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보르헤스 읽기] 『말하는 보르헤스』 2부 같이 읽어요

D-29
2025년에도 이어서 읽는 보르헤스의 여덟 번째 책입니다. 민음사 논픽션 전집판으로는 세 번째 책을 읽습니다. 함께 읽을 분들은 참여해주세요😀 『말하는 보르헤스』는 총 2부로 나뉘어 있으며, 이 모임에서는 이어서 2부의 다섯 편을 마저 읽겠습니다. 대략 5일에 산문 하나를 읽습니다. 목차는 이렇습니다. [2부, 7일 밤] ⏤셋째 밤, 『천하루 밤의 이야기』 161 ⏤넷째 밤, 불교 186 ⏤다섯째 밤, 시 212 ⏤여섯째 밤, 카발라 238 ⏤일곱째 밤, 실명 259 ⏤후기 284 ※ 한 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제 짤막한 감상을 남기겠습니다. 대화하실 때는 단편별로 [이 대화에 답하기] 기능을 활용해서 대화 타래를 엮어가요. ※ 지나간 글꼭지에 대한 언급도 얼마든 가능합니다. 나눠놓은 기간에 구애하지 마시고 [게시판] 기능을 활용해서 언제든 대화 타래에 동참해주세요. ※ 제 아이디를 탭 하고 [만든 모임]을 보시면 이전에 열렸던 모임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대략적인 방향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모임에 대한 의견도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 참여 인원이 없어도 25/6/7에 시작하겠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천하루 밤의 이야기] 셋째 밤입니다. 이전에 ⟪영원성의 역사⟫ 2부에서도 한번 다룬 적이 있는 '천일야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는 여러가지 제목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천일야화'라고도 하고, '아라비안나이트', '천하루 밤의 이야기'라고도 합니다. 편의상 ⟪천일야화⟫라고 부르겠습니다. 전에도 설명했으니 간단히만 설명하자면, ⟪천일야화⟫는 17세기 프랑스의 고고학자였던 앙투안 갈랑에 의해서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되었습니다. 갈랑은 동양 문화권에 큰 관심이 있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동양(Orient)'은 아랍 국가를 포함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랍이 왜 동양인지 의아하게 여기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서양'은 단순히 지정학적 위치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 기독교권과 비기독교권를 가름하는 당시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편할 겁니다(엄밀하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천일야화⟫는 15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채집된 이야기를 시작으로, 인도와 페르시아, 소아시아에서 구전으로 떠돌던 이야기도 섞여 있습니다. 원전이라고 할 만한 것이 집대성된 시기는 14-15세기로 당시에는 아랍어 판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랍어 원전'이라고 할 수도 없는게, 애초에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언어로 된 이야기가 뒤섞여 있기 때문이죠. '천일'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아랍어 판본조차 282번째 밤에서 끊겨 있었습니다. 앙투안 갈랑이 프랑스에 들여오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삽입하여 오늘날 우리가 아는 '아라비안나이트'로 만들었습니다. 책의 배경 자체가 모호하고, 원전이라고 할 만한 판본도 불명확하며, 이후에 각국으로 번역되면서 내용이 조금씩 추가되거나 각색되었습니다. 이따금 한국어판 서평 중에서 이 책이 중역이기 때문에 가치가 떨어진다고 열등하다고 말하는 분을 볼 때가 있는데, 그건 '원전 없는 번역본'으로서 ⟪천일야화⟫가 지닌 독특한 배경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죠. 우리가 접하는 천일야화는 모두 중역판이고, 그건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겁니다. 보르헤스도 말했듯이, '천하루 밤'이라는 표현은 매우 독특합니다. 왜 '천 밤'이 아니라 왜 '천하루 밤'일까요? 아마 당시 '천(千)'은 '무한'과 동의어처럼 쓰였을 겁니다. 무한은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천배만배'라는 표현처럼, 진짜 숫자 '천'이나 '만'이 아니라 '셀 수 없이 많다'는 관용적인 의미로 우리는 받아들이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 추상적인 무한 개념에 비하면 거기에 더해지는 '하루'는 너무 사소하지만 매우 구체적입니다. 그래서 '천하루'라고 하면, 이상한 구체성을 단번에 얻게 됩니다. 단적으로 저에게 '천하루'란 '무한과 무한에 더한 단 하루'처럼 추상과 구상이 더해진 어떤 인상으로 다가옵니다. 모르긴 몰라도 '천하루 밤'을 처음 말했던 사람은 스스로 명료하게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추상으로서 '무한'과 구상으로서 '하루'를 은연중에 결합하면 더욱 풍성한 무한이 암시될 것임을 직감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렇게 '천하루'는 그 당시에는 가장 구체적인 무한이면서도 무한을 넘어서는 무한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얻게 됩니다. 탁월한 표현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늘 드는 비유이지만, 붉은 체리 한 알이 올라간 생크림케이크가 떠오릅니다. '디저트'의 관점에서 보면, 생크림케이크의 본체는 생지 시트와 그 위에 덧발린 생크림입니다. 그에 비하면 붉은 체리 한 알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소한 것입니다. 하지만 생크림케이크를 '이미지'의 관점에서 보면, 상황은 완전히 역전됩니다. 피처럼 붉은 체리 한 알은 생크림케이크 전체를 지배합니다. 이미지에 관한 한, 이 작고 붉은 체리 위에 생크림케이크가 올라타고 있습니다. '천하루 밤'이라는 표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천하루'를 무한으로 보내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천이라는 글자에 보태어진 단 '하루'입니다. 보르헤스도 말하듯 영어에서는 'forever'이라는 말 대신에 'forever and a day'라고 쓴다고 합니다. 영원에 더해진 하루는 영원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듭니다. 이 하루는 여느 하루와 다르지 않은, 고작 하루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여느 하루와는 달리 영원을 향합니다. 세헤라자드에게 주어진 하루가 뭇사람들의 하루와 달랐듯이요. 천하루 밤의 이야기에서 세헤라자드는 오늘 하루 몫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딱 하루치의 목숨을 연장합니다. 그녀에게 오늘 모면해야 하는 그 '하룻밤'은 매우 중합니다. 그에 비하면 '천일밤'은 대관절 언제 주어질지, 주어지기나 할지도 알 수 없는 공허합니다. 처녀들과 밤을 보내고 나면 목을 치는 마술적인 왕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세헤라자드는 그 '덤'으로서 하루를 구원함으로써 그 마법 같은 밤을 무한히 연장했던 셈입니다. 보르헤스도 말하듯, 서양이 이성을 말한다면 동양은 마술을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마술이란, 이성이 주장하는 인과관계의 바깥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마술은 전혀 다른 인과관계이며, 그것은 이성의 사각에서 새로운 인과관계를 파고 있습니다. ⟪천일야화⟫는 이야기들의 성경에 비견될 만합니다. 우리가 하루 속에서 다른 하루로 건너가듯, 세헤라자드는 이야기 속에서 또 다른 이야기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성경은 신자들을 되비추는 거울이라고 합니다. 신자들은 거기서 모순을 보고 분통을 떠뜨릴 때도 자신의 모순에 화낼 따름이고, 진리에 감동할 때도 기실 자기 자신을 보고 있을 따름입니다. 천일야화도 거울이되, 다만 시대라는 또 다른 거울 앞에 마주 세우는 거울이라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천일야화⟫는 거울 앞에 세워진 또 하나의 거울로서 무수한 '사이'를 창출하고, 그 사이 공간을 왕복운동합니다. 어쩌면 동양에 매혹된 서양의 갈랑이 ⟪천일야화⟫를 옮겨왔을 때부터, ⟪천일야화⟫는 서양인들에게는 건너갈 수 없는 동양을 머릿속으로 건너가는 방식이었을 겁니다. ⟪천일야화⟫야말로 이 무수한 '사이'를 이어주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책 속에서 이야기들은 또 다른 이야기를 증식하고, 꿈을 꾸는 자는 상대방이 간밤에 꾼 꿈 속에서 자신의 집과 마당에 숨겨진 보물을 봅니다. 한편, 보르헤스는 이런 ⟪천일야화⟫가 얼마나 독특한 결과물인지 설명합니다. 성당을 짓는 기술자들과 장인들은 자신이 무엇을 만드는지 알고 있었던 반면, ⟪천일야화⟫의 일화를 처음으로 들려준 익명의 이야기꾼들은 자기가 ⟪천일야화⟫를 쓰고 있는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익명의 이야기꾼들은 ⟪천일야화⟫를 몰랐지만, ⟪천일야화⟫를 짓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일야화⟫이 지닌 힘이자 경이로움이지요. 이런 이유로 보르헤스는 ⟪천일야화⟫를 수 세기에 걸쳐서 지어지고 있는 궁궐에 비유합니다. 17세기 앙투안 갈랑은 14-15세기 아랍에서 최초로 발견한 아랍어 필사본 4권을, 그 익명의 저자들이 채집한 불완전한 책을 프랑스어로 옮기면서, 자기 입맛대로 이리저리 첨삭을 가했습니다. 이후 개찬에 가까운 번역본들이 쏟아집니다. 19세기 레인과 버턴이라는 걸출한 번역가들이 여기 동참합니다. 결과적으로 현재 우리가 접하는 ⟪천일야화⟫는 모두 직역본조차 아닌 중역본이며, 원전의 내용은 아무도 모르고, 심지어 궁금해하지도 않습니다. 오늘날 ⟪천일야화⟫는 '원전 없는 번역본'인 모든 책의 상징이라고 할 만합니다. ⟪천일야화⟫는 앞으로도 번역될 것이며, 아마 수 세기 후에는 지금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말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천일야화⟫는 오직 번역본으로만 존재할 것이며, 따라서 한 시대는 자신의 시대에 걸맞은 ⟪천일야화⟫를 가지게 될 겁니다. 14-15세기의 ⟪천일야화⟫는 17세기 앙투안 갈랑의 ⟪아라비안나이트⟫와 달랐고, 그 이후에 등장한 레인과 버턴의 ⟪천일야화⟫와도 역시 달랐습니다. 언어 자체가 무수한 반향임을 감안하고 보면 ⟪천일야화⟫는 언어에 무엇보다 충실하다고 할 만합니다. ⟪천일야화⟫는 완성된 적이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완성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모두 읽었다고 말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원전이 없다는 흥미진진한 사실에 더해서 완독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되레 ⟪천일야화⟫ 속에 까마득한 심연을 팝니다. 보르헤스는 자신의 집에 열일곱 권으로 된 버턴의 번역본이 있지만, 자신이 그것을 절대로 모두 읽지 않을 것이라고 능청을 떱니다. 완독 여부와 무관하게 ⟪천일야화⟫는 여전히 가치 있다고 말하면서요. 이것이 ⟪천일야화⟫가 지닌 무한한이며 흥미진진함일 텐데, 이런 특성마저 마주 선 두 장의 거울이 자아내는 압도적인 깊이감, 그 사이에 놓인 채 무한히 얇아진 인간이 느낄 법한 소회일 따름입니다. 보르헤스의 작품 세계를 요약하라고 하면 아마 ⟪천일야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우리는 '서양'이란 말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서양 문화는 서양의 노력 덕분에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순수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서양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나라는 바로 그리스(로마는 헬레니즘 전통의 연장선에 있습니다)와 동양 국가인 이스라엘입니다. 두 나라는 우리가 서양 문화라고 부르는 말 속에 합쳐져 있습니다. 동양이 드러났다고 말할 때, 우리는 계속된 드러남, 즉 성경을 떠올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건은 상호성을 띠고 있습니다. 서양이 동양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어느 프랑스 작가는 자신의 책에 ⟪중국인의 서양 발견⟫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것은 사실이며,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기도 합니다.
말하는 보르헤스 170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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