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장은 마치 과학에 막연히 관심을 갖고는 있으되, 익숙치 않은 독자들이 과학에 가질 법한 호기심과 매혹과 혐오를 살짝씩 건드리는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 rissit님의 의견에 몹시 동의하고요, 다만 저는 작가가 일부러 사용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 책이 신종원 작가를 접한 첫 번 째 책이라 그런지 오히려 더 잘 받아들였던 거 같습니다. 지적하신 여러 표현 방법들이 오히려 예전에 신비주의 종교나 초기 기독교의 방법(저는 의도적으로 사용했다고 여기는) 이랑 비슷하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그 분야의 지식이 있으신 분들이 들으면 이게 뭐야? 할 이야기가 누군가에겐 다르게 들린다는 거. 암시와 상징, 신비하고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이야기들에 경도되고 현혹되는 사람들, 이런 이유가 기독교에 수비학의 흔적이 남은 이유라고 생각하고, 현대에는 그 중 하나가 과학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어려운 내용이 아니더라도 약어나 은어로 신조어를 만들고, 밈을 만들고 거기에 자신들만의 의미를 부여해서 사용하는 행위도 어떤 의미에선 비슷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신성을 부여하기엔 힘들겠지만요.
의도적으로 한 발자국 떨어져 진실에 다가가고 싶은 욕망과 동시에 다가갈 수 없게 만드는 장치로서, 불새와 성배에 대한 이야기에 그런 표현들을 유난히 많이 사용했다고 봅니다. 저도 첨에는 모르는 건 대부분 찾아가며 읽다가, 흐린 눈으로 읽어야지 더 잘 읽을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면서 마음 편하게 멈췄습니다. 불새 역시 종교적 산물이 아닙니다. 신화의 존재를 페르시아 문학에서 종교와 결합시킨 존재하는 점에서 불새와 성배, 기독교를 연결한점이 흥미로웠고요.
제가 다른 건 하나도 기억이 안나는데 작가의 말 중에서 이런 문장을 하나 적어 뒀더라구요. 대충 이런 이야기였는데 확실하진 않습니다.
"신화나 전설에 비어있는 틈에 내 이야기를 넣는다"
많은 작가들의 소설 속 내용이 실제와도, 사실과도 다릅니다. 시간이 지나서일 수도 있고, 작가의 주관성이 지나쳤거나, 오해나 부족일 수도 있고, 의도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죠. 그래도 이런 다양한 읽기가 독자와 작품, 작가를 만나게 해주는 지점이라 생각해서 몹시 즐겁네요
[도서 증정] 내일의 고전 <불새> 편집자와 함께 읽어요!
D-29

고양이라니

센스민트
저는 안타깝게도 이 책이 모국어로 쓰여졌음에도 어느 순간 의미와 문자를 일치시키지 못한 채로 읽기 자체에만 주력해서 오늘에서야 겨우 완독했는데 제가 느낀 뭔가 석연치 않은데 표현하기 힘든 부분들을 russist님이 너무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 주셔서 읽는 내내 감탄했고, 대부분 다 공감이 갔어요. (제대로 이해 못한 저같은 이들에 대한 위로까지!) 솔직히 이 소설에 대한 분석은 제 능력 밖이라 저는 한 가지만 언급하고 싶은데요. 일반적으로 '고전'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문학이나 예술 작품, 즉 시대와 세대를 초월해서 읽을 가치가 있고, 여러 번 읽고 싶은 책으로 알고 있어서 '내일의 고전'으로 <불새>가 선정됐다는 건 이런 기준에 앞으로 부합할 거라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과연 이 책이 여러 번 읽고 싶은 책인지, 아니면 여러 번 읽을 수 밖에 없는 책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는데요. 작가가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전달 방식은 다양할 수 있지만 '고전'이라는 타이틀은 '전달'이라는 기본적인 요건을 충족한 상태에서 많은 이들로부터 읽을 가치까지 인정받아야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곳곳에 난무하는 생경한 어휘와 상징에 대한 해독의 압박을 느껴 참고 자료를 찾아봐야 할 정도로 문맥만으로 내용 파악이 잘 안 된다면 그 시도가 새롭고 독창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고전'이라는 카테고리에 적합한 책이 될 수 있을지 지금도 의문입니다. 특히 제가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지금껏 소설을 읽을 때 텍스트로 된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려지던 것들이 이번에는 제대로 기능한 적이 거의 없었다는 점인데요. 신종원 작가님의 글이 그런 부분까지 충분히 고려한 상태로 쓰여진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계속 들었고, 이런 부분들은 전적으로 작가의 필력에 달려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보니 다 읽고 나서도 편집자님과 몇몇 평론가분들의 호평(문제의 본질에 직행하는 정공법 작가?)에 수긍하기가 어려웠어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습지 장례법>도 반쯤 읽어 봤는데 불새보다 사용 어휘는 맥락상 이해 가능한 수준이었지만, 중심 주제로의 몰입을 저해하는 복잡한 서사 구조로 인해 역시나 피로감이 느껴졌어요. 그래도 이것이 신종원 작가님만의 고유한 전개 방식이란 건 알게 됐네요. 취향의 문제도 있어서 <불새>를 한 마디로 단정 짓긴 어렵지만 이렇게 의견이 분분하고 가치 판단 기준이 모호하다면 수많은 정보의 사실 여부에 대한 논란을 차치하고서라도 많은 이들에게 읽혀지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사실 글이 쓰여지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기 때문에 작가님과 편집자님이 이 작품을 완성하는 데 들인 많은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제 생각을 솔직하게 말한다는 게 쉽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한 권의 책을 읽고 이렇게 긴 시간을 들여서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해 본 게 처음이기도 해서, 나름 관심의 일환으로 쓴소리를 반복해서 늘어놓게 된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특별한 책을 접할 기회를 주시고,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사람들이 갖는 의문을 해소해 주기 위해서 노력하신 편집자님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어요. 앞으로 다른 모임에서도 여기 계신 분들의 다양한 식견을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저에게는 지난 한 달이 의미 있는 시간이었고 지적인 여러분을 통해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 특히 소수 의견임에도 제일 열심히 활동하시고,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신 고양이라니 님! 열정상이 있다면 제가 꼭 드리고 싶어요~ ^^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russist
마지막에 이르러서 대화가 참 재밌어지는데 이렇게 끝나게 되어서 아쉽네요. 마지막으로 제가 주의 깊게 보았던, 이 전지적인 시점에 대해서 얘기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이 전지적 화자의 목소리에 꺼림칙함을 느끼는 것인지 거듭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단순히 역학적인 사실관계나 수학적인 기술법이 오해와 오류의 여지가 있고, 다분히 현학적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그게 다는 아닙니다.
저는 이 전지적인 시점이 지극히 인간된 외재적 관점에서 모든 사물과 사안을 설명하려고 할 때, 그래서 자칫 대상의 기계적인 측면이 부각될 때, 어떤 사물의 원인을 거듭 찾아가며 무한히 퇴행하는 과거의 철학자들이 떠올랐습니다. 인간의 피와 뼈와 살과 근육과 그 각각의 거동 방식을 하나하나 이해하기만 하면,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굴었던 어떤 세계관도 떠올랐고요. 철저히 까마득한 시선과 높이를 점유한 채 어떤 대상을 내려다보고 분해하는 시선 말입니다. 이를테면 인간의 수학과 과학적인 이론으로써 새의 항행을 설명하는 것인데, 아무리 그런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놓아도 우리는 새의 삶을 단 일초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러한 관점이 새를 이해하는 데 커다란 장애물이 될지도 모릅니다. 나아가 그 불가해함을 불가해함으로 내버려 두지 않고 인간된 외재적인 관점을 개입시켜서 '새'라는 대상의 거동을 이론으로 굴복시키려고 할 때, 그것은 현실의 복잡다단한 요소를 몇 가지 이론으로 환원하려는 야심찬 기획이 될 따름입니다. 이제는 그 지식의 높이, 그 시선의 높이를 과연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가, 아니 가져도 되는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먼저 물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조차 이미 너무 오래된 고민이긴 하지만요.
저는 여기서 무슨 예술의 자유를 운운하려던 게 아닙니다. 어떤 자유로움은 반드시 성찰되고 반성되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어떤 대상이든 감히 해부학적 단위로 내려가서 그 움직임을 설명하거나, 정식화된 물리와 수학의 이론을 이용해서 설명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의 움직임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음향학적 지식을 모두 동원해서 음악을 설명한다고 해도 멜로디 한 마디를 듣는 것만 못하고, 해부학적 지식으로 파편화된 몸을 서술한다고 해도 한 순간 몸이 반응하는 찰나의 움직임은 이해할 수 없고, 과학적 사실을 나열한다고 해도 그 과학이 애초에 설명하고자 했던 현실이 말끔히 해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음향학적 지식은 음악이 아니고, 해부학적 지식은 움직임이 아니고, 이미 알려진 과학적 사실을 나열하는 것도 엄밀한 의미로 과학은 아닌 탓입니다. 진짜 예술하는 사람들이 '예술'이란 단어를 입에 한 마디도 올리지 않고, 그저 묵묵히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글을 쓰고, 도자기를 깎는 것과 같죠.
실상 자유자재로 모든 사물에 이입하는 방식이 어려워보이지만 가장 간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해 말기를 바랍니다. 기술법 자체가 간단하다는 게 아니라 기술법 근저에 깔린 사고방식이 간단하다는 것입니다. 대중저술가이자 양자물리학자인 카를로 로벨리는 단테의 과학 선생이었던 브루네토 라티니를 언급하면서, 과학자로써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와 시선에 대해서 얘기한 적 있습니다. 브루네토 라티니의 뛰어난 점은 그가 무려 13세기의 이탈리아의 학자였음에도 당시로서는 굉장히 독특한 세계관을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브루네토 라티니는 일찍이 ⟪보배의 서⟫라는 책에서 '외재적 기하학'이 아닌 '내재적 기하학'의 관점을 보여줍니다. 쉽게 말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지구를 설명할 때, 바깥쪽에서 본 모습으로 쉽게 "지구가 오렌지처럼 생겼다"고 쓰지 않았습니다. 물론 브루네토 라티니는 얼마든 그렇게 할 지적 능력이 있었고, 당시에도 그렇게 가정할 법한 연구나 사실 관계가 어느 정도 쌓여 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손쉬운 길을 피했습니다. 그 대신에 일부러 빙빙 돌려 쓰는 사람처럼 "두 기사가 반대 방향으로 계속해서 말을 달린다면, 결국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쓰거나, "어떤 사람이 바다에 가로막히지 않고, 계속해서 걸어 나가면 결국 떠났던 지점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라고만 썼습니다. 그는 지구 전체 모습을 함부로 상상해서 '오렌지'라는 보조관념을 빌린 직유를 활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망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그 대답은 허탈할 정도로 간단합니다. 그건 사람의 관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전체'를 관망하려고 하는 것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어떤 권력욕이 담기게 마련이고, 지적인 중력에 굴복한 자에게 가장 먼저 찾아드는 유혹이기도 합니다. 자기 몸을 밀어넣지 않은 채, 지지고 볶는 대신에, 멀리서 시선을 던지는 관객이 되는 것입니다. 객관을 뒤집으면 관객이 된다는 말도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저는 소설을 펼칠 때 관객이 되고 싶어서 펼치는 것이 아닙니다.
결말이 이상하긴 하지만··· 모쪼록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남의 잔칫집에서 쓴소리 늘어놓은 꼴이 되었지만, 저 스스로 돌아보고 생각해볼 만한 시간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누군가에겐 저의 이런 소수 의견이 도움이 조금이나마 되었기를 바랍니다.

하료
다들 수고많으셨습니다.
Russist님과 고양이라니님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서 이 책을 다 읽고나서 한번 더 생각해볼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지식과 이론의 과다한 사용에 대해 이를 조금만 덜어내거나 다듬는다면 좀 더 뚜렷하고도 아름답게 작품을 빚어내는게 가능하지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했던 점을 Russist 님이 한번 더 짚어주시고 이런 방식이 가질 수 있을 한계에 대해 자세하게 얘기해주신 것도 재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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