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4. <소련 붕괴의 순간>

D-29
“고르바초프가 수레(정치 개혁)를 말(급진적 경제 개혁) 앞에 뒀다”고 하는데, 그가 그렇게 서두르지 않고 안드로포프의 “통제되고 보수적인 개혁” 노선을 따라갔더라면 어땠을지 생각해 보게 되더군요. 당-국가 체제를 성급하게 해체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되고, 먼저 경제부터 대대적으로 개조해야 한다는 안드로포프의 발상… 소련 붕괴 후 “안드로포프가 더 오래 살았다면”이라는 아쉬움이 나올 만도 하다, 싶더라고요.
@향팔 고르바초프가 안드로포프의 노선을 따랐다면 아마 소련은 중국과 비슷한 모양의 시장 자본주의로 편입되는 과정을 겪었을 테고, 어쩌면 소련은 중국과 미국의 중간 정도의 연방 국가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고, 그럼 21세기의 세계 지정학도 크게 바뀌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이 책 읽으면서 계속 해봤답니다. 무엇보다, 소련 해체 이후의 대혼란과 러시아 국수주의와 독재자의 등극,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체첸 학살 같은 일은 없었거나 그 양상이 아주 달랐겠죠. 이런 생각들이요.
저자 주보크도 딱 그런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는 듯해요. 역사학자는 어쩔 수 없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회한 같은 게 있을 수밖에 없겠다, 이런 생각도 이 책 읽으면서 들었고요.
네, 저도 주보크가 그렇게 얘기하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사실 정말 안타깝기도 하고…
그러고보면 푸틴이 소련 붕괴를 두고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한 소리가 어떤 의미에서 맞는 말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런 얘길 한 의도는 둘째 치고요) 저는 나중에 그 말을 들었을 때 저 독재자가 뭐라는 거야? 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리고 참 아이러니하네요, 그 재앙이 가져온 결과 중엔 본인도 포함될 텐데.
“당신도 알다시피 개혁 조치는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오. 해야 할 일이 많소. 우린 모든 것을 과격하게,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하오. 당신은 항상 흥미로운 발상을 떠올리지. 날 만나러 오시오. 얘기 좀 합시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1부 1장,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1989년 2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영국의 경제학자 알렉 노브(Alec Nove)는 소련 경제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터널의 끝에 빛이 보이기는커녕 터널도 안 보인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5장 갈림길, 182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5장의 처음에 제가 어렸을 때 읽었던 책의 저자가 등장해서 괜히 반가웠어요. 알렉 노브. 그의 입장과 고민은 아래 두 책과 저자 소개 등을 살펴보시면 아실 거예요. 1994년 5월에 세상을 뜨면서 마음이 아주 무거웠을 듯해요. 앞의 책은 세상을 뜨기 전인 1992년에 펴낸 그의 대표작(그는 생전에 서구 최고의 소련 경제사 전문가였어요) <An Economic History of the USSR, 1917∼1991>를 완역한 것이고, 뒤의 책은 그가 아직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믿었던 1983년에 펴낸 책을 국내에서 뒤늦게 2001년에 소개한 책입니다. 아주 오랫동안 제 책장에 두 권 다 있었는데, 집 옮기는 과정에서 박스에 넣어서 베란다에 보관해두다 빗물에 젖어서 저번 이사 때 버렸어요. 그런데 이렇게 또 이름을 보네요.
소련경제사
실현 가능한 사회주의의 미래 - 유토피아에서 현실로 1영국의 저명한 정치경제학자 알렉 노브는 사회주의를 주창한 마르크스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뒤 실증적차원에서 현실사회주의의 경험을 분석한다. 소위 '2차 사회주의 계산논쟁'이라 불리는 일련의 논쟁을 야기했던 이 역저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를 넘어서는 대안적인 경제체제의 구상을 펼쳐나가고 있다.
아 이 문장은 정말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네요. “터널의 끝에 빛이 보이기는커녕 터널도 안 보인다.”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면… 진도가 한번 뒤처지니 따라가기 쉽지 않네요. 열심히 달려 보겠습니다! 근데 이 책이 <냉전>보다 페이지 수는 적은데, 글자 수는 더 많아 보이는 건 제 착각일까요?
페이지 수가 적은 게 챕터 수가 적어서 그런 것 같아요. 대신 한 챕터 당 페이지 (그리고 내용이) 훨씬 많은 것 같아요.
(1990년 8월 말에서 9월 초) 고르바초프는 아카데미 회원이자 1983~1987년 경제 개혁의 설계자 아벨 아간베갼(Abel Aganbegyan)에게 두 프로그램을 조화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소련 지도자는 500일 계획이 연방 정부 및 연방세와 연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이 고르바초프를 비난했고, 일부 역사가들은 이때 소련 지도자가 자신의 비호 아래 개혁을 재개할 마지막 기회를 잃었다고 본다. 하지만 고르바초프가 망설인 데에는 나름의 정치적 논리가 있었다. 중앙 정부가 없다면, 대통령은 15개 공화국과 거대한 인민대표대회를 혼자서 상대해야 할 처지였기 때문이다. 모든 주요 산업이 중앙에서 통제되는 복합 기업들로 구성된 소련 경제에는 광범위한 혼란이 발생할 것이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5장 갈림길, 201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참, 안타까운 일이 경제 개혁을 하긴 해야 하는데, 이 경제 개혁의 고삐를 중앙 정부가 쥐고 있지 않으면 대혼란이 발생할 수 있어서 주저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서 후세 역사학자들이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는 평가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그 대혼란의 원인이 되는 체계를 바로 고르바초프가 만들어 준 거잖아요. 이게 고르바초프의 그 측근의 무능과 한계를 보여준 대목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이런 대혼란이 결국에는 폭력 개입의 여지를 만들고, 또 고르바초프는 그런 폭력 사용을 주저하고.
고르바초프는 정치인보다는 뭐랄까 독야청청한 학자나 이론가, 독서가로 살았어야 할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답니다.
@향팔 그래서 저는 "역사랑 대화하는" 지도자는 경기를 일으키면서 싫어해요. 보면, 역사랑 대화하다 보면 꼭 지금 현실적이지 못한 이상한 결정을 내리더라고요. "역사랑 대화하는" 데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공부를 하거나, 이렇게 벽돌 책이나 함께 읽는 소시민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하하!
어떤 리더의 역사적 평가는 그가 "역사랑 대화"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역사학자가 평가하면서 해석해서 기록하는 것이겠죠.
차분히 잘 읽다가 이 대목에서 웃음이 터졌네요. 동의합니다. 지도자의 자질과 연구자의 자질은 조금 다른 것 같더라고요. 후자일 때는 굉장히 멀쩡하던(심지어 존경받던) 사람이 갑자기 정치를 시작하고, '도대체 왜 저러지?' 싶은 경우를 보면, 평가나 해석은 다 다를 수 있겠지만, 이상과 현실도 확실히 다른 것 같아요. 뜬금없지만 벽돌 책 모임 중 『3월 1일의 밤』을 읽던 때가 새록새록 떠오르기도 하네요.
그쵸.. 본인이 좋아하는 철학만 파지... 직장을 잘못 택한 듯..
저는 고르바초프가 폭력 사용을 혐오하고 주저했던 것에 대해선 별로 아쉽게 생각하지 않아요. 당장 천안문 학살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 여겨지기도 해서요. (우유부단해서 그랬든 신념 땜에 그랬든..) (폭력을 써야 할 때조차 안 써서 더 큰 폭력을 불러왔다는.. 그건 판단이 너무 어려운 문제 같습니다. 무력을 함부로 마구 써서 더 큰 문제가 된 지도자들이 세상엔 더 많았던 것 같기도 하고요.) 다만 @YG 님 말씀대로 폭력 개입의 여지가 필요한 지경까지 벌여 놓은 무능과 오판 등이 너무 아쉽습니다.
근데 측근들도 무능하지만.. 고르바초프 자신도 솔직히 철학과 역사책만 냅다 파고 정작 실제 경제나 소련 사회에 대한 지식은 부족했던 것 같아요. 1장에서도 Law on Socialist Enterprises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5장에서 아예 파블로프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이해도 못하는 모습을 보였죠. 게다가 심지어 Lukyanov가 경제 개혁을 더 강제적으로 실시하자는 제안을 듣고 모두가 반응을 기대하고 있는데 이를 회피하며 못 알아듣는 척까지 하죠. 요즘 RFK의 보건정책 실패와 홍역 outbreak에 대한 기사를 보고 있으면 전문적 분야에서 무식하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큰 여파를 일으키는지 실감하게 됩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돈과 대출을 구걸하고 있었다”라고 체르냐예프는 당시의 고르바초프에 관해 썼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5장 갈림길, 207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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