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4. <소련 붕괴의 순간>

D-29
사회자는 옐친에게 “소련의 미래를 어떻게 보십니까?”라고 물었다. 옐친은 사람들이 젊고 활력 넘치는 지도자를 선택할 것이며, 그 지도자는 “초권위적인 권력 없이” 모든 상황을 바로잡을 것이라고 답했다. 지노비에프는 러시아 인민은 이미 1917년에 권력을 잡았으나, 이는 스탈린의 독재로 귀결되었을 뿐이라고 대꾸했다. 그는 옐친이 소련을 죽일 것이며, 서방은 그에게 박수를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러 해가 지나면 러시아 사회는 권위주의로 퇴행할 것이고, 인민들은 브레즈네프의 ‘황금기’를 그리워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회자는 옐친에게 고르바초프를 대신해 소련의 대통령이 되고 싶은지 물었다. 옐친은 짐짓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오. 미래는 러시아의 것입니다.” 옐친은 자신이 한 말을 지켰지만, 지노비에프의 판단 역시 예언적이었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향팔 저도 이 대목 메모해뒀는데. 너무 예언적이라서 흠칫했답니다. 얼른 5장으로 넘어오세요!
그러니까요.. Zinoviev 철학자를 넘어선 예언자..
너무 정확한 예언에 소름이… 이 사람은 왜 추방당했나 검색해봤더니, 브레즈네프 시대에 소련 체제를 비판하는 책을 써서 쫓겨난 것이더군요.
솔제니친처럼.. 너무 아픈 데를 정확히 찔렀겠죠..ㅎㅎㅎ
1990년 1월, 크렘린의 지도자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무력을 사용해 기존 국가를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 공화국들에 권력을 이양하는 노선을 이어갈 것인가? 결국, 고르바초프는 두 번째 길을 택했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좀 늦었지만 오랜만에 저도 합류합니다. 고르바초프를 무척 좋아했었는데. 러시아에 대해 제가 너무 모르는 것 같고 제가 막연히 알고 있던 것과 다른 관점의 책인 것 같아 기대가 됩니다. 인물들이 살아움직이는 소설 같은 역사책일 것 같기도 하구요. 앞부분 안드로포프에 대해 읽고 있는데 거의 아는 것이 없었던, 퇴행적인 소련지도자 정도로 알았던 인물에 대한 내용들이 흥미롭네요.
“고르바초프가 수레(정치 개혁)를 말(급진적 경제 개혁) 앞에 뒀다”고 하는데, 그가 그렇게 서두르지 않고 안드로포프의 “통제되고 보수적인 개혁” 노선을 따라갔더라면 어땠을지 생각해 보게 되더군요. 당-국가 체제를 성급하게 해체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되고, 먼저 경제부터 대대적으로 개조해야 한다는 안드로포프의 발상… 소련 붕괴 후 “안드로포프가 더 오래 살았다면”이라는 아쉬움이 나올 만도 하다, 싶더라고요.
@향팔 고르바초프가 안드로포프의 노선을 따랐다면 아마 소련은 중국과 비슷한 모양의 시장 자본주의로 편입되는 과정을 겪었을 테고, 어쩌면 소련은 중국과 미국의 중간 정도의 연방 국가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고, 그럼 21세기의 세계 지정학도 크게 바뀌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이 책 읽으면서 계속 해봤답니다. 무엇보다, 소련 해체 이후의 대혼란과 러시아 국수주의와 독재자의 등극,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체첸 학살 같은 일은 없었거나 그 양상이 아주 달랐겠죠. 이런 생각들이요.
저자 주보크도 딱 그런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는 듯해요. 역사학자는 어쩔 수 없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회한 같은 게 있을 수밖에 없겠다, 이런 생각도 이 책 읽으면서 들었고요.
네, 저도 주보크가 그렇게 얘기하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사실 정말 안타깝기도 하고…
그러고보면 푸틴이 소련 붕괴를 두고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한 소리가 어떤 의미에서 맞는 말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런 얘길 한 의도는 둘째 치고요) 저는 나중에 그 말을 들었을 때 저 독재자가 뭐라는 거야? 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리고 참 아이러니하네요, 그 재앙이 가져온 결과 중엔 본인도 포함될 텐데.
“당신도 알다시피 개혁 조치는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오. 해야 할 일이 많소. 우린 모든 것을 과격하게,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하오. 당신은 항상 흥미로운 발상을 떠올리지. 날 만나러 오시오. 얘기 좀 합시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1부 1장,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1989년 2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영국의 경제학자 알렉 노브(Alec Nove)는 소련 경제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터널의 끝에 빛이 보이기는커녕 터널도 안 보인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5장 갈림길, 182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5장의 처음에 제가 어렸을 때 읽었던 책의 저자가 등장해서 괜히 반가웠어요. 알렉 노브. 그의 입장과 고민은 아래 두 책과 저자 소개 등을 살펴보시면 아실 거예요. 1994년 5월에 세상을 뜨면서 마음이 아주 무거웠을 듯해요. 앞의 책은 세상을 뜨기 전인 1992년에 펴낸 그의 대표작(그는 생전에 서구 최고의 소련 경제사 전문가였어요) <An Economic History of the USSR, 1917∼1991>를 완역한 것이고, 뒤의 책은 그가 아직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믿었던 1983년에 펴낸 책을 국내에서 뒤늦게 2001년에 소개한 책입니다. 아주 오랫동안 제 책장에 두 권 다 있었는데, 집 옮기는 과정에서 박스에 넣어서 베란다에 보관해두다 빗물에 젖어서 저번 이사 때 버렸어요. 그런데 이렇게 또 이름을 보네요.
소련경제사
실현 가능한 사회주의의 미래 - 유토피아에서 현실로 1영국의 저명한 정치경제학자 알렉 노브는 사회주의를 주창한 마르크스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뒤 실증적차원에서 현실사회주의의 경험을 분석한다. 소위 '2차 사회주의 계산논쟁'이라 불리는 일련의 논쟁을 야기했던 이 역저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를 넘어서는 대안적인 경제체제의 구상을 펼쳐나가고 있다.
아 이 문장은 정말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네요. “터널의 끝에 빛이 보이기는커녕 터널도 안 보인다.”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면… 진도가 한번 뒤처지니 따라가기 쉽지 않네요. 열심히 달려 보겠습니다! 근데 이 책이 <냉전>보다 페이지 수는 적은데, 글자 수는 더 많아 보이는 건 제 착각일까요?
페이지 수가 적은 게 챕터 수가 적어서 그런 것 같아요. 대신 한 챕터 당 페이지 (그리고 내용이) 훨씬 많은 것 같아요.
(1990년 8월 말에서 9월 초) 고르바초프는 아카데미 회원이자 1983~1987년 경제 개혁의 설계자 아벨 아간베갼(Abel Aganbegyan)에게 두 프로그램을 조화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소련 지도자는 500일 계획이 연방 정부 및 연방세와 연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이 고르바초프를 비난했고, 일부 역사가들은 이때 소련 지도자가 자신의 비호 아래 개혁을 재개할 마지막 기회를 잃었다고 본다. 하지만 고르바초프가 망설인 데에는 나름의 정치적 논리가 있었다. 중앙 정부가 없다면, 대통령은 15개 공화국과 거대한 인민대표대회를 혼자서 상대해야 할 처지였기 때문이다. 모든 주요 산업이 중앙에서 통제되는 복합 기업들로 구성된 소련 경제에는 광범위한 혼란이 발생할 것이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5장 갈림길, 201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참, 안타까운 일이 경제 개혁을 하긴 해야 하는데, 이 경제 개혁의 고삐를 중앙 정부가 쥐고 있지 않으면 대혼란이 발생할 수 있어서 주저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서 후세 역사학자들이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는 평가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그 대혼란의 원인이 되는 체계를 바로 고르바초프가 만들어 준 거잖아요. 이게 고르바초프의 그 측근의 무능과 한계를 보여준 대목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이런 대혼란이 결국에는 폭력 개입의 여지를 만들고, 또 고르바초프는 그런 폭력 사용을 주저하고.
고르바초프는 정치인보다는 뭐랄까 독야청청한 학자나 이론가, 독서가로 살았어야 할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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