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진호 선생님에게 같은 번역가로서 마이클 헐스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고 물었고 답변은 아래와 같습니다. 역시 헐스 선생님은 마음이 잔잔한 바다와 같고, 제발트 선생님은 "분별 있는 광기"의 소유자......
[번역가 답변]
내가 마이클 헐스라면 제발트의 교정 원고를 받고 굉장히 놀랐을 겁니다. 영국과 독일에서 최상의 교육을 받은 뒤 양국의 대학교에서 시와 비교문학을 가르치며 주요 영국 시인의 한 사람이 되었는데 그런 원고를 받았으니 저라면 충격을 넘어 아마 살이 떨렸을 겁니다.
그런데 단순히 제발트가 고친 것뿐이라면 살까지 떨리진 않았을지도 모르겠군요. "자기가 영어를 알면 얼마나 안다고"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마음을 다잡아 교정 원고를 검토하고 역자의 의견을 첨가하는 것으로 끝났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발트가 비서에게 첫 교정을 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아마 심각하게 자존심이 상했을 겁니다. 번역가이기 전에 시인으로 나름 이름을 얻었는데 영어에 대한 다른 사람의 '귀' 또는 언어 감각을 더 중시하는 건가, 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저라면 살이 떨리다 폭발했을 텐데, 헐스는 제발트 사후에 쓴 어떤 에세이에서 "제발트의 영어는 제발트화된 영어"라는 점잖은 말로 정리하였습니다.
PS. 마이클 헐스는 현재 영국 워릭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https://warwick.ac.uk/fac/arts/scapvc/wwp/about/hulsemrmichael/
[아티초크/책증정] 구병모 강력 추천! W.G. 제발트 『기억의 유령』 번역가와 함께해요.
D-29

아티초크

stella15
문득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란 책 제목이 생각이 났습니다. 전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흔히들 글 쓰는 작가는 인품도 좋고 인격적일 거란 생각을 하잖아요. 물론 그러면이야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죠. 그러므로 이만한 작품을 쓰는 사람은 인품도 좋을거란 기대는 접어두는 게 좋을 듯도 합니다. ㅎㅎ
뭐 그렇지 않더라도 사람에겐 양면성이 다 존재하잖아요. 천하의 제발트도 누군가에겐 겸손하고 온유해지는 사람이 있겠죠. 아님 본의 아니게 고국이 아닌 이국에서 살아야 했으니 함부로 못하도록 일부러 깐깐했던 건 아닐까요?
어쨌든 여기서 우리가 존경을 표하게 되는 사람은 아무래도 마이클 헐스네요. 끝까지 진지함 과 인내로 번역을 했으니 대단하다 싶습니다. 그 덕분에 많은 독자들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제발트의 영어는 제발트화된 영어"란 말로 점잖게 한 방 먹일 줄도 알고. ㅋㅋ 공진호 선생님 말씀은 그리하셔도 헐스만큼이나 해내시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아티초크님 덕분에 번역가님의 이야기도 들어 볼 수 있고, 여러모로 유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저도 아직 제발트는 읽어보지 못했는데 이를 계기로 언제고 한번 도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아티초크
하하, 맞습니다. 천하의 제발트도 누군가에게는 겸손하고 온유할 겁니다. 그런 대상이 누굴까 생각하며 『기억의 유령』을 들쳐보았는데 일단 제 결론은 제발트의 외동딸과 반려견입니다. '옮긴이의 말'에 보면 제발트가 외동딸을 끔찍이 사랑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딸은 제발트가 자동차 사고로 즉사했을 때 조수석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작가 연보를 보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나옵니다. 1975년에 제발트의 반려견은 초식(!)만 하는 래브라도였습니다. 래브라도는 총명하고 온화한 대형견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탐지견이나 인명구조견으로 활약이 대단하지요. 『기억의 유령』만 봐서는 제발트가 2001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계속 래브라도 종을 키웠는지 알 길이 없지만, 본문에서 글쓰기 방식을 설명할 때 언급하는 개는 래브라도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원래 체계적 방식을 좋아하지 않아요. 박사학위 논문을 위해 연구 조사를 할 때도 체계적이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무작위로, 되는 대로 해 나가는 식이었죠. 작업이 착착 진행되어 가면서 저는 중요한 뭔가를 찾을 길은 그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말하자면 개가 들판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꼴과 같은 방식입니다. 코가 이끄는 대로 다니는 개를 보면 좌표를 설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들판을 이리저리 돌아다닙니다. 그러다 보면 개는 찾던 걸 반드시 찾아요. 저는 늘 개를 키웠습니다만, 제 방식은 개를 보고 배운 겁니다."(178~179쪽)
PS. 제발트가 어린 래브라도와 함께 찍은 사진이 인터넷에 있어 올려봅니다. 사진 속 제발트가 마이클 헐스의 번역 원고에 빨간 줄을 쫙쫙 긋는 그 제발트가 맞을까요? ^^; 한 달 간 제발트 북클럽과 함께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만렙토끼
번역가님 답변에서 헐스 선생님이 얼마나 넓은 마음을 가졌는지, 이해심이 엄청난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제발트화된 영어라고 표현 한게 정말 점잖은 말이였군요
만렙토끼
이렇게 하나하나 신경 써 주시는게 참 대단 한 것 같아요. 정보를 늘 같이 올려주시는 부분도요!
느티나무
책에 대해서 자세하게 소개해주셔서 감사해요 !! 편집자님의 많은 노력이 있었기에 좋은책이 나왔을거라고 생각해요 !!

stella15
“ 코가 이끄는 대로 다니는 개를 보면 좌표를 설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들판을 이리저리 돌아다닙니다. 그러다 보면 개는 찾던 걸 반드시 찾아요. [청중들의 웃음소리] 저는 늘 개를 키웠습니다. 어떤 한 자료가 다른 자료에 가지를 치게 되죠.
......
새로운 무언가를 쓴다는 관점에서 보면 사실상 별로 생산적이지 않죠. 따라서 선례가 없는 무언가를 쓰는 방향으로 머리를 움직이려면 자료의 종류가 각기 달라야 합니다. 저는 글쓰기를 그런 식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물론 호기심에 굴복하게 됩니다. ”
『기억의 유령 - 폭력의 시대, 불가능의 글쓰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179, W. G. 제발트 지음, 린 섀런 슈워츠 엮음, 공진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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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초크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 영역은 용접 밀폐된 곳이 아닙니다. 저승으로 여행을 가는 곳 즉 회색 지대 같은 영역이 있는 겁니다. 불행한 사람들이 특히 그러듯이, 살아도 죽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죠.”(289쪽)
안녕하세요 @모임 여러분.^^ 『기억의 유령』 마지막 북클럽을 시작합니다. 이번 3주차는 총 세 편의 에세이를 읽고 이야기를 나눠봅니다. 기간 및 활동은 아래와 같습니다.
― 기간: 7.7(월)~7.13(일)
― 읽기: 연기의 고리/모의된 침묵/경계를 넘다
― 활동: 번역가 Q&A, 문장수집, 자유롭게 이야기 (사진 업로드 가능)
이번 모임에서 함께 읽을 에세이의 저자들을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 루스 프랭클린(Ruth Franklin): 《뉴 리퍼블릭》 편집자로 유명한 미국의 문예비평가. http://ruthfranklin.net/author/bio/
― 찰스 시믹(Charles Simic, 1938~2023): 세르비아계 미국 시인이자 번역가, 《파리 리뷰》 시 부문 편집자. 1990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했습니다.
― 아서 루보(Arthur Lubow, 1952~):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뉴욕타임스 매거진》과 《뉴요커》의 문화비평가. https://arthurlubow.com/about/
루스 프랭클린은 「연기의 고리」에서 집단 참사를 미적으로 표현하는 일의 위험성과 공중전을 다루는 제발트의 방식이 불편할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저는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찰스 시믹은 「모의된 침묵」에서 자신이 어렸을 때 겪은 전쟁의 고통을 제발트의 작품과 함께 호소력 있게 이야기하고, 아서 루보는 「경계를 넘다」에서 제발트가 “기억하는 일을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행위”로 여겼음을 강조합니다.
이 세 명의 저자가 쓴 에세이에서도 앞선 인터뷰에서와 마찬가지로 “산 사람의 세계와 죽은 사람의 세계 사이의 경계가 완전히 치밀하지 않다”는 제발트의 일관된 견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번 3주차 모임도 잘 부탁드립니다. 무더위에 건강 유의하시고 조금이나마 시원한 일상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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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 서술자에게는 양심이 있고, 따라서 오랫동안 본문에 제시되는 문제들과 씨름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독자에게 줄 필요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참상의 주요 광경들은 절대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상기시켜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
『기억의 유령 - 폭력의 시대, 불가능의 글쓰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p153, W. G. 제발트 지음, 린 섀런 슈워츠 엮음, 공진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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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 [아우스터리츠]의 산문은 다른 어떤 작품보다 더 유령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먼지가 많고 안개가 짙게 낀 분위기, 이상하고 잘못 가리키는 불빛••••• 마치 실제로 안개 속에서 길을 잃으려는 듯이 말이죠. ”
『기억의 유령 - 폭력의 시대, 불가능의 글쓰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p156, W. G. 제발트 지음, 린 섀런 슈워츠 엮음, 공진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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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 네. 이런 성향이 어디서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어떤 이유로든 열외로 취급받는 사람들의 말을 듣는 걸 좋아합니다. 제 경험으로는 사람들이 일단 입을 열면 다른데서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해 줍니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이 제게 해 주는 이야기를 경청할 필요를 느꼈어요. ”
『기억의 유령 - 폭력의 시대, 불가능의 글쓰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p160, W. G. 제발트 지음, 린 섀런 슈워츠 엮음, 공진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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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15
“ 그 사실 때문에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일에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저술이란 그런 집착이죠. 그런 종류의 글쓰기가 좋은 점은, 이를테면 학술 논문을 쓰다가 정의 내리기 어려운 무언가를 쓰는 일로 전환했을 때, 완전한 자유를 가지게 된다는 겁니다. ”
『기억의 유령 - 폭력의 시대, 불가능의 글쓰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186, W. G. 제발트 지음, 린 섀런 슈워츠 엮음, 공진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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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묭
전쟁은 지옥이다 라거나 인간은 세계 어디를 가나 다 그렇다 라는 식의 설명으로는 무고한 사람들에게 가해진 잔학 행위를 잠시만이라도 잊을 수 없었다.
『기억의 유령 - 폭력의 시대, 불가능의 글쓰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268, W. G. 제발트 지음, 린 섀런 슈워츠 엮음, 공진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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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묭
“ 산 자와 죽은 자에게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던 제발트이니만큼, 어쨌든 그들은 그의 마음속에서 나란히 어깨를 맞부딪치고 있었으니까, 그는 아마도 지금 자신의 죽음을 차분히 바라보고 있으리라. ”
『기억의 유령 - 폭력의 시대, 불가능의 글쓰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308, W. G. 제발트 지음, 린 섀런 슈워츠 엮음, 공진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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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묭
완독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제발트의 작품 세계를 깊이 있게 탐색할 수 있는 책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작품에 대한 고민과 시선이 잘 드러나 있었고, 특히 문학이 기억의 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 인상 깊었어요.
또한,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문학이 단순한 이야기 전달을 넘어서 태도와 책임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새삼 느꼈습니다. 연보와 부록 등 다양한 구성도 책의 깊이를 더해 주었고요.
제발트의 작품을 아직 직접 읽어보진 않았지만, 이 책은 제발트의 작품들을 꼭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
화제로 지정된 대화
만렙토끼
양심없이 살아야 오래 살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 세상을 일찍 등지는 걸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네요. 심층 인터뷰라고 하니 전 예전에는 인터뷰는 다 비슷비슷한데(드라마나 영화 홍보 인터뷰 정도만 봤었거든요) 왜 매번 하는 건가? 하고 생각 했던 적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책을 읽고,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고, 조금 더 전문적인 인터뷰를 찾아보고 답변과 질문의 수준에 대해 알게 되면서 아, 이래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아직도 인터뷰를 많이 챙겨보지는 않아서 부족한 부분이 있는데 아티초크님이나 다른 모임원 분들은 어떤 인터뷰어를 좋아하시나요? 추천 해 주실 수 있나요?

아티초크
세상을 일찍 등진 선한 사람들은 제발트 식으로 말하자면 "어둠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은 기억의 무게에 꺾이고 만" 사람들입니다. 제발트는 『기억의 유령』에서 '기억의 무게'를 재차 강 조합니다. 웍텔은 제발트에게 기억은 어째서 그토록 피하기 어렵고 파괴적인지 묻습니다.
"그건 특정한 무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늙어 갈수록 더 많은 걸 잊는다고 할 수 있죠. 그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인생에서 방대한 부분들이 망각으로 사라진다고 할까요. 하지만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는 부분의 밀도는 상당히 높아집니다. 이로 말미암은 무게가 한번 짓누르기 시작하면 우리를 침몰시킵니다. 그런 종류의 기억은 정서적으로 짐이 되는 경향이 있죠."(109쪽)
작가 인터뷰집으로 『작가란 무엇인가』를 추천합니다. @모임 여러분 가운데 이미 읽은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 책은 세계적인 문호들이 미국의 저명한 문예지인 『파리 리뷰』와 한 인터뷰 모음집입니다. 작가 인터뷰가 거기서 거기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PS. 여담인데 오늘 <오징어 게임 3>를 봤습니다. 극중에서 용식(양동근)의 노모(강애심)가 말하는 대사가 매우 인상적이더군요. "세상이 참 불공평해요. 못된 놈들은 나쁜 짓을 해놓고도 남 탓 하면서 마음 편히 사는디. 착한 사람들은 뭐가 조금만 잘못되어도 다 자기 탓을 하면서"

[세트] 작가란 무엇인가 1~3 (헤밍웨이 탄생 123주년 기념 리커버) - 전3권 - 소설가들의 소설가를 인터뷰하다『작가란 무엇인가 』가 2022년, 헤밍웨이 탄생 123주년을 맞아 클래식한 디자인으로 리커버되었다. 『작가란 무엇인가』는 열두 명의 세계적인 작가가 미국의 저명한 문학잡지 『파리 리뷰』와 가진 인터뷰 모음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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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15
<작가란 무엇인가> 좋은 책이죠. 저는 구판으로 가지고 있는데 아직 완독은 못했습니다. 혹시 피리 리뷰팀이 언제 제발트를 인터뷰했나 했더니 그건 아닌가 봅니다. 인터뷰는 이 책을 봐야겠네요. ㅎ
만렙토끼
작가란 무엇인가...오 제목이 마음에 듭니다. 언뜻 봤던 것 같은데 이게 인터뷰집이였군요! 파리 리뷰도 이번 모임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는 건 안비밀입니다. 하하 감사해요.

아티초크
북클럽의 묘미는 '안비밀'이지요! 책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나누는 기쁨이 북클럽의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민자들』을 구매하셨다니 박수를 보냅니다. 짝짝짝!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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