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요. 저는 솔직히 말하면 이 소설의 기술 방식에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작가의 작품이기에 응원하고는 싶습니다만, 비판할 부분이 적지 않아서 뭐라 표현해야 할지 말을 고르고 있는데요... 일단 역학적이고 해부학적이며 음향학적인 기술 방식이 왜 필요한지 저에겐 잘 설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소설에 자주 나오는 특유의 직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긴장을 찾아보기 어려웠고, 테크니컬한 지식을 나열하는 정도에 그치기에 상당 부분 실패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특히 한 명의 공학도로서 저 역시 모든 분야를 알지는 못하지만, 특정 문장에서 보여지는 표현들은 사실 관계조차 모호하거나 작가가 이해하지 않고 쓴다는 인상마저 받았습니다. 이걸 문학적인 허용이라고 하기엔 글쎄요. 문학적 표현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세계를 확장하는 데 있는 것이지, 이미 지어진 이론이나 고유명사 속에 우리 자신을 한계짓기 위함은 아니지 않을까요.
또한 문제적인 것은 이 화자의 시선이 점유하고 있는 위치인데요, 어떻게 이렇게 자유로울 수가 있지 싶을 정도입니다. 어떤 의미로는 굉장히 권위적인 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점점 더 익숙해지지 않고 꺼림칙하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작가의 모든 작품을 본 건 아니지만 꼭 '신'이라는 주제를 다루지 않더라도 이렇게 썼던 걸로 기억합니다. 하나의 목소리밖에 내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었는데, 이 장편을 보면서 그 의심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음... 아무리 생각해도 미래의 고전을 기획한다는 것 자체가 제게는 잘 와닿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고전을 논할 때 우리는 뒤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미래의 고전'이라는 타이틀은 오지도 않은 과거의 권위를 도착적으로 상상하는 기획의 일환은 아니었을지 한번 생각해 볼 시점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실패는 어찌보면 예정되어 있었을 것이고요. 이미 시작부터 과거의 권위를 흉내내기에 급급해지기 마련이거든요. 잔뜩 힘이 들어간 문장을 보면서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애당초 무언가를 싸우려고 읽고 쓰는 게 아니라 그냥 좋아서 읽고 씁니다. 물론 이 좋음 안에는 싸움도 있겠지만 그게 진짜 목적은 아닐 겁니다. 이 차이가 이렇게 크구나 싶었습니다.
[도서 증정] 내일의 고전 <불새> 편집자와 함께 읽어요!
D-29

russist

russist
음··· 먼저 책을 제공 받고 읽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크든 작든 이 책에 작게 연루(?)된만큼 한 명의 독자로서 이 책에 관해서 도움이 될 만한 대화를 해보고 싶었는데, 망설이기만 하다가 어느덧 마지막이 되어서야 제대로 글을 쓰게 되네요.
먼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좋은 순간들도 많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아무도 명명해주지 않아도 한 번도 조명되지 않았던 순간들이, 그냥 흘려보낼 법한 평범해 보이는 순간들이, 이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서 빛나는 걸 지켜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 정도로 높은 해상도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사람이 또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이 좋고 참 반가웠습니다. 이 소설을 쓰려고 들인 시간과 노고가 떠오르면서, 내가 세상을 너무 허투루 보고 지나치고 있지는 않은지 괜히 정신이 번쩍 차려지기도 했어요.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내가 모르는 단어와 고유명사와 이론들이 많구나 실감하기도 했습니다. 마치 이제는 잊힌 고유명사들을 모아놓은 오래된 백과사전을 읽는 것도 같았고, 처음 들어가 보는 숲길에서 몸의 감각이 활짝 열리고 곁눈이 바빠지는 기분좋은 피로감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저는 이 책의 서술 방식에 온전히 동의한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여전히 진리의 도구로서 과학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여기 나오는 몇 가지 서술 방식을 보고 있으면, 여기서 나열하고 있는 무수한 이론과 고유명사가 그야말로 현학적이고 낭비적인 수사처럼 활용된다는 의심을 감추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중반부 이후부터는 상당한 의심이 들었습니다. 소설의 뼈대는 사실상 그리 복잡하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성배를 에워싼 여러가지 역사적인 에피소드가 나열되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몇 가지 줄기가 병렬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분명 주류의 쓰기 방식은 아니라고 볼 수 있지만 전례를 찾아보자면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시험했던 몇몇 소설가들의 계보가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합니다. 게다가 거듭 언급하지만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화자의 목소리가 너무 거슬렸습니다. 달리 표현할 방법을 모르겠네요. 절대로 배면에 있는 법이 없고 연극적으로 앞으로 적극 튀어나와서 마치 웅변하듯이 모든 상황을 전지적 3인치의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해설하고 해석하고 분해하는 목소리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이조차 종교의 권위적인 목소리를 흉내냈다고 옹호할 여지는 있겠지만, 소설 전체에 일관되게 이런 한 가지 목소리만 내고 있다는 사실이 꺼림칙했습니다.
이 한 가지 목소리가 서로 다른 주제를 논할 때도 일관되지 않고, 서로 묘하게 어긋나고 충돌한다고 느끼는 대목도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불새 포획⟩ 장에서는 갑자기 월동지를 찾아가는 철새의 움직임을 지구 역학과 수학의 언어로써 거의 해체하고 있습니다(“새들은 ··· 진북에 대해서 자북이 형성하는 편각을 컴퍼스로 재듯 정밀하게 계산하면서”, 120쪽). 그런데 갑자기 ⟨급습⟩ 장에서는 신화 속의 늑대를 나열하면서 이들이 살아가는 야생을 '로고스'가 미치지 않는 영역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도무지 작가가 뭘 설득하려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야생은 로고스가 미치지 않는 영역, 의식의 외부에 매복한 그림자인즉,”). 주제는 병렬적일 수 있어도, 그 배면에 깔린 철학적인 시선은 같은 층차에서 움직여야 하는 게 아닐까요. 최대한 이해해보려고 해서 철새가 불새를 암시하는 존재라고 하더라도, 철새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초월적인 불새와 동일시되는 것인지 알기 어려웠고, 월동지를 찾아가는 철새의 항행은 그러면 야생의 움직임이 아닌 뭐라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혼란스러웠습니다. 한쪽에서는 야생의 철새가 역학과 수학을 꿰고 있는 절대적인 존재가 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신화적 늑대가 야생을 대표한다고 서술하는 것을 작가는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는 걸까요. 근데 가장 문제점은 이 문장들 자체도 문학적 허용을 논하기 어렵게 모호하고 오류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저에겐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 설명이 쉽지 않고 길게 될까봐 조금만 더 생각해보고 쓸지 말지 고민해보겠습니다...

russist
이 책을 읽고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거나, 이 책이 너무 심오하기에 여러 번 읽어야만 이해된다고 믿는 분들께 위로를 드리고 싶습니다. 실로 그렇게 한 작품을 대하는 자세는 나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많은 책을 읽어 나가면서 더 자기 세계를 넓혀갈 수 있을 테니까요. 다만 이 책에 관해서라면 전적으로 독자의 잘못은 아닐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어떤 문장은 독자에게 일부러 읽히지 않게끔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예시는 정말 많지만 아래 문장 하나만 본보기로 들겠습니다.
“새들의 관점에서, 지자기는 코리올리 힘에 의해 구부러진 선이나 띠 혹은 무늬와 같이 감지될 것이다. (…) 새들은 자기 머리를 나침반 삼아 위도와 경도를 측정하고, 진북에 대해 자북이 형성하는 편각을 컴퍼스로 재듯 정밀하게 계산하면서, 리우빌 정리를 이용해서 자기장을 끊고 월동지를 향해 날아간다.”(불새 포획, 120쪽)
사실 이 문장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하면서 읽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문장을 보고서 사실 덮을까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최근에 한국에서 라바투트 벵하민 같은 작가들이 굉장히 위험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음에도 각광을 받는 것을 보면서 심란한 마음이 들었었는데, 이 대목을 읽으면서 데자뷔를 느꼈습니다. 이 문장은 마치 과학에 막연히 관심을 갖고는 있으되, 익숙지는 않은 독자들이 과학에 가질 법한 호기심과 매혹과 혐오를 살짝씩 건드리는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다큐멘터리에나 나올 법한 저 문장 하나하나는 과학적 사실 관계에 엄밀한 것 같지만, 뜯어 보면 굉장히 모호하게 서술돼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 첫문장에서 활용된 직유의 보조관념 자체가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 문장의 문제점은 '지자기' 자체가 코리올리 힘(혹은 코리올리 효과)의 산물임을 감안하면, 괴이한 동어반복으로 읽힌다는 겁니다. 굳이 코리올리 힘이라는 고유명사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지자기력선은 이미 구부러진 선의 형태로 나타납니다(이 설명조차 완전히 엄밀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자기가 코리올리 힘에 의해 구부러진다'고 말하면, 마치 지자기에 코리올리 힘이 효과를 미쳐서 구부리는 것처럼 들리는데, 이것은 틀린 설명입니다. 따라서 애당초 이 보조관념 자체의 사실관계가 어그러져 있기 때문에 원관념도 설득이 되지 않는 실패한 직유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관계가 틀렸을 뿐 아니라 불필요하기까지 한 동어반복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 문장 하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점이며, 얼마나 더 많은 문장이 이럴까 하는 의심을 자아내고 있다는 겁니다. (뒷부분의 문장도 문제적인데, 리우빌 정리로써 자기장을 끊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작가에게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더욱 제가 문제로 보는 것은 현실의 철새가 저런 방식으로 월동지를 찾아가지 않음에도 저런 문장으로 말미암아 일종의 과학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다는 점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새에 얼마든지 신화적 상상력을 부여할 수 있고, 문학적 표현은 그것을 얼마든 허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사실관계를 가져오는 순간 작가는 책임을 져야 하고, 그 사실 관계에 충실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욱이 지자기, 새들이 월동지를 찾아가는 매커니즘, 진북과 자북 개념, 코리올리 효과, 리우빌 정리 같은 다분히 합의되어 있고 학술적으로 엄밀한 개념을 쓸 때는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왜냐하면 저러한 고유명사들은 문학에서 흔히 논하는 주관적 감상의 영역을 벗어나며 그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아카데믹한 노력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흔히 말하는 '슬픔'이나 '울분', '행복', 혹은 오늘 본 '달의 모습'처럼 얼마든 주관적으로 묘사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사실관계이자 이론이며, 객관적 준거 틀을 만들어서 모두 논의할 수 있도록 무수한 합의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러 학문으로 정립된 개념들입니다. 따라서 그 표현을 가져와서 문학적으로 표현하려는 작가들은 매우 제한적으로, 엄밀하게 쓸 수 있습니다.
물론 소설은 얼마든 환상에 대해 얘기할 수 있고, SF적인 얘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실을 제가 모르지 않습니다. 다만 그 환상이 현실을 호도하는 것이라면, 심지어 그것이 문학적 외피를 입은 것이라면 그건 문제라고 봅니다(현실에서 정말 과학자들이 철새들의 움직임을 저런 식으로 설명한다고 믿는 사람은 없기를 바랍니다). 과학을 마치 세상 만사를 설명하는 도구처 써서 어떤 고유명사에 부여된 권위를 참칭하려고 한다면, 저는 그 서술을 문학적으로든 과학적으로든 받아들일 수 없을 겁니다. 도대체 성경에서 '불새'가 그토록 고귀한 존재로 묘사된다고 하는 사실과 철새의 역학적이고 수학적인 움직임을 묘사하는 것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작가가 저렇게 해박하구나, 하는 사실 외에 제가 더 무얼 받아들여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불새와 철새들의 무리 이동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인지, 또 소설 내에서 어떤 연관성이 있어야 하는지, 나아가 철새들이 코리올리 힘을 이해하고 지자기의 개념과 진북과 자북의 불일치가 만들어내는 편각 개념과 통계 해석에서 쓰이는 리우빌 정리를 왜 알아야 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신은 과학적 사실관계에 능하고 그것을 뛰어넘는 존재라고 묘사하려고 했다면, 그것은 지극히 통속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마치 불행에 처한 인간이 신에게 인격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논리적 함정에 빠지는 것이니까요. 망치를 쥐면 세상만사가 못대가리로 보이는 것은 인간된 관점의 오류입니다.
사실 이 외에도 상당히 많습니다만 일일이 설명하기가 너무 벅차네요. 이 외에도 비슷한 오류가 제게 많이 보여서 힘들었습니다. 단순히 어떤 사실관계가 그릇되고 아니고의 문제를 떠나서, 저런 문장을 읽을 때마다 그냥 흐린 눈으로 지나쳐온 문장들에 의구심이 들었고, 그 때문에 소설에 집중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나아가 어쩌면 이 글이 정말 문장 하나하나의 사실관계를 아는 사람을 대상으로 쓰여지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어느 사안도 깊숙이 들어가지 않으면서 약간의 호기심과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만한 지적이고 섹시한 손톱만 보여주는 식이 아닌가 의심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과학주의라고 부르며, 과학주의와 과학은 다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마크 트웨인은 바른 말과 거의 올바른 말의 차이는 번갯불과 반딧불의 차이만큼 크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읽으면서 내내 마크 트웨인의 말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이게 제 솔직한 심정이고요... 물론 이런 제 소견이 저만의 의심이나 저의 실패일 수도 있겠죠. 저보다 훨씬 뛰어난 다른 독자분들은 이 소설에서 저보다 더 많은 것을 얻어가셨기를 바랍니다. 생각나는 대로 쓰다보니 조금 두서가 없는 점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하료
앞뒤가 안 맞는 서술인 것 같단 생각은 미처 해보질 못했었는데 그렇게 보실 수도 있군요.
사실 이 책을 읽을 때 유기적 연결성까지 꼼꼼히 따져볼 생각은 할 겨를도,그럴 힘도 없었는데 이런 비판을 보니까 나중에 다시 볼 때 참고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고양이라니
저도요ㅎ 약간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기는 한데, 뒤부터는 저는 흐린 눈으로 읽었습니다.

고양이라니
"성총의 일격. 감전과 전율.
영혼은 낱낱이 해부되었고, 영혼은 미끌미끌한 유약에 싸인 구체 형상의 전해질 덩어리에 지나지 않으며, 영혼은 전기 불꽃이다"
145쪽과 342쪽에서 같은 문장이 반복됩니다. 불새가 날아 오르는 장면으로 나아가고요. 또 잠시 읽는 걸 멈추고 생각해 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소전서가
어떤 의미일까요?! 고양이라니 님의 감각으로 들어보고싶어요!!

하료
저는 오늘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종교인의 고뇌를 다룬다는 면에서 흥미를 느끼고 이 책을 읽고 싶었는데 어찌어찌하니 좀 늦었네요.
'불새포획'부분 까지 읽었는데 많은 분들이 어렵다 하신 것처럼 저도 생소한 용어들과 지식들이 많이 나와서 검색해보기도 하고 그게 피곤하고 짜증나면 때로는 맥락만 짚어가면서 흘리기도 하면서 읽고 있습니다. 워낙 그런 부분들이 많아서 일일이 다 설명할 수는 없었을 거라 이해는 가는데 한번씩 짜증날 때 각주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래도 소설 읽는 게 좀 더 편하지 않았을까 잠깐 투덜거려봅니다만 ^^;; 그래도 앞으로 소설의 전개가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기대하면서 보고 있습니다. 바오로 신부의 선택과 도난당한 성배를 찾는 과정이 어떤 식으로 맞물려서 전개될 지 궁금하네요. 왠지 헬레나라는 인물이 바오로 신부의 심경과 선택에 중요한 역할을 한 듯한 인물로 나올 것 같은데 계속 읽어봐야겠죠.
완전히 다 읽어봐야 좀 더 확실한 비교평가가 가능하겠지만 왠지 전작 습지장례법에서보다 이번 작품에서 독자들로 하여금 소설을 계속 붙잡고 끌고나가게끔 하는 작가님의 능력은 더 나아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아무튼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소전서가
<오늘>부터 읽으셨는데 금방 따라잡히겠네요. 각주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했지만, 독자들이 너무 주변적인 것에 시선을 빼앗기고 집중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소설 밖의 언어로 소설 속의 세계를 설명하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금 달린 주석은, 불새의 언어로 오직 소설의 세계 안에서만 설명하고 있습니다. 소설 외의 텍스트가 아니라 소설 안의 텍스트로서,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관점을 추가하여 독서해 보시면 어떨까요.
<습지 장례법>을 읽으셨군요. 반갑습니다. 신종원이 어떤 세계를 가지고 있는 작가인지 감을 잡으셨을 것 같아요~

하료
소설 속에 간간이 드러나는 각주들을 보니 진행자님의 말씀이 무슨 느낌인지 알 것도 같습니다. 그 각주들도 확실히 텍스트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렵게 완독을 했지만 여운이 짙은 작품이기도 한데 저는 분명히 습지장례법 때보다 이 작품에서 진일보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계속해서 눈길을 주고 싶은 작가님이네요.

소전서가
4주차에 접어들었습니다. 시간이 정말 빠르네요. 다들 어려워하시지만, <완독>하면 뿌듯함을 느끼실 거라고 확신합니다. 낯선 방식의 소설을 다 읽어 냈다는! 자신감이 있을 것이고, 앞으로 도전의식을 불러오는 소설들에 대한, 에너지도 얻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의 생명을 볼모로 이루어지는 다양한 진실과 욕망의 관계들, 그 부조리함에 대해 한번 더 환기할 수 있길 바랍니다. 그 <생명>이 단지 소설 속, 드라마 속, 역사 속의 것이 아니라, 나의 가족이라면? 나의 친구라면? 나의 동료라면? 다양한 질문을 던져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제가 이번주에 같이 나누고 싶은 부분은 <여명>의 뒷부분입니다(288면~). 갤러해드가 브리타니아 지역에서 새로운 성전을 세워야 한다는 희망을 따라 <성배>가 있다는 성을 향합니다. 그리고 그 전에 자신을 성으로 데려갈 사공이자, 나루터 주인이자, 천사를 만나죠. 천사는 먼저 성배를 차지하기 위해 온 갤러헤드에게 격려와 암시를 해줍니다. 그 암시는 뒤에 있을 <붉은 기사>에 관한 것이겠죠. 이 부분에서는 저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장면을 여러번 읽고나서 그 뒤에 이어지는 <붉은기사>와의 만남을 보시면, 다양한 의미들이 읽힐 거예요. 붉은기사는 누구일까요...
다들 이 부분 어떻게 읽으실지,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 외의 상적이거나 소화가 잘 안 거나 하는 장면들은 무조건으로 공유해 주세요. 같이 이야기 나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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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길르앗아, 고단해 보이는구나.」
마침내 안개 바깥에서 해가 완전히 저문다. 적막이 시냇가에 내려앉고, 저녁노을의 어슴푸레한 분광 속에서 목소리 하나가 다가와 기사를 깨운다. 기사는 반나절 내내 사공을 기다리다가 까무룩 잠들어 있던 참이다. 나루터 주인은 일찍이 귀띔받았던 용모와 크게 배치되는데, 어느 아름다운 청년이 웃으며 지팡이를 내려놓은 것이다. 기사는 수년 전 카멜롯에서 목도했던 성배의 환상을 떠올린다. 황금빛 행렬의 선두에 섰던 바로 그 청년이 말뚝에서 밧줄을 풀고 있다.
「두려워 마라. 나는 거룩하신 분의 축복 아래 여행자들을 돕는 시종이다.」
기사는 몹시 놀랐지만 잠시뿐이다. 목소리가 두려움을 몰아내는 힘으로 공명하기 때문이다. 이윽고 천사가 다가오라고 손짓하자, 온몸이 즉시 부름에 응답한다. 나룻배 위에 올라타고 앉기까지 모든 일이 결정하기도 전에 이루어지지만, 의심도 불만도 뒤따르지 않는다. 나룻배는 두꺼운 널빤지를 대못과 나사로 보강한 반쪽짜리 목공품으로, 작은 물보라에도 위태롭게 휘청인다.
「꼬마 길르앗아,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널 지켜봐 왔다.」
천사가 이어서 말한다.
「어김없이 여정의 끝에 다다랐구나. 정말 잘해 주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기사가 묻는다.
「정녕 성배가 저곳에 있습니까?」
천사가 눈을 감고 지그시 머리를 흔든다.
「저곳에 있는 건 진실뿐이다.」
기사가 묻는다.
「그렇다면 여정의 끝을 암시하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천사가 웃음을 무너뜨린다. 입가에서 환희가 중단된다. 우려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꼬마 길르앗, 너는 네 삶에서 단 한 번도 겨루어 본 적 없는 분노와 유혹, 배신을 맞닥뜨리게 된다. 우리가 강물을 건너 다가가고 있는 저 흑암의 성채, 카보넥에서 말이다. 지금까지는 주님께서 널 보호하셨지만, 이 마지막 결투만큼은 온전히 네 힘으로 치러 내야 한다.」
기사가 단호하게 읊조린다.
「주님의 적을 기쁘게 쳐부수겠나이다.」
천사가 눈물 흘리며 고개를 떨어뜨린다.
「널 기다리는 자가 주님의 적도, 악령, 마귀도, 괴물도 아니기에 가슴이 찢어지도록 괴롭구나.」
천사가 이어서 말한다.
「꼬마 길르앗아, 잊지 말거라. 성배는 한 번도 네 곁에서 멀어진 적이 없다.」
모호한 당부와 함께 천사가 뱃머리를 가리켜 보인다. 천사는 마지막 노질로 나룻배를 물살 밖으로 밀어 올린다. 반질반질하게 다듬어진 잔돌들이 나룻배 밑바닥의 들보와 나무 막대들을 긁는다. 기사가 배에서 뛰어내려 뒤를 돌아보았을 때, 천사는 이미 사라져 자취를 감춘 뒤다.

하료
붉은 기사와 갤러해드의 대립, 베드로와 로마 제국의 대립 그리고 현재 시점의 토마스 수사와 페트리로 대표되는 이들의 대립, 이 작품에선 계속해서 대립과 싸움의 이미지가 반복해서 나타나고 그 속에는 성배가 계속해서 등장하는데 이 천사의 말은 저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 같았어요.

고양이라니
저는 지금 조로아스터교와 페르시아 전설을 지나,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 성배 전설로 이어진 산만한 곁들임 독서 중입니다. 바스크 분리주의자들 이야기까지는 책으로 찾아보기 어려워서 흐린 눈으로 넘어갔고요, 바스크 치즈케이크(?)로 대신할 예정입니다.
편집자님이 언급하신 부분을 더 꼼꼼히 읽어봐야 겠네요. <불새>가 가진 이질적인 것들, 수수께끼같은 모호함이 얼마나 저를 매혹시키는지 오랫만에 아이로 돌아가 가슴뛰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경외심 뭐 이런 감정들을 제외하면 전설의 불새를 만난 셈이지요.

선경서재
완독. 운영자(편집자)님의 질문에 답변을 해 봅니다.
1. 맘에 드는 문장이나 장면 알려주세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양을 찾아 떠나야 한다. 밀리p11"
2. 선뜻 이해가 어려운 부분, 더 깊게 이해를 했으면 하는 부분을 알려주세요.
; 작가가 선택한 많은 것들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메모한 것들을 일부 적어봅니다. 연결고리를 찾기 위한 독자의 몸부림이 이토록 필요한 책이라니...
수메르 사람 아브라함. 페니키아 사람들. 라틴어의 열두 번째 알파벳이 끄트머리가 구부러진 막대 모양의 상형 문자. 목자와 양. 유프라테스 강. 왕실 연금술사 자비르 이븐 하이얀. 아라비아 다마스쿠스 출신 왕자. 아르메니아 고원. 수메르인. 바드르. 스페인 총선. ETA. 바흐 작품번호 227번.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의 사랑의 딸 수녀회 회원 마르타 수녀. 닭이 세번 울기 전. 아비가일(주의 기쁨), 요안나(주의 은혜), 이사벨(주의 약속)의 죽음. 카를로스 대령. 고대 로마의 보병 대형을 상징물로 내세운 파시스트 정당, 소위 에스파냐 팔랑헤Falange Española는 리베라 장군의 유산. 켈트인. 브리튼 왕국의 궁정. 꼬마 길르앗. ....
3. 본인이 생각하는 줄거리나 주제를 공유해 주세요.
스물 여덟 살에 사제 서품을 받은 바오로 신부는 사제직 수행 중 발생한 신앙적 갈등으로 신부를 그만두려고 한다. 그에 앞서 베드로의 청으로 스페인으로 성지순례를 떠나게 되는데... 스페인은 총선을 앞두고 발렌시아 대성당의 성배가 도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라진 성배와 그것에 담아낸 인간의 염원은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는데...
"네 의사 따위는 묻지도 않고, 생명은 자기 앞의 일을 치르기 때문이다. 생명은 죽음에 관한 한 어떤 관용도 베풀지 않으며, 다만 재촉할 따름이니 말이다. 생명은 오로지 한 가지 의무에 복무하라 다그친다. 그것은 사는 것이다. 삶이라는 질서를 옹호하는 것이다. p182"
4. 자신이 생각하는 <문학 읽기의 즐거움>이 있다면 공유해주시고,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즐거움을 공유해 주세요.
어렵다기 보다는 답답한 소설이었습니다. 여러 사건과 이야기들이 중심 줄거리를 관통하지 못했죠. 중반 이후 부터는 단편소설을 읽는 기분으로 마음을 비웠습니다. 비슷한 느낌을 줄 법한 <노트르담 드 파리>와 <장미의 이름>, <죄와 벌> 등의 책들이 떠올랐습니다. 아쉽게도 언급한 고전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게, 이 소설은 낯선 것과 신선한 것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한 듯 합니다. 나열한 명사들을 모아놓으면 그럴듯한 환타지 소설처럼 보일 정도였지요.
적어도 '내일이 고전'이라면... 편집자님이 언급하신 '플롯, 새로운 표현의 감각, 아름다움, 독특한 세계, 잘 짜여진 한 편의 이야기에서 느끼는 카타르시스' 중 어느 하나는 있어야 할 듯 한데, 저는 이 책 소개에 언급된 '오직 하나의 질문과 대답' 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 소설은 읽혀야 하는 것 아닌가요? 소선서가가 선택한 '내일의 고전'이라는 타이틀이 아니었다면 이런 참을성을 가지고 완독하지 못했을 책입니다. 많이 아쉽네요.
Rhong
격하게 공감합니다

조이유
겨우 겨우 힘들게 읽었다. 불새를 보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회복한 신부가 다행이라고 느껴진다. 마지막 주교의 공식 의견서가 모든 과정을 마무리하는 것 같다. 그가 자유인으로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 모든 죄의식을 벗어버리고...
이 책을 읽으며 지금은 개신교인인데 한때 카톨릭에 1년 남짓 관심을 가진 젊은 시절도 생각났다. 고등학교 동창인 수녀가 된 친구의 안부도 떠올려 진다.
나에게는 읽기가 힘든? 책이지만 마무리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언제쯤 다시 읽어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이책을 통해 개신교와 카톨릭은 같은 성경을 사용하지만 너무 다른것 같다. 마치 진보와 보수 같은 느낌도 들고...
모처럼 어려운 책을 읽으며 작가의 의식 영역이 일반적이기 보다는 매우 특별한 영성으로 살아가는 분이 아닐까? 대부분 내가 읽은 소설은 대체로 가볍게 며칠만에 읽는 편인데 이책은 나에게는 전문서적 보다 더 힘든 경험을 하게하는 매우 생소하고 적응하기 어려운 소설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괜찮나요? 라는 의문도 생겼다.
한마디로 '불려는 지지만 보지 못한 불새처럼 모호하고 애매함이 있는 소설'

하료
늦게 시작을 했지만 저도 힘들게 다 읽긴 읽었네요.
다 읽고 나서 읽는사람의 선발대, 독서단 분들의 서평과 그동안 여기서 진행되었던 토론 내용들까지 쭉 훑어봤는데
역시 가장 많이 나오는 반응은 '난해하다'네요.
저 역시 읽고나서 총평을 해보자면...
앞서도 말했지만 생소한 용어들과 지식의 사용, 익숙하지 않은 서술 방식과 전개방식의 난해함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상하게 이 책엔 쉽게 폄하할 수 없는 그런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전 다 읽고 나서 현재 시대의 바오로 신부의 성배 이야기와 과거 여러 시대들 속 인물들의 성배 이야기들이 모두 인간의 삶이라는 이름의 하나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이루는 축들처럼 느껴졌고 그 끝없이 굴러가는 거대한 수레바퀴 의 모습 속에서 그 축들이 보였다 사라지고 다시 보였다 사라지고 하는 그런 이미지가 떠올랐네요.
아마 작가도 그런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이런 식으로 구성을 했던 것 아니었을까요.
또한 제가 인상깊게 봤던 챕터는 '불새의 애원' 부분이었어요.
저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가장 핵심이 되는 논지가 다른 챕터들에선 성배를 찾는,성배와 관련된 인물들의 이야기들에 빗대서 제시되는 것에 비해 비교적 뚜렷하게 제시되었던 장이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그런 걸 보면 작가가 의외로 친절하게 배려를 해준 건가(?) 싶기도 하네요. ㅋㅋ;;
아무튼 내일의 고전이라는 타이틀에 어울리는 묵직함을 갖춘 작품이라는 것엔 인정해주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아쉬운 점은 분명히 있는게 단어의 사용이 너무 불필요하다 싶을 정도로 어렵다는 점은 지적을 안 할 수가 없네요. 굳이 이 문장을 쓰기 위해서 이런 단어를 써야 할 이유가 있나? 싶은 문장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춘 어휘 사용을 해라 당연히 뭐 이런 건 아니지만 작가님이 더 좋은 작가가 되려면 앞으론 어휘를 좀 더 섬세하게 가다듬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사족이지만 습지장례법과 같은 시리즈로 구상하셔서 그런 건지 구성방식이 전작과 상당히 유사하다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과거 시대의 이야기들과 현재 시대의 이야기와 함께 병존하는 구성방식도 그렇고 마지막 부분에 천주교의 미사집전과 습지장례법의 마지막 진혼곡 부분이 겹치게 느껴지는 것도 그렇고.. 일부러 노린 걸까요? 두 권 다 읽어 보신 다른 분들도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요?

하료
불새의 애원 부분에서 세상과 생명의 심오한 원리에 대한 작가의 깊은 생각과 연약한 인간과 그들의 삶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불새와 헬레나의 목소리를 통해 다른 장들보다 비교적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하료
세계는 0과 1로 이루어져 있다.
0은 점이고 1은 선이다. 0은 영원,1은 하루이다. 0은 false, 1은 true.
『불새』 108p, 신종원 지음, 한규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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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료
“ 쓰지 말라는 명령에 거역하며 자기 운명을 기술하려는 자는 누구든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글자씩 공백을 쫓아내야 한다. 이렇게 문필가는 안개 같은 공허 속에서 삼라만상을 결정하는 파라미터, 즉 힘의 이미지를 어루만진다. ”
『불새』 p157, 신종원 지음, 한규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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