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의란 것이 현실을 무시하는 무책임이 되어서는 안되겠지만 사람마다 능력과 정보와 지식에 한계가 있어서 믿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고르바초프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고 해서 그의 판단과 행동들에 다 경멸의 뉘앙스를 띠고 접근하는 관점이 참 별로입니다. 좀더 객관적인 서술이었다면 당시 소련이 부딪혔던 난국과 그것을 풀어보려 했던 희망에 부푼 시도들과 그 실패와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이 한편의 비극적 서사시처럼 장중한 느낌을 줄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러시아 뿐 아니라 전세계 관점에선 고르바초프의 업적이 없었다고 할 수 없을 거구요.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4. <소련 붕괴의 순간>
D-29

오도니안

오도니안
이제 2장을 읽은 참이라서. 늦게 끼어들어 진도도 못 맞추고 저 혼자 엉뚱한 얘기해서 죄송합니다. ^^

향팔
제 경우 1부를 읽을 때 책에 적응(?)하기 급급해 별 생각 없이 넘어갔던 부분들도 @오도니안 님 덕분에 다시 읽고 처음엔 못했던 생각을 해볼 수 있어서 독서가 더욱 풍부해집니다.
말씀하신 고르바초프의 열정과 노력들이 행간에서 많이 읽힌다는 것 자체가, 저자가 고르바초프에 대해서 경멸하는 태도만을 갖고있는 게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제 이야기를 해보자면 저는 책에서 역사적 인물에 대해 비꼬고 인신공격적 서술을 한들 어떠랴 하 는 생각이라 그런 건 괜찮았습니다(아무래도 그가 최고권력자였다 보니 책임이 크니까요.) 저자가 너무 단정적으로 말하는 스타일? 그것도 저같은 사람에겐 책의 관점을 헷갈리지 않게 해줘서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국가폭력이나 강경조치를 둘러싼 문제에서 처음엔 이 책에 쪼금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책을 읽어갈수록 ‘아 이게 내 생각처럼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여러 빌런들(국가를 파괴하려는 옐친파, 고르바초프를 지원해주지 않는 미국)의 역할이 도드라지면서 저자가 문제를 다각도로 보고 있음을 알게 되고… 그러다보니 저자의 관점에 점점 동의하게 되네요. (제가 워낙 귀가 얇기도 하지만요 하하)

오도니안
혼자 얘기하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2장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저자의 관점, 그러니까 민주화를 추구하다 보니 억눌려 왔던 사람들의 사람들의 급진화를 막을 수 없게 되고 통제력을 잃은 마법사의 제자 같이 되었다 하는 건 그런가보다 할 수 있는데, 고매한 서기장이 역사를 읽어보지도 않은 모양이다 하는 식으로 비꼬는 표현이 걸립니다. 이런 식의 표현들이 곳곳에 보이거든요.
제가 고르바초프에게 원래 호감이 있다 보니까 그런 부분 볼 때마다 반감이 생기면서, 주보크 당신께서 소련 지도자였으면 훨씬 잘하셨을텐데 아쉽네요 하는 심정이 듭니다.
빨리 따라잡고 싶은데 진도가 금방 금방 안 나가네요. TT

향팔
네, 저도 고르바초프에 대해 연민 같은 게 있어서 그 마음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번 독서로 제 환상을 깨고 현실을 보는구나 생각하니 나쁘지 않아요. 1부는 저도 읽기 힘들고 진도가 잘 안 나갔어요. 근데 2부는 엄청 잘 읽힙니다. 얼렁 2부 들오셔서 같이 얘기 나누면 더 재밌을 것 같아요. (기대)

향팔
아, 그리고 @오도니안 님! 빨랑 읽으세요, 2부가 찐이에요. (한편으론 너무 안타까운 이야기라 마음이 무겁지만요…)

오도니안
저는 정말 주보크처럼 단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코드에 안 맞나봅니다. 행동을 쓴 섀폴스키는 엄청난 팩트와 논리를 동원하면서도 항상 성급하게 단정하지 않도록,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의 한계를 다시 생각해보도록 권했잖아요. 저는 그런 저자들이 좋아요.

오도니안
그리고 구시렁거리는 김에 계속하자면 수십년 억압되었던 러시아 국민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를 주려고 했던 열정이 고매하다고 경멸당해야 하는 건가요? 이상만 앞세우고 현실을 무시했다면 모르겠지만 고르바초프가 혼자 이상하게 행동한 것도 아니고 상당수 동료와 보좌진들과 논의하고 협력하고 고민하고 의심하면서 진행했다는 것이 행간에 많이 읽힙니다. 그러고 보면 3대동안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김씨가문이 대단한 거 같습니다.

stella15
저도 저자가 냉정해야 하는데 너무 신랄하기만 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더군요. 냉정과 신랄은 같은 게 아닌데, 그나마 그 신랄이 어느 한쪽으로만 기울지 않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맞나?) 그런 느낌이 들어요.
저는 요즘 <서울 리뷰 오브 북스> 2025 여름호를 읽고 있는데, 옥창준 교수가 '김용구 연구 회고록'이란 책을 리뷰한 쳅터가 나오죠. 뭐 다 소개할 수는 없고, 김용구는 국제정치학자로 올해 타계하셨더군요. 모든 학문이 다 그렇겠습니다만 국제 정치학도 어렵긴 굉장히 어려운가 봅니다. 격변하는 국제 정세의 흐름을 우리만의 시각으로 조망하기는 또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더구나 우리나라는 대원군의 쇄국 정책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닫혀 있었던만큼 국제 정치학이란 학문이 정착한 세월이 다른 학문에 비해 길지 않겠더군요.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김용구 교수가 소련의 역사를 주목했다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소련을 미국의 관점에서 지켜보고 있는 게 다였는데 이 분의 연구로 소련을 우리의 관점으로 볼 수 있는 시야에 눈을 뜨게 됐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분명 김용구 교수도 고르비를 연구했을 거라고 보는데 어떤 평가를 했을지 궁금하긴 합니다.
또한 옥창준 교수는 자신이 사는 시대 연구자들은 과연 회고록을 쓸 수 있겠냐고 반문하기도 하죠. 한마디로 시대를 꿰뚫는 거대한 질문에 대한 탐구 보다는 각자의 관심사에만 집중한다고 꼬집습니다. 동시에 회고록만큼 자신의 자의식을 강하게 투영한 장르도 없다는 걸 일깨우고 있습니다.
제가 과연 고르바쵸프를 공부할 날이 올지 모르겠는데 주보크가 이렇게 신랄하니까 그의 자서전을 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기도 하더군요. 마침 우리나라에 고르비의 자서전이 나와있더라구요. 정말로 그가 비판을 받아야할 존재라면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은 있다는데 비록 넉두리라도 들어는 봐야하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도 들더군요. 참 한 인물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판단해야할지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선택 - 미하일 고르바초프 최후의 자서전고르바초프 최후의 자서전. 뼈속까지 사회주의자였던 고르바초프의 어떤 철학과 삶이 그로 하여금 대변혁의 결단을 하게 만들었을까? 지금도 많은 이들이 개혁과 개방의 길을 선택한 고르바초프의 내면의 결단에 관심과 의문을 갖고 있다.

김용구 연구회고록 - 한국 국제정치학 발전을 위한 60년의 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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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 니안
관심을 많이 갖지는 않았던 분야 역사인데,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가 많이 생기기는 해요. 소련이라고 하는 국가의 역사는 가장 거대한 규모의 이념 실험의 역사였던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의 러시아 상황도 막연하게 푸틴 싫어 하는 수준인데 페레스트로이카의 혼란기에서 지금의 안정기까지 오게 된 역사를 비롯해서 진짜 제가 러시아에 대해 아는 것이 없구나 싶기도 해요.

향팔
“ 셰바르드나제는 친구인 제임스 베이커에게 다급한 호소문을 보냈는데, 자금 원조와 소련의 양보를 연결시키려는 미국의 고집이 강경파를 자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고르바초프에게 재정 지원을 제공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결국 당신들은 끔찍한 독재자를 상대하게 될 것이며, 지금 고르바초프가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국방비로 지출할 것”이라고 셰바르드나제는 경고했다. ”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341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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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니안
“ 혼돈과 에로스는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 직면하는 딜레마를 상기시킨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선택이야’라고 내면의 목소리는 말한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는 이런 이분법적 시각이 거짓 프레임임을 암시한다. 결정 과정에 이 프레임을 씌우면 우리는 스스로를 옭아매서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하게 된다.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바라볼수록 우리는 더욱 혼돈과 에로스의 중간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된다. 옳고 그름을 가리려 할수록 점점 더 그 둘을 구별할 수 없게 된다.
... 옳고 그름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하는가보다 더 흥미로운 질문은 우리의 가장 진실한 욕구를 세계의 혼돈에 어떻게 적용하는가다. ”
『결정 수업 - 그들은 어떻게 더 나은 선택을 했는가?』 조셉 비카르트 지음, 황성연 옮김

결정 수업 - 그들은 어떻게 더 나은 선택을 했는가?어떤 상황에서도 적용할 수 있고 시간이 지나도 절대 변하지 않을 핵심 원리를 이 책에 고스란히 담았다. 결정의 순간에 마주하는 두려움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의사결정의 단계를 하나하나 살펴가면서 가장 현명한 결정에 이르는 과정을 생생하게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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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니안
제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인데, 이런 문구가 인상적이었어요. 정치가와 리더의 경우 옳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책임감도 중요하겠지만, 어떤 의사결정이 옳았는가, 잘못된 것이었는가 하는 평가는 절대적일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사후적으로 복기를 해 볼 수는 있겠지만, 결국 카오스를 당면한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겠죠.
2차세계대전이 다른 식으로 흘러 갔다면 처칠이 독일과 협상하지 않고 계속 전쟁을 이어가기로 한 결단도 비현실적이었다고 비난을 받을 것 같습니다.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한 것이 지금 보면 어리석은 일이지만 당시의 전문가들은 소련이 쉽게 무너질 것으로 예측했다고 하더라구요.

향팔
“ 무엇보다도, 고르바초프는 경제 개혁에 관해 여전히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미국 대사관은 고위급 정보원을 통해 소련 정부에서는 시장경제로 신속하게 넘어갈 필요성을 누구도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망설이는 주요 원인은 이행에 따르는 정치적 비용이었다. 나자르바예프의 측근인 한 전문가는 고르바초프가 사유 재산 개념을 여전히 불편하게 여겼기 때문에, 집단 소유를 통해 동일한 수준의 경제 효율을 이뤄낼 다른 방법이 있는지 미국인들에게 계속 묻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마피아가 매각 대상으로 나온 기업체를 모조리 사들이고” 노동자조합의 권리를 박탈할 것을 걱정했다. 또 다른 정보원에 따르면, 고르바초프는 G7에 어떤 경제 패키지를 제시할지는 “런던행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자신도 모를 것이라고 반쯤 농담조로 말했다. ”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344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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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1부에서도 고르바초프는 ‘강한 중심과 강한 공화국들’이라는 모순이 공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죠. 경제 정책에 관해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네요.

오도니안
앞에서는 좀 냉소적으로 얘기했었지만, 저는 이 책이 정말 김정은에게 참고서 역할을 할 것 같아요. 북한 체제에 개혁을 시도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가. 더불어서 북한을 상대하는 우리 정부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게임을 하려면 상대의 입장을 알아야 하니까요. 당시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정책들의 영향이 어땠는지도 볼 수 있구요.

오도니안
“ 스웨덴 방문단의 또 다른 일원이었던 니콜라이 트랍킨(Nikolai Travkin)은 건설 노동자이자 소련 애국자로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신봉하여 MDG에 합류했다. 그의 소비에트 정체성도 스톡홀름에서 무너졌다. 그는 공산주의가 그동안 소련 사람들을 줄곧 속여왔다고 확신하고 화가 나서 모스크바에 돌아왔다. 1990년 3월에 그는 당에서 탈퇴하고 노멘클라투라로부터 권력을 빼앗기 위해 러시아민주당을 창당했다. ”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3장,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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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니안
고르바초프의 실패는 대부분이 소련 공산주의 역사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봅니다. 개방 정책으로 인해 새로운 현실에 눈뜬 민중과 지식인들이 반체제인사가 되었다면, 개방 정책을 주도한 리더의 책임 이전에 체제의 문제가 그만큼 심각하게 썩어 있었던 탓이 큰 것이었겠지요. 개방과 민주화의 속도를 늦추고 통제하려는 시도가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보다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을까요? 아니 가능하기라도 했을까요?

향팔
네, 저도 스탈린 이래로 특히 브레즈네프가 만들어 놓은 경제적 유산이 워낙 엉망진창이었으니 고르바초프가 아무리 개혁을 하려고 해도 이미 너무 늦었고, 따라서 근본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니, 제가 알던 게 전부가 아니더라고요! ‘지금까지의 내 생각도 틀린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방법과 기회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마지막 기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많이 날아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중에는 고르바초프의 실책도 포함되고요.

향팔
물론 당시 개혁이라는 게 너무 어려운 미션이었죠.. 판단도 어려웠을 테고.. 그래서 더 안타깝습니다. 지난번에 글을 올렸던 도서관 강연이 생각나는데, 어르신 수강생들께서 옐친 욕은 다 한마디씩 하시는데 고르비한테 뭐라 하시는 분은 없더군요 하하. (수업 중에 고르바초프랑 레이건이 같이 찍은 사진이 나오니 고르바초프가 배우 출신인 레이건보다 훨씬 더 잘생겼다고 외모 칭찬도 하시고 ㅎㅎ 고르바초프가 호감형이긴 하죠? 저한텐 어렸을 때 TV나 책에서 얼핏 본 ‘이마에 지도 그림 있는 아자씨’ 이미지가 남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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