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에 간간이 드러나는 각주들을 보니 진행자님의 말씀이 무슨 느낌인지 알 것도 같습니다. 그 각주들도 확실히 텍스트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렵게 완독을 했지만 여운이 짙은 작품이기도 한데 저는 분명히 습지장례법 때보다 이 작품에서 진일보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계속해서 눈길을 주고 싶은 작가님이네요.
[도서 증정] 내일의 고전 <불새> 편집자와 함께 읽어요!
D-29

하료

소전서가
4주차에 접어들었습니다. 시간이 정말 빠르네요. 다들 어려워하시지만, <완독>하면 뿌듯함을 느끼실 거라고 확신합니다. 낯선 방식의 소설을 다 읽어 냈다는! 자신감이 있을 것이고, 앞으로 도전의식을 불러오는 소설들에 대한, 에너지도 얻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의 생명을 볼모로 이루어지는 다양한 진실과 욕망의 관계들, 그 부조리함에 대해 한번 더 환기할 수 있길 바랍니다. 그 <생명>이 단지 소설 속, 드라마 속, 역사 속의 것이 아니라, 나의 가족이라면? 나의 친구라면? 나의 동료라면? 다양한 질문을 던져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제가 이번주에 같이 나누고 싶은 부분은 <여명>의 뒷부분입니다(288면~). 갤러해드가 브리타니아 지역에서 새로운 성전을 세워야 한다는 희망을 따라 <성배>가 있다는 성을 향합니다. 그리고 그 전에 자신을 성으로 데려갈 사공이자, 나루터 주인이자, 천사를 만나죠. 천사는 먼저 성배를 차지하기 위해 온 갤러헤드에게 격려와 암시를 해줍니다. 그 암시는 뒤에 있을 <붉은 기사>에 관한 것이겠죠. 이 부분에서는 저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장면을 여러번 읽고나서 그 뒤에 이어지는 <붉은기사>와의 만남을 보시면, 다양한 의미들이 읽힐 거예요. 붉은기사는 누구일까요...
다들 이 부분 어떻게 읽으실지,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 외의 상적이거나 소화가 잘 안 거나 하는 장면들은 무조건으로 공유해 주세요. 같이 이야기 나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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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길르앗아, 고단해 보이는구나.」
마침내 안개 바깥에서 해가 완전히 저문다. 적막이 시냇가에 내려앉고, 저녁노을의 어슴푸레한 분광 속에서 목소리 하나가 다가와 기사를 깨운다. 기사는 반나절 내내 사공을 기다리다가 까무룩 잠들어 있던 참이다. 나루터 주인은 일찍이 귀띔받았던 용모와 크게 배치되는데, 어느 아름다운 청년이 웃으며 지팡이를 내려놓은 것이다. 기사는 수년 전 카멜롯에서 목도했던 성배의 환상을 떠올린다. 황금빛 행렬의 선두에 섰던 바로 그 청년이 말뚝에서 밧줄을 풀고 있다.
「두려워 마라. 나는 거룩하신 분의 축복 아래 여행자들을 돕는 시종이다.」
기사는 몹시 놀랐지만 잠시뿐이다. 목소리가 두려움을 몰아내는 힘으로 공명하기 때문이다. 이윽고 천사가 다가오라고 손짓하자, 온몸이 즉시 부름에 응답한다. 나룻배 위에 올라타고 앉기까지 모든 일이 결정하기도 전에 이루어지지만, 의심도 불만도 뒤따르지 않는다. 나룻배는 두꺼운 널빤지를 대못과 나사로 보강한 반쪽짜리 목공품으로, 작은 물보라에도 위태롭게 휘청인다.
「꼬마 길르앗아,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널 지켜봐 왔다.」
천사가 이어서 말한다.
「어김없이 여정의 끝에 다다랐구나. 정말 잘해 주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기사가 묻는다.
「정녕 성배가 저곳에 있습니까?」
천사가 눈을 감고 지그시 머리를 흔든다.
「저곳에 있는 건 진실뿐이다.」
기사가 묻는다.
「그렇다면 여정의 끝을 암시하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천사가 웃음을 무너뜨린다. 입가에서 환희가 중단된다. 우려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꼬마 길르앗, 너는 네 삶에서 단 한 번도 겨루어 본 적 없는 분노와 유혹, 배신을 맞닥뜨리게 된다. 우리가 강물을 건너 다가가고 있는 저 흑암의 성채, 카보넥에서 말이다. 지금까지는 주님께서 널 보호하셨지만, 이 마지막 결투만큼은 온전히 네 힘으로 치러 내야 한다.」
기사가 단호하게 읊조린다.
「주님의 적을 기쁘게 쳐부수겠나이다.」
천사가 눈물 흘리며 고개를 떨어뜨린다.
「널 기다리는 자가 주님의 적도, 악령, 마귀도, 괴물도 아니기에 가슴이 찢어지도록 괴롭구나.」
천사가 이어서 말한다.
「꼬마 길르앗아, 잊지 말거라. 성배는 한 번도 네 곁에서 멀어진 적이 없다.」
모호한 당부와 함께 천사가 뱃머리를 가리켜 보인다. 천사는 마지막 노질로 나룻배를 물살 밖으로 밀어 올린다. 반질반질하게 다듬어진 잔돌들이 나룻배 밑바닥의 들보와 나무 막대들을 긁는다. 기사가 배에서 뛰어내려 뒤를 돌아보았을 때, 천사는 이미 사라져 자취를 감춘 뒤다.

하료
붉은 기사와 갤러해드의 대립, 베드로와 로마 제국의 대립 그리고 현재 시점의 토마스 수사와 페트리로 대표되는 이들의 대립, 이 작품에선 계속해서 대립과 싸움의 이미지가 반복해서 나타나고 그 속에는 성배가 계속해서 등장하는데 이 천사의 말은 저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 같았어요.

고양이라니
저는 지금 조로아스터교와 페르시아 전설을 지나,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 성배 전설로 이어진 산만한 곁들임 독서 중입니다. 바스크 분리주의자들 이야기까지는 책으로 찾아보기 어려워서 흐린 눈으로 넘어갔고요, 바스크 치즈케이크(?)로 대신할 예정입니다.
편집자님이 언급하신 부분을 더 꼼꼼히 읽어봐야 겠네요. <불새>가 가진 이질적인 것들, 수수께끼같은 모호함이 얼마나 저를 매혹시키는지 오랫만에 아이로 돌아가 가슴뛰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경외심 뭐 이런 감정들을 제외하면 전설의 불새를 만난 셈이지요.

선경서재
완독. 운영자(편집자)님의 질문에 답변을 해 봅니다.
1. 맘에 드는 문장이나 장면 알려주세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양을 찾아 떠나야 한다. 밀리p11"
2. 선뜻 이해가 어려운 부분, 더 깊게 이해를 했으면 하는 부분을 알려주세요.
; 작가가 선택한 많은 것들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메모한 것들을 일부 적어봅니다. 연결고리를 찾기 위한 독자의 몸부림이 이토록 필요한 책이라니...
수메르 사람 아브라함. 페니키아 사람들. 라틴어의 열두 번째 알파벳이 끄트머리가 구부러진 막대 모양의 상형 문자. 목자와 양. 유프라테스 강. 왕실 연금술사 자비르 이븐 하이얀. 아라비아 다마스쿠스 출신 왕자. 아르메니아 고원. 수메르인. 바드르. 스페인 총선. ETA. 바흐 작품번호 227번.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의 사랑의 딸 수녀회 회원 마르타 수녀. 닭이 세번 울기 전. 아비가일(주의 기쁨), 요안나(주의 은혜), 이사벨(주의 약속)의 죽음. 카를로스 대령. 고대 로마의 보병 대형을 상징물로 내세운 파시스트 정당, 소위 에스파냐 팔랑헤Falange Española는 리베라 장군의 유산. 켈트인. 브리튼 왕국의 궁정. 꼬마 길르앗. ....
3. 본인이 생각하는 줄거리나 주제를 공유해 주세요.
스물 여덟 살에 사제 서품을 받은 바오로 신부는 사제직 수행 중 발생한 신앙적 갈등으로 신부를 그만두려고 한다. 그에 앞서 베드로의 청으로 스페인으로 성지순례를 떠나게 되는데... 스페인은 총선을 앞두고 발렌시아 대성당의 성배가 도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라진 성배와 그것에 담아낸 인간의 염원은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는데...
"네 의사 따위는 묻지도 않고, 생명은 자기 앞의 일을 치르기 때문이다. 생명은 죽음에 관한 한 어떤 관용도 베풀지 않으며, 다만 재촉할 따름이니 말이다. 생명은 오로지 한 가지 의무에 복무하라 다그친다. 그것은 사는 것이다. 삶이라는 질서를 옹호하는 것이다. p182"
4. 자신이 생각하는 <문학 읽기의 즐거움>이 있다면 공유해주시고,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즐거움을 공유해 주세요.
어렵다기 보다는 답답한 소설이었습니다. 여러 사건과 이야기들이 중심 줄거리를 관통하지 못했죠. 중반 이후 부터는 단편소설을 읽는 기분으로 마음을 비웠습니다. 비슷한 느낌을 줄 법한 <노트르담 드 파리>와 <장미의 이름>, <죄와 벌> 등의 책들이 떠올랐습니다. 아쉽게도 언급한 고전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게, 이 소설은 낯선 것과 신선한 것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한 듯 합니다. 나열한 명사들을 모아놓으면 그럴듯한 환타지 소설처럼 보일 정도였지요.
적어도 '내일이 고전'이라면... 편집자님이 언급하신 '플롯, 새로운 표현의 감각, 아름다움, 독특한 세계, 잘 짜여진 한 편의 이야기에서 느끼는 카타르시스' 중 어느 하나는 있어야 할 듯 한데, 저는 이 책 소개에 언급된 '오직 하나의 질문과 대답' 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 소설은 읽혀야 하는 것 아닌가요? 소선서가가 선택한 '내일의 고전'이라는 타이틀이 아니었다면 이런 참을성을 가지고 완독하지 못했을 책입니다. 많이 아쉽네요.
Rhong
격하게 공감합니다

조이유
겨우 겨우 힘들게 읽었다. 불새를 보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회복한 신부가 다행이라고 느껴진다. 마지막 주교의 공식 의견서가 모든 과정을 마무리하는 것 같다. 그가 자유인으로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 모든 죄의식을 벗어버리고...
이 책을 읽으며 지금은 개신교인인데 한때 카톨릭에 1년 남짓 관심을 가진 젊은 시절도 생각났다. 고등학교 동창인 수녀가 된 친구의 안부도 떠올려 진다.
나에게는 읽기가 힘든? 책이지만 마무리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언제쯤 다시 읽어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이책을 통해 개신교와 카톨릭은 같은 성경을 사용하지만 너무 다른것 같다. 마치 진보와 보수 같은 느낌도 들고...
모처럼 어려운 책을 읽으며 작가의 의식 영역이 일반적이기 보다는 매우 특별한 영성으로 살아가는 분이 아닐까? 대부분 내가 읽은 소설은 대체로 가볍게 며칠만에 읽는 편인데 이책은 나에게는 전문서적 보다 더 힘든 경험을 하게하는 매우 생소하고 적응하기 어려운 소설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괜찮나요? 라는 의문도 생겼다.
한마디로 '불려는 지지만 보지 못한 불새처럼 모호하고 애매함이 있는 소설'

하료
늦게 시작을 했지만 저도 힘들게 다 읽긴 읽었네요.
다 읽고 나서 읽는사람의 선발대, 독서단 분들의 서평과 그동안 여기서 진행되었던 토론 내용들까지 쭉 훑어봤는데
역시 가장 많이 나오는 반응은 '난해하다'네요.
저 역시 읽고나서 총평을 해보자면...
앞서도 말했지만 생소한 용어들과 지식의 사용, 익숙하지 않은 서술 방식과 전개방식의 난해함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상하게 이 책엔 쉽게 폄하할 수 없는 그런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전 다 읽고 나서 현재 시대의 바오로 신부의 성배 이야기와 과거 여러 시대들 속 인물들의 성배 이야기들이 모두 인간의 삶이라는 이름의 하나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이루는 축들처럼 느껴졌고 그 끝없이 굴러가는 거대한 수레바퀴 의 모습 속에서 그 축들이 보였다 사라지고 다시 보였다 사라지고 하는 그런 이미지가 떠올랐네요.
아마 작가도 그런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이런 식으로 구성을 했던 것 아니었을까요.
또한 제가 인상깊게 봤던 챕터는 '불새의 애원' 부분이었어요.
저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가장 핵심이 되는 논지가 다른 챕터들에선 성배를 찾는,성배와 관련된 인물들의 이야기들에 빗대서 제시되는 것에 비해 비교적 뚜렷하게 제시되었던 장이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그런 걸 보면 작가가 의외로 친절하게 배려를 해준 건가(?) 싶기도 하네요. ㅋㅋ;;
아무튼 내일의 고전이라는 타이틀에 어울리는 묵직함을 갖춘 작품이라는 것엔 인정해주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아쉬운 점은 분명히 있는게 단어의 사용이 너무 불필요하다 싶을 정도로 어렵다는 점은 지적을 안 할 수가 없네요. 굳이 이 문장을 쓰기 위해서 이런 단어를 써야 할 이유가 있나? 싶은 문장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춘 어휘 사용을 해라 당연히 뭐 이런 건 아니지만 작가님이 더 좋은 작가가 되려면 앞으론 어휘를 좀 더 섬세하게 가다듬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사족이지만 습지장례법과 같은 시리즈로 구상하셔서 그런 건지 구성방식이 전작과 상당히 유사하다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과거 시대의 이야기들과 현재 시대의 이야기와 함께 병존하는 구성방식도 그렇고 마지막 부분에 천주교의 미사집전과 습지장례법의 마지막 진혼곡 부분이 겹치게 느껴지는 것도 그렇고.. 일부러 노린 걸까요? 두 권 다 읽어 보신 다른 분들도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요?

하료
불새의 애원 부분에서 세상과 생명의 심오한 원리에 대한 작가의 깊은 생각과 연약한 인간과 그들의 삶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불새와 헬레나의 목소리를 통해 다른 장들보다 비교적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하료
세계는 0과 1로 이루어져 있다.
0은 점이고 1은 선이다. 0은 영원,1은 하루이다. 0은 false, 1은 true.
『불새』 108p, 신종원 지음, 한규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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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료
“ 쓰지 말라는 명령에 거역하며 자기 운명을 기술하려는 자는 누구든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글자씩 공백을 쫓아내야 한다. 이렇게 문필가는 안개 같은 공허 속에서 삼라만상을 결정하는 파라미터, 즉 힘의 이미지를 어루만진다. ”
『불새』 p157, 신종원 지음, 한규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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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료
선을 향해 걷게 될 것이다. 선이 되어 갈 것이다. 그림자는 검고 어둡다.
『불새』 p216, 신종원 지음, 한규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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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료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을 더 말하자면 메인 서사라고 할 수 있을 바오로 신부와 헬레나의 사연과 목소리가 좀 더 드러났으면 소설이 더 흥미로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습지장례법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번 불새에서도 같은 생각을 했네요. 그럼에도 전작보다 플롯의 흥미를 유발하는 부분이 더 나아졌다고 여기기에 아쉬운 점이면서도 작가님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하네요.

바나나
겨우겨우 완독했습니다. 중간중간 몰입감 읽게 읽혔던 부분과 무슨말인지 모르겠는 부분이 섞여 있었던것 같아요. 처음으로 돌아가다시 읽어보려고요. 전체 그림을 한번 보고 다시 읽으면 이해 안되던 디테일이 다르게 다가올것으로 기대하면서요.

고양이라니
앗, 저는 바스크 분리주의 무장조직(ETA)단원이었던 페트리를 빌바오 현지 핀초스 투어로 알게 되었다는 대목에서 ETA 순서를 바꾸면 EAT가 되는 걸 연상하며 낄낄거리며 웃었습니다.

고양이라니
저도 책을 읽으면서 성배와 관련된 역사나 신화, 전설 같은 여러 이야기들 말고도 문자나 기호, 발성 방법에 대해 장황할 만큼 자세하게 언급의 이유를 이해하고 싶어서 두 번 째는 여러 감각을 사용해서 책을 읽어보려고 했어요. 책에 유난히 다양한 감각을 위한 표현들이 많다고 생각했거든요. 마치 중세 시대 글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성서를 이해했을까를 생각하면서요. 성당 안에 들어가면 높은 천장과 어스럼한 성당 내부에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빛이 위에서 아래로 비치고, 제단 정면과 양 옆에 종교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파이프오르간은 대부분 위에 2층에 위치해 있고, 높은 종탑에서 종이 울립니다. 모든 것은 위와 아래를 수직적으로 구분하는데 적절하게 기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종교화도 수직으로 구성된 공간 안에 땅에 붙어 있는 사람들, 어떨 때는 땅 속의 해골까지, 그리고 상승하는 예수님이나 천사, 성인 등으로 삶과 영생을 높낮이를 전달하는 그림이 꽤 많고요. 책에서도 이러한 높낮이를 표현한 구절이 많은데, 저는 가장 낮은 위치에 헬레나를 두고, 높낮이에서 자유로운 불새의 상승과 하강을 이야기한 것이 마음에 듭니다. 지나치게 장황하고 현학적인 표현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사실 종교가 없는 저에게 성서의 구절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라, 잠시 의도인가도 생각해봤어요. 대부분 신비주의로 권위를 세우려고 하는 것들은 그렇잖아요. 어려운 말로 현혹시키는거죠. 그리고 아직 작가의 다른 작품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그 의도대로 저는 이 작품에 확실히 낚였습니다.
저도 책을 읽으면서 성배와 관련된 역사나 신화, 전설 같은 여러 이야기들 말고도 문자나 기호, 발성 방법에 대해 장황할 만큼 자세한 언급의 이유를 이해하고 싶어서 두 번 째는 여러 감각을 사용해서 책을 읽어보려고 했어요. 책에 유난히 다양한 감각을 위한 표현들이 많다고 생각했거든요. 마치 중세 시대 글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성서를 이해했을까를 생각하면서요. 성당 안에 들어가면 높은 천장과 어스름한 성당 내부에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빛이 위에서 아래로 비치고, 제단 정면과 양 옆에 종교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파이프오르간은 대부분 위에 2층에 위치해 있고, 높은 종탑에서 종이 울립니다. 모든 것은 위와 아래를 수직적으로 구분하는데 적절하게 기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종교화도 수직으로 구성된 공간 안에 땅에 붙어 있는 사람들, 어떨 때는 땅 속의 해골까지, 그리고 상승하는 예수님이나 천사, 성인 등으로 삶과 영생을 높낮이를 전달하는 그림이 꽤 많고요. 책에서도 이러한 높낮이를 표현한 구절이 많은데, 저는 가장 낮은 위치에 헬레나를 두고, 높낮이에서 자유로운 불새의 상승과 하강을 이야기한 것이 마음에 듭니다. 지나치게 장황하고 현학적인 표현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사실 종교가 없는 저에게 성서의 구절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라, 잠시 의도인가도 생각해 봤어요. 그리고 아직 작가의 다른 작품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그 의도대로 저는 이 작품에 확실히 낚였습니다.
헬레나는 가장 낮은 위치에서 침묵과의 대결을 시작할 것이다. (142p)(380p) 그로써 모든 하강이 몰락이나 쇠퇴로 이어지는 표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 이따금 어떤 하강의 임의의 낙차를 극복하는 요한 베르누이의 삼각함수처럼 사이클로이드 곡선을 그리며 우아하고 신속하게 진리에 다다른다는 사실을 – 말 한마디 없이 알게 할 것이다. (381p)
바흐의 모테트. 작품 번호 227번. 죽음, 사탄, 지옥에서 낮은 음으로 하강했다가 예수, 기쁨, 자유에서 높은 음으로 상승하는 워드 페인팅 기법에 의해 아찔한 낙차를 실감할 수 있었다. (85p)
책은 이제 이런 신성한 분위기를 마련하고, 오랜 시간 찾아온 신성의 실재 성배를 쫓는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기에 오랜 신화와 역사, 문학을 가지고 와서요. 압드 알라흐만 왕자의 이야기로 어떻게 스페인에 성배가 오게 되었으며, 원탁의 기사와 프랑코 정권의 이야기로 성배를 찾으려고 했던 사람들 그것이 약간의 신실함에서 탐욕으로 변하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하고 생각했고요. 지금도 우리는 탐욕으로 성배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때의 성배라는 게 꼭 종교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요.
성찬례의 도구가 한낱 기적의 수단으로 추락하여, 헛된 꿈이나 더러운 야심을 품은 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마는 것이다. (132p)
종은 위아래가 뒤집힌 성배이다. (138p), 콘수에타를 알리는 전례의 종을 울리며 도시의 영혼이 타락하지 않도록 감시해 왔다. (133p)
이제야 알겠다. 성배는 단지 형상일 뿐, 깨진 컵도 마법의 가마솥도 아니었구나. (307p)
가로 폭이 14.5센티미터, 세로 폭이 9.7센티미터에 불과한 작은 몸뚱이 안에서 삶과 죽음이 교환된다. (324p)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전쟁들. 권력자나 위정자들이 탐욕의 성배를 찾는 과정에서 희생되는 수많은 사람들. 종교가, 민족이, 나라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피를 흘리지만, 정작 항상 대립이란 하나가 태어나면 자연스레 태어나는 것으로, 사라질 수가 없어요. 둘은 항상 공존할 수밖에 없으니, 전쟁이나 다른 방법으로 제거하겠다는 것은 어리석고 불가능한 일이 됩니다. 그게 불새의 존재로 보여주기도 하고요.
어떤 생명을 살리고 어떤 생명을 죽일지 선택하는 건 언제나 너희 자신의 몫이다. (176p) 네 몸 안에서, 네가 다스리는 너의 왕국 안에서 일어난 일을 남에게 의탁하지 말아라. (177p)
생명도 책과 같다. 모든 고통이 삶의 한 면이다. 잔인한 일이다. 네 의사 따위는 묻지도 않고, 생명은 자기 앞의 일을 치르기 때문이다. 생명은 죽음에 관한 한 어떤 관용도 베풀지 않으며, 다만 재촉할 따름이니 말이다. 생명은 오로지 한 가지 의무에 복무하라 다그친다. 그것은 사는 것이다. 삶이라는 질서를 옹호하는 것이다. (177p)
진실은 실로 오묘하게 역전되어 있도다. 우리는 모든 삶에 목적이 있으며, 삶 자체가 바로 그 목적을 찾는 탐색의 연장이라고 착각하지만, 틀렸다. 삶 자체가 이미 목적인즉, 이것을 보호하려는 모든 실천이 비로소 생명이로구나. (307p)
세상이 면이라면 삶은 선일 터이다. 선은 탐색하고, 선은 연속되며, 선은 횡단한다. 삶은 구부러지건 펼쳐지려는 충동의 표현인즉, 어느 방향으로든 경로를 형성해야 한다. (316p) 사람을 하나의 점으로, 낱개의 기호로(316p) 점은 제 위치를 옮기려는 갖가지 외력에 저항하여 인내하고 몸부림치는 덩어리다. 오직 확고부동한 영성만이 드물게 점의 지위를 획득할 따름이다. (316p) 세상을 게임판처럼 들여다보고, 사람 목숨을 행마법처럼 다루지 않습니까? (317p)
오늘날 교회를 공격 중인 내부의 전쟁들(407p) 모두 전통과 진보의 대결로부터 비롯됩니다. 성 베드로의 이름에서 가르침을 얻듯,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공동체 위에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다가오는 외부의 전쟁들을 대비하기 위해 다시 한번 하나의 몸으로 결속되어야 합니다. (407p) 모든 전쟁은 생명과 죽음의 대결로 귀결됩니다. (407p)
한국과 스페인은 닮은 점이 참 많아. (320p) 하지만 무엇보다......끔찍한 동족상잔을 벌였지. (320p) 옆집 사는 이웃들끼리 또다시 쏘고, 지르고, 불태워 죽이게 될까 봐. 에스파냐는 그런 땅이라네. 이베리아의 진홍빛 토양 밑에 죽음과 분노와 눈물을 묻어 두고 영영 잊어버리기로 약속한 땅. (321p)
대립되는 하나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함께 하는 것은 가능하고, 그것이 결국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이야기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책에서도 언급되는 프랑코 독재가 끝난 뒤의 사면법 <팍토 델 올비도>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요.
영성체는 신의 육신을 섭취함으로써 동형 반복을 확인하는 의식이다. 몸과 몸의 차이 없음. 하나의 몸은 다른 몸의 부분이며 전체이다. 어떤 몸을 죽일 수 있다면, 다른 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가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몸과 몸 사이의 계급을 허물었던 것처럼. 그렇다면 성사는 이 명제를 거꾸로 뒤집는 것이다. 어떤 몸을 살릴 수 있다면, 다른 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325p)
책에서 두 번씩 반복되는 문장이 몇 개 더 있지만, 그걸 최초로 인지한 문장을 곱씹어 봅니다. 육체는 현생의 삶을 살고 죽은 후 썩어 없어지고, 영혼은 올라가서 영생을 산다는 기독교의 교리. 우리의 지금 여기를 하찮게 만드는 이 분리에서 영혼을 단지 하나의 전기 현상처럼 만들어 버림으로써, 우리의 몸, 생명, 현재의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게 타자에게도 그러하기를 바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성총의 일격. 감전과 전율, 영혼은 낱낱이 해부되었고, 영혼은 미끌미끌한 유약에 싸인 구체 형상의 전해질 덩어리에 지나지 않으며, 영혼은 전기 불꽃이다! (145p) (342p) 멀리서 산티아고 대성당의 종탑이 울려 퍼진다. 늑대는 소리가 아니라 떨림으로 이것을 듣는다. (343p)
성배는 심리학 융 학파나 조셉 캠벨 같은 신화학자들 사이에서 생명과 재생의 상징이고, 이를 확장해서 자궁에 대한 은유로 확장했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오로 신부가 성배를 찾는 여정을 시작한 곳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처음에 읽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넘겼던 문장인데, 끝내고 나니 가장 슬픈 문장으로 다가오네요. 도스도예브스키의 대심문관이 떠오릅니다.
“신부님, 저는 이제 성당에 나올 수 없나요?” (144p)

고양이라니
겨울에 이상우 작가의 <warp>를 읽고 이게 대체 무엇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프리즘>이란 책을 한 권 더 읽었어요. 너무나 낯설어서 이것이야 말로 초현실주의 문학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잘 알지 못하면서), 끝까지 이해가 하나도 안되더라구요. 하지만 예술 감상의 목적 중 하나인 낯설게 보기, 그를 통해 생각하고, 서로 이야기하기라는 행위에 의외로 가장 잘 닿아있구나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그 때 느낀 약간의 분노와 좌절감이 이 책을 음 읽었을 때도 들었지만 다른 자세로 다시 읽게 만든 건, 책이 가진 매혹인 것 같습니다. 모든 책이 그러한 것도, 모두에게 그러할 수도 없지만요. 그래서 이런 이야기들이 더 재미있는 거 같아요. 각주까지 침범한 종결어미의 자유로운 구사에서 보여주는 작가의 힘과 장악력이 저는 소설에 잘 어울려서 좋았습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봤음직한 평범한 문장인
“신부님, 저는 이제 성당에 나올 수 없나요?” 이 대목이 바오로 신부를 움직인 그 무엇 같고, 소설을 덮고 난 후 제 마음속을 울리는 문장이 되었으니 작가는 저에게 <낯설게 보기>를 성공한 셈이네요.

하료
'각주까지 침범한 종결어미의 자유로운 구사에서 보여주는 작가의 힘과 장악력이 소설과 잘 어울린다'는 말씀에 저도 공감이 가네요. 글에서 굉장히 권위적인 시선이 느껴진다라고 다른 분이 지적을 해주시기도 하셨는데 음..이것도 어떻게 보면 사람에 따라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저같은 경우엔 작년 도서전에서 직접 작가님이 인터뷰하는 걸 옆에서 봤었는데 그 인터뷰에서 제가 느꼇던 작가님에 대한 인상은 본인의 세계관과 문학관이 뚜렷하고 글을 쓰는 데 있어 굉장히 거칠 것 없는 분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저한텐 호감으로 작용을 해서 당시에 습지장례법 책도 궁금해서 구매를 해서 보게 됐던 거였구요. 그 책을 볼 때도 전문적 어휘들이 잇따라 나오는 것이 되게 좀 불친절하다라는 느낌을 받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또 언어와 기호에 대한 관심이 풍부하고 자신만의 믿음이 확고한 분이라는 인상이 이번 불새를 통해 더 확실하게 저한텐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그런 자신감이 있으니까 불새도 이렇게 쓰신 것이겠지요.
이 작가님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애초에 의도하고 쓰시는 분은 아니신 것 같긴 합니다.
모임 진행자님이 언급해주신 추천사만 보더라도 어떤 느낌인지 감이 오죠.
분명 어떤 이에겐 경직되고 권위적인 느낌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이거다 싶으면 일단 직진하는 그런 과감함이 있어야 좋은 작품을 남기는 것도 가능하리란 생각도 한편으로 하게 되네요.
깃털처럼
드디어 완독했습니다. 독서를 시작하기 전 여러 전문가들의 서평 등 참고자료를 읽고 소설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높은 상태에서, 그저 줄거리를 따라 가다 보면 작가의 깊은 의도나 의미가 저절로 다가올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저의 실수였던 것 같습니다. 완독 후 소전서가님이 일전에 소개하셨던 Diana 님의 북 리뷰 동영상을 보고 나니 제가 놓쳤던 것들이 많았구나 라는 생각에, 한 번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서술.전개 방식이 제겐 너무 낯설어 재독한다 해도 술술 읽힐 것 같진 않지만, 최소한 능동적으로 의미를 탐색하고 깊이 숙고하며 읽어볼 생각입니다. 암튼 함께 읽기가 아니었다면 결코 완독하지 못했을 만큼 읽는 과정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나름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하료
Russist님이 지적해주신 코리올리 효과 리우빌 정리 등등 그 밖에 책에 나오는 수많은 전문적 지식들(누군가에겐 아닐수도 있겠지만 저한텐 이 작가님이 내용전개에 동원하는 대부분의 지식들이 거의 다 생소했습니다)과 어휘들이 도대체 왜 쓰여야했는가 저도 무척 공감합니다. 전 그런 것들까지 다 찾아보면서 독서하다간 이 책을 읽는 게 불가능할 것 같아 언뜻언뜻 검색만 해보면서 읽었는데 대신해서 구체적으로 예시를 들어주셔서 지적해주신 것처럼 그런 것들이 소설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에 어떤식으로 기여하는지 명확하게 상관 관계를 찾긴 어렵다에 솔직히 저도 공감했으니까요. 작가님이 새로운 지식을 얻고 그것을 자신의 작품에 차용하는 것을 즐기시는 건 확실해보입니다. 학문적 지식과 이론을 문학적 표현의 도구로 사용하고자한다면 보다 더 신중하게 사용을 해야할 거라는 russist님의 지적에 동의합니다. 설령 제가 이해를 못한 것이라 하더라도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자하는 주제까지 전문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에 이런 부분은 계속해서 작가님이 작품을 쓰고자 하신다면 의견을 들을 필요가 있지않을까 생각이 드네요. 저런 지식들을 차용해서 말할 필요가 있다면 꼭 필요한 부분에만, 그것도 최소한으로 쓸 필요가 있는 게 아닐까...단순히 지식과 이론의 나열로 비춰질 수도 있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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