에게 매우 개인적인 주제입니다. 알다시피 보르헤스는 선천적으로 시력이 악화되는 가족력을 앓았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다가 쉰 살 무렵에 의학적으로 실명 판정을 받았으며, 그 이후로도 변함없이 읽고 썼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비극적으로 느껴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생 전체로 보았을 때 '실명'은 보르헤스에게 갑작스럽게 찾아든 사고가 아니었습니다. 보르헤스는 자기 할머니와 아버지가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것을 보면서, 언젠가 자신도 그리 될 운명임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장애의 관점으로 보면 실명은 애석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가 아는 한, 글 속에서 보르헤스는 자신의 운명을 함부로 비관하거나 자조하지 않았습니다. 외려 그것을 운명에 대한 은유로, 또 필연적인 죽음의 은유로 받아들이고 대처함으로써 한 명의 작가 이전에 한낱 인간으로서 존엄함을 고민할 계기로 삼았습니다. 즉, 보르헤스에게 황혼은 진짜 죽음 이전에 찾아드는 작은 죽음이었으며, 하루 끝에 서서히 찾아든 황혼 이후에도 밤이 계속된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이 황혼의 은유 속에서 우리네 인생 전체는 하루로 집약되고 있습니다. 실명이 보르헤스의 삶과 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앞서 엿새의 밤 동안 논했던 주제들을 한꺼번에 아우를 정도로 중요했습니다. 허나, 보르헤스에게 실명이 개인적인 주제였던 것만은 아닙니다. 보편적인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오십여 년에 걸쳐서 진행된 실명은 '하루는 작은 인생'이라는 유구한 은유를 다시금 환기합니다. 보르헤스는 실명으로써 자신이 속한 정치적 현실에 참여했습니다. 나아가 문학의 계보 안에서 자신처럼 실명한 이들의 사례를 살펴보고, 그 속에서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보았습니다. 그 길은 아무나 갈 수는 없는 길이었습니다. 흔히들 말하고는 합니다. 몸이 천 냥이면 눈은 구백 냥이라고요. 이는 우리가 얼마나 시각적인 데 매몰되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물론 시각은 중요하며, 우리 주변을 둘러봐도 시각적인 메시지만큼 강력한 것을 찾아보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처럼 시각적인 파급력이 크기에 우리는 다른 감각을 경시하고 있던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됩니다. 강한 서치라이트가 사물의 윤곽선을 흐려버리듯이요. 우리는 무언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당장의 현실과 등치시키는 버릇이 있지만, 언제나 더 큰 현실이 그 너머에서 준엄하고 굳건히 서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시각적인 세계 너머에서 보다 커다란 현실을 발견해내기에 이릅니다. 오늘의 우리는 보르헤스가 백 냥 남짓한 쌈짓돈으로 이뤄낸 세계, 하이퍼링크로 무한히 참조되는 세계를 당연한듯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천 냥을 가지고도 구백 냥만 가지고 있는 듯 살아가는 사람을 얼마나 많고, 또 천 냥을 모두 가지고도 손에 고운 모래만 쥐고 있는 초라한 이들은 얼마나 많은가요. 생의 말년에서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가졌느냐로 평가되는 게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이루었는지로 평가될 것입니다. 보르헤스는 실명 이전과 이후를 모두 살았습니다. 작가로서 낮과 밤을 모두 경험했습니다. 실명은 그의 문학적인 삶을 그 이전과 이후로 가름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말년의 보르헤스가 '보이는 세계'를 넘어서 글로 쓰인 음악을, 시의 세계에 생의 말년까지 매달렸다는 사실은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시각이 인생의 청년기를 지배하는 감각이라면, 청력은 인생의 황혼기를 지배하는 감각이라고 할 만합니다. 실제로 사람이 임종 순간에 가장 마지막으로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청각이라고 하니까요. 보르헤스는 역사 속에서 어떤 이들이 실명했고,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자기보다 한 세대 앞서 실명하고도 도서관장을 역임한 작가 그루삭의 운명이 보르헤스 앞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눈이 멀었던 소설가이자 정치가였던 호세 마르몰도 있었습니다. 보르헤스는 오히려 실명 속에서 더 문학적으로 깊어질 수 있음을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이가 시각적인 데 집중하고 매몰되어 있는 와중에도, 드물게 어떤 이들이 시각을 벗어나려고 시도했으며, 심지어는 시각 없이도 대단한 성취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시각이 아닌 청각적인 시를 쓰고자 노력했으며, 밀턴은 실명했지만 구술로써 그 유명한 ⟪실낙원⟫을 남겼습니다. 제임스 조이스 역시 선천적으로 시력이 약했고,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거의 어둠 속에서 글을 썼던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조이스가 쓴 엄청나게 두꺼운 책은 어둠 속에서 쓰여졌다는 것을 보르헤스는 잘 알았습니다. 제임스 조이스는 말한 적 있습니다. "내게 수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가장 대단치 않은 일은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보르헤스 이렇듯 실명 이후에도 위대한 문학을 썼던 이들의 삶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실명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 중 하나"임을 확신하기에 이릅니다. 어느덧 마지막입니다. 이즈음 이르러서는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소설이야말로 눈 먼 자들의 낙원이 아닌가 하고요. 시각적인 충격으로 가득한 이 곳에서, 소설이란 거의 가림막이기까지 하다는 생각을 저는 종종 하고는 합니다. 펼침면을 기준으로 문단 구분도 되어 있지 않고, 글자가 윤기나는 곡식처럼 주르르 늘어선 광경을 보고 있자면, 해방되는 느낌마저 듭니다. 이 느낌은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요. 저에게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자발적인 맹시(盲視)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일입니다. 이상한 말 같지만, 우리는 소설을 읽을 뿐 보지 않습니다. 심지어 저는 소설의 핵심이 보이지 않는 것, 심지어는 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보이지 않음은 소설 안팎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먼저,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두 눈으로 보았을 수도 있었을 무수한 세계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소설을 펼치는 사람은 흑백으로 얼룩덜룩 채워진 지면을 뚫고 심상의 세계로 침잠합니다. 이 '자발적인 맹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설이 아닌 것, 그럼에도 소설과 가장 많이 비교되는 장르를 살펴보는 게 도움이 될 겁니다. 바로 영화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뛰어난 영화 감독일수록 소설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들은 영화가 '보이는 세계'인 만큼 소설이 '보이지 않는 세계'라는 사실에 핵심이 있다는 걸 안다는 겁니다. 영화는 보이는 매체이지만, 진짜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무엇이 보여주지 않을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감독들은 자신의 영화 속에 시력을 잃는 인물을 내세웁니다. 그리고 그런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가 어느 지점에서 언제 어떻게 끝나야 하는지도 정확히 이해합니다. 좋은 소설이 스스로 언제 끝나야 할지 알고 정확히 그 자리에서 끝나듯이, 그들이 만든 영화는 끝나야 할 그 지점에서 비로소 끝납니다. 이런 생각을 할 때 제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블라인드⟫와 ⟪랍스터⟫입니다. ⟪블라인드⟫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루벤은 자신에게 책을 읽어주는 마리와 사랑에 빠지고, 그녀를 사랑하기에 한번이라도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여 시력을 되찾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마리는 그런 루벤이 자신을 보고 실망할 것이 두려워 그를 떠납니다. 먼저 말하자면 영화의 마지막은 루벤이 다시 시력을 잃는 장면으로 끝이 나며, 거기서 영화는 느닷없이 중지된다는 인상마저 듭니다. 루벤이 바라보는 세계의 종말을 맞이함과 동시에 화면을 암전시킴으로써 감독이 무언가를 말하려고 한다는 인상을 저는 받았습니다. 물론 영화는 거기서 끝나지만, 거기서 시작되는 이야기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요. 영화는 눈 뜬 자들의 세계이며, 눈 먼 자들의 세계를 온전히 설득하기 어렵다고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영화는 '끝'이라는 제게 남은 마지막 수단을 활용함으로서 자신의 주제를 설득하기에 이릅니다. 더 얘기하지 않겠지만, 이는 영화 ⟪랍스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왜 지금 이런 얘기를 하고 있을까요. 결국 저는 마지막까지 중언부언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세계와 그 풍성함을 논할 때, 우리는 보는 자의 세계에 몸 담고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자의 세계를 설득해야 하는 역설에 봉착합니다. 어떤 이들을 알고 있습니다. 소설이 영화화되는 것은 전혀 당연하지 않으며, 대단히 뛰어난 영화는 이미 소설적이어서,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비로소 소설을 상상하게 만든다고요. 중언부언하는 얘기 듣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더 랍스터짝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호텔, 하지만 45일 안에 제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로 변한다. 아내에게 버림받은 후 이곳에 온 데이비드는 만약 동물이 된다면 100년을 거뜬히 살며 귀족처럼 파란 피를 가졌고 평생 번식을 한다는 이유로 랍스터가 되기로 한다. 하지만 커플을 찾는 일은 쉽지 않고, 마감일에 쫓긴 데이비드는 비정한 여인과 위장 커플이 되지만 거짓된 관계는 파국으로 끝난다. 다음으로 그가 찾은 숲속은 호텔과 달리 철저한 솔로들의 공간. 연애가 죄악시되는 이곳에서 데이비드는 오히려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작가란 삶 그 자체입니다. 시인의 임무는 고정된 시간표 속에서 완수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8시에서 12시까지, 그리고 2시에서 6시까지 시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항상 시인이며, 계속해서 시의 공격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화가도 삶 전체에서 색깔과 모양의 공격을 받는다고 느낄 것입니다. 음악가 역시 예술에서는 가장 이상한 세계인 이상한 소리적 세계가 항상 그를 찾고 있으며, 그를 찾는 멜로디와 불협화음이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 작가, 아니 모든 사람은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이 유용한 수단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특정한 목적을 위해 그에게 주어집니다. 예술가의 경우엔 더욱 그렇습니다.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 심지어는 수치와 장애와 불행을 포함한 모든 것은 점토로서, 즉 예술의 재료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받아들여 이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고대 영웅들의 음식을 다루는 어느 시에서 수치와 불행과 불화를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가 그것들을 변형해서 우리의 삶이 처한 비참한 상황으로부터 영원하거나 영원하려고 소망하는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함입니다.
말하는 보르헤스 28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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