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은 가장 늦게서야 발명(발견은 아니니)되었고 유럽에는 피보나치가 산반서를 통해서 소개했으나, 오랫동안 받아들여지지 않은 걸로 알고 있어요. 기독교적 관점에서 비어있음. 공허를 인정하기가 어려웠고, 당시 사용하던 로마숫자에 비해 위조가 쉬웠기 때문이라는데, 151쪽의 "처음에는 오직 0만이 존재했다" 읽으면서 아니 0은 나중에 생겼는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 좀 웃었습니다ㅎ <0>과 <1>의 상징이 이 책에서 중요한 부분인데 말이죠ㅎ
[도서 증정] 내일의 고전 <불새> 편집자와 함께 읽어요!
D-29

고양이라니

소전서가
오 그렇군요! 재밌는 이야기예요.결국 이 책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개념과 상징에 대한 전복이 깔려 있네요.

센스민트
폴란드인 ㅎㅎ

고양이라니
"창밖에서 무수히 많은 1들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96p)" 이 대목 볼 때 마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골콩드'가 연상됩니다. 등은 중력을 거스르지 못하고 곤두박질 치고 있고, 그림은 절박하다기 보다는 왈츠음악에 맞춰서 우아하게 내려오는 느낌(저에게는)이지만요
깃털처럼
@고양이라니 듣고 보니 정말 '골콩드'가 연상되네요!^^

소전서가
소설을 읽는 재미 중에 하나는, 이렇게 중간중간 이렇게 다양한 상상을 할 수 있게 하는 표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고양이라니
“ 진실은 실로 오묘하게 역전되어 있도다. 우리는 모든 삶에 목적이 있으며, 삶 자체가 바로 그 목적을 찾는 탐색의 연장이라고 착각하지만, 틀렸다. 삶 자체가 이미 목적인즉, 이것을 보호하려는 모든 실천이 비로소 생명이로구나. ”
『불새』 309p, 신종원 지음, 한규현 그림
문장모음 보기

고양이라니
로맹가리의 <자기 앞의 생>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든 생각은 우산이라도 사랑해야 하나? 였어요. 모모가 우산에게 아르튀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마지막에 우산을 찾으러 가거든요. 그러다 올봄에 순례길 위에서 까를로 로벨리의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사랑하니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니까 사랑하는 것이다, 라는 대목을 읽고 우리의 삶에서 사랑이 차지하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봤었거든요.
어떻게 사랑하는데 살아가지 않을 수가 있죠?
어떻게 살아있는데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죠?
불새가 이번 늦봄에서 여름, 한낮의 바깥보다 뜨겁게 다가온 건 이런 삶의 긍정인 것 같아요. 이미 죽은 자의 목소리를 좇고, 내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지나치게 설명적인 묘사와 현학적인 문장들 사이에서 가려진 한 줄 이야기가 마치 오랜 시간, 신성에 묻혀 가려진 단순하고 명백한 삶의 진리처럼 다가와서요.

소전서가
이 책의 헌사를 한번 더 들춰보게 됩니다.

russist
책 잘 받았습니다. 늦게나마 감사드립니다. 더 늦기 전에 뭐라도 써야지 싶어서 부랴부랴 들어왔네요.
딱 절반 정도를 읽었습니다. 여러가지 생각이 들기는 하는데, 그걸 여기 써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써야할지도 감이 잘 안 오네요. 감탄과 신음이 나오기는 했습니다. 그보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편집자께서는 이 책을 원고 상태에서부터 편집하면서 어떤 점을 느끼셨고,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편집하셔야겠다고 생각했는지를요.

소전서가
감탄과 신음이라. 제가 딱 작년과 올해를 넘기는 시점에 그러했는데요.
저는 이 작 품을 보면서, 새로운 소설의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는 소설이 어떤 태도와 방식을 요구받을까? 그럴 때 무엇보다 <이전보다는 다른 감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었고요. 아마 그럴수록 작가는 더욱 고독하고, 불리하고, 어느 때는 해명을 요구받기도 하겠죠. 그러나 그것이 예술로서의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들이 생명과 영원을 노래했으나, 그 이야기를 다시 소설로서 꺼내려면, 즉 소설이 계속 그 위상을 유지하려면 모든 매체의 <원작>으로서 다른 감각을 탄생시킬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이 소설을 성실히 따라갔습니다.
아 또한, 저는 편집자로서 이 소설이 가진 이야기 간의 연결을 고민하고, 작가와 이야기해 가면서 작업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연결이나 논리란, 이야기 전반에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소설은, 한번으로는 부족할 거예요. 한번 읽으시고 뭔지 모르는 매력이 느껴지신다면, 다시 한 번 더 읽어 보시길 추천드려요. 그러면 더 즐겁게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좋은 점도, 부족한 점도 더 잘 느낄 수 있을 것이고요. 어떤 부분에서 감탄을, 어떤 부분에서 신음을 내셨는지~~ ㅎㅎ 공유해 주세요.

russist
글쎄요. 저는 솔직히 말하면 이 소설의 기술 방식에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작가의 작품이기에 응원하고는 싶습니다만, 비판할 부분이 적지 않아서 뭐라 표현해야 할지 말을 고르고 있는데요... 일단 역학적이고 해부학적이며 음향학적인 기술 방식이 왜 필요한지 저에겐 잘 설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소설에 자주 나오는 특유의 직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긴장을 찾아보기 어려웠고, 테크니컬한 지식을 나열하는 정도에 그치기에 상당 부분 실패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특히 한 명의 공학도로서 저 역시 모든 분야를 알지는 못하지만, 특정 문장에서 보여지는 표현들은 사실 관계조차 모호하거나 작가가 이해하지 않고 쓴다는 인상마저 받았습니다. 이걸 문학적인 허용이라고 하기엔 글쎄요. 문학적 표현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세계를 확장하는 데 있는 것이지, 이미 지어진 이론이나 고유명사 속에 우리 자신을 한계짓기 위함은 아니지 않을까요.
또한 문제적인 것은 이 화자의 시선이 점유하고 있는 위치인데요, 어떻게 이렇게 자유로울 수가 있지 싶을 정도입니다. 어떤 의미로는 굉장히 권위적인 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점점 더 익숙해지지 않고 꺼림칙하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작가의 모든 작품을 본 건 아니지만 꼭 '신'이라는 주제를 다루지 않더라도 이렇게 썼던 걸로 기억합니다. 하나의 목소리밖에 내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었는데, 이 장편을 보면서 그 의심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음... 아무리 생각해도 미래의 고전을 기획한다는 것 자체가 제게는 잘 와닿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고전을 논할 때 우리는 뒤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미래의 고전'이라는 타이틀은 오지도 않은 과거의 권위를 도착적으로 상상하는 기획의 일환은 아니었을지 한번 생각해 볼 시점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실패는 어찌보면 예정되어 있었을 것이고요. 이미 시작부터 과거의 권위를 흉내내기에 급급해지기 마련이거든요. 잔뜩 힘이 들어간 문장을 보면서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애당초 무언가를 싸우려고 읽고 쓰는 게 아니라 그냥 좋아서 읽고 씁니다. 물론 이 좋음 안에는 싸움도 있겠지만 그게 진짜 목적은 아닐 겁니다. 이 차이가 이렇게 크구나 싶었습니다.

russist
음··· 먼저 책을 제공 받고 읽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크든 작든 이 책에 작게 연루(?)된만큼 한 명의 독자로서 이 책에 관해서 도움이 될 만한 대화를 해보고 싶었는데, 망설이기만 하다가 어느덧 마지막이 되어서야 제대로 글을 쓰게 되네요.
먼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좋은 순간들도 많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아무도 명명해주지 않아도 한 번도 조명되지 않았던 순간들이, 그냥 흘려보낼 법한 평범해 보이는 순간들이, 이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서 빛나는 걸 지켜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 정도로 높은 해상도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사람이 또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이 좋고 참 반가웠습니다. 이 소설을 쓰려고 들인 시간과 노고가 떠오르면서, 내가 세상을 너무 허투루 보고 지나치고 있지는 않은지 괜히 정신이 번쩍 차려지기도 했어요.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내가 모르는 단어와 고유명사와 이론들이 많구나 실감하기도 했습니다. 마치 이제는 잊힌 고유명사들을 모아놓은 오래된 백과사전을 읽는 것도 같았고, 처음 들어가 보는 숲길에서 몸의 감각이 활짝 열리고 곁눈이 바빠지는 기분좋은 피로감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저는 이 책의 서술 방식에 온전히 동의한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여전히 진리의 도구로서 과학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여기 나오는 몇 가지 서술 방식을 보고 있으면, 여기서 나열하고 있는 무수한 이론과 고유명사가 그야말로 현학적이고 낭비적인 수사처럼 활용된다는 의심을 감추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중반부 이후부터는 상당한 의심이 들었습니다. 소설의 뼈대는 사실상 그리 복잡하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성배를 에워싼 여러가지 역사적인 에피소드가 나열되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몇 가지 줄기가 병렬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분명 주류의 쓰기 방식은 아니라고 볼 수 있지만 전례를 찾아보자면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시험했던 몇몇 소설가들의 계보가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합니다. 게다가 거듭 언급하지만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화자의 목소리가 너무 거슬렸습니다. 달리 표현할 방법을 모르겠네요. 절대로 배면에 있는 법이 없고 연극적으로 앞으로 적극 튀어나와서 마치 웅변하듯이 모든 상황을 전지적 3인치의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해설하고 해석하고 분해하는 목소리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이조차 종교의 권위적인 목소리를 흉내냈다고 옹호할 여지는 있겠지만, 소설 전체에 일관되게 이런 한 가지 목소리만 내고 있다는 사실이 꺼림칙했습니다.
이 한 가지 목소리가 서로 다른 주제를 논할 때도 일관되지 않고, 서로 묘하게 어긋나고 충돌한다고 느끼는 대목도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불새 포획⟩ 장에서는 갑자기 월동지를 찾아가는 철새의 움직임을 지구 역학과 수학의 언어로써 거의 해체하고 있습니다(“새들은 ··· 진북에 대해서 자북이 형성하는 편각을 컴퍼스로 재듯 정밀하게 계산하면서”, 120쪽). 그런데 갑자기 ⟨급습⟩ 장에서는 신화 속의 늑대를 나열하면서 이들이 살아가는 야생을 '로고스'가 미치지 않는 영역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도무지 작가가 뭘 설득하려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야생은 로고스가 미치지 않는 영역, 의식의 외부에 매복한 그림자인즉,”). 주제는 병렬적일 수 있어도, 그 배면에 깔린 철학적인 시선은 같은 층차에서 움직여야 하는 게 아닐까요. 최대한 이해해보려고 해서 철새가 불새를 암시하는 존재라고 하더라도, 철새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초월적인 불새와 동일시되는 것인지 알기 어려웠고, 월동지를 찾아가는 철새의 항행은 그러면 야생의 움직임이 아닌 뭐라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혼란스러웠습니다. 한쪽에서는 야생의 철새가 역학과 수학을 꿰고 있는 절대적인 존재가 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신화적 늑대가 야생을 대표한다고 서술하는 것을 작가는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는 걸까요. 근데 가장 문제점은 이 문장들 자체도 문학적 허용을 논하기 어렵게 모호하고 오류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저에겐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 설명이 쉽지 않고 길게 될까봐 조금만 더 생각해보고 쓸지 말지 고민해보겠습니다...

russist
이 책을 읽고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거나, 이 책이 너무 심오하기에 여러 번 읽어야만 이해된다고 믿는 분들께 위로를 드리고 싶습니다. 실로 그렇게 한 작품을 대하는 자세는 나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많은 책을 읽어 나가면서 더 자기 세계를 넓혀갈 수 있을 테니까요. 다만 이 책에 관해서라면 전적으로 독자의 잘못은 아닐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어떤 문장은 독자에게 일부러 읽히지 않게끔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예시는 정말 많지만 아래 문장 하나만 본보기로 들겠습니다.
“새들의 관점에서, 지자기는 코리올리 힘에 의해 구부러진 선이나 띠 혹은 무늬와 같이 감지될 것이다. (…) 새들은 자기 머리를 나침반 삼아 위도와 경도를 측정하고, 진북에 대해 자북이 형성하는 편각을 컴퍼스로 재듯 정밀하게 계산하면서, 리우빌 정리를 이용해서 자기장을 끊고 월동지를 향해 날아간다.”(불새 포획, 120쪽)
사실 이 문장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하면서 읽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문장을 보고서 사실 덮을까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최근에 한국에서 라바투트 벵하민 같은 작가들이 굉장히 위험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음에도 각광을 받는 것을 보면서 심란한 마음이 들었었는데, 이 대목을 읽으면서 데자뷔를 느꼈습니다. 이 문장은 마치 과학에 막연히 관심을 갖고는 있으되, 익숙지는 않은 독자들이 과학에 가질 법한 호기심과 매혹과 혐오를 살짝씩 건드리는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다큐멘터리에나 나올 법한 저 문장 하나하나는 과학적 사실 관계에 엄밀한 것 같지만, 뜯어 보면 굉장히 모호하게 서술돼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 첫문장에서 활용된 직유의 보조관념 자체가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 문장의 문제점은 '지자기' 자체가 코리올리 힘(혹은 코리올리 효과)의 산물임을 감안하면, 괴이한 동어반복으로 읽힌다는 겁니다. 굳이 코리올리 힘이라는 고유명사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지자기력선은 이미 구부러진 선의 형태로 나타납니다(이 설명조차 완전히 엄밀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자기가 코리올리 힘에 의해 구부러진다'고 말하면, 마치 지자기에 코리올리 힘이 효과를 미쳐서 구부리는 것처럼 들리는데, 이것은 틀린 설명입니다. 따라서 애당초 이 보조관념 자체의 사실관계가 어그러져 있기 때문에 원관념도 설득이 되지 않는 실패한 직유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관계가 틀렸을 뿐 아니라 불필요하기까지 한 동어반복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 문장 하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점이며, 얼마나 더 많은 문장이 이럴까 하는 의심을 자아내고 있다는 겁니다. (뒷부분의 문장도 문제적인데, 리우빌 정리로써 자기장을 끊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작가에게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더욱 제가 문제로 보는 것은 현실의 철새가 저런 방식으로 월동지를 찾아가지 않음에도 저런 문장으로 말미암아 일종의 과학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다는 점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새에 얼마든지 신화적 상상력을 부여할 수 있고, 문학적 표현은 그것을 얼마든 허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사실관계를 가져오는 순간 작가는 책임을 져야 하고, 그 사실 관계에 충실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욱이 지자기, 새들이 월동지를 찾아가는 매커니즘, 진북과 자북 개념, 코리올리 효과, 리우빌 정리 같은 다분히 합의되어 있고 학술적으로 엄밀한 개념을 쓸 때는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왜냐하면 저러한 고유명사들은 문학에서 흔히 논하는 주관적 감상의 영역을 벗어나며 그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아카데믹한 노력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흔히 말하는 '슬픔'이나 '울분', '행복', 혹은 오늘 본 '달의 모습'처럼 얼마든 주관적으로 묘사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사실관계이자 이론이며, 객관적 준거 틀을 만들어서 모두 논의할 수 있도록 무수한 합의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러 학문으로 정립된 개념들입니다. 따라서 그 표현을 가져와서 문학적으로 표현하려는 작가들은 매우 제한적으로, 엄밀하게 쓸 수 있습니다.
물론 소설은 얼마든 환상에 대해 얘기할 수 있고, SF적인 얘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실을 제가 모르지 않습니다. 다만 그 환상이 현실을 호도하는 것이라면, 심지어 그것이 문학적 외피를 입은 것이라면 그건 문제라고 봅니다(현실에서 정말 과학자들이 철새들의 움직임을 저런 식으로 설명한다고 믿는 사람은 없기를 바랍니다). 과학을 마치 세상 만사를 설명하는 도구처 써서 어떤 고유명사에 부여된 권위를 참칭하려고 한다면, 저는 그 서술을 문학적으로든 과학적으로든 받아들일 수 없을 겁니다. 도대체 성경에서 '불새'가 그토록 고귀한 존재로 묘사된다고 하는 사실과 철새의 역학적이고 수학적인 움직임을 묘사하는 것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작가가 저렇게 해박하구나, 하는 사실 외에 제가 더 무얼 받아들여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불새와 철새들의 무리 이동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인지, 또 소설 내에서 어떤 연관성이 있어야 하는지, 나아가 철새들이 코리올리 힘을 이해하고 지자기의 개념과 진북과 자북의 불일치가 만들어내는 편각 개념과 통계 해석에서 쓰이는 리우빌 정리를 왜 알아야 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신은 과학적 사실관계에 능하고 그것을 뛰어넘는 존재라고 묘사하려고 했다면, 그것은 지극히 통속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마치 불행에 처한 인간이 신에게 인격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논리적 함정에 빠지는 것이니까요. 망치를 쥐면 세상만사가 못대가리로 보이는 것은 인간된 관점의 오류입니다.
사실 이 외에도 상당히 많습니다만 일일이 설명하기가 너무 벅차네요. 이 외에도 비슷한 오류가 제게 많이 보여서 힘들었습니다. 단순히 어떤 사실관계가 그릇되고 아니고의 문제를 떠나서, 저런 문장을 읽을 때마다 그냥 흐린 눈으로 지나쳐온 문장들에 의구심이 들었고, 그 때문에 소설에 집중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나아가 어쩌면 이 글이 정말 문장 하나하나의 사실관계를 아는 사람을 대상으로 쓰여지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어느 사안도 깊숙이 들어가지 않으면서 약간의 호기심과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만한 지적이고 섹시한 손톱만 보여주는 식이 아닌가 의심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과학주의라고 부르며, 과학주의와 과학은 다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마크 트웨인은 바른 말과 거의 올바른 말의 차이는 번갯불과 반딧불의 차이만큼 크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읽으면서 내내 마크 트웨인의 말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이게 제 솔직한 심정이고요... 물론 이런 제 소견이 저만의 의심이나 저의 실패일 수도 있겠죠. 저보다 훨씬 뛰어난 다른 독자분들은 이 소설에서 저보다 더 많은 것을 얻어가셨기를 바랍니다. 생각나는 대로 쓰다보니 조금 두서가 없는 점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하료
앞뒤가 안 맞는 서술인 것 같단 생각은 미처 해보질 못했었는데 그렇게 보실 수도 있군요.
사실 이 책을 읽을 때 유기적 연결성까지 꼼꼼히 따져볼 생각은 할 겨를도,그럴 힘도 없었는데 이런 비판을 보니까 나중에 다시 볼 때 참고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고양이라니
저도요ㅎ 약간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기는 한데, 뒤부터는 저는 흐린 눈으로 읽었습니다.

고양이라니
"성총의 일격. 감전과 전율.
영혼은 낱낱이 해부되었고, 영혼은 미끌미끌한 유약에 싸인 구체 형상의 전해질 덩어리에 지나지 않으며, 영혼은 전기 불꽃이다"
145쪽과 342쪽에서 같은 문장이 반복됩니다. 불새가 날아 오르는 장면으로 나아가고요. 또 잠시 읽는 걸 멈추고 생각해 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소전서가
어떤 의미일까요?! 고양이라니 님의 감각으로 들어보고싶어요!!

하료
저는 오늘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종교인의 고뇌를 다룬다는 면에서 흥미를 느끼고 이 책을 읽고 싶었는데 어찌어찌하니 좀 늦었네요.
'불새포획'부분 까지 읽었는데 많은 분들이 어렵다 하신 것처럼 저도 생소한 용어들과 지식들이 많이 나와서 검색해보기도 하고 그게 피곤하고 짜증나면 때로는 맥락만 짚어가면서 흘리기도 하면서 읽고 있습니다. 워낙 그런 부분들이 많아서 일일이 다 설명할 수는 없었을 거라 이해는 가는데 한번씩 짜증날 때 각주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래도 소설 읽는 게 좀 더 편하지 않았을까 잠깐 투덜거려봅니다만 ^^;; 그래도 앞으로 소설의 전개가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기대하면서 보고 있습니다. 바오로 신부의 선택과 도난당한 성배를 찾는 과정이 어떤 식으로 맞물려서 전개될 지 궁금하네요. 왠지 헬레나라는 인물이 바오로 신부의 심경과 선택에 중요한 역할을 한 듯한 인물로 나올 것 같은데 계속 읽어봐야겠죠.
완전히 다 읽어봐야 좀 더 확실한 비교평가가 가능하겠지만 왠지 전작 습지장례법에서보다 이번 작품에서 독자들로 하여금 소설을 계속 붙잡고 끌고나가게끔 하는 작가님의 능력은 더 나아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아무튼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소전서가
<오늘>부터 읽으셨는데 금방 따라잡히겠네요. 각주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했지만, 독자들이 너무 주변적인 것에 시선을 빼앗기고 집중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소설 밖의 언어로 소설 속의 세계를 설명하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금 달린 주석은, 불새의 언어로 오직 소설의 세계 안에서만 설명하고 있습니다. 소설 외의 텍스트가 아니라 소설 안의 텍스트로서,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관점을 추가하여 독서해 보시면 어떨까요.
<습지 장례법>을 읽으셨군요. 반갑습니다. 신종원이 어떤 세계를 가지고 있는 작가인지 감을 잡으셨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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